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학교는 빠르게 질서를 되찾기 시작했다.
변함없이 교문 앞에는 취재진이 가득하고 경찰이 교내를 오갔지만 학생들은 필사적으로 일상을 지켜내려고 했다. 친구들과 별것 아닌 이야기를 떠들며 웃고 수업이 지루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성실하게 필기를 하고 선생님께 질문했다. 그렇게 일상을 연기하듯이 모두 열심이었다.
마쓰자와의 죽음은 물론 여전히 모두가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 필사적으로 일상을 꾸몄다. 친구가, 학급이, 학교 전체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상을 보내자고 서로 압력을 주고 있어서였다.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평온한 일상이 위협받았다. 사건을 진지하게 마주하거나 상실감과 불안을 드러낸 채로 생활하면 학교 전체가 음울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일상은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풍파를 일으키지 않는 하루하루를 아무렇지 않은 척 보내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 없을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중얼거리면서도 모두 마음속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온화한 일상을 바라고 있었다.
그 결과 학교는 신기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어제처럼 눈물이 터지는 학생도 없을뿐더러 사건을 해명하려고 애쓰는 학생도 나와 미즈키 외에는 없었다.
겉보기에는 대체로 온화했다. 하지만 깊은 곳에는 어두운 뭔가가 가라앉아 있었다. 학생들은 자책하는 마음과 공포를 느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두려움과 슬픔을 느꼈기에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뒤에서는 눈물을 흘렸다. 솔직한 감정을 보이면 될 것을 그러지 않았다.
반에서 밝게 웃던 학생이 화장실에서 몰래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쓰자와의 반에서는 남겨진 그녀의 책상 쪽을 보기만 해도 그 반 학생 전체에게 눈초리를 받았다.
솔직히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그만이고 자신의 기분을 그대로 표현하면 그만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고 다른 사람의 모습을 살피면서 자신이 진짜로 생각한 것, 느낀 걸 봉인해버리는 건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도 결국 반 친구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걸 철저히 감추고 있었지만…….
마쓰자와의 죽음에도 축제는 예정대로 열기로 정해졌다. 마쓰자와의 부모님이 축제를 기대하고 있던 딸을 위해서라도 진행해주길 바라서였다.
“마쓰자와를 위해서라도 성공적인 무대를 만들고 싶어.”
방과 후. 아무도 오지 않는 정원 벤치에서 내가 중얼거린 말에 미즈키는 얼굴을 들고 결의가 담긴 눈빛을 보였다.
“성공하면 좋겠다. 아니, 성공해야만 해.”
단호한 말투였다. 미즈키는 죽은 마쓰자와의 일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있는 듯했다.
“여기 있었네? 저기, 잠깐 얘기 좀 해.”
그때 누군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들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항상 나를 괴롭히는 1학년 4반 여학생들이 무리지어 다가오고 있었다.
미즈키와 함께 있는 걸 들키고 말았다! 그런 생각이 들어 초조했지만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어째서 내가 미즈키와 함께 있는 게 떳떳하지 못한 거지? 내 사고 회로는 평소와 다른 방향을 향했다.
“무슨 일이야?”
미즈키는 펜을 계속 움직이면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 태도에 화가 났는지 한 여학생이 험상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마쿠라, 이대로 유리코 님을 다룬 각본을 계속 쓸 생각이야? 솔직히 말해서 신중하지 못한 일인 것 같아.”
리더 격인 그 여학생은 고개를 계속 숙이고 있는 미즈키를 노려봤다. 하지만 미즈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여학생은 더욱더 격분했다.
“죽은 마쓰자와의 명예를 훼손할 만한 각본을 쓰다니 옳지 않다고 생각해. 지금 즉시 그만두고 다른 내용으로 바꿔야 한다고.”
너무나도 ‘상식파’다운 의견이었다.
미즈키는 그제야 겨우 펜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리코 님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게 어째서 신중하지 못하거나 마쓰자와의 명예를 훼손하는 거지?”
미즈키의 조용한 한마디에 여학생들은 순간 얼어붙은 듯이 굳었다.
“당연하잖아! 유리코 님 전설을 쓰면 마쓰자와의 죽음에 대한 내용이 당연히 들어가게 될 테고, 그걸 무대 위에 올린다는 것은 그 친구의 죽음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일이야. 그런 건 신중하지 못한 일이라고!”
