아직 확증이 없다면서 미즈키는 밀실에 대한 추리를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소화 불량에 걸린 기분이었지만 미즈키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다. 미즈키가 말해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도 축제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연속해서 일어난 사망 사건의 영향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어색할 정도로 순조로웠다. 분명 모두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실에서 외면한 결과일 것이다. 사망한 기시 유리코의 부모님도 원했기 때문에 축제는 연기되지 않았다.
연극 각본은 내가 이야기해준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 내용을 바탕으로 미즈키가 단숨에 써내려가 거의 완성되었다. 배역도 정해지고 연습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각본의 핵심은 역시 클라이맥스겠지.”
방과 후 아무도 없는 정원 벤치에서 미즈키는 각본의 마지막 부분을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연습도 빠지고 미즈키와 함께 있었다. 출연하는 부분이 아주 짧은 단역인 데다 모두의 시선이 차가웠기 때문에 연습하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있어도 문제는 없었다.
“초대 유리코 님이 자살하는 걸로 끝나버리면 재미가 없지. 뭔가 마지막에 재미있는 전개를 넣고 싶어.”
나는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입을 열었다.
“마지막에 추리를 넣으면 재미있을까? 유리코 님을 괴롭히던 여학생에게 찾아온 불행은 지금 상태로는 결국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유리코 님의 힘이 작용한 거라는 해석이잖아. 초자연적인 판타지도 재미있지만 현실적인 추리가 더 재미있어.”
미즈키는 흐음, 하고 숨을 내뱉고는 기쁜 듯이 웃었다.
“나도 같은 의견이야. 도망치는 남자 고등학생의 존재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니 현실적인 추리를 더하면 좋을 것 같아.”
미즈키도 같은 의견이었다. 마음이 기쁨으로 일렁였다.
하지만 미즈키는 바로 충고해두려는 듯이 말했다. “유리코는 현실에도 그 발상을 적용시켜볼 필요가 있어. 초자연적인 힘 같은 건 있을 수 없어. 이번의 사망 사건들에도 반드시 범인이 있다고 생각해야 해.”
빈틈없는 지적이었다. 나는 머리를 긁으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현실적인 추리가 되지 않는단 말이지. 일기 내용에 대해 계속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은 위화감이 드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일기 내용을 말로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미즈키가 직접 일기를 읽을 수 있다면 그 위화감의 정체도 확실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시마쿠라 미즈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그때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려다보니 거기에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유리코 님 후보 중 한 명인 쓰쓰미 유리코였다. 오늘도 머리는 양 갈래로 땋았고 붉은 셔츠를 입었다.
“쓰쓰미 선배, 무슨 일이에요?”
나는 일어서려다가 쓰쓰미 등 뒤에 줄줄이 모여 있는 얼굴들을 보고 다시 앉았다. 그녀의 등 뒤에는 우리 반 여학생 대여섯 명이 모여 있었다.
묘한 조합에 당황해하는 사이에 쓰쓰미가 입을 열었다.
“각본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가능하면 진행 상황을 알고 싶은데.”
3학년인 쓰쓰미가 1학년이 준비하고 있는 연극에 흥미를 보이다니 어찌된 일일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여드릴게요.”
미즈키가 노트를 내밀자 쓰쓰미가 받아들고는 내용을 훑어보았다.
“그렇구나. 유리코 님 전설의 탄생을 그린 각본이네.”
대충 내용을 읽어본 쓰쓰미는 탁 소리를 내며 노트를 덮었다.
“이 각본 말인데 내용을 바꿔줬으면 하는데. 유리코 님에 관련된 내용은 전부 지워줘.”
생각도 못 한 요구였다.
“어째서 내용을 바꿔야 하나요?”
미즈키는 철저하게 부드러운 말투로 응했다. 고생해서 쓴 각본 전체를 부정당했는데도 너무나도 의연한 대응이었다.
“그야 당연하지. 초대 유리코 님이 분명히 화를 내실 테니까.”
반면 쓰쓰미는 말투에도 어쩐지 초조함이 느껴졌다. 안색이 조금 좋지 않았다.
“제 각본 때문에요?”
“그래, 맞아. 지금까지 유리코 님 후보가 안 좋은 일로 빠진 적은 있지만 죽음으로 빠진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런데 최근 연달아 유리코 님 후보자가 죽었어. 이것은 초대 유리코 님이 화가 나서 우리에게 벌을 내린 거야. 그리고 초대 유리코 님이 화가 난 원인은 바로 네 각본에 있어.”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쓰쓰미는 이야기를 끊지 않고 더욱 강한 어조로 말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무대에 올리는 것에 대해 초대 유리코 님은 화를 내고 계셔. 허락도 없이 자신에 대한 세세한 부분까지 무대에 올라가는 것이 분명 불쾌하신 거야. 그래서 후보들이 연달아 죽은 거라고.”
궁지에 몰린 듯 쓰쓰미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시마쿠라, 넌 해당되지 않으니까 상관없겠지만 나는 유리코 님 후보 중 한 명이야. 네가 쓴 각본 때문에 화가 난 초대 유리코 님에게 살해될지도 모르는 입장이라고. 내가 얼마나 초대 유리코 님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또 다른 유리코 님 후보인 1학년 니시지마 유리코도 두려움에 얼마나 떨고 있는지 몰라. 그 불안을 이해한다면 지금 바로 각본 내용을 바꿔줘.”
