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0)

“혹시 유리코 님에 대한 전설 알아?”

기분 좋게 화창한 5월 말, 방과 후였다. 갑자기 선배가 이름에 ‘님’을 붙여 부르는 바람에 당황하고 말았다. 발아래 모아둔 공을 라켓으로 튕기던 손이 반사적으로 멈췄다.

“어떤 전설이에요?”

이름에 ‘님’을 붙여 불릴 정도로 대단하진 않은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상대가 선배다 보니 일단 물어보았다. 그러자 선배는 실실거리는 얼굴로 “알고 싶어?”라며 얄밉게 나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알고…… 싶어요.”

불안과 호기심이 섞인 마음으로 대답하자 선배는 공 줍기를 아예 그만두고 그늘 진 동아리실 뒤로 나를 데리고 갔다. 동아리실 뒤쪽은 묘하게 어둑하고 음침해서 습한 공기가 피부에 찰싹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이 전설은 아주 민감해.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다룰 때는 아주 조심해야 해. 테니스부에서도 1학년 중에 알고 있는 사람은 아직 극히 일부뿐이니까.”

이유도 모른 채 엄중하게 미리 입단속을 받았다. 5월의 햇볕 때문이 아닌 또 다른 이유로 흘러나온 땀이 축축하게 스며들어 손에 든 라켓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곳 유리가하라 고등학교에는 특권의 신분인 유리코 님이 한 명 있어. 단 한 명.”

학생들 중에 그 유리코 님인가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가? 그런데 특권의 신분이라는 건 대체 뭐지?

“유리코 님은 이름이 유리코인 여학생만이 될 수 있어. 한자는 어떤 글자를 써도 상관없어. 아무튼 이름을 유리코라고 읽으면 유리코 님 후보가 되는 거야.”

그렇구나, 그래서 선배는 이 이야기를 꺼낸 거구나. 내 이름은 유리코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내가 그 유리코 님 후보라는 모양이다.

다만 유리코라는 이름은 그렇게 드문 이름이 아니다. 학교 내에 두 명 이상 있을 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선배는 내 마음을 꿰뚫어본 듯이 웃었다.

“물론 이름이 유리코인 학생이 여러 명일 경우도 있지. 그때는 자리 쟁탈전을 벌이게 돼. 싸움 끝에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한 사람이 유리코 님이 되는 거야.”

“사, 살아남는다, 고요?”

느닷없이 살벌한 단어가 등장하여 깜짝 놀랐다. 설마 서로 죽이는 싸움을 한다는 건 아니겠지?

“그래, 살아남는 사람. 학교에 유리코가 여러 명 있을 경우 퇴학이나 전학, 또는 입원 등 어떤 일이 생겨서 유리코는 한 명만 남게 돼.”

선배는 내 반응을 보고는 만족한 듯 가슴을 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있어날 수 있을까. 나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공기가 무거워지며 묵직하게 어깨를 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알아챘겠지만, 너도 유리코 님 후보야. 듣기로 1학년 중에 유리코가 몇 명 있다는 것 같으니까 지금까지 유리코 님 자리에 있던 여학생과의 사이에서 쟁탈전이 일어날 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당하는 건 가여울 것 같아서 이렇게 미리 알려주는 거라고.”

아직 나는 혼란스러웠다. 유리코 님의 존재인지 뭔지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기, 지금까지 유리코 님 자리에 있던 여학생은 누구예요?”

“아, 너희 1학년에 유리코가 몇 명 입학하기 전까지 학교 내에서 혼자 남아 있던 유리코를 말해. 그 친구도 격렬한 자리 쟁탈전을 치르고 유리코 님이 되었는데, 1학년이 입학하면서 또다시 전쟁에 휘말리게 됐어. 다시 말해 그런 과정을 거쳐 학교 내에서 단 하나뿐인 유리코 님 자리에 앉더라도 매년 새로운 적이 입학한다는 말이지.”

그러면 다시 전투를 치르고 살아남은 자가 유리코 님이 된다는 말인가? 나는 엉겁결에 큰 목소리로 선배에게 물었다.

“그럼 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게 말이지. 굳이 말하자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돼.”

대수롭지 않은 선배의 말에 나는 멍해졌다.

“아, 오해하지 말았으면 하는데, 딱히 피를 부르는 싸움은 아니니까. 유리코 님 후보는 아무것도 안 해도 자연스럽게 도태되어 결국 한 명만 남게 돼.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후보자에게 갑자기 불상사가 일어나 퇴학당하거나 학교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해서 전학 가거나 다쳐서 입원하기도 해. 다양한 형태로 이 학교에서 퇴출당하는 거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자연스럽게 한 명만이 남는다니.

“믿어지지 않아? 하지만 사실이야. 벌써 몇 십 년이나 이 유리코 님의 전설은 이어져오고 있어.”

땀이 등줄기를 타고 유난히 느리게 흘러내렸다. 선배는 그런 나를 재미있는 듯이 바라보았다. 짐작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선배는 내가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유리코 님으로 선택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해했어? 그러면 다음으로, 유리코 님이 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줄게.” 선배는 목소리를 낮추며 신난 모습으로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처음에 내가 유리코 님은 특권 신분이라고 말했지? 정말로 말 그대로야. 유리코 님이 되면 모두가 그 뜻을 따르고 어떤 학생이라도 받들어 섬기게 돼.”

“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분명 선택되는 과정은 섬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교생이 유리코 님의 말을 따르고 받든다는 게 말이 되냐고?