그래, 맞아. 여학생들이 외쳤다. 사람들은 여러 명이 모이면 갑자기 목소리가 커진다. 하지만 미즈키는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힘 앞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과연 그럴까? 나는 오히려 각본을 쓰는 것이 그녀가 편히 잠들기 위한 일이라고 보는데. 숨기고 보이지 않는 곳에 두는 건 죽은 사람의 넋을 달래기 위한 일이 아니야. 오히려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둘 때 비로소 모두가 그녀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진심으로 그녀의 넋을 달래줄 수 있어. 무대 위에 연극이 올라갈 때 마쓰자와에 대한 기억은 연극을 본 모두의 마음에 깊이 새겨질 거야.”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사건을 보고도 못 본 척하려는 여학생들을 넌지시 비난하고 있었다. 마쓰자와의 죽음을 보지 않은 것으로 하려는 방식을 떳떳하지 못하게 느꼈는지 여학생들의 기세는 갑자기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야. 분명 구경거리에 단순 재미로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게 두면 그만이야. 어차피 금방 잊어버릴 테니까. 그보다도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야 할 건 연극을 보고 마쓰자와의 죽음을 가슴에 새겨 오래도록 잊지 않을 사람들이야.”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여학생들은 입술을 깨물며 입을 다물었다. 미즈키가 온화함 속에 강한 의지를 담아 물었다.
“나는 각본을 통해 마쓰자와의 넋을 달래줄 거야. 그래도 괜찮겠지?”
여학생들은 압도당한 모습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곤혹스러워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난 모르니까 알아서 해.”
자기들 멋대로 마지막 말을 내뱉고는 여학생들은 일제히 자리를 떴다.
“대체 뭐야?”
나는 화가 치솟았다. 제멋대로인 그들의 명분이 너무나도 눈꼴사나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위선 가득한 말을 내뱉다니 이보다 더 꼴불견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화가 나는 이유는 또 있었다. 그들은 미즈키와 이야기하는 동안 내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며 내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다.
철저하게 나를 무시하고 반에서 배척하는 여학생들. 늘 있던 일이었지만 그들의 방식을 참고 견디는 데 슬슬 한계가 느껴졌다. 어떻게 똑같이 되갚아줄 방법이 없을지 조바심을 내며 매일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녀와 다시 만난 것이다.
“이런 곳에 있었어?”
점심시간에 계단 층계참에 있을 때였다. 고개를 들자 붉은 셔츠를 입고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사람이 있었다. 지난 4월까지 유리코 님 자리를 유지하던 쓰쓰미 유리코였다.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너도 유리코 님 후보니까 좀 더 당당하게 행동해.”
같은 반 친구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미즈키를 만나러 가지도 못하고 정처 없이 교내를 어슬렁거리고 있던 나에게 갑자기 거만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 것이다.
“어, 쓰쓰미 선배다.”
주위의 남학생들이 수군거렸다. 지나가던 다른 학생들의 시선도 모였다.
“무슨 일이신가요?”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물었다.
아사카의 유서를 자기 마음대로 교사에게 넘긴 쓰쓰미의 방식에 강한 반발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일은 없고. 다만 네가 싸울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보고 있자니 한심해서 좀 짜증이 났을 뿐이야.”
쓰쓰미의 가시 돋친 말에 나는 화가 욱 하고 올라왔다.
“무슨 의미예요?”
“말 그대로. 나는 유리코 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계속 싸워왔어. 이 차림도 그걸 위해서야. 그런데 넌 싸우려고 하지 않아. 한심하단 생각이 들지 않니?”
내가 처한 사정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학급 친구들과 싸우지 않는 걸 지적받고 내 마음은 따끔따끔 아팠다.
“적에게 도움을 주는 것 같아 싫지만 너무 짜증이 나니까 말해둘게. 적이 있으면 싸워야 해. 그러지 않는 사람에게는 유리코 님이 될 자격은커녕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조차 없어.”
쓰쓰미의 말은 무척 매서웠다. 내장을 쥐어 잡는 듯한 위압감이 있었다.
“유리코 님으로 있는 것도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야. 이름만으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택되어서 학교 최고 자리에 군림해야 해. 그 압박감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나 하겠니?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켜온 내가 계속 마음 편히 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쓰쓰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유리코 님 자리에서 그녀도 험난한 날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나는 계속 싸워왔어. 그러니 너도 싸워야 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이름만으로 선택되었다고 불만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선택된 것만으로 행운이야. 싸움의 무대 위에 올려졌다면 거기서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것이 옳아.”
마음이 흔들렸다. 나는 싸워야만 하는 걸까?