아무래도 쓰쓰미와 니시지마는 유리코 님 망령에게 살해된다는 생각에 빠진 모양이다. 흰 백합 모임에서 들었던 대로 선배는 유리코 님의 망령이 두려워 평정심을 잃은 것 같았다.
“각본을 바꾸라뇨? 그럴 순 없어요.”
하지만 미즈키는 쌀쌀맞게 거절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각본을 절대 바꾸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어째서? 유리코 님의 저주로 더 많은 사람이 죽어도 괜찮다는 거야?”
“저는 이번 사망 사건들이 유리코 님의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미즈키는 이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쓰쓰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아무리 봐도 초대 유리코 님이 한 일이잖아?”
“그럴까요?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이 유리코 님의 망령이 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쓰쓰미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마쓰자와가 추락했을 때 옥상은 탈출할 수 없는 밀실 상태였어. 만약 범인이 있었다고 해도 그 범인은 탈출하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옥상에는 아무도 없었어. 이 말인즉 마쓰자와를 떨어뜨린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닌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존재라는 말이지.”
쓰쓰미는 있는 힘을 다해 미즈키의 의견에 반발했다.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모습이었다.
“밀실에 대해서는 일단 답을 가지고 있어요. 아직 확신까지는 아니지만요.”
지난번 밀실이 깨졌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순간 떠오른 생각일 것이다.
“흥미롭네. 자세히 말해봐.” 쓰쓰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에라도 미즈키의 추리를 부정할 기세였지만 동요하는 모습이 배어났다. 반면 미즈키는 진지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애초에 옥상이 밀실이라는 말이 나온 건 탈출구가 문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예요. 유일한 탈출구인 옥상 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에 탈출은 불가능하다, 그런 생각이죠.”
“그래. 그게 뭐가 이상해?”
쓰쓰미는 정색하고 달려들었지만 미즈키는 그 반응을 가볍게 넘겼다.
“다른 곳에 탈출구가 있었다면 어떨까요? 문 이외에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옥상은 밀실이 아니게 되죠.”
“그럴 리 없어. 문은 하나밖에 없다고.”
정당한 반박이었다. 문 이외에 탈출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미즈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럴까요? 펜스 밖으로 뛰어내리면 탈출할 수 있지 않나요?”
쓰쓰미의 목구멍에서 말의 형태가 아닌 소리가 새어나왔다. 너무나도 당찮은 반론이었다.
“하늘을 날아서 도망이라도 쳤다는 거야? 그거야말로 유리코 님의 망령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야.”
미즈키가 고개를 저으며 반박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렇죠. 어떤 의미에서는 하늘을 날아서 도망쳤다고 할 수 있죠.”
그 말을 듣고 쓰쓰미는 물론 등 뒤에 있던 여학생들도 멍해졌다. 나도 당황했다.
“대체 너 뭐니? 유리코 님 전설을 믿는 거야, 안 믿는 거야? 어느 쪽이야?”
다시 쓰쓰미가 반발했지만 미즈키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유리코 님의 망령이 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살아 있는 인간의 범행이에요.”
“그렇다면 어째서 하늘을 날았다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실제로 하늘을 날았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살아 있는 인간이 하늘을 나는 일은 불가능해요. 하지만 공중에 매달릴 수는 있어요. 로프에 매달려서 내려간다든가 말이죠.”
“무슨 말이야?”
“범인은 로프 같은 것에 매달려 옥상에서 아래층으로 건물을 타고 내려갔어요.”
뭐? 쓰쓰미는 놀란 소리를 내며 표정이 굳었다. 예상 밖의 추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로프 같은 걸 사용하면 옥상에서 탈출할 수 있어요.”
“잠깐만, 만약 범인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했을 때 이야기지만, 그 범인은 히가시다 선생님 때문에 의도치 않게 옥상에 갇힌 거잖아? 그런데 미리 로프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야? 준비가 너무 지나친 거 아닌가?”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쉽게 유리코 님의 자리를 지켜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즈키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콕 집어서 로프라고 말하지는 않았어요. 로프 같은 것이라고 했죠. 범인이 사용한 로프 같은 건 로프가 아닌 평소에 몸에 지니고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거겠죠.”
미즈키가 천천히 교복 블라우스의 칼라를 잡아당겼다.
“범인이 사용한 건 이 교복이에요.”
쓰쓰미 뒤에 있던 여학생들이 술렁거렸다. 나 역시도 무심결에 “뭐?”라고 내뱉었다.
“교복을 벗어서 로프로 사용했다는 거야?”
“네, 그래요. 교복은 대부분 학생들의 활발한 활동에 견딜 수 있도록 강도가 높은 소재와 실을 사용하죠. 체중이 가벼우면 찢어지지 않고 충분히 로프 역할을 해냈을 거예요.”
그렇구나, 나는 감탄했지만 쓰쓰미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블라우스만으로는 길이가 부족해. 바로 아래층인 4층까지도 닿지 않아.”
“그러니까 범인은 스커트와 셔츠도 사용했어요. 옷의 끝과 끝을 묶어서 하나의 로프로 만들면 4층 정도는 닿아요.”
쓰쓰미는 분한 듯이 신음을 내뱉었지만 바로 반론을 제기했다.