“선배, 유리코 님에 대한 전설을 믿지 않는 학생도 있지 않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런 학생은 유리코 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것 같은데요.”

“오, 좋은 질문. 믿지 않는 학생이 있기는 있지. 그런 사람은 처음에는 유리코 님을 따르지 않아. 하지만 말이야, 언젠가는 따르게 되어 있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유리코 님이라는 존재에 반항하는 사람도 결국 복종하게 하는 어떤 ‘힘’이 있다는 말인가?

“왜냐하면 유리코 님의 뜻을 거스른 사람에게는 불행이 찾아오거든.”

차가운 바람이 불길한 일이 일어날 전조처럼 내 머리카락을 심하게 흩날렸다. 원래라면 분명 따뜻한 5월의 바람일 텐데 어째서인지 꽁꽁 언 금속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불행이라면 어떤 거예요?”

“계단을 잘못 디뎌서 굴러떨어진다든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 넘어진다든가, 자동차에 치인다든가. 주로 다치는 일이 많아.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꽤 심각한 부상을 입어. 그리고 정신적인 충격을 크게 받는 일도 있고. 최근에 있었던 일로는 작년 겨울에 유리코 님에게 반항하던 여학생의 교복 상의와 스커트가 체육 수업을 하는 사이에 차례차례 사라지는 일도 있었어.”

유리코 님을 따르지 않으면 불행이 찾아온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반항하던 사람들도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그 정도로 유리코 님은 엄청나게 강해.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지는 않지만 모두가 학생회장보다도 유리코 님을 존중해. 유리코 님은 바로 그런 존재야.”

선배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농담을 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진심이 느껴진 것이다.

“넌 그런 유리코 님이 될 기회를 얻은 거야. 얻기 힘든 기회잖아? 꼭 잘 해냈으면 좋겠어.”

“아뇨. 유리코 님이라니, 전 되고 싶지 않아요.”

“그래? 특이하네. 다들 유리코 님이 되고 싶어 하는데.”

선배는 의아하게 여겼지만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어쩐지 엮여서는 안 될 것 같은 섬뜩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 유리코 님 후보자라는 건 사퇴할 수 없나요?”

“불가능해. 굳이 그러고 싶다면 전학을 가는 방법도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효고 현에서 톱클래스 사립 학교인 이 유리가하라 고등학교에 고생고생해서 입학했다. 이제 와서 전학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합격을 기뻐해준 가족과 친지들에게 뭐라고 하면 좋단 말인가. 유리코 님이 무서워서, 라고 했다가는 결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 학교에 들어온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전학이라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유리코 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에 참가할 수밖에 없겠네. 그럼 내가 다른 후보자들보다 한 발 앞설 방법을 가르쳐줄게.”

선배는 더욱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교복 블라우스 안에 붉은 셔츠를 입어.”

“네? 그게 뭐예요?”

내가 어리둥절하게 있으니 선배는 비밀을 알려주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그렇게 하면 하늘이 네 편이 되어줄 거야. 유리코 님 후보자인 동안에 너를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생겨.”

“유리코 님의 힘을 비슷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렇지.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야.”

그러면 만약 나 말고 다른 유리코가 그런 차림을 하면 라이벌인 내게 불행이 찾아오는 걸까?

“지금까지 유리코 님 자리에 있던 3학년 쓰쓰미 유리코 선배는 새 학년이 시작되자마자 쭉 그 차림을 하고 있어. 유리코 님의 자리를 어떻게든 끝까지 지키겠다는 각오지.”

이미 그 차림을 한 유리코가 있다는 말이었다.

“머리를 땋는 건 그렇다고 해도 붉은색 셔츠는 교칙 위반이니까 그런 차림으로 다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선생님들 눈을 잘 피해야만 하니까. 쓰쓰미 선배는 어떻게든 붉은 셔츠를 계속 입고 있지만 말이지.”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예전에 유리코 님 쟁탈전에서 승리한 3학년 학생이 선생님에게 들킬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런 차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쟁탈전이 혹독하다는 뜻이리라.

“참고로 왜 머리를 땋고 붉은 셔츠를 입는지 알고 싶지 않아?”

선배는 대단한 정보라도 알고 있는 것처럼 거침없이 다가왔다. 나는 관심이 생겨서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초대 유리코 님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 유리코 님 전설을 만든 최초의 유리코 님은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어. 30년 전인지 50년 전인지, 언제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무튼 꽤 오래전 이야기야. 유리코라는 이름의 학생이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었어. 소문으로는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나 봐. 그때의 무념과 한이 학교 내에 깊이 스며들어 유리코 님의 힘이 생겼다고 해.”

그 최초의 유리코 님이 혹시.

“초대 유리코 님이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을 때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있었어. 그래서 머리를 땋으라는 거야. 게다가 떨어졌을 때 피범벅이 되는 바람에 하얀 블라우스가 새빨갛게 물들었어. 그것을 모방해서 붉은 셔츠를 입는 거야.”

즉 죽었을 때의 유리코 님을 흉내 낸다는 것이구나. 힘은 어느 정도 얻을 수 있겠지만 막상 하라고 하면 저주를 받을 것 같아 무서웠다.

“어때, 유리코 님에 대해 이제 좀 알겠어?”

이야기가 끝났는지 선배는 기세등등하게 물었다. 나는 모호하게 “네에”라고 대답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거기, 어디서 게으름 피우고 있는 거야?”

