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10)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 아사카 주리의 자살 미수는 일단락되었다.

처음에는 일부 학생들 사이에서 작년 겨울에 여학생 교복을 훔친 변태가 다시 근처에 나타나 결국 살인을 계획한 거라는 소문이 퍼지며 난리가 났었다. 하지만 유서가 교사의 손에 전달되면서 그런 추리도 완전히 사라졌다. 뛰어내린 연유를 알게 되자 모두들 이런저런 추리를 할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다만 한편에서는 사라지지 않는 소문도 있었다. 아사카의 자살 미수가 유리코 님의 힘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사람을 자살 미수에 몰아넣을 정도의 힘을 가진 유리코 님. 그 소문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해서 유리코 님에 대해 몰랐던 1학년 학생의 대부분에게도 유리코 님 존재에 대한 인식이 퍼졌다.

그래서인 모양이다. 복도를 걷고 있으면 다른 반 학생이 말을 걸어오는 일이 많아졌다. 그럴 때면 다들 똑같은 질문을 했다.

“너도 유리코 님이 되고 싶어?”

이것이 정해진 대사다. 내 이름이 유리코라는 걸 알고 유리코 님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에 참가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면 성가신 이야기였다. 한때는 유리코 님이 되면 좋겠다고 상상하기도 했지만 그 또한 진심은 아니었다. 온갖 곤란한 상황과 위험에 휩쓸리는 일까지 감수하면서 유리코 님이 되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유리코 님이 되고 싶은지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기로 했다.

“유리코 님 전설은 어차피 미신이야.”

미즈키에게 들은 말이었다. 하지만 미즈키가 한 말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했다. 절대 틀리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발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 말을 건 학생의 대부분은 시시하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를 떴다. 애써 말을 걸어준 것에 대해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이 내 본심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

그중에는 그래도 끈질기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학생도 있었다. “그러면 다른 유리코 님의 힘에 밀려 학교를 떠나게 될 거야”라거나 “유리코 님을 무시하면 벌을 받는대”라는 등 협박이 섞인 말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친절하게 유리코 님에 관련된 정보를 주는 학생도 있었다. 그런 정보 중에 특히 신경이 쓰이는 것은 다른 유리코의 존재였다.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여학생은 지금 유리가하라 고등학교에 다섯 명이었다.

나, 1학년 4반 야사카 유리코(矢坂百合子).

1학년 1반 기시 유리코(岸ゆり子).

1학년 3반 마쓰자와 유리코(松沢佑璃子).

1학년 6반 니시지마 유리코(西島揺子).

그리고 3학년 2반의 쓰쓰미 유리코(筒見友里子).

이렇게 다섯 명이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유리코 님 후보였다.

1학년 유리코인 기시, 마쓰자와, 니시지마와는 아직 만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유리코 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언젠가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날 6교시, 체육관에는 두 학급의 학생이 모였다. 내가 있는 1학년 4반과 1학년 5반 학생들이었다. 5반에는 미즈키가 있어서 학급별로 나눠 체육관 바닥에 앉아 있으면서도 나는 미즈키에게 몇 번이고 시선을 던졌다. 물론 미즈키도 눈치채고 내게 시선을 보냈다. 행복했다.

“여러분, 그러면 지금부터 의견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화이트보드 앞에 선 두 학급의 반장(둘 다 여학생이다)은 일동을 빙그르 둘러보고는 회의를 시작했다.

“의제는 ‘축제 출품작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입니다. 우리 1학년 4반과 5반이 함께 출품하기로 정했으므로 오늘은 그 내용에 대해 정하고자 합니다.”

기록을 담당한 두 학급의 남자 부반장이 화이트보드에 기록했다. 깔끔하고 단정한 글씨로 ‘1학년 4반&5반 축제 출품작’이라고 썼다. 유리가하라 고등학교 축제에는 두 학급이 함께 출품할 수도 있어서 4반과 5반은 함께하기로 정한 것이다.

“그러면 의견 있으신 분?”

수많은 여학생이 기세 좋게 손을 들었다. 남학생은 여학생의 분위기를 살피며 아직 조용했다. 이것도 유리가하라 고등학교 독자의 여성 우위 풍조다.

“역시 연극이 좋을 것 같아요. 이 정도 인원이 있으니까 스케일이 큰 무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반의 여학생이 무척 신난 모습으로 의견을 발표했다. 이 제안을 4반과 5반의 여학생들이 지지하고 나왔다. 찬성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자 단번에 방향이 결정되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차피 내 의견 따위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거라서 남학생과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5반 여학생이 내친김에 물었다. “여학생 사이에서는 연극이 인기인데 남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해?”

남학생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가 “연극이면 될 것 같아”라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뭐, 적극적으로 반론해봐야 여학생의 기세에 눌릴 게 뻔했기 때문에 현명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연극을 하는 것으로 결정하겠습니다.”

반장 두 사람이 손뼉을 치면서 결론을 내렸다.