“4층까지 닿는다고 해도 창문이 닫혀 있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4층 화학 준비실은 약품 냄새가 차지 않도록 항상 창문이 열려 있다고 해요. 범인은 분명 그곳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거예요.”
흰 백합 모임 장소다. 범인은 창문이 열려 있는 걸 이용해 건물 안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그건 네 상상이잖아? 실제 교복으로 만든 로프로 범인이 탈출했다는 물증은 없어. 만약 있다면 물증을 보여봐.”
이길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나도 그런 게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미즈키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물증이라면 있어요. 사건 발생 당시에 특별동 뒤편에서 불이 났던 거 기억하시나요?”
“그게 뭐?”
“그때 교복 블라우스와 스커트, 그리고 붉은 셔츠가 불에 탔다는 것도 아시나요?”
쓰쓰미는 말문이 막혔다. 설마, 나도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교복을 로프 대용으로 이용하려면 그 끝을 옥상 펜스에 묶어야만 하겠죠. 다만 옥상에 묶었던 부분을 4층에서 푸는 건 불가능해요. 그렇다면 범인은 어떻게 했을까요?”
“설마 로프로 사용한 교복을 태웠다고?”
“네, 맞아요. 묶여 있는 부분까지 태워버릴 생각으로 범인은 로프의 아래쪽 끝에 불을 붙인 거예요. 화학 준비실에는 알코올램프 등에 불을 붙이기 위해 성냥이나 라이터가 비치되어 있어요. 그걸로 범인은 로프의 흔적을 없앤 거예요.”
계획이 뜻밖에 잘 풀려서 교복으로 만든 로프는 전부 타고 묶여 있던 부분이 땅 위로 떨어져 풀숲을 태워버렸다.
“화재가 일어나 교복과 셔츠가 탔다는 사실이 교복을 로프로 사용해 탈출했다는 걸 말하고 있어요. 어떤가요? 이대로라면 살아 있는 인간도 범행은 가능하겠죠?”
미즈키가 밝혀낸 진상은 놀라웠다. 쓰쓰미는 입술을 깨물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초대 유리코 님이 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살인이 논리적으로 해명되자 초대 유리코 님을 무시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물증으로는 좀 약해. 불에 탄 교복은 누군가가 특별동 뒤에서 직접 태운 걸지도 모르잖아. 그것만으로는 로프로 사용되었다는 근거가 되지 않아.”
쓰쓰미는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은 듯한 모습으로 철저하게 틀린 부분을 지적했다. 어떻게 하면 그녀가 받아들일까 생각하고 있는데 미즈키가 문득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면 이건 어떤가요? 범인이 교복을 로프로 사용해서 들어갔다는 증거로 화학 준비실 창문에 떨어져 있던 거예요.”
미즈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바로 화학 준비실에서 내가 주워온 단추였다.
“이것은…… 교복 단추.”
“네, 맞아요. 아마도 범인이 로프로 사용한 교복에서 떨어져 창가에 남은 거겠죠.”
쓰쓰미는 궁지에 몰린 듯 숨을 삼켰다. 하지만 바로 맹렬하게 반론했다.
“하지만 그게 로프에 사용된 교복에 붙어 있던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어.”
“아뇨, 할 수 있어요. 잘 보세요. 이 단추는 뜯어낸 게 아니에요. 그 증거로 여기 실 끝을 보세요. 조금 그을렸죠?”
미즈키가 실이 그을린 부분을 내보였다. 그것을 본 쓰쓰미는 할 말을 잃었다.
“왜 실이 그을린 단추가 화학 준비실 창가에 떨어져 있었을까. 핵심은 당연히 특별동 뒤편에서 불에 탄 교복이에요. 어떻게 생각해도 불에 탄 교복 단추가 바로 이거죠. 그리고 특별동 뒤편에서 불에 탄 교복과 화학 준비실 창문을 직선으로 연결한 위쪽에 옥상이 있어요. 옥상에서 아래로 늘어뜨린 교복이 불에 타서 거기에서 단추가 떨어져 나온 거예요. 창가에 떨어진 건 불을 붙이기 위해 교복 로프를 화학 준비실 안으로 잡아당겼기 때문이겠죠. 창밖으로 내놓기 전에 단추가 떨어져 나온 거예요.”
미즈키는 논리 정연하게 이야기했다. 쓰쓰미는 분한 듯이 주먹을 쥐었다.
“교복으로 로프를 만드는 무모한 일을 실행했다면 어딘가에 교복에서 뜯겨진 부분이나 타고 남은 부분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죠. 그리고 제가 상상했던 대로였어요.”
그렇구나, 그래서 미즈키는 화학 준비실에 뭔가 떨어져 있지 않았는지 내게 물었구나.
“하지만 교복과 셔츠를 태워버리면 입을 옷이 없잖아. 범인은 거의 다 벗은 상태로 학교에서 나갔다는 거야?”
쓰쓰미는 반론을 계속했다. 게다가 정확한 지적이었다.
“아니요, 입을 것은 바로 준비할 수 있었을 거예요.”
미즈키는 냉정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기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스커트 아래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있는 여학생이 많으니까 하의는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있으면 문제가 없었을 거예요. 상의는 화학 준비실에 흰색 가운이 있으니 그걸 입으면 돼요. 평소라면 눈에 띄는 차림이겠지만 지금은 다행히도 축제 준비 중이에요. 축제에 사용할 의상이거나 준비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다지 주목을 받지 않았을 거예요.”