등 뒤에서 커다란 호통 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라 몸이 튀어 올랐다. 허둥지둥 뒤돌아보자 테니스부 주장이 라켓을 어깨에 걸치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빨리 돌아가서 공 주워.”

나와 선배는 자세를 꼿꼿하게 세우고 “네”라고 대답한 후 쏜살같이 코트를 향해 달려갔다.

내가 다니는 유리가하라 고등학교는 고베 시 나다 구에 있는 남녀 공학으로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고등학교다. 효고 현에서도 톱클래스 학력을 뽐내는 명문고로, 올해로 창립 90주년을 맞는다.

20년 전까지는 여고였기 때문에 남학생은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20년 전에 학교 운영 방침을 바꿔 남녀 공학이 되었다. 그 결과 여인 천하였던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평범한 진학 고등학교가 되었을 거라고 보통은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유리가하라 고등학교에는 여전히 여고 시절의 풍토가 남아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남자가 약하고 여자가 강한 풍조가 있는 것이다. 학생회장은 대대로 여학생 중에서 선출되었고 각 반의 반장도 여학생이 되고 남학생은 부반장에 머물렀다. 뭔가를 정할 때도 여학생 의견이 우선시 된다. 여학생은 기세등등하게 교정을 누비고 남학생은 가장자리로 붙어 움츠리고 다닌다. 공학이 된 후 20년이 지났지만, 교내에는 여전히 여존남비 분위기가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분위기가 편안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남학생들이 학교 내에서 어수선하게 소란을 떨고 여학생은 구석에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광경이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여학생이 활개를 치며 걸을 수 있는 이 학교의 분위기는 신선하고 고맙기까지 했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유리가하라 고등학교가 이전에 여자 고등학교였기 때문에 조성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여인 천하였던 시절의 잔재일 것이라고.

하지만 여학생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 혹시 그것은 유리코 님의 존재인 건 아닐까? 뜻을 거스르는 사람에게 불행을 내리는 유리코라는 이름의 단 한 명뿐인 여학생. 전교생이 두려워하는 그 존재야말로 남학생의 활약을 막고 있는 게 아닐까?

남학생은 여학생의 상징이 되는 유리코 님의 기분을 망치는 일을 하지 않을 테니까 자연스럽게 여학생들이 싫어하는 짓을 하지 않게 된다. 그들은 여학생 전체를 조심스럽게 대하고 그 결과 여학생에게 우선권이 돌아간다.

이것이 유리가하라 고등학교에 남아 있는 여학생 우위 풍토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유리코 님 전설이 정말로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후보자라고 생각하니 신기하게 기분이 고양되었다. 남자들조차 경외하는 마음을 보낸다. 학교의 암묵적 일인자. 나 같은 사람이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흐음, 유리코 님이라고.”

석양을 받으며 시마쿠라 미즈키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투명해서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 듯한 검은 눈동자에 매끈한 콧날. 윤기 있고 균형 잡힌 형태의 입술에 단정한 턱 선. 거기에 더해 반짝이는 칠흑의 긴 머리카락. 오렌지 빛으로 물든 그녀의 옆모습은 여자인 내가 봐도 홀딱 반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공통점이라고는 애써 찾아봐도 검은 긴 머리카락 정도밖에 없는 평범한 용모인 나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미즈키는 유리코 님에 대한 전설을 알고 있었어?”

내가 자전거를 밀면서 물어보자 옆에서 나란히 자전거를 밀고 가던 미즈키는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몰랐어. 처음 들어.”

무엇이든 잘 아는 미즈키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니. 나는 미즈키를 이기기라도 한 듯 조금 우쭐해졌다.

“이름이 유리코인 여학생만이 될 수 있는데, 그 사람을 거스르는 사람에게는 불행이 찾아온다는 신격화된 존재래. 꽤 흥미롭지 않아?”

문득 미즈키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떠올랐다. 중학교 때부터 연극 부원인 미즈키는 재미있는 연극 작품을 발견했을 때 이런 표정을 지었다. 그 웃음은 요염하면서도 어딘가 장난기 가득한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유리코도 그 유리코 님의 후보자가 된 거란 말이지. 네가 묻고 싶은 것은 결국 앞으로 어떻게 처신하면 좋을지 하는 부분인 거고?”

미즈키는 빈틈없이 내 기분을 꿰뚫어보았다. 역시 대단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유리코 님이 되어야 할까?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까?”

곤란한 일이 있을 때는 일단 미즈키에게 상담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계속 이어온 습관이었다.

“자리 쟁탈전에 뛰어드느냐 마느냐? 결론은 간단하다고 생각하는데.”

석양에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미즈키는 늘 그랬듯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유리코 님에 선택되는 건 어디까지나 자연 도태로 결정된다며? 그러면 그만둔다는 것도 도태되는 거잖아. 그러면 그만두는 것도 의미 없는 거지. 그렇다면 유리코 님 자리 쟁탈전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은 후에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붉은 셔츠를 입는 차림의 힘을 빌리는 편이 마지막까지 이길 가능성이 있는 거잖아.”

분명 그렇다. 아무리 도망친다고 해도 불행은 따라오는 것이다.

“뭐, 전학이라도 간다면 다른 얘기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유리코 님이 무서워서 안 되겠다면 어디로 전학 가면 좋을지 정도는 같이 고민해줄게.”

“그건 안 돼.”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튀어 나왔다. 내 목소리 크기에 놀라 볼이 빨개졌다.

“왜 안 돼?”