“그럼 이만. 네가 그대로 한심한 모습을 보일지 용기를 낼지, 똑똑히 지켜봐줄게.”
쓰쓰미는 당돌하게 웃으며 멀어져갔다. 유리코 님의 상징인 양 갈래로 땋은 머리와 붉은 셔츠가 내 눈에 잔상으로 계속 남았다.
쓰쓰미는 싸우는 중이었다. 학교 안에서 학생들이 두려워하는 시선을 보내도 굴하지 않고 양 갈래로 머리를 땋고 붉은 셔츠로 무장하여 혼자 고독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 거만한 태도는 참을 수 없었지만 선배가 한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선배의 말에 강한 자극을 받은 나는 한 가지 결의를 품고 학교로 향했다.
아침 시간, 교실에 들어가자 처음에는 평소처럼 무시당했다. 아무도 내게 시선을 주지 않고 인사조차도 하지 않았다. 여학생도 남학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책상 사이를 지나 내 자리까지 가는 사이에 교실 분위기는 완전히 변했다. 모두가 내 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쟤 좀 봐. 머리 스타일.”
“저 셔츠도.”
“유리코 님이 하는 그 차림이야?”
나는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가방을 책상에 올렸다. 그러자 모두들 놀라며 당황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속으로 ‘어때?’라고 생각하며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 교복 블라우스 안에 비치는 붉은 셔츠.
나는 유리코 님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초대 유리코 님을 모방한 차림으로 등교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금세 다른 반에서 학생들이 구경을 왔다. 복도 쪽 창가에 수많은 학생들이 줄지어 서서 나를 거리낌 없이 바라봤다. 그중에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무례한 학생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구경꾼들 덕분에 학급 내 분위기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길가 돌멩이 정도의 존재감밖에 없던 내가 지금은 학급 내에 가장 눈에 띄는 존재가 되었다. 무시로 일관하며 나를 얕보던 반 친구들이 보기에 이보다 분한 일은 없을 것이다.
반면 나는 쾌재를 외치고 싶을 정도로 쾌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나를 없는 취급하던 반 친구들에게 한 방 먹인 것 같아 통쾌하기까지 했다.
이것도 유리코 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붉은 셔츠라는 알기 쉬운 모티브가 있었기에 나는 이렇게 이목을 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름이 유리코라는 것까지 함께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와 붉은 셔츠의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복도에서는 지나가던 학생들이 길을 비켜주고 사방에서 관심 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교실에서도 예전 같은 명백한 무시와 비웃음은 자취를 감췄다. 물론 험담을 쓴 종이를 구겨서 던지는 일도 없었다. 나는 이 차림 하나로 학급의 그림자 같은 존재에서 두려움의 존재로 변신했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세계를 바꿀 수 있다니. 나는 도취되었다. 변신하고 싶은 소망을 이룬 것 같았다. 잠들어 있던 어린 마음을 깨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재미있어져서 학교 안을 휘젓고 다녔다. 솟아오르는 웃음을 참으며 3학년 교실 근처까지 가보니 3학년들조차도 나를 보고 두려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스스로가 대단해진 것 같아 지금까지의 열등감이 말끔히 사라졌다.
문득 앞을 보자 앞쪽에 있던 3학년 학생들이 일제히 길을 열었다. 나를 위해 길을 비켜준 것으로 생각하며 바다를 가른 모세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그때 갈라진 길 가운데로 다른 한 사람, 양 갈래로 땋은 머리와 붉은 셔츠를 입은 여학생이 나타났다. 쓰쓰미 유리코였다.
양쪽으로 나뉜 인파 가운데 나와 쓰쓰미는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주위에서 침을 꿀꺽 삼키며 이 대치 상황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흐음, 하려면 할 수 있잖아.”
변함없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경멸의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쓰쓰미는 나를 인정해준 걸까?
“그런 모습이야말로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어울려. 부디 최선을 다하길.”
쓰쓰미는 내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고는 자리를 떠났다. 주위의 술렁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자신이 유리코 님 후보라는 사실을 강하게 실감했다.
계단을 내려가 1학년 교실 앞에 가자 허리에 손을 얹은 미즈키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코, 드디어 저질렀구나.” 칭찬도 비난도 아닌 억양 없는 목소리로 미즈키가 말했다.
“미즈키, 이 모습 정말 대단해. 세계가 변한 것 같아.”
지금까지는 같은 반 친구들의 시선을 신경 써서 학교 내에서 미즈키에게 말을 거는 걸 망설였지만, 이 모습을 하여 얻은 전능한 기분을 무기로 나는 더 이상 피할 것이 없어졌다.