역시 미즈키였다. 앞뒤가 맞는 논리 전개에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싶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추리에 맞춰 생각해보면 범인도 대략적으로 보일 거예요.”
미즈키는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더 나아간 추리를 선보였다.
“불에 탄 블라우스와 스커트. 거기까지는 그나마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붉은 셔츠는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래서 어떻다는 거지. 그때 미즈키는 놀라운 사실을 입에 올렸다.
“블라우스 아래에 붉은 셔츠를 입는 사람. 그것은 유리코 님 후보 중 누군가만이 가능해요. 교칙을 어기면서까지 그런 차림을 하는 건 유리코 님의 힘을 얻으려는 목적을 가진 사람만이 할 일이기 때문이에요.”
쓰쓰미는 망연자실한 듯 눈을 크게 뜨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의심하는 거야?”
“그렇죠. 붉은 셔츠를 일부러 입을 동기가 쓰쓰미 선배에게는 있으니까요.”
얼굴을 마주하고 당당하게 당신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다니. 미즈키는 평소에는 말을 골라 하지만 때때로 이렇게 대담한 발언을 한다.
“지금 현재 살아 있는 유리코 님 후보는 여기 있는 야사카 유리코, 1학년 6반의 니시지마 유리코, 그리고 쓰쓰미 유리코 선배 이렇게 셋뿐이에요. 지금으로서는 범인은 이 세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더욱 노골적인 발언이었다. 나까지 의심한다니. 다만 친구라는 이유로 나를 제외하지 않는 미즈키의 공정한 사고방식에는 호감을 느꼈다. 반면 쓰쓰미는 몸을 떨며 얼굴이 새빨개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번 사건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초대 유리코 님의 힘이 작용한 거야.”
“그렇게 믿으며 외면하는 건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두 명이나 살해한 살인범이 실재한다고요.”
강하게 훈계하는 미즈키의 말투에 쓰쓰미는 말을 얼버무렸다.
“……난 아니야.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건 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쓰쓰미는 울부짖듯 외치더니 미즈키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잠시 서로 노려보며 침묵이 이어졌다. 온몸이 저려올 듯한 날카로운 긴장감이 흘렀다.
“흠, 됐어.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겠네.” 쓰쓰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초대 유리코 님의 힘을 믿어. 네 소중한 친구인 야사카에게도 언젠가 불행이 찾아올 거야. 그때 초대 유리코 님에 대한 공포를 몸속 깊이 느껴봐.”
쓰쓰미는 둘러싸고 있던 1학년 학생들을 남겨두고 그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여학생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서로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경멸의 시선을 던지고는 쓰쓰미의 뒤를 쫓았다.
“신경 쓰지 마. 쓰쓰미는 혼란스러워서 지금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는 거야.” 미즈키가 나직하게 말했다.
불쌍히 여기는 것도 위로하려는 것도 아닌 담담한 말투. 강요하지 않는 그 말투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도 허점이 있는 건 사실이야.”
뭐라고? 완벽해 보이는 미즈키의 추리에 어떤 허점이 있다는 걸까.
미즈키는 의아한 표정을 지은 나를 보고 그 허점이 뭔지 설명해주었다.
“교복과 셔츠를 불에 태운 후 범인의 복장이야. 아무리 축제를 한창 준비하는 중이라고 해도 흰색 가운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있으면 역시나 눈에 띄어. 흰색 가운 안에는 분명 속옷 차림일 테니까 주목받을 위험성은 더욱 높겠지. 탈출 후에 무엇을 입었는지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전에 형사들이 수사할 때도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다. 옥상에 갇힌 일과 옷에 피가 묻은 건 분명히 예측하지 못한 사태일 테니 범인이 옷을 미리 준비했을 리는 없었다. 어떻게 거의 벌거벗은 상태가 된 범인이 눈에 띄지 않는 복장을 준비했을까?
“옥상 밀실은 깨졌지만 아직 수수께끼는 남아 있어.”
미즈키는 깊이 생각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등교했다. 미즈키가 제시한 ‘거의 벌거벗은 상태가 된 범인이 무엇을 입었을까?’라는 문제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복도를 걷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고개를 들어보니 쓰쓰미였다.
“역시 초대 유리코 님은 화가 나셨어.”
선배는 얼굴이 벌겋게 되어 나를 적의가 담긴 눈으로 노려봤다.
“무슨 일이세요?”
내가 물어보자 그녀는 갑자기 내 멱살을 잡았다.
“내가 오늘 아침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쓰쓰미는 갑자기 충격적인 말을 털어놓으며 더욱 내 멱살을 추켜잡았다.
“다, 답답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
“오늘 아침 학교로 오던 중에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밀었어. 자동차도 많이 다니고 있었는데 조금만 더 밀렸으면 차에 치일 뻔했다고.”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 깜짝 놀랄 일이었지만 그보다 지금은 숨쉬기가 괴로웠다.
“이건 초대 유리코 님이 한 일이야. 무대 위에 유리코 님 전설을 올린다는 부도덕한 행위에 화가 난 초대 유리코 님이 불행을 내린 거야.”