미즈키가 검은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석양을 받아 반짝이는 그 눈동자에 나는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아니, 뭐. 그냥…… 그게, 애써서 어려운 시험을 치르고 입학했으니까 졸업할 때까지는 이 학교를 다니고 싶어. 그냥 그뿐이야.”

빨개진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다른 쪽으로 얼굴을 휙 돌렸다.

“그래. 그렇다면 별 수 없네.”

미즈키는 알겠다는 듯 말했지만 내 마음은 복잡했다. 내가 이 유리가하라 고등학교에 지원한 진짜 이유는 미즈키가 지원해서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함께 사이좋게 지내온 미즈키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은 공립 고등학교를 추천했지만 내가 미즈키와 같은 학교가 좋다고 우겨서 무리하게 유리가하라 고등학교를 지원했다.

“그러면 이제 정면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네. 머리를 땋고 붉은 셔츠를 입고 최대한 다른 후보자에게 불행이 찾아오기를 기도해.”

변함없이 냉정한 말투다. 내 마음도 모르면서, 조금 원망스러워졌다.

“하지만 누군가의 불행을 바라는 건 싫어. 나 그렇게까지 심술궂은 생각은 할 수 없어.”

미즈키를 동요시키려고 일부러 우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미즈키는 다른 쪽을 보고 있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뭐, 유리코 님의 저주라는 것도 그냥 미신이겠지만.”

나는 할 말을 잃고 돌아섰다.

“그냥 미신이라니, 대대로 유리코 님의 자리는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많은 사람이 불행해졌는걸.”

“그건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뿐이잖아? 꾸며낸 이야기일지도 몰라. 아니, 꾸민 이야기라기보다는 오해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려나.” 미즈키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유리코 님의 힘이 있다고 굳게 믿으면 사사로운 일도 전부 유리코 님의 힘이 작용한 것으로 느껴져. 누군가가 넘어진 것도 유리코 님의 힘, 누군가가 감기에 걸린 것도 유리코 님의 힘. 그런 식으로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을 전부 유리코 님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유리코 님의 힘 때문에 전학을 가거나 퇴학당한 경우는 어떻게 되는 거야? 전학이나 퇴학이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

“그건 유리가하라 고등학교이기 때문이야. 학력이 높은 우리 학교니까 공부를 좇아가지 못하고 전학갈 수밖에 없는 학생도 몇 명은 나오게 마련이지. 게다가 교칙도 엄격해서 퇴학 처분을 받는 학생도 적지만은 않을 거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전학과 퇴학이 많은 유리가하라 고등학교였다.

“아, 하지만 이름이 유리코인 학생이 교내에 한 명만 남도록 자연 도태된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야 해? 아무리 그래도 그 부분은 설명이 안 되잖아?”

“그거야말로 오해야. 과거에는 유리코라는 학생이 여러 명 있었던 때도 있을 거야. 이번 4월까지는 한 명이었던 모양이지만, 그건 그냥 우연일 뿐이야. 유리코 님이라는 존재가 지나치게 신격화되어서 그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 과거가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진 거지.”

“하지만 실제로 지난 4월까지는 이름이 유리코인 사람이 학교 내에 한 명뿐이었잖아? 그건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데.”

“유리코라는 이름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야. 옛날에는 많았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시대에는 ‘코’를 붙인 이름이 많이 줄어들었어. 유리코라는 이름이 흔하다는 인상을 고려한다면 최근에는 그 이름을 지어주는 부모도 줄어들지 않았을까? 유리코라는 이름이 학교 내에 한 명이라고 해도 특별히 신기한 일이 아니야.”

미즈키의 말은 하나하나 정론이었다. 나는 하아, 라고 감탄의 숨을 내뱉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유리코 님의 힘이라는 건 어차피 미신이야. 신경 쓸 필요 없어.”

미즈키가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나는 반은 이해하고 반은 의문을 가진 채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 아침, 학교 현관에서 실내화를 갈아 신는 내 마음은 무거웠다. 그 교실에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예 보건실에 갈까. 아니,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 버릴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건 지는 걸 의미했다. 그 심술궂은 여학생 그룹 앞에서 꼬리를 감추고 도망치는 꼴이 되어 등 뒤에서 한층 더 비웃음을 살 게 분명했다. 그것만은 죽어도 싫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크게 심호흡했다. 괜찮아, 라고 자신에게 말하며 계단을 올라 복도를 걸어 교실 앞까지 갔다.

괜찮아, 괜찮아. 마음속으로 주문이라도 외듯이 반복하며 나는 교실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얘들아 안녕. 좋은 아침이야.”

힘차게, 아무 일도 없는 척 인사를 했다. 하지만 아무도 내 인사에 답하지 않았다. 교실 안에 있던 여학생도 남학생도 모두 각자 하던 행동을 멈추고 내 쪽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숨기기 힘든 혐오의 표정이 담겨 있었다.

“좋은, 아침…….”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나는 어느새 등을 둥글게 움츠리고 기가 죽은 모습으로 의자에 앉았다.