“다음으로 연극 타이틀을 뭘로 할지 의견을 내주세요.”

회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학생들은 내버려둔 채로.

“가장 무난한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건 어때? 러브 스토리는 호응이 좋잖아.”

“그것보다 오히려 일본 대표 극작가인 기타무라 소의 작품은 어때? ‘푸른 혜성의 하룻밤’이나 ‘열한 명의 소년’ 같은 거.”

“그렇다면 차라리 오리지널 각본이 낫지 않아?”

의견이 차례차례 튀어나왔다. 이 역시 남학생을 배제한 여학생들만의 의견이었는데 거기에서도 물론 나는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나저나 각본은 누가 써? 오리지널을 하든 작품을 각색하든 대본을 만드는 각본가가 있어야 하잖아?”

그때 여학생 한 명이 중요한 지적을 했다. 그렇다. 연극을 성공시키려면 우수한 각본가의 존재를 빠뜨릴 수 없었다.

우수한 각본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얼굴은 한 명밖에 없다. 그 이름을 너무나도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여 자중했다.

“각본이라면 시마쿠라에게 맡기면 어때?”

그때 내 마음을 대신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 5반 여학생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미즈키를 지명했다.

“시마쿠라는 연극부에서 각본을 담당하고 있어. 아직 1학년인데 말이야. 그런 실력이 있으니까 이번 연극의 각본을 담당하기에는 적임자라고 생각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해줘서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입으로 직접 말하고 싶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미즈키에 대해서라면 제일 잘 아는 내가 설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아, 시마쿠라가? 그거 괜찮네.”

여학생들은 한껏 들뜬 모습으로 미즈키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냈다. 미즈키는 조금 쑥스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고 “나 같은 사람이……”라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렇지 않아. 시마쿠라라면 적임자라고 생각해.”

많은 학생들이 찬성하는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결국에는 박수까지 치며 미즈키를 각본가로 내세우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시마쿠라, 그럼 부탁해도 될까? 다들 네가 하면 좋겠다고 하는데.”

반장 두 사람이 손을 모으고 부탁했다. 미즈키는 이렇게까지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기 힘들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가 각본을 써볼게.”

여학생들의 분위기가 끓어올랐다. 미즈키의 손을 잡고 “고마워”라며 요란스럽게 감사 인사를 하는 학생도 있었다. 미즈키는 부끄러운 듯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물론 미즈키가 하는 그런 일련의 태도는 연기다. 수줍어하는 것도, 부끄러워하는 것도 전부 여학생들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한 행동이다. 조금은 거절의 뜻을 비치지 않으면 여학생들은 손바닥 뒤집듯이 뒤에서 비난의 목소리를 낸다. 어떻게 한 번을 거절하지 않을 수가 있어? 자의식 과잉이야? 이런 말을 하면서.

미즈키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진짜 미즈키의 모습은 어딘가 세상에 대해 삐딱한 자세를 취하고 비꼬는 말을 잘했다. 그런 그녀가 사양하는 척하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았다. 미즈키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 여학생들에게 나는 깊은 혐오를 느꼈다.

“그러면 연극 타이틀은 시마쿠라가 정하면 어때?”

내가 마음속으로 툴툴거리고 있는 사이에 여학생 중 한 명이 좋은 의견을 냈다. 각본을 담당하는 이상 미즈키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기분 좋게 집필했으면 싶었다.

“그래도 괜찮아? 나 같은 사람이 정해도 돼?”

앞에서 그랬듯이 미즈키는 사양했지만 여학생들이 “괜찮아, 괜찮아”라고 입을 모았다. 이렇게 귀찮기 짝이 없는 서론을 거쳐야 겨우 미즈키는 각본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주제는 유리코 님 전설 어떨까?”

출렁, 파도가 치는 것처럼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얼마 전 아사카의 자살 미수로 유리코 님의 소문은 1학년 사이에서도 퍼져 있었다. 일부 남학생만 “그게 뭐야?”라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스토리를 관객들이 좋아할까?”

“분명 좋아할 거야. 지금 학교 안에는 유리코 님 소문이 자자하니까. 선생님이나 외부 사람들에게도 어딘가 신비한 학교 전설은 분명히 흥미를 끌 거야.” 미즈키가 강하게 주장했다.

그렇게까지 유리코 님 전설에 관심이 있었던가? 나는 의문스러웠다. 유리코 님 전설 같은 건 어차피 미신이라는 말을 꺼낸 이는 다름 아닌 미즈키가 아니었나.

“유리코 님을 소재로 하면 벌을 받지 않을까?”

발뺌하는 듯 말하는 여학생도 있었지만 미즈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론했다.

“유리코 님을 부정하지만 않으면 괜찮아. 유리코 님을 거스른 사람에게만 불행이 찾아온다고 하니까.”

유리코 님 전설을 믿는 사람의 기분을 이해한 후에 반론하는 것이 역시 대단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유리코 님 전설을 소재로 하고 싶은 미즈키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유리코 님 전설. 괜찮을 것 같은데, 나쁘지 않아.”