논리가 비약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만큼 지금 쓰쓰미는 궁지에 몰려 있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야. 전철역 승강장에서 밀려 떨어질 뻔했고, 의자 다리가 느닷없이 부러져버리고, 오토바이에 치일 뻔하고, 아무튼 불길한 일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 그리고 그 일은 전부 유리코 님 전설의 각본을 쓸 무렵부터 시작되었단 말이야.” 쓰쓰미는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그 일이 정말로 유리코 님의 망령이 한 거라고요?”
내가 숨이 차서 헐떡이며 물어보자 쓰쓰미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 유리코 님 말고 누가 그런 일을 한다는 거야?”
“예를 들면 쓰쓰미 선배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이라든가.”
“그런 사람은 없어. 만약 있다고 해도 의자 다리를 인위적으로 부러뜨리는 일 같은 걸 할 수 없잖아.”
글쎄? 나사를 조금 풀어두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아무튼 시마쿠라에게 각본 내용을 바꾸라고 말해. 그렇지 않으면 나는 초대 유리코 님에게 살해당할 거야.”
쓰쓰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급기야 공포로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거기, 뭐하는 거야?”
드디어 구원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듣고 쓰쓰미는 그제야 목덜미를 잡았던 손을 내렸다. 나는 콜록콜록 기침을 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크게 내쉬었다.
“괜찮아?”
고개를 들자 흰 백합 모임의 고문인 다카미자와가 있었다. 붕대를 감은 오른손 대신 왼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나는 다카미자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반면 쓰쓰미는 등을 둥글게 웅크리고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럼 부탁해.”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남기고 쓰쓰미는 자리를 떠났다. 유리코 님에 대한 확신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선배에게 닥친 몇 가지 불행에 대해서는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유리코 님 자리 쟁탈에 관련된 일이니? 야사카도 힘들겠구나.” 미소를 지으며 다카미자와가 말했다.
하지만 붕대가 감긴 오른손이 애처로웠다. 왼쪽 다리에도 붕대를 감고 있었다.
“저기, 선생님도 큰일 겪으셨네요. 교통사고라고 들었는데, 괜찮으세요?”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다카미자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아, 다친 것 말이지?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야. 다들 난리를 쳐서 그렇지 사실은 자동차가 살짝 스쳐서 가볍게 굴렀을 뿐이거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붕대를 감은 모습은 역시 애처로웠다. 입원도 했다고 하니 가벼운 부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사고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나는 계속 혼자 생각하던 말을 꺼냈다.
“선생님, 역시 선생님이 다친 건 유리코 님의 망령이 내린 불행일까요?”
다카미자와는 잠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멀뚱멀뚱했지만 곧바로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그렇지 않아. 그건 단순히 내가 부주의해서 생긴 사고야. 특별히 유리코 님이 내린 불행인 건…….” 태평스레 말하던 다카미자와가 문득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잠깐만.”
돌연 목소리가 심각함을 띠더니 다카미자와의 얼굴이 살짝 하얘졌다.
“왜 그러세요?”
걱정이 되어 물어보자 다카미자와는 에둘러 “아, 아니”라고 말을 얼버무렸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자동차 접촉 사고가 나기 직전에 누군가에게 등을 밀린 느낌은 들었어. 분명 근처에 아무도 없었던 것 같은데.”
심장이 맨손으로 쥐어짠 듯 튀어 올랐다. 그렇다면 초대 유리코 님의 저주가 아닌가.
역시 양 갈래로 땋은 머리와 붉은 셔츠를 옹호한 것이 원인이다. 내 일에 지나치게 관여한 탓에 불행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죄송한 일이었다.
다카미자와 선생님, 죄송합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초대 유리코 님의 힘이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데 나는 공포를 느꼈다.
“역시 뭔가 이상해.”
점심시간, 정원에서 미즈키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사건, 어딘가 위화감이 있어. 그 정체를 찾지 않는 이상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없을 거야.”
미즈키가 진지한 눈빛을 보였다. 진심으로 사건을 해결하려는 이유가 나를 안심시켜주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은 평온해졌다.
“유리코 님 전설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해. 경찰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유리코 님을 주목하지 않는다면 사건은 분명 미궁 속에 빠질 거야.”
경찰 수사는 잘 풀리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뉴스 같은 데서도 가끔 언급되는 우리 학교의 사건은 경찰의 서투른 대처에 규탄하는 논조로 이야기될 때가 많았다.
“사건을 풀기 위해서는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가 중요해. 어떻게 직접 볼 방법이 없을까.”
미즈키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흰 백합 모임의 방에 어떻게든 잠입할 방안을 찾는 것 같았다.
“열쇠는 다카미자와 선생님이 관리하고 있고 마음대로 가지고 나올 수는 없다고 했지.”
중얼거리는 미즈키를 앞에 두고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설명을 제대로 잘했다면 일기 내용이 충분히 전달되었을 텐데.
“내 설명만으로는 일기 내용이 전달되지 않지?”
미안한 마음에 결국 물어보자 미즈키는 놀란 얼굴을 하고 손을 저었다.