어디선가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나를 비웃는 소리에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살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기분 탓이야, 기분 탓.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그때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휙 들어 둘러봤지만 아무도 웃고 있지 않았다. 위가 꽉 조이는 것처럼 아파왔다.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하고 가방을 열어 교과서를 꺼냈다. 책상 서랍에 차곡차곡 교과서를 넣었다. 이렇게 뭔가를 하고 있을 때는 거기에 몰두할 수 있어서 조금은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가 내 머리를 쳤다. 당황하며 뭔지 살펴보자 발밑에 둥글게 구겨진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종이를 주워서 펼쳐보자 ‘빨리 죽어버려, 학급 학생 일동’이라고 적혀 있었다. 누군가가 이걸 써서 내게 던진 것이다. 범인을 찾아내고 싶었지만 어느 쪽에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이 종이를 구겨서 휴지통에 버리러 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휴지통이 있는 쪽으로 향하는 사이에 교실 안에서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가 퍼졌다. 나는 의식을 휴지통에 집중시켜 최대한 웃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지?

나를 향한 괴롭힘은 정말 하찮은 이유로 시작되었다.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4월. 학급 전체가 거의 첫 대면인 반 친구들과 우호적인 인간관계를 쌓기 위해 서로의 태도와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누구와 누가 친구가 되고, 어떤 그룹이 만들어지는지. 어떤 그룹으로 나뉘는 것이 학급을 위한 일이 될지. 무언 속에 인간관계의 실은 얽히고 얽혀 모두 학급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그걸 필사적으로 풀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얽힌 실에서 도망쳤다. 쉬는 시간이 될 때마다 옆 반인 5반에 가서 오랜 친구인 미즈키와 만났던 것이다. 낯선 반 친구들보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낸 미즈키와 함께 있는 편이 훨씬 마음 편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 행동은 같은 반 여학생 모두를 화나게 했다. 자신들이 열심히 학급의 조화를 꾀하고 있는 사이에 나 몰라라 다른 반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5월이 되면서 이미 고정된 학급의 인간관계에 내가 있을 곳은 없었다.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변명은 하지 않겠다. 내가 편한 쪽으로 행동한 것은 비난받아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단 괴롭힘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무시하고 괴롭히는 여학생, 그 여학생들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방관하는 남학생. 양쪽 다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집단 괴롭힘을 하는 녀석들에게는 천벌이 내려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집단 괴롭힘을 하는 쪽에 어떤 벌도 내려지지 않는다는 건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자신이 집단 괴롭힘을 방관하던 쪽에 있었을 때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에게는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는다. 나도 손을 내밀지 못했다. 언제나 손해를 보는 쪽은 괴롭힘을 당하는 쪽이고 괴롭히는 쪽은 계속 웃고 있을 뿐이었다.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처음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쪽이 된 지금, 나는 천벌을 빌었다.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빌었다.

내가 유리코 님이 된다면.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거스르는 사람에게 제각각의 불행을 내리는 유리코 님. 그런 존재가 된다면 괴롭히는 쪽에 천벌을 내릴 수 있을 텐데. 진심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기분을 달랬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붉은 셔츠라, 한번 해볼까?

수업 중에 그렇게 멍하니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 또 뭔가가 머리를 쳤다. 창가 쪽에서 날아온 것 같았다. 주워보니 또 둥글게 구긴 종이였다. 펼쳐보자 ‘빨리 사라져버려, 학급 학생 일동’이라고 적혀 있었다.

창문 쪽을 봤지만 누가 던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은밀한 웃음소리만은 들려왔다. 한 명이 아니었다. 여러 명이 소리 죽여 웃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 있는 학생들을 차례차례 노려봤지만 다들 딴청을 피웠다. 내 처지가 서글퍼졌다.

그런데 다음 순간 예상도 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창밖에 교복 차림의 여학생이 떨어져 내린 것이다.

“어?”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잠깐 동안 와작, 하고 뭔가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운동장 쪽에서 비명이 들리고 교실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학생들이 얼어붙었다.

“지금 뭐, 뭐야?”

“사람이었지?”

교실 전체가 술렁였다. 수업 중인데도 일어나서 창문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학생도 있었다.

“지금 다들 뭐하는 거야? 수업 중이잖아.”

신입 여자 선생님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학생들의 동요는 가라앉지 않았다. 창가 자리에 있던 학생들이 창문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비명을 질렀고, 일종의 패닉 상태가 일어났다.

“선생님, 사람이 떨어졌어요.”

여학생의 말을 듣고 선생님은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하얗게 질려 창문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 아앗.”

선생님은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크게 뜬 눈에는 핏발이 서 있고 눈동자는 공포로 떨렸다.

“우선 구급차를 불러. 그리고 다른 선생님께도 알리고.”

여학생들의 선도로 몇몇 학생이 교실에서 뛰어나갔다. 다른 반 학생들도 눈치챘는지 갑자기 학교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복도를 뛰어 다니는 발소리가 울리고 호통 같은 명령이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마치 재해 현장처럼 팽팽하게 긴장된 분위기가 퍼지며 우리는 비일상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수업은 중단되었고, 학생들은 교실에서 대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절대로 교실에서 나와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은 후 방치된 채 이래저래 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떨어진 사람, 3학년 여학생이라나 봐.”

“4층 빈 교실에서 떨어졌대.”

교실 여기저기에서 정보가 날아왔다. 교실에서 나갈 수는 없지만 현대 고교생에게는 스마트폰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선생님이 오더라도 들키지 않도록 책상 아래에 숨기고 모두가 다른 반 학생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자살인가?”

“타살은 아니라는 것 같던데…….”

빠르게도 죽었다는 전제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아직 죽었다고 확인된 것도 아닌데.