“이것도 유리코 님의 힘인가 봐. 대단해.”
기뻐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미즈키가 다시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유리코의 세계는 변한 모양이네. 하지만 그 차림새는 지나치게 눈에 띄니까 주의해야 할 거야.”
무슨 의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들뜬 내게는 그런 사사로운 의문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그보다 미즈키, 함께 학교 안을 걷지 않을래? 다들 나에게 시선을 보내면서 길을 비켜줘.”
나는 신이 나서 미즈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야사카, 그 차림은 뭡니까?”
깜짝 놀라 뒤돌아보자 히가시다가 있었다.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들뜬 내 기분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반항적인 대답을 하고 말았다.
히가시다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무슨 일이세요? 그 말은 뭡니까? 이 붉은 셔츠. 교칙에 셔츠는 흰색만 입을 수 있다고 정해져 있을 텐데요. 엄연한 교칙 위반입니다.”
아, 이런. 테니스부 선배에게 충고를 들어놓고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지금 바로 벗으세요. 여기서 벗으라고 할 수는 없으니 저기 있는 화장실에서 갈아입고 오세요.”
히가시다는 가까운 여자 화장실을 가리켰다.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아 나는 그만 크게 낙담했다.
내가 주목받는 것은 양 갈래로 땋은 머리와 붉은 셔츠 덕분이었다. 머리는 이대로 괜찮을지 모르지만 붉은 셔츠는 역시 눈에 띈다. 셔츠를 벗으면 나는 바로 보잘것없는 학생으로 돌아간다. 마치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처럼.
“선생님, 유리코는 굳이…….”
“빨리 갈아입고 오세요.”
히가시다는 미즈키의 말도 끊고 소리쳤다.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받은 신데렐라 꼴이 된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히가시다 선생님, 잠깐만요.”
등 뒤에서 남자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놀라서 뒤돌아보자 흰 백합 모임의 고문인 다카미자와 유리오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셔츠를 벗게 하는 것이 과연 괜찮을까요.”
다카미자와는 어째서인지 나를 감싸는 듯한 말을 했다.
“야사카, 셔츠 아래에는 뭘 입고 있죠?”
앗, 하고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셔츠 아래에는 속옷밖에 입지 않은 것이다.
“그게…… 속옷만 입고 있어요.”
내가 머뭇거리자 다카미자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히가시다 선생님, 애초에 교칙에서 색이 있는 셔츠를 금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갑자기 질문을 받은 히가시다는 놀란 것 같았다. 뭔가를 중얼거리고는 화가 난 말투로 말했다.
“당연히 학교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죠. 색이 있는 셔츠를 입는 것은 선정적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설명이었지만 요약하자면 색이 있는 셔츠는 남학생들의 성욕을 자극하기 때문에 좋지 않다는 것이다. 뭐 그 정도로 자극받을 학생은 없겠지만.
“그럴까요? 색이 좀 있는 정도라면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미즈키는 작은 목소리로 비난했지만 나는 교칙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다카미자와는 그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가요. 선정적이기 때문에 좋지 않다……. 그러면 야사카가 지금 여기서 붉은 셔츠를 벗으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네에?”
히가시다의 목구멍에서 얼빠진 소리가 새어나왔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의미로 들렸다.
“셔츠를 벗으면 선정적인 부분이 사라집니다.”
“그럴까요?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요.”
다카미자와에게 지적받고 히가시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화를 냈다.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가르쳐주시죠, 다카미자와 선생님.”
질문을 받은 다카미자와는 “좋습니다”라며 응했다.
“좀 전에 확인했듯이 야사카는 셔츠 아래에 속옷만 입고 있습니다. 만약 여기서 셔츠를 벗으면 흰 교복 블라우스 아래에는 속옷 한 장만 남게 되죠. 교복 블라우스는 잘 비치는 재질이라 속옷이 비쳐 보이게 됩니다.”
히가시다는 자신이 잘못 생각한 걸 깨달았다는 듯이 손을 입술에 댔다.
“속옷이 비치는 차림은 누가 봐도 선정적이겠죠. 붉은 셔츠보다 그쪽이 훨씬 더 선정적이에요. 남학생이 나쁜 생각에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차림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나를 남자들이 흘끔흘끔 보는 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유리코 님 후보로 주목받아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예외로 봐주면 안 되겠습니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다카미자와가 그렇게 결론짓자 히가시다는 화장이 짙은 눈을 치켜뜨며 무척 분한 듯 새빨간 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수 없군요. 이번뿐입니다.”