“그런 게 아냐. 유리코의 설명은 정확해. 다만 모든 문학 작품이 그렇듯이 다른 사람에게 내용을 전해 듣는 거랑 스스로 읽는 것은 이해하는 정도가 천지 차이가 나잖아. 글자를 직접 접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있는 이상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웠다. 미즈키는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말을 고르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러니 어떻게든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를 직접 보고 싶은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다시 말해 미즈키가 일기를 읽지 못하는 이상 사건은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아아, 하늘이라도 날아서 창문으로 화학 준비실에 들어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한숨을 섞어 판타지 같은 말을 하고 말았다. 말한 후에 스스로 바보 같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그런데 미즈키는 내 말을 듣고 눈을 끄게 떴다.
“그래, 바로 그거야.”
“응? 뭐가?”
내가 당황하자 미즈키는 내 어깨를 힘껏 잡았다.
“화학 준비실 창문은 늘 열려 있잖아. 하늘을 날아서 그 창문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미즈키가 이상해졌다는 생각에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즈키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물론 정말로 하늘을 난다는 게 아니야. 범인이 마쓰자와를 죽였을 때 한 방법을 따라 하는 거지. 옥상에서 로프나 다른 뭔가를 늘어뜨려 타고 내려가서 창문으로 화학 준비실에 들어가면 돼.”
뭐라고? 놀란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겨우 일기를 위해 그렇게나 큰 위험을 무릅쓰다니 그러지 않아도…….”
“아니, 일기는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가 될 거야. 그 정도 위험은 무릅쓸 가치가 있어.”
미즈키는 혼자 흥분했다. 뭐라도 해서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미즈키의 어깨를 붙잡았다.
“옥상에서 로프를 내리려고 해도 특별동 옥상은 지금 출입 금지잖아. 문은 통자물쇠로 엄중하게 잠겨 있다고 들었어.”
하지만 미즈키는 불온한 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어떻게 될 거야. 옥상은 경찰이 수사를 하려고 하루에도 몇 번인가 열었다 닫았다 해.”
그래서 어떻다는 건가 싶었지만 미즈키는 그 의문을 봉쇄하려는 듯 미소 지었다.
“괜찮아. 잘할 거야. 걱정하지 마.”
미즈키가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나는 이 시점에서 미즈키는 분명 잘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방과 후. 4층 계단에서 화학 준비실 쪽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흰 백합 모임의 유리코와 유리, 그리고 다카미자와가 나왔다. 몸집이 작은 두 학생과 키가 큰 선생님이 함께 있는 모습은 변함없이 언밸런스해 보였다. 문을 단단히 잠그고 세 사람은 계단을 내려갔다. 다카미자와의 오른손과 왼쪽 다리에는 붕대가 감겨 있어 교통사고가 할퀴고 간 상처를 애처롭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옥상으로 가는 계단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세 사람이 지나쳐가는 걸 본 후 옥상으로 통하는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미즈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면 작전 개시야.”
미즈키는 문에 걸려 있는 통자물쇠를 손에 쥐었다. 4층에는 연결 복도가 없고, 복도 한쪽에만 계단이 있어서 그 계단만 망을 보고 있으면 충분했다. 나는 미즈키를 도우려고 망을 보는 역할을 자청했다.
과연 어떤 트릭을 써서 옥상으로 나갈 생각일까? 기대하며 망을 보고 있을 때 생각보다 빠르게 철컥하고 통자물쇠가 열렸다.
“어? 어떻게 한 거야?”
당황한 나를 내버려두고 미즈키는 옥상으로 나갔다. 펜스가 부서진 곳의 반대쪽, 다시 말해 특별동 뒤편으로 미즈키는 체육관에서 빌려온 굵은 로프를 들고 걸어갔다.
“설명은 나중에 할게. 지금은 아무튼 화학 준비실에 들어가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미즈키는 로프를 재빠르게 펜스의 기둥에 묶고는 옥상 끝에 섰다.
“유리코, 로프가 풀리면 구해줘.”
그 말만 남기고 미즈키는 천천히 로프를 아래로 내리고 건물 벽을 차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미즈키…….”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지켜봤다. 옥상은 특별동의 뒤편 방향으로 튀어나와 있어서 각도상 바로 아래 있는 화학 준비실의 창문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로프가 끊어진다면, 기둥이 꺾인다면, 이런 상상을 할 때마다 미즈키가 사라진다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미즈키는 눈 깜짝할 사이에 화학 준비실의 창문까지 도달한 모양이었다. 창문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조금 고생했나 보지만 그래도 잠시 있으니 준비실 안으로 착지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성공’이라고 문자가 왔다.
나는 안도감에 무릎이 꺾일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도 지시받은 대로 4층으로 돌아가 화학 준비실 문 앞에 섰다.
“순조로웠어.”
안쪽에서 잠긴 문이 열리고 미즈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며 미즈키를 끌어안았다.
“미즈키…… 엉뚱한 짓 좀 하지 마.”
울면서 호소하자 미즈키는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걱정 끼쳐서 미안, 하지만 이제 정말 미스터리를 풀 수 있을지도 몰라.”
미즈키는 내게서 몸을 떼고 창가의 목재 선반으로 향했다. 거기에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가 있었다.
“이거지? 읽어볼게.”
미즈키는 민첩하게 일기를 꺼내 눈동자를 굴리며 읽기 시작했다.
“역시 느낌이 달라. 이 일기 뭔가를 명확하게 쓰지 않고 얼버무리고 있어.”