한동안 교실이 소란스러웠지만 갑자기 문이 열리자 모두 자리에 앉아 입을 다물었다. 담임인 히가시다가 들어왔다. 쉰 살이 넘은 중년의 히가시다는 평소와 다름없는 짙은 화장 뒤에 피로감이 스며든 모습으로 교단에 서서 학생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여러분,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남은 수업은 물론 동아리 활동도 오늘은 없습니다.”

뭐라고? 놀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일은 평소대로 수업을 진행할 테니까 평소대로 등교하세요. 만약 임시 휴교가 정해지면 연락망을 통해…….”

“선생님, 여학생 한 명이 떨어졌죠? 어떻게 되었나요?”

여학생 한 명이 질문을 던졌다. 히가시다는 화장으로 색을 덧바른 뺨을 바짝 굳히며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3학년 여학생인데, 수업 시간에 4층 빈 교실에서 떨어졌어요. 떨어진 후 의식이 있어 물었더니, 바깥 공기를 마시려고 창문을 열었을 때 실수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사고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아무튼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여러분, 부디 매스컴 등 외부인에게 말실수하지 않도록 신경 쓰세요. 유리가하라 고등학교 학생으로서 절도 있는 행동을 하길 바랍니다.”

반론은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재빨리 교실에서 나갔다.

“확실히 자살이지? 그런 사고가 일어날 리 없잖아?”

여학생 중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치? 뒤를 이어 같은 의견을 내는 목소리가 차례차례 들렸다. 교실 안에는 의혹의 감정이 앙금이 되어 가라앉았다.

“유리코.”

현관에서 실내화를 벗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자 거기에는 가방을 든 미즈키가 서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반듯한 자세다.

“4층에서 떨어진 3학년 학생은 다치긴 했는데, 다행히 생명에 이상은 없다나 봐.”

미즈키가 시원스러운 표정으로 알려줬다. 하지만 나는 우물쭈물하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뒤꿈치까지 덮는 형태의 실내화를 우왕좌왕하며 벗은 후 입을 꾹 다물고는 신발을 신었다.

“이 정보는 우리 반 여학생이 담임을 추궁해서 들은 거라 확실해.”

미즈키가 이어서 말했지만 그보다도 나는 미즈키와 대화하는 것에 불안을 느꼈다.

미즈키와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 그것은 같은 반 친구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학급 내의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미즈키와 사이좋게 지냈던 것, 그 사실에 모두가 화를 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같은 반 학생이 지나갈 가능성이 있는 장소에서 이렇게 미즈키와 이야기하는 건 그녀들을 불쾌하게 만들어 괴롭힘이 더욱 심각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나는 학교 밖에서만 미즈키와 만족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물론 미즈키는 나의 이런 갈등을 알지 못해서 학교 내에서도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미즈키의 그런 행동은 무척 기뻤다. 기뻤지만 주위 시선이 더 신경 쓰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무튼 한시라도 빨리 같은 반 친구의 눈이 없는 곳으로 가야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없이 미즈키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그녀는 그 자리에서 우뚝 서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미즈키? 뭐하고 있는 거야?

나는 초조했지만 미즈키는 천천히 내 손을 뿌리치고는 어째서인지 1학년이 아닌 3학년 신발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쪽은 3학년 신발장이야.”

조심스레 말을 건넸지만 미즈키는 개의치 않는 태도로 신발장을 차례대로 살펴봤다. 신발장에 문이 달려 있지 않아서 안에 놓인 실내화와 신발이 있는 그대로 다 보였다.

“이게 떨어진 3학년 학생 신발장이야.”

미즈키는 천천히 신발장 중 한 곳을 가리켰다. 이름표는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미즈키는 자신만만하게 가리켰다.

“어떻게 알 수 있어?”

“생각해봐. 교내에서 떨어졌으니까 그 3학년 학생은 실내화를 신고 있었을 거야. 우리 학교 실내화는 뒤꿈치를 덮는 타입이라 억지로 벗기면 위험하니까 병원까지 실내화를 신은 채로 옮겨졌을 게 분명해. 하지만 병원에서는 밖에서 신을 수 있는 신발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병원 안에서라면 실내화도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밖에 나갈 때는 아무래도 신발이 필요하겠지. 그러니까 그런 부분을 신경 쓴 선생님이나 누군가가 신발을 챙기지 않았을까?”

그렇구나. 나도 마음속으로 동의했다. 그렇다면 신발장을 찾아낼 수 있다.

“실내화는 신고 있었고, 신발은 선생님이 가지고 갔다면 신발장은 비어 있겠네.”

“그래. 원래 실내화거나 밖에서 신는 신발 어느 쪽인가가 들어 있어야 할 신발장이 비어 있다. 이거야말로 이 신발장의 주인이 옥상에서 떨어진 3학년 학생이라고 알려주는 거야.”

역시 미즈키였다. 나와는 두뇌 회전이 차원이 다르다.

“교실의 책상과 사물함, 떨어진 현장은 선생님들이 지키고 있을 테니까 조사하려면 여기 정도. 뭔가 추락과 관련된 증거가 남아 있지 않을까?”

미즈키는 신발장에 손을 넣고는 조심조심 안쪽까지 살폈다.

“응? 이건 뭐지?”

미간을 찌푸리며 미즈키가 손을 빼냈다. 미즈키의 손에는 접힌 종이가 쥐여 있었다.

“글자가 적혀 있어. 편지……?”

종이를 펼쳐 읽어본 미즈키가 단정한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유리코, 이거 유서야.”

뭐? 반사적으로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런 곳에 유서가 있다고?