그렇게 내뱉고는 히가시다는 발소리를 크게 내며 멀어져갔다.
“유리코, 다행이다.”
미즈키가 말을 걸었지만 나는 멍하니 있었다. 교사가 교칙 위반을 감싸준 것에 아직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야사카, 괜찮니?”
머릿속이 새하얗던 내게 다카미자와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저, 감사합니다.”
“괜찮아.” 다카미자와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무래도 곤란하겠다고 생각했거든. 교칙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학생의 기분이니까.”
좋은 선생님이다. 흰 백합 모임에서는 한마디도 안 했기 때문에 몰랐다.
“넌 유리코 님이 되기로 한 모양이구나.”
다카미자와가 갑자기 물어와 나는 당황했다. 나는 유리코 님이 되고 싶은 걸까? 그저 심술궂은 반 친구들과 싸우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좋아. 더 열심히 노력하면 돼. 유리코 님은 우리 학교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전설이니까.”
생각도 못 한 사고방식을 가진 선생님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카미자와는 직접 나서서 흰 백합 모임의 고문을 맡았다고 들었다.
“선생님은 유리코 님을 믿으세요?” 미즈키가 물었다.
다카미자와는 흐음, 하고 숨을 내뱉고는 생각에 잠긴 듯 팔짱을 꼈다.
“그렇지, 굳이 말하자면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아니야. 어느 한쪽에 서지 않는 중립이랄까.”
어쩐지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아리송했지만 다카미자와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유리코 님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 학교에 오래 남아 있는 이런 전설은 역사가 깊은 것 같아 멋지지 않니? 유리코 님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물어본다면 나는 원한다고 바로 대답할 거야.”
재미있는 선생님이다. 무사안일주의인 다른 선생님들에게는 없는 뭔가가 있다.
“흰 백합 모임의 고문을 내가 나서서 맡은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야. 다른 선생님은 모두 유리코 님 전설 따위 시시하다며 상대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흥미가 있어서 고문이 되겠다고 자청했지.” 거기까지 말하고 다카미자와는 만족스러운 듯 숨을 내쉬었다. “뭐, 그러니까 힘내서 유리코 님의 자리를 차지하라고. 어른으로서 뒤에서 지켜볼 테니까.”
다카미자와는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좋은 선생님이야.” 미즈키가 살짝 속삭였다.
양 갈래로 머리를 땋고 붉은 셔츠를 입고 등교했던 그날 저녁. 나는 동아리 활동을 끝내고 미즈키와 만나 자전거 주차장으로 향했다. 길을 가던 학생들이 내 모습을 보고는 두려운 듯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걸 보고 기분이 더 없이 좋았다. 나는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심정으로 미즈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자전거가 있는 곳까지 갔다.
자전거 자물쇠를 풀고 킥스탠드를 올린 후 안장에 올라탔다. 그사이에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두려운 시선이 쏟아졌다. 마치 연예인이라도 된 것처럼 들뜬 기분으로 지면을 찼다. 곧바로 자전거를 타고 출발하려고 했다.
“잠깐만, 유리코.”
그런데 미즈키가 팔을 붙잡았다. 나는 앞으로 꼬꾸라지며 위험하게 넘어질 뻔했다.
“미즈키 뭐하는 거야?”
원망을 섞어 미즈키를 봤지만 그녀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전거 앞쪽으로 돌아가 왜 그러는지 웅크리고 앉아 살피기까지 했다.
“미즈키……?”
말을 걸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미즈키는 자전거 케이블을 손에 들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끊어져 있어.” 차가운 목소리로 미즈키가 말했다.
내가 고개를 기울이자 미즈키는 몸을 일으켜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 자전거의 브레이크 와이어가 끊어져 있어. 양쪽 다.”
깜짝 놀라며 자세히 살펴보니 분명히 브레이크에 연결된 와이어가 양쪽 모두 중간이 잘려 있었다. 이 상태라면 브레이크를 잡아도 앞뒤 바퀴 모두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이대로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내려갔더라면……. 상상만으로 공포에 휩싸여 몸이 떨렸다. 미즈키가 눈치채고 사고를 막아준 것에 고마워할 일이었다.
“왜지? 너무 오래 사용해서 낡은 걸까?”
놀란 마음에 혼란스러워하며 이유를 찾아보려 했지만 미즈키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렇게 찌그러져서 끊어진 모양을 보면 인위적으로 자른 것이 분명해. 누군가가 공구 같은 걸 써서 의도적으로 와이어를 잘랐어.”