미즈키는 재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면서 일기를 읽었다. 미즈키가 말했던 ‘위화감’이 지금 머릿속으로 빠르게 흡수되고 있을 것이다.
“뭔가가, 뭔가가 이상해. 하지만 대체 뭐지?”
미즈키는 중얼거리면서 엄청난 속도로 페이지를 넘겼다. 통자물쇠는 어떻게 열었는지 도저히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게 30분 정도 지났을까. 해가 저물어가고 귀가를 재촉하는 교내 방송이 흘러 나올 무렵 미즈키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렇구나. 그랬던 거구나.”
크게 놀라는 미즈키의 모습에는 진상을 꿰뚫어본 충격이 느껴졌다. 미즈키는 천천히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역시 이번에 일어난 모든 사건은 살아 있는 인간이 저지른 일이야. 유리코 님에게 놀아난 한 애처로운 인간이 모든 범행을 저질렀어.”
모든 미스터리가 풀린 걸까. 역시 미즈키는 대단하다.
“이렇게 되었으니 범인을 한시라도 빨리 밝혀내야겠지. 하지만 증거가 없어.”
미즈키는 다시 자신의 세계로 들어가 중얼거렸다. 이대로라면 혼자 남겨질 것 같아 나는 미즈키에게 물었다.
“미즈키, 누가 범인이야? 그 범인은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둔 거야? 그리고 옥상의 통자물쇠는 어떻게 열었어?”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질문에 미즈키는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 미안. 유리코에게 설명하는 걸 잊고 있었네.”
미즈키는 사과를 하고는 내게 설명을 해주었다.
“우선 통자물쇠 말인데, 그건 지극히 단순한 트릭이야. 열쇠를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원래 걸려 있던 통자물쇠 A를 열고 열린 통자물쇠를 걸어둔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고 해보자. 그때 통자물쇠 A를 몰래 자신의 통자물쇠 B로 바꿔치기하는 거야. 그러면 안에 들어갔던 사람은 바뀐 통자물쇠 B를 잠그고 자리를 뜨겠지. 그렇게 되면 그 후엔 통자물쇠 B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 원래라면 통자물쇠 A로 잠겨 있었을 문을 열 수 있는 거지.”
깜짝 놀랐다. 그야말로 감쪽같은 수법이었다. 자물쇠를 잠글 때는 열쇠가 필요하지 않은 통자물쇠의 특성을 잘 이용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처음에 빼놓은 통자물쇠 A를 다시 걸어서 잠그면 나중에 자물쇠가 바뀌었던 사실이 발각되지도 않아. 재미있는 방법이지?”
감복하고 말았다. 이런 발상을 떠올린 미즈키는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사실 나는 경찰이 수사하느라 통자물쇠를 걸어둔 채로 옥상에 가 있을 때를 노려 몰래 통자물쇠를 바꿔치기했어. 무엇보다 문에 달린 잠금 장치를 잠그지 않은 것도 행운이었어. 학교 측의 실책이라고 할 수 있지. 열쇠 두 개를 사용하기가 귀찮았겠지.”
운도 같은 편이 되어주었다. 운도 실력이라고 생각해보면 역시 미즈키는 대단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범인은?”
하지만 미즈키는 여기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조금 더 기다려줄 수 있을까?”
“뭐, 왜?”
불만의 목소리를 내자 미즈키는 팔짱을 끼고 신음을 뱉었다.
“아직 물증이 없어. 내가 생각하는 인물이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 그게 없는 한 그 인물을 범인이라 할 수 없어.”
신중히 일을 진행하려나 보다. 미즈키다운 판단이었다.
“알았어. 지금은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고마워.”
우리는 눈을 맞추고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정했으니 여기서 나가자. 오래 있을 필요 없어.”
미즈키는 일기를 선반에 꽂고 내 손을 끌어당겨 복도로 나왔다. 만약 흰 백합 모임의 부원이 돌아오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으아아악.”
그런데 복도로 나온 순간 아래쪽에서 커다란 비명이 울렸다. 공포에 질린 듯한 유난히 날카로운 목소리. 그와 동시에 뭔가 단단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의 정적. 그 후 웅성거리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복도 창문으로 내다보니 현관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 긴박한 소란이 일어난 것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설마 또……. 평형 감각이 사라지면서 발밑이 빙글 흔들렸다.
미즈키와 함께 현관으로 달려가보니 수많은 학생과 선생님이 모여 있었다. 대규모 개미 무리처럼 모여 있는 학생들을 선생님들이 쫓아내고 있었다.
“보면 안 돼. 가까이 오지 마.”
선생님이 소리쳤지만 자리를 뜨는 사람은 없었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는 겁 없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누가 쓰러져 있는 모양이야.”
미즈키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소란이 일어난 원인을 짐작해보았다. 까치발을 하고 살펴보니 무리 한가운데, 현관 바로 앞 부근에 여학생 한 명이 위를 보고 쓰러져 있었다. 사지는 축 늘어져 있고 몸 아래에는 검붉은 피 웅덩이가 퍼지고 있었다.
“쟤 1학년 6반 니시지마 유리코 아니야?”
목을 길게 빼고 보던 미즈키의 지적에 깜짝 놀랐다. 니시지마 유리코,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유리코 님 후보 중 한 명이다.