미즈키가 계속해서 주장하는 사이에 차례차례 찬성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학생 사이에서 드문드문 찬성하는 사람이 나오자 서서히 그 분위기가 퍼져갔다. 어느샌가 여학생 대부분은 유리코 님 전설을 다루는 데 찬성하고 있었다.

“그럼 투표로 정할까요? 유리코 님 전설을 소재로 삼는 것에 찬성하는 사람?”

반장이 물어보자 여학생 과반수가 손을 들었다. 상황을 살피던 남학생들도 슬슬 손을 들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두 학급 대부분의 학생이 손을 들고 있었다.

동기는 모르겠지만 미즈키가 하고 싶다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조심 손을 들었다. 다행히도 반장은 나를 포함해 찬성하는 사람 수를 셌고, 남자 부반장에게 찬성 수를 쓰도록 했다.

“찬성 67, 반대 13. 찬성이 과반수를 넘었으므로 주제는 유리코 님 전설로 정해졌습니다.”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즈키는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처럼 주위의 여학생들과 악수를 나누고는 부끄러운 듯 일어났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좋은 각본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미즈키는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인사를 했다.

“미즈키, 왜 유리코 님을 하겠다고 한 거야?”

나는 기다리지 못하고 체육관을 빠져 나오기 전에 미즈키에게 말을 걸었다. 같은 반 여학생들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그것을 무시하고서라도 미즈키의 진짜 생각을 듣고 싶어서였다.

“왜냐고? 이유는 당연히 관심이 있기 때문이지.”

미즈키다운 간결한 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리코 님 전설은 미신이라고 했잖아.”

정색하고 캐묻자 미즈키는 이상하다는 듯 큭큭 웃었다.

“그랬지. 유리코 님 전설은 그냥 미신이야.”

“그 말은 시시하다는 의미 아니야?”

“다르지. 분명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시시하다고 말한 기억은 없어.”

어쩐지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문답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면 미즈키는 유리코 님 전설에 대해서 미신이라고 생각하지만 관심은 있다는 거야?”

“응. 어디까지나 학생이 생각해낸 가공의 전설이겠지만 그것이 발생한 과정에는 관심이 있어.”

“과정?”

“그래. 유리코 님 전설이 성립하게 된 과정. 왜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는지 그 메커니즘에 관심이 있어.”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미즈키는 유리코 님의 전설을 만들어낸 사람의 마음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오늘부터 각본을 써야 하는데, 유리코, 도와줄 거지?”

미즈키가 다정하게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두근거리면서도 조금 망설여졌다.

“하지만 내가 도와주면…….”

미즈키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른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나는 같은 반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즈키에게 털어놓지 않았던 것이다.

미즈키와 함께 각본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다른 여학생들이 미즈키까지 괴롭힐지 모른다. 어려운 판단에 몰린 나는 고민이 되어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미즈키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다정하게 웃었다.

“괜찮아. 유리코가 도와준다면 정말 좋겠어.”

미즈키가 태평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나는 마음을 정했다. 미즈키가 이렇게까지 나를 원하는데 내가 거절할 수 있을까. 그래서는 안 된다.

“알았어. 함께 유리코 님 전설의 각본을 완성시키자.”

그 기세로 미즈키의 손을 잡았다. 두근두근거리면서. 실크처럼 부드러운 손을 잡고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미즈키와 함께 유리코 님 전설을 각본으로 만들기로 약속했다. 약속한 건 좋았지만 무엇보다 유리코 님의 전설을 어떻게 각본으로 만들지 의문이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면 기억을 바탕으로 쓰면 되지만, 옛날 일은 어떻게 하지? 전설을 다룬다면 그 성립 과정도 그려야만 하고 당연히 엉터리 같은 상상으로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초대 유리코 님에게 저주받을 것이다. 올바른 과거를 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취재가 필요했고 그러려면 전설을 아는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전설을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당시의 재학생은 이미 오래전에 졸업했을 테고 선생님들에게 물어봐도 자세히 알 것 같지 않고…….

미즈키는 대체 어떻게 할 작정인 거지?

불안한 마음으로 나는 종례를 듣고 있었다.

“유리코.”

방과 후 교실에서 나오자마자 등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깜짝 놀라 바르르 몸을 떨며 뒤돌아보자 미즈키가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미소 짓는 미즈키를 보고 안심했다. 같은 반 여학생들이었으면 어쩌나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미즈키라면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보는 곳에서 둘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미즈키, 저기로 가자.”

아무 말 없이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미즈키를 두고 그 자리에서 도망칠 수도 없어 나는 미즈키의 팔을 잡아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교실이 있는 교실동에서 두 건물을 잇는 연결 복도를 건너 특별동으로 향했다. 교실동과는 달리 이쪽은 조용하고 사람도 거의 없었다. 여기라면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유리코, 왜 갑자기 달리고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미즈키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지만 나는 얼버무리듯이 신경 쓰였던 것을 물었다.