다시 흠칫했다. 그렇다면 악의를 가진 누군가가 이런 일을 했단 말인가.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미즈키는 거침없이 말했다.
“당연히 유리코를 다치게 하기 위해서겠지.”
당연한 대답이었지만 무서운 일이었다. 나를 노리는 악의가 이 학교에 존재한다. 내 가슴은 차갑게 식었고 얼음처럼 차가운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느껴졌다.
“뭐, 범인은 그 애들이겠지만.”
이런 순간에도 미즈키는 어디까지나 냉정했다. 내 귀에 소곤거리며 내 등 뒤를 봤다.
뒤쪽에 대체 뭐가 있기에? 조심조심 뒤를 돌아보자 자전거 주차장의 코너 쪽에 같은 반 여학생 네다섯 명이 모여서 소곤소곤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설마 저 애들이?”
나는 놀라서 눈을 부라렸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와 붉은 셔츠 차림의 효과는 절대적이라서 더 이상 나를 적대시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틀림없어. 가운데 있는 애 손을 봐.”
여학생 무리의 가운데에는 미쓰노라는 같은 반 친구가 있었다. 학급 리더의 위치에 있는 여학생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친구의 양손은 붉은 얼룩이 묻어 지저분했다.
“저거, 피가 묻은 거야. 브레이크 와이어를 공구로 자를 때 와이어 파편이 튀거나 공구가 파손되어 그 조각이 튀어서 상처가 생겼을 거야.”
내가 다시 돌아보자 미즈키는 잘린 브레이크 와이어를 들어 올려 내게 보여줬다. 잘린 단면 부근에는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브레이크 와이어는 전용 공구를 사용하지 않는 한 쉽게 잘리지 않으니까. 학교에 있는 공구로 우리가 오기 전에 자르느라 꽤 힘들었겠지. 분명히 와이어 파편이 튀거나 공구가 부서졌을 거야.”
그렇다면 역시 미쓰노가? 놀라운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아마도 유리코 님 후보로 활개를 치는 유리코가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자신들의 입장이 위협받는다고도 생각했을 거야.”
말도 안 되는 동기다. 이렇게까지 위험한 일을 당할 이유가 없었다.
“열 받아. 가서 한마디 해야겠어.”
나는 자전거를 세우고 당장 뛰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미즈키에게 다시 한 번 팔을 붙잡혔다.
“유리코, 진정해. 넌 냉정함이 부족해.”
“하지만 하마터면 내가 다칠 뻔했다고. 어쩌면 큰 부상을 입었을지도 몰라.”
“그렇기 때문에 더 진정해야 하는 거야. 여기서 도발에 응해서 싸움이라도 일어나면 유리코가 싸움을 걸었다는 누명을 쓸 거야.”
미즈키가 하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난 화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은 일단 여기서 끝내자. 내일 선생님에게 말하면 되니까.”
미즈키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지만 미즈키를 봐서라도 오늘은 물러나기로 했다.
여전히 나를 보고 있는 여학생 무리를 뒤로하고 자전거를 밀며 학교에서 나왔다. 분한 감정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다음 날 나는 자전거점에서 수리받은 자전거로 학교에 갔다. 화가 난 마음을 담아 이번에도 양 갈래로 땋은 머리와 붉은 셔츠 차림으로. 교문 앞에서 아침 선도 당번을 맡은 히가시다와 마주쳤을 때 어이없는 표정과 눈길을 받았지만 무시하고 그대로 지나쳤다.
건물 현관에서 복도로, 그리고 교실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시선을 받았다. 모든 시선이 선망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이 들었다. 교실에서는 일부러 다리를 꼬고 앉아 여학생들에게 위압감을 주었다. 아무튼 어제 자전거를 건드린 걸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학급 여학생들이 나를 철저하게 두려워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내 모습의 변화로 교실 분위기는 크게 변했다. 지금은 바로 내가 학급의 일인자였다. 모두를 두렵게 만들자 어제의 굴욕이 조금 씻긴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날 교실은 나 때문만이 아니라 어딘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둘러보자 미쓰노가 아직 오지 않았던 것이다. 미쓰노는 언제나 일찍 등교했다. 이 시간까지도 오지 않다니 이상했다. 아무래도 미쓰노가 없는 탓에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학생들의 인간관계는 중심인물이 빠지면 바로 와해된다.