나는 허둥지둥 그 종이를 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저는 자살합니다. 다가오는 입시의 압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바에는 지금 죽는 편이 낫습니다. 남은 가족에게는 미안하지만 저는 너무나 괴로워 죽는 것밖에 할 수 없습니다.

3학년 5반 아사카 주리

“역시 자살이었구나.”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즈키는 응응, 하고 동의하듯이 조용히 끄덕였다.

“아, 그런데 왜 유서를 이런 곳에 뒀지? 보통 뛰어내릴 현장에 남겨두지 않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물었다. 그러자 미즈키는 종이의 한 구석을 가리켰다.

“여기에 추신이 있어.”

정말이었다. 아래에 글이 더 있었다.

P. S.

이 편지를 발견해준 분께. 이 편지를 저의 부모님께 전해주세요. 학교 선생님들이 감출 것 같아 이렇게 찾기 힘든 장소에 숨겨뒀습니다.

그렇구나. 사건에 관심을 가진 학생 중 누군가가 신발장을 뒤져봤을 때 발견되도록 넣어둔 모양이었다. 안쪽 깊은 곳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신발을 가지러 온 선생님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미즈키, 어떻게 하지?”

내가 물어보자 미즈키는 크게 숨을 내뱉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허리에 손을 얹었다.

“이렇게 발견했으니 전달할 수밖에 없겠지. 본인이 원하는 일이니까.”

나는 미즈키의 이런 다정한 부분이 무척 좋았다.

그때 한 남학생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앗, 쓰쓰미 선배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보자 3학년으로 보이는 예쁘장한 여학생이 현관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다만 모습이 이상했다. 그녀는 블라우스 안에 붉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얀 블라우스 아래로 비치는 붉은 셔츠는 타오르는 불꽃처럼 그녀의 상반신을 감싸고 있었다.

그 선배는 머리도 양 갈래로 땋아 내리고 있었다. 땋은 머리에 붉은 셔츠. 테니스부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쳤다.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교복 블라우스 안에 붉은 셔츠를 입어.’

‘지금까지 유리코 님 자리에 있던 3학년 쓰쓰미 유리코 선배는 새 학년이 시작되자마자 쭉 그 차림을 하고 있어.’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에게 불행을 내리는 힘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양 갈래로 땋은 머리와 붉은 셔츠. 그렇다면 저 사람이 우리 1학년이 입학하기 전까지 유리코 님 자리에 있던 쓰쓰미 유리코인 것인가.

“유리코 님이다…….”

누군가가 중얼거리자마자 현관의 분위기가 변했다. 떠드는 소리가 멀어지고 긴장감이 가득한 분위기가 퍼졌다. 쓰쓰미를 피하듯이 모두가 빠른 걸음으로 물러섰다.

쓰쓰미는 그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않는 것처럼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흔들면서 유유히 걸었다. 그리고 그대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선배가 물었다. “그 종이는 뭐지?”

“아, 이건 별것 아니에요.”

내가 우물우물 말하자 선배는 의아한 눈빛을 보였다.

“유서, 아냐?”

어떻게 알았지? 내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내놔봐.”

쓰쓰미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 손에서 유서를 빼앗았다.

“흐음, 그 애 입시 스트레스였구나.” 쓰쓰미는 유서를 읽고는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뭐, 이것도 천벌이겠지.”

그 말이 너무나 마음에 걸렸다. 그 말에 따르면 마치 이번 추락 사건이…….

“선배가 유리코 님의 힘을 이용해서 떨어뜨린 거예요?”

먼저 물은 사람은 미즈키였다. 미즈키는 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가 지금까지 유리코 님 자리에 있던 분이죠?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붉은 셔츠로 후보자가 여러 명 있는 지금도 힘을 발휘하고 있는, 그 힘으로 아사카 선배를 떨어뜨린 건가요?”

“너,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쓰쓰미는 미즈키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보면서 쿡쿡 웃었다.

“그래 맞아. 내가 이전 유리코 님인 3학년 쓰쓰미 유리코야. 지금도 이 차림으로 힘을 보존하고 있어.” 득의양양하게 땋은 머리와 붉은 셔츠를 가리키며 선배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후배님의 현명한 판단대로 내가 아사카 주리에게 불행을 내렸어. 나한테 반항을 했거든. 언젠가 불행이 찾아오라고 기원했어. 이전에도 내게 반항하는 사람은 모두가 사고를 당하거나 병이 들어서 얌전해졌지.”

무서운 이야기였다. 그건 마치 의견이 다른 사람을 숙청하는 독재자와 마찬가지 아닌가.

“하지만 이번 아사카 선배의 사건은 입시 스트레스에 따른 자살 미수잖아요. 아무리 선배가 유리코 님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조종할 수는 없잖아요?”

미즈키가 따지듯이 물었지만 쓰쓰미는 재미있는 듯 대답했다.

“아니, 가능해. 유리코 님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어. 거스르는 사람에게 불행을 내리기 위해서라면 인간이 언뜻 보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수단이라도 이루어진다고.”

유쾌하게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소름이 끼쳤다. 이 사람, 유리코 님 지위에 있으면서 마음이 일그러진 게 아닐까.

“그나저나 거기 너, 1학년 야사카 유리코지?”

갑자기 이름이 불렸다. 당황하는 내게 다가와 쓰쓰미가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어떻게 알았냐고? 올해 입학한 유리코 님 후보에 대해서는 전부 조사해뒀으니까.”

적의로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아무래도 유리코 님 후보인 나를 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절대 빼앗기지 않을 거야. 나는 졸업할 때까지 쭉 유리코 님 자리에 있을 생각이니까.”