“각본은 어떻게 쓸 거야? 전설에 대해 쓰려면 취재도 필요하잖아.”

노골적으로 화제를 바꿨지만 미즈키는 웃으면서 응해주었다.

“그거라면 문제없어. 방법이 있어.”

이상하리만큼 자신 넘치는 말투였다. 전설에 대해 자세히 아는 선생님이라도 찾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미즈키는 특별동의 계단을 올랐다. 교무실이 있는 방향은 아니었다.

“미즈키, 잠깐만.”

당황하며 뒤를 쫓아갔지만 미즈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 남겨질까 봐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결국 미즈키는 특별동의 꼭대기 층인 4층까지 올라갔다. 그러고는 4층 복도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4층에는 교실동과 이어지는 연결 복도가 없고 계단도 복도도 한쪽으로만 나 있었다.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도 적고 사람의 기척도 없어 무척 조용했다.

뭘 하러 온 걸까? 내가 의문을 느끼고 있을 때 갑자기 미즈키가 걸음을 멈췄다.

“여기야.”

멈춰 서서 미즈키의 시선을 따라가보자 그곳은 최근엔 사용하지 않는 화학 준비실이었다. 문 위쪽에 화학 준비실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취재를 하는 거야?”

내가 수상해하자 미즈키가 “이거”라며 문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문에는 작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흰 백합 모임(白百合の会)

종이에 적힌 글은 간결했다. 하지만 무엇을 하는 모임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저기, 미즈키. 이건?”

어떤 모임인지 물어보려 했으나 미즈키가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히는 바람에 그 목소리를 삼켜야 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는지 쉽게 열렸다. 창문도 열려 있어서 바람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좁은 공간이었다. 준비실인 만큼 물건을 두기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높은 스틸 선반이 좌우에 놓여 있어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선반에는 흰색 가운도 몇 벌인가 걸려 있었다. 딱 보기에도 화학 준비실이었다.

그런 좁은 방 안에는 세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몸이 마른 여학생이 한 명, 몸집이 작은 남학생이 한 명, 그리고 선생님으로 보이는 키가 큰 30대 중반 정도의 남자가 한 명 있었다.

“실례합니다. 여기가 흰 백합 모임인가요?”

미즈키가 주눅도 들지 않고 물어보자 세 사람은 신기한 듯이 우리 쪽을 쳐다보았다.

“누구세요? 모임에 들어오고 싶다면 우선 조건이 충족되는지 확인…….”

몸집이 작고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한 남학생이 말을 꺼내다가 끝까지 말하지 못하고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앗, 당신은! 혹시.”

나는 깜짝 놀라 튀어오를 뻔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이런 곳까지 찾아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남학생이 벌떡 일어나더니 굽실거렸다. 예쁜 얼굴을 가진 미즈키의 팬인 걸까? 그런 남학생은 늘 많았으니 특별히 드문 일은 아니지만…….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자, 이런 곳에 서 계시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세요.”

하지만 그는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나? 유리코라는 이름 때문에 내가 환대를 받는 걸까? 그렇다면 이 모임의 목적은.

“이제 알겠지? 유리코.” 곤혹스러워하는 나를 앞에 두고 미즈키는 웃으며 설명했다. “흰 백합 모임은 유리코 님을 받들어 모시는 학교 비공인 동아리야.”

화학 준비실의 창문은 열려 있었다. 지나가는 바람이 뺨을 스쳤다. 커튼이 난동이라도 부리듯 펄럭였다.

안쪽으로 안내받은 나는 이유도 모른 채 두 남녀 사이에 껴 있었다. 두 사람은 예리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유리코 님 후보자 본인이 직접 흰 백합 모임에 오시다니, 처음 있는 일이에요.”

“아아, 후보자님, 고맙습니다. 영광입니다.”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한 남학생과 비쩍 마른 여학생. 두 사람은 내 앞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그게.”

나는 당황하여 미즈키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문 앞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화학 준비실에 들어올 낌새는 전혀 없었다. 도와주길 바라며 이번에는 방 안에 있는 30대 중반의 남자를 봤지만 그는 이쪽에는 그다지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이 다른 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후보자님, 여기엔 무슨 일이십니까?” 마른 여학생이 물었다.

볼이 푹 패어 마치 해골처럼 마른 모습이었다. 식사는 충분히 하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 체형과는 달리 눈빛만은 날카롭게 빛을 내며 박력이 있었다. 생기 없는 얼굴 가운데 그 눈만이 조금 색다른 위압감을 띠었다.

“아, 그게…….”

나는 도움을 청하려고 미즈키를 봤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후보자님?”

마른 여학생이 무릎을 꿇어서 나는 더욱 곤혹스러워졌다. 이렇게 열렬한 환영을 받는 것은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아, 저기에 있는 여학생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군요. 제가 쫓아 보낼게요.”