별일이 다 있구나. 내가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담임인 히가시다가 교실에 들어왔다. 어느새 조례 시간이 되어 있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도 짙은 화장을 한 히가시다는 강렬한 빨간색으로 물든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의 표정은 험악했다. 보통 일이 아닌 사태가 일어났다는 예감이 들었다.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어제 누군가의 자전거 브레이크 와이어가 잘려 있던데, 대체 누가 잘랐죠?”
교실이 술렁였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면 나는 벌써 미즈키가 히가시다에게 말했다고 생각하여 믿음직스러웠다. 나는 조례가 끝나면 말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선생님, 어떤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건가요?”
용기 있는 여학생이 따져 물었지만 히가시다는 고개를 저었다.
“자른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선 그 대답을 들어야겠어요.” 히가시다가 말했다.
모두 입을 다물고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나는 정당하게 죗값이 치러질 거라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꼈다.
“아무도 짚이는 일이 없다는 거죠?” 그녀는 콧김을 뱉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나요?” 다른 여학생이 다시 물었다.
히가시다는 포기한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사정을 설명했다. “어제저녁 미쓰노가 브레이크 와이어가 끊어진 줄 모르고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굴러떨어졌어요. 그때 다리를 다쳐서 현재 입원 중입니다.”
교실 안이 떠들썩해졌다. 나도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아니라 미쓰노가?
“미쓰노의 어머니 말씀으로는 자전거는 불과 얼마 전에 새로 산 것으로 브레이크 와이어가 끊어질 리 없다고 하는군요. 게다가 앞뒤 바퀴에 이어지는 와이어가 모두 끊어져 있었고, 자전거를 수리하는 분 말씀은 저절로 그렇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미쓰노의 자전거 브레이크 와이어를 일부러 끊었을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나쁜 일을 꾸민 건 미쓰노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 나쁜 일이 미쓰노에게 돌아갔을까?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묻고 있는 거예요. 누군가 고의든 우연이든 미쓰노의 자전거에 손댄 사람이 있습니까?”
우연, 그럴 리는 없겠지. 틀림없이 의도적인 범행이다.
조례가 끝나고 히가시다가 나가자마자 교실은 소란스러워졌다.
“누가 그랬을까?”
“원한을 산 거 아냐? 무서워.”
일부 학생들이 이런 말을 하는 반면 대다수 학생의 의견은 그것과는 달랐다.
“분명 유리코 님의 힘이야.”
“유리코 님의 힘으로 브레이크 와이어가 끊어진 거야.”
그렇게 수군거리면서 다들 내게 시선을 향했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붉은 셔츠. 나는 지금 유리코 님의 힘을 잠정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야사카를 괴롭혔기 때문에 미쓰노가…….”
“유리코 님의 저주야. 무서워.”
낮은 목소리로 주고받는 대화가 전부 들려왔다. 요약하자면 내 탓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자전거가 새 제품이라도 유리코 님의 힘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니. 초자연적인 힘으로 브레이크 와이어가 끊어지는구나.”
모두가 내게 두려워하는 시선을 보냈다. 교실 안은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가득 찼다.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마도 이 반에서 얼굴이 가장 새하얗게 질려 있을 것이다. 자신이 이런 차림을 한 탓에 싫어하던 사람이긴 했어도 같은 반 친구가 다쳤다. 우월감과 분노로 끓어올랐던 마음이 급격히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점심시간, 나는 옆 반인 1학년 5반 교실로 달려갔다. 더 이상 같은 반 친구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미쓰노의 사고를 미즈키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무슨 일이야?”
침착하게 나를 보는 미즈키를 끌고 나와 복도 끝으로 갔다. 거기서 나는 온 힘을 다해 빠르게 말했다.
“큰일 났어. 유리코 님의 힘으로 사고가 일어났어. 어제 내 자전거를 건드린 여자애가 사고를 당했어. 완전 똑같이 자전거 브레이크 와이어가 잘려서. 아, 하지만 그 자전거는 새로 산 지 얼마 안 되어서 브레이크 와이어가 끊어질 일은 절대 없다는 거야. 게다가 앞뒤 바퀴 모두 끊어져 있었다고…….”
“유리코, 냉정하게 생각해봐. 아직 유리코 님의 힘이라고 확인된 건 아니잖아.”
미즈키가 말렸지만 냉정해질 수 없었다.
“하지만 미쓰노는 내게 적과 같은 존재였다고. 그런 미쓰노가 내가 이런 차림을 하자마자 사고를 당했어.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어?”