세 번째 유리코 님 후보에게 불행이 내려왔단 말인가. 세상이 일그러지며 무너져 내렸다. 종말을 보는 듯한 절박한 기분을 느꼈다.
“저기, 구급차가 왔어.”
다른 선생님이 현관으로 달려왔다. 그와 동시에 구급차의 사이렌이 들리고 구급대원이 들것을 메고 달려왔다.
“옮깁니다. 하나, 둘, 셋.”
구급대원은 노련하게 니시지마 유리코를 들것에 싣고 구급차로 향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군중 속에서 목을 길게 빼고 살펴보니 니시지마 유리코가 쓰러져 있던 부근에 뭔가 둥근 게 떨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금속 재질의 무거워 보이는 그것은…….
“미즈키, 저거 포환던지기 할 때 쓰는 포환 아니야?”
내가 가리키는 곳을 보고 미즈키도 알게 된 모양이었다. 미즈키는 턱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겼다.
“저게 위에서 떨어졌나 봐.”
미즈키가 한 말을 듣고 위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저렇게 무거워 보이는 물체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목숨을 부지하기가 힘들 것이다.
“완전히 죽이려고 했던 거야.”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미즈키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든 물증을 손에 넣어야 해. 다음 희생자가 나오겠어.”
“역시 그랬어.”
정신이 나간 상태인 듯한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쓰쓰미가 서 있었다.
“초대 유리코 님이 화가 나셨어. 유리코 님 후보를 죽음으로 도태시킬 작정이야.”
변함없이 붉은 셔츠를 입고 양 갈래로 땋은 머리를 한 쓰쓰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벽에 손을 기대고 있었다. 그 눈빛은 궁지에 몰린 먹잇감 같으면서도 동시에 사냥꾼 같은 날카로운 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음은 내가 아니면 야사카겠네. 살아남은 쪽이 진짜 유리코 님이 될 테니까 도태는 그걸로 끝나겠지.”
머릿속 깊은 곳에서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50퍼센트의 확률로 나에게 죽음이 찾아온다.
“나는 절대로 살아남을 거야. 유리코 님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 내가 사는 의미니까.”
쓰쓰미는 허둥지둥 그 자리를 떠났다.
“신경 쓰지 마. 범인은 살아 있는 인간이니까 조심하면 괜찮을 거야.”
미즈키의 말은 든든했다. 하지만 그 반면 나는 아무리 해도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힘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을 전부 송두리째 바꿔버릴 힘을 가진 유리코 님. 그 존재가 나의 머릿속에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니시지마 유리코는 즉사했다고 한다. 건물에서 나오는 타이밍에 누군가가 2층에서 떨어뜨린 포환에 직격으로 맞아 두개골이 함몰된 것이다. 치료할 것도 없이 죽은 걸 알 수 있을 정도의 참상이었다.
당연히 학교는 임시 휴교에 들어갔다. 이틀이 더 지나서야 수업이 재개되었지만 그마저도 4교시까지 수업을 단축했다. 경찰 관계자가 정신없이 학교를 드나들고 언론이 교문 앞에 진을 쳤다. 평상심을 되돌릴 수 있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가 눈에 보이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풍파를 일으키지 않으려는 학생들 사이에 암묵의 합의가 기능했다. 울면서 슬퍼하거나 두려워하는 학생은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사건을 언급하는 학생도 거의 없었고 마치 사건 같은 건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지냈다.
모두가 동요하면서도 표면상으로는 평정을 위장했다. 웃으면서 축제를 준비했다. 연극 연습을 하고, 가판대를 만들고, 전시물을 준비했다. 명백하게 어색한 일상이 학교를 지배했다.
“이번에도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를 따라 했어.”
방과 후, 정원 벤치.
각본이 완성되어 시간 여유가 생긴 미즈키가 말했다. “일기 속에서 세 번째 불행은 머리 위로 화분이 떨어지는 거였어. 이번에는 포환이 떨어졌지. 비슷해.”
듣고 보니 그랬다. 떨어진 물건은 다르지만 상황은 비슷했다.
“포환을 선택한 건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서겠지. 초대 유리코 님과는 달리 이번 범인은 살인에 주안점을 두고 있어.”
미즈키가 알아낸 범인. 그 정체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아직 물증을 찾지 못한 모양이다.
“미즈키, 범인에 대해서 경찰에 이야기하는 게 좋지 않아? 경찰이 마음먹고 조사하면 물증 하나둘쯤은 찾아낼 것 같은데.”
하지만 미즈키는 고개를 저었다. “고등학생이 하는 말을 경찰이 들어줄 리 없어. 게다가 범인으로 지목하는 근거가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라고 설명하면 절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야. 경찰은 유리코 님 전설에 대해서는 전혀 믿고 있지 않으니까.”
그랬다. 경찰이 유리코 님 전설을 믿어주기만 한다면 방법이 있을 텐데.
“이렇게 된 이상 도박을 걸 수밖에 없겠어.”
미즈키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도박이라니?”
미즈키는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 대답했다. “곧 축제가 시작돼.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범인의 정체를 밝혀 보이겠어.”
미즈키의 눈동자는 불꽃이 타는 것 같았다. 마음을 정한 듯 빛났다.
“이제 슬슬 끝내자. 유리코 님을 둘러싼 사건들을.”
그렇게 말하는 미즈키의 아름다운 옆모습에 결의가 넘쳐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