내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마른 여학생은 문 쪽으로 재빨리 다가가 미즈키를 쫓아냈다. 미즈키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아, 미즈키.”

내가 불렀지만 그보다 먼저 문이 닫혔다. 나는 혼자 이곳에 남겨졌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나의 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방해꾼은 사라졌어요. 후보자님, 이쪽에 앉으시죠.”

남학생이 의자를 가지고 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여드름투성이였다. 걱정이 될 정도로 많은 여드름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수상한 느낌이 나는 사람들, 나는 무서워졌다. 좀 전부터 입을 다물고 방관하는 30대 중반의 남자도 음침한 느낌이라 다가가기 어려웠다.

미즈키가 옆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미즈키만 있으면 어떤 공포도 이겨낼 수 있는데.

“저기, 미즈키…… 지금 밖에 있는 친구도 여기에 들어오라고 해주면 안 될까요?”

얼른 물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즈키가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남학생이 거절을 표하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후보자님의 요청이라고 해도 힘들 것 같네요. 흰 백합 모임의 규칙이기 때문이에요.”

“규칙? 어떤 규칙인가요?”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남학생은 자세를 똑바로 고치고 목소리를 높였다.

“흰 백합 모임에 들어올 수 있는 자는 이름 가운데 유리코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자만 가능하다는 규칙입니다.”

뭐? 나도 모르게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렇다면 유리코 님 후보자와 똑같은 거 아닌가?

“다만, 유리코 님 후보자와는 조금 달라요.”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남학생이 말했다. 마음이 조금 쿵쿵거렸다.

“유리코 님 후보자는 성이 아닌 이름이 반드시 ‘유리코’여야만 합니다. 하지만 흰 백합 모임은 조건이 조금 느슨해요. 성과 이름 전체에 유리코라는 글자가 들어 있으면 됩니다.”

설명을 들었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같은 말이 아닌가?

“예를 드는 편이 쉽겠죠. 저는 2학년 유리 코타로(由利小太郞)입니다. 이름은 유리코가 아니지만 성과 이름 첫 글자를 이으면 유리코가 되죠?”

유리 코타로. 그렇구나 ‘유리코’ 타로가 되는 거구나.

“이런 식이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는 유리코 님 후보는 아니지만 흰 백합 모임의 멤버는 될 수 있는 거죠.”

일단 이해가 되었다. 그러면 이쪽의 마른 여학생은…….

“저는 3학년 유리코 미사키(岼子美咲)라고 해요. 이름은 유리코가 아니지만 성이 유리코예요.”

독특한 성이었지만 분명 유리코였다.

“그리고 이쪽에 계신 분이 고문을 맡고 계신 다카미자와 유리오(高見沢友利夫) 선생님. 학교 비공식 동아리인데도 자발적으로 고문을 맡아주신 감사한 분입니다. 3학년 5반 담임이시고 화학 선생님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유리코는 아니지만, 여성 이름에 쓰는 코를 빼고 남성 이름으로 쓰는 오를 붙여 남성형 유리코라고 판단해서 고문을 해주고 계십니다.”

음침해 보이는 키 큰 30대 중반의 남자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역시 선생님이었구나.

“현재 흰 백합 모임은 이 세 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된 활동 내용은 유리코 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 전설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아니, 이 세 사람이 매일 유리코 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을 한다고?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하지만 그때 문득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미즈키가 대본을 쓰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잖아?

“저, 저기, 유리코 님에 대한 걸 기록하고 있단 말이죠?”

내가 물어보자 유리코 선배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흰 백합 모임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유리코 님과 관련된 일이라면 전부 기록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유리코 님 전설이 탄생했던 당시의 일도 기록되어 있나요?”

“그렇게까지 오래된 건 안타깝지만 없어요. 남아 있는 건 20년 전부터 18년 전, 그리고 공백을 두고 13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기록이에요. 오래된 기록이 없는 것은 분명 남녀 공학으로 바뀌는 사이에 자료를 정리해서 버렸기 때문일 거예요.”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귀중한 정보원이었다. 그래서 미즈키는 나를 여기로 데려온 것이다. 유리코 님 전설을 각본화하기 위한 가장 좋은 재료가 여기 흰 백합 모임에 있기 때문에.

“그 기록을 좀 볼 수 있을까요?”

머뭇머뭇 물어보자 여드름투성이 남학생, 유리가 “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후보자님의 부탁이라면 어떤 자료라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자마자 그는 창가에 세워져 있는 목재 선반으로 향했다. 햇볕을 받아 하얗게 색이 바랜, 어떻게 봐도 누군가가 손수 만든 느낌이 나는 선반이었다. 거기에서 그는 노트를 몇 권 꺼내왔다.

“이것이 유리코 님에 관련된 기록이에요.”

노트는 무려 열 권 정도였다. 한 권을 펼쳐보자 눈이 아플 정도로 글자가 촘촘히 적혀 있었다. 언뜻 보는 것만으로도 어질어질했다.