“분명 평범하게 생각하기는 힘들지만, 우연은 어쩌다가 일어난 전혀 상관없는 몇 가지 상황이 교묘하게 맞아 떨어져서 우연이 되는 거야.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라도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있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궤변처럼 느껴졌다. 내 마음은 개운하지 않았다.
“신경 쓸 필요 없어. 이건 그냥 사고일 뿐이야. 유리코는 그 차림을 계속하고 있으면 돼.”
과연 그럴까. 내 마음은 어딘지 모를 안개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혹시 들었어? 유리코 님 후보의 힘으로 또 다친 사람이 생겼다나 봐.”
“뭐? 정말?”
근처에서 두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각지대에 있어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들려왔다. 두려워하면서도 어딘가 재미있다는 듯이 둘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눴다.
다들 미쓰노에 대한 일을 재미로 이야기하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다른 여학생이 생각도 못 한 말을 했다.
“어젯밤 다카미자와 선생님이 교통사고를 당했대. 그 왜 3학년을 가르치는 선생님 있잖아. 자동차에 치여서 온몸이 다쳤다더라.”
“뭐? 어떡해. 엄청 아프겠다.”
두 여학생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다카미자와까지 사고가 났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어째서 다카미자와일까? 선생님은 딱히 유리코 님 후보에게 거슬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나의 양 갈래로 땋은 머리와 붉은 셔츠 차림을 옹호한 것이 원인일까? 내 일에 지나치게 간섭해서 다른 후보자를 거스른 것으로 오인하여 불행이 내려진 거라면, 그렇다면 일단 앞뒤는 맞는 것 같았다.
“흐음, 다카미자와 선생님이 사고를 당했단 말이지.” 미즈키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나는 그 일에 대해 더 알아보는 게 좋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보다 먼저 “으악” 하는 여학생의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소리는 연결 복도 건너편 같은 층의 특별동에서 들려왔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주위 학생들이 두리번거리며 서로의 시선을 살피는 사이 미즈키가 제일 먼저 움직였다.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 특별동으로 이어지는 연결 복도로 향했다. 나는 당황하여 고개를 숙였지만 잠깐 사이를 두고 곧 미즈키의 뒤를 쫓았다.
특별동 1층과 2층 사이의 층계참. 거기에는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처참한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팔다리를 내뻗고 위를 향해 쓰러져 있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펼쳐져 있고, 거기에 잡힌 곤충처럼 축 늘어진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누가 선생님 불러와!” 미즈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뒤를 따라온 다른 여학생이 허둥거리며 오른쪽으로 돌아 교무실을 향해 달려갔다. 그걸 보고 미즈키와 나는 층계참으로 내려갔다.
“괜찮아?”
미즈키가 쓰러져 있는 여학생에게 말을 걸었지만 반응은 미약했다. 빛을 잃은 눈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계단에서 떨어졌나 봐. 부딪힌 곳이 좋지 않은 거 같아.”
냉정하게 분석하는 미즈키 옆에서 나는 그저 멍하니 우뚝 서 있었다. 이럴 때 해야 할 일을 바로 찾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초조했다.
“유…… 코…….” 여학생이 뭔가 말했다.
말이 끊겨서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필사적으로 뭔가를 알리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귀를 가까이 댔다. 그러자 다음 순간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유리코 님에게…… 당했어.”
몸 깊은 곳에서부터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공포가 전신으로 퍼졌다. 얼마 전에 추락사한 마쓰자와가 한 말과 똑같았다.
“유리코 님에게 당했어? 어떻게?”
나는 당황하며 물었지만 그녀는 잠시 입을 반쯤 벌리다가 고개가 툭 꺾였다. 눈이 감긴 걸 보니 죽기 직전 마지막 숨이었던 것 같다.
“틀렸어. 이미 늦은 것 같아.”
미즈키가 안타까워하며 중얼거린 그때, 연결 통로 쪽에서 여학생이 비명을 질렀다.
“말도 안 돼! 유리코, 괜찮아?”
유리코라고? 놀라서 그쪽을 돌아보자 1학년으로 보이는 그 여학생이 말했다.
“그 애 우리 반 기시 유리코야. 유리코 님 후보 중 한 명이라고.”
마쓰자와에 이어, 또 유리코 님 후보가 죽었다. 그 사실에 나는 세게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미즈키, 이것도 우연이라고 단언할 수 있어?”
의식을 잃은 기시 유리코를 바라보는 미즈키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게 우연이라고는 말하기 힘들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