그 외에도 꽤 두꺼운 파일과 유리코 님 인형으로 보이는 수공예품 같은 물건이 선반에 쭉 늘어서 있었다. 파일은 역대 후보자의 정보를 모아놓은 것이라고 유리가 설명해주었다.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숨을 삼키고 손에 든 노트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창문이 열려 있는 탓에 바람이 불어 들어와 노트 페이지가 차르륵 기세 좋게 넘어갔다.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저기, 창문을 닫아주실 수 있나요?”

내가 부탁하자 두 학생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분명 신앙 같은 어떤 이유일 것이라고 상상하여 나는 더 이상 부탁하지 않기로 했다.

불편을 감수하고 읽어나가자 몇 분 후 겨우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지금 내가 손에 들고 있는 노트에는 10년 전인 2008년 유리가하라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일이 기록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2008년

4월 7일 입학식. 올해 신입생 중 이름이 유리코인 학생은 3명. 현재 유리코 님인 유리코 A와 자리 쟁탈전을 하게 될 것이다.

4월 8일 유리코 A, 양 갈래로 땋은 머리와 붉은 셔츠 차림으로 등교.

5월 7일 유리코 A를 험담한 여학생, 동아리 활동 중에 다리를 접질리다.

5월 10일 유리코 A가 싫어하던 교사, 식중독으로 결근.

5월 16일 유리코 A를 험담한 남학생, 넘어져 다리 골절.

5월 23일 유리코 A에게 끈질기게 말을 걸어오던 사무직원, 복통으로 보건실행.

5월 30일 1학년 사이에 유리코 님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

이게 다 뭐지? 너무 놀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유리코 님의 힘이 일으킨 불행이 자세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조사해 썼다는 점에서 필자의 상당한 집념을 느꼈다.

“흰 백합 모임의 선배분들이 대대로 이어서 기록해왔어요. 훌륭하죠?”

유리가 밝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건 그렇고 유리코 님을 거스르는 사람은 철저하게 불행을 맞이하는 듯했다. 식중독이나 복통 정도야 큰일은 아니지만, 넘어져서 골절상 입는 일 같은 건 말하자면 작은 사건 수준이었다.

“그러면 6월과 7월 기록도 살펴보세요. 여기가 흥미진진해지는 부분이에요.”

유리의 말에 따라 나는 노트로 시선을 되돌렸다.

6월 12일 유리코 A, 1학년 유리코 전원에게 선전 포고. 유리코 B, 노골적으로 혐오 표현.

6월 16일 유리코 B,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전신 타박상. 입원.

6월 20일 퇴원한 유리코 B, 유리코 A에게 욕을 퍼부음.

6월 23일 유리코 B, 귀가 중에 교통사고, 다시 입원.

6월 24일 1학년 유리코 C, 유리코 님 자리 쟁탈전에서 빠지고 싶다고 유리코 A에게 요청하지만 인정받지 못함.

6월 26일 유리코 C, 수업 중에 구역질을 일으키며 보건실에 실려감.

6월 27일 유리코 C, 무단결석.

7월 3일 1학년 유리코 D, 불순한 이성 교제로 정학 처분, 자택 근신. 성인 남성과 성매매를 한 듯. 본인은 속았다며 사실을 부정.

7월 10일 무단 결석이 이어지던 유리코 C, 전학 결정.

7월 14일 입원했던 유리코 B, 퇴원하지만 전학 결정.

7월 18일 자택 근신 중이던 유리코 D, 퇴학 처분 결정.

다른 후보자가 사라지고 유리코 A, 유리코 님 자리 계속 유지 결정.

대체 이게 다 뭐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놀라움은 좀 전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유리코 님 후보자는 철저하게 비참한 상황에 처했다.

“저, 여기 적힌 일이 정말로 있었던 일인가요?”

조심조심 물어보자 유리코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이건 실제로 있었던 일이에요.”

믿을 수 없었다. 유리코 님을 거스르는 사람에게 불행을 내린다고 하더니 후보자들도 이렇게까지 불행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유리코 B는 이전 유리코 님인 유리코 A에게 반항했기 때문에 그때마다 부상을 입고 결국 두려워하며 전학을 갔다. 유리코 C는 처음부터 발 빼려고 했지만 그래도 불행을 피하지 못하고 등교를 거부하는 상황에 처해 그대로 전학, 유리코 D의 경우는 불순한 이성 교제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본인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어쩌면 누군가의 계략에 걸려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도 유리코 님의 힘이 작용한 불행일까?

“유리코 님 후보자들은 매년 이러한 상황에 처하는 거예요?”

“네. 사고, 건강 이상, 스캔들…… 6월이나 7월에 가장 많은 경향이 있어요. 아무리 늦어도 여름방학이 시작하기 전에는 한 명만 남아 유리코 님 자리에 앉을 학생이 정해져요.”

유리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두려운 마음이 점점 더 커졌다. 지금은 5월이다. 유리코 님 후보인 내게도 7월 안에 여기에 적혀 있는 불행이 찾아온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불행이 오는 걸 피할 수 있을까요?”

나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유리와 유리코는 얼굴을 마주 본 뒤 무표정으로 말했다.

“안타깝지만 유리코 님의 불행을 피할 방법은 없어요.”

시커멓고 커다란 파도 같은 절망감이 덮쳐왔다. 나는 불행에 빠져 울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다만 후보자님이 유리코 님이 된다면 그 문제는 해결됩니다. 후보자님이 다른 사람에게 불행을 내릴 수 있게 되어 자신에게 불행이 찾아오는 일은 사라질 거예요.”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건가. 어쩐지 기분 나쁜 조건이었지만 살아남을 길이 그것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다.

“어떻게 하면 다른 후보자를 누르고 유리코 님이 될 수 있나요?”

무엇이든 하겠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물어보자 유리코 선배가 대답했다.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붉은 셔츠를 입으면 유리코 님의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어요. 아직 후보자라 해도 그 차림을 하면 잠정적으로 유리코 님의 힘을 얻을 수 있어요. 저항하는 다른 유리코 님 후보를 힘으로 쫓아낼 수 있을 거예요.”

아직 후보자 신분이지만 일단 잠정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 테니스부 선배한테서도 들은 내용이었다.

자리 쟁탈전에 뛰어들어 싸울 수밖에 없는 건가.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원래 싸우는 건 싫어하지만 이번만은 정면으로 싸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그때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다카미자와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너무 마음에 두고 걱정할 필요는 없어. 아무리 유리코 님이라고 해도 사람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유리코 님이 다른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생명까진 뺏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겠지?”

완전히 편해지지는 않았지만 어깨의 짐을 조금은 덜어낸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이 다카미자와의 말은 곧 틀린 말이 되었다. 유리코 님의 힘으로 학생 한 명이 죽은 것이다.

날이 저물 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흰 백합 모임이 동아리실로 사용하고 있는 화학 준비실에서 나왔다.

유리와 유리코에게 유리코 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어느샌가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재미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쓸데없고 고통스러웠다. 시간이 무척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고 견디기 힘들 만큼 어깨가 결렸다.

그래서 다카미자와가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라는 말을 꺼냈을 때 구원을 받은 것 같았다. 뭐, 조금 일찍 말해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다카미자와가 화학 준비실 문을 잠갔다. 창문은 여전히 열어둔 상태였기 때문에 신경이 쓰였지만 신앙에 따른 이유라고 생각했다.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후보자님, 안녕히 가세요. 꼭 다시 와주세요.”

유리코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바람에 난감했다. 똑같이 인사하는 유리에게도 나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몸집이 작은 유리, 그와 거의 비슷한 유리코, 머리 하나 정도 키가 큰 다카미자와. 세 사람이 나란히 멀어져갔다. 나는 어쩐지 살짝 섬뜩한 느낌이 들어서 잠시 화학 준비실 앞에 머물렀다. 세 사람의 바로 뒤를 따라 걷고 싶지 않아서였다.

학교 건물에서 나온 후에도 흰 백합 모임이 마음에 걸렸다. 자전거 주차장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특별동 4층에 있는 화학 준비실 쪽으로 흘끔흘끔 고개가 돌아갔다. 화학 준비실은 마침 건물 뒤쪽에 있어 자전거 주차장에서 보면 반대편에 위치하는 복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복도 쪽 바로 위, 옥상 건물 바깥쪽 펜스가 부서져 있는 것도 보였다. 선생님들이 위험하다고 경고하며 절대로 가지 말라고 엄중하게 단속하고 있는 장소다. 옥상문은 단단하게 잠겨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몇 번인가 뒤돌아보면서 자전거 주차장에 도착하자 미즈키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즈키는 내 자전거의 짐받이에 앉아 있었다.

“꽤 오래 걸렸네. 유익한 정보는 얻어냈어?”

“앗!” 나는 흰 백합 모임에 간 본래 목적을 잊고 있었다. “미안, 유리코 님 전설에 대해서는 그다지 듣지 못했어.”

미즈키가 나를 거기에 보낸 이유는 유리코 님 전설의 과거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나는 수동적으로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정작 중요한 전설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진짜 진짜 미안해. 나 정말 바보 같지.”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고 있자 이런 내 어깨에 미즈키가 손을 살짝 올렸다.

“아니, 괜찮아. 설명도 하지 않고 보낸 내가 잘못했지.”

미즈키는 나를 감싸주었다. 그 다정함에 마음이 서서히 따뜻해졌다.

“고마워. 흰 백합 모임에 다시 가볼게. 다음에는 꼭 전설에 관련된 정보를 얻어오겠어.”

미즈키 덕분에 생각이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언제 어느 때라도 미즈키는 나를 지켜줬다.

“전교 학생 여러분,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교내에 남아 있는 사람은…….”

귀가를 독촉하는 방송이 울렸다. 해 질 녘이 되면 정해진 시간에 이 방송이 흘러나온다.

“그럼 집에 가자.”

미즈키가 자전거에서 일어섰다. 나는 자물쇠를 열어 자전거를 움직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꺄아악.”

학교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로 커다란 비명이 들렸다. 공포로 일그러진 여성의 비명, 그 직후 들린 쿵 하고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 교실동과 특별동에 둘러싸인 정원에서 들린 것 같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불과 얼마 전에 비슷한 소리를 들었는데.

“유리코, 혹시.”

미즈키도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이 하얘졌다. 나는 덜덜 떨면서도 무의식중에 정원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저무는 태양은 불길하게 느껴질 정도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 가운데 그 붉은 원은 이상하리만큼 강렬했다.

설마, 설마.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머릿속에 제멋대로 상상이 펼쳐졌다. 이 사태를 일으킨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이 흘러가버렸다.

이것도 유리코 님이 한 일인가?

정원에 도착하니 이미 사람이 모여 있었다. 학생들이 열 명 정도 모여 연달아 괜찮으냐고 말을 걸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미즈키가 내 앞에 서서 길을 만들어주어 사람들 무리 앞으로 나올 수 있었다. 거기에는 예상했지만 없기를 바랐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머리부터 검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떨어진, 거야?”

당연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모여 있던 학생들 가운데에서 흥분한 모습의 남학생이 대답했다.

“특별동 옥상에서 떨어졌어! 내가 여기서 놀다가 직접 봤다고.”

그의 등 뒤에는 남학생 두 명이 있었다. 세 사람이 놀다가 추락하는 걸 목격한 모양이다. 세 명 모두 흥분한 상태인지 불안정하게 다리를 떨고 있었다.

“옥상에 펜스가 부서진 곳에서 떨어졌어.”

빠른 말투로 설명이 이어졌지만 비일상적인 사태에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내용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다들, 비켜. 여기 있지 말고.”

남자 선생님의 화난 목소리가 울렸다. 학생 무리를 멀리 밀어내며 흩어지게 한 후 떨어진 여학생이 있는 곳에 다가갔다. 다른 선생님 몇 명도 따라왔다.

“큰일 났네. 빨리 구급차 불러.”

선생님들이 떨어진 여학생 주위를 둘러싸는 바람에 상황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학생들은 3층과 4층으로 올라가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상황을 살폈다.

“거기, 너희들, 뭐하는 거야! 하교 시간 지났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

남자 선생님의 화난 목소리에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학생은 급기야 스마트폰을 꺼내 카메라로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댔다.

“멈춰! 찍지 마!”

남자 선생님이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효과는 없었다. 한동안 카메라 플래시가 조명처럼 정원을 비췄다.

“야, 큰일 났어. 불이야.”

이런 상황에 더욱 절박감이 가득한 목소리가 울렸다. 특별동 쪽에 있던 남학생이 당황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특별동 뒤편에 불이 났어. 풀숲이 타고 있어.”

이런 긴급 사태에 화재까지 이어지다니. 나는 더욱더 혼란스러워졌다. 특별동 뒤편이라고 하면 이 정원에서 특별동을 가운데 두고 반대쪽이었다. 어째서 이런 타이밍에 평소에 잘 일어나지도 않는 화재까지 난 걸까?

혹시, 이것도 유리코 님의 힘인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꺼림칙한 느낌에 나는 현실감을 잃고 멍하니 있었다.

“어, 움직였다.”

그때 남자 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서둘러 주위에 있는 선생님들을 불러 모았다.

“아직 살아 있어. 빨리 응급 처치해. 빨리!”

추락한 여학생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주위가 어수선해졌다.

“우리도 가자.”

갑자기 미즈키가 팔을 잡아끌었다. 미즈키는 선생님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추락한 여학생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나도 강제로 이끌려 미즈키 옆에 다가갔다.

“거기 비켜. 학생은 오면 안 돼.”

선생님이 소리쳤지만 미즈키는 나를 더욱 잡아당기며 추락한 여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질문을 받은 여학생은 괴로운 듯이 피를 토한 흔적이 남은 입을 뻐끔뻐끔한 후 내장을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리코 님에게…… 당했어.”

보이지 않는 손이 살짝 어루만진 것처럼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공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로 변하며 나를 덮쳤다. 그녀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다시 의식을 잃은 모양이었다.

“빨리 비켜. 방해되잖아.”

선생님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나와 미즈키는 그 자리를 떠났다. 필사적으로 응급 처치를 하는 선생님들 옆을 지나며 나는 그녀의 말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유리코 님에게 당했어.

나는 거의 저물어버린 석양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의 망막에 사라져가는 석양의 붉은빛이 남아 있었다. 그 붉은빛이 그녀가 흘린 피의 붉은색과 겹쳐지며 지독하게도 짙은 붉은색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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