선전 포고였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했다.

“그럼, 안녕.”

쓰쓰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끝내고는 발길을 돌리려 했다. 겨우 해방되었다는 안도와 동시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남아 있었다.

“저, 저기, 아사카 선배의 유서는…….”

쓰쓰미가 신발장에서 나온 유서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 이거? 선생님께 보여줘야지. 걘 선생님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런 건 내가 허락할 수 없어. 걔가 싫어하는 건 전부 할 거거든.”

근성이 배배 꼬였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어이가 없어 하는 사이에 쓰쓰미는 소리 높여 웃으면서 멀어져갔다.

“유리코 님, 이라고? 저런 사람이 학교의 암묵적 일인자인 거야?” 미즈키가 비꼬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날 하굣길. 학교 전체가 수업과 동아리 활동을 쉬게 된 덕분에 나와 미즈키는 이른 시각에 자전거를 밀며 나란히 걸었다. 이렇게 걸으면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돌아갈 수 있어서였다. 석양이 우리를 비추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 태양은 높은 위치에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번 사건, 유리코 님의 힘으로 일어난 걸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쓰쓰미의 말이 인상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아사카 선배가 쓰쓰미 선배에게 반항했고 그래서 조종당해 뛰어내린 걸까?”

목소리가 떨렸다. 유리코 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옆까지 바싹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유리코 님의 힘이라는 거 어차피 다 망상이야.”

그런데 미즈키는 정면으로 내 생각을 부정했다. 나는 너무 놀랐다.

“하지만 아사카 선배는 실제로 자살하려 했잖아.”

나도 모르게 반론했지만 미즈키는 냉정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입시 스트레스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아사카 선배 개인의 문제이지 쓰쓰미 선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하지만 아사카 선배는 쓰쓰미 선배에게 반항했다고 했어. 이게 우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아니, 우연이야. 어쩌다 일어난 자살 미수를 쓰쓰미 선배가 자신의 상황에 맞춰 해석하고 있을 뿐이지.”

미즈키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쓰쓰미 선배가 말했잖아. 지금까지도 자신의 뜻을 거스른 사람들 모두에게 사고가 나거나 병이 드는 불행한 일을 일어나게 했다고.”

“그것도 쓰쓰미 선배가 자기 사정에 맞춰 해석했을 뿐이야. 사고나 병이 생긴 후에 ‘아, 저 애랑은 사이가 안 좋았지’라고 생각해서 자신의 힘을 믿게 된 거라고. 그렇지 않은 케이스는 전부 제외하고 말이야.”

그런 걸까. 실제로 사고를 당하거나 병이 든 사람이 있었다. 자기 상황에 맞춰 해석했다는 것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미즈키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사회심리학이랑 인지심리학에 확증 바이어스라는 용어가 있어. 이 말은 사람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보만 믿고, 그것에 반하는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의 편중을 나타내는 말이야.”

갑자기 심리학 강의가 시작되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자세를 바로 잡았다.

“예를 들어 어떤 연극을 재미있다고 굳게 믿는다면 재미없다고 말하는 사람의 의견은 잘못되었다고 단정하며 전혀 듣지 않는 것이 확증 바이어스야. 애인이 다정하다는 생각에 깊이 빠지면 아무리 자신이 하찮게 다뤄지고 폭력을 당해도 가끔 보여주는 다정한 모습 한 면만 보고 역시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확증 바이어스에 해당하지.”

“그렇다면 쓰쓰미 선배도 그 확증 바이어스에 사로잡혀 있다는 거야?”

쭈뼛쭈뼛 물어보자 미즈키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유리코 님의 힘을 굳게 믿는 바람에 그 힘이 발휘되었다고 생각되는 사태만을 골라내서 힘을 믿고 있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그런 건 전부 처음부터 무시하는 거지.”

그런 걸까. 이해가 되기 시작했지만 아직 나는 유리코 님의 힘을 부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유리코. 너 자신도 확증 바이어스에 사로잡혀 있어.”

“뭐? 내가?”

나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가 나왔다. 나는 분명히 냉정하게 사실을 꿰뚫어보고 있는데?

“하지만 아사카 선배의 일은 사실이잖아. 그걸 믿는 게 뭐가 이상해?”

“아니, 그게 아니라. 유리코는 반증을 무시하고 있어.”

내가? 언제 그랬다는 거지?

“어떤 반증을 무시했다는 거야?”

미즈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쓰쓰미 선배에게 반항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 내가 지금도 이렇게 쌩쌩한 것이 반증이야.”

앗,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쓰쓰미에게 정면으로 도전한 미즈키는 이렇게 건강하게 내 옆을 걷고 있다.

“하, 하지만, 그건 아직 불행이 찾아오지 않았을 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 아닐까…….”

“유리코가 나를 계속해서 지켜봐. 분명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미즈키가 힘 있는 말투로 단언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유리코 님의 전설을 들은 후부터 계속 불안하고 찜찜했던 기분이 오랜만에 맑아진 것 같았다.

“고마워, 미즈키. 이제 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연스럽게 감사의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미즈키는 내 말을 듣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천만의 말씀. 그렇게 말해줘서 오히려 고마워.”

내 문제를 자신의 일처럼 진지하게 생각해주는 미즈키의 마음이 느껴져 기뻤다.

“그럼 유리코, 역 앞에 있는 가게에서 맛있는 슈크림 사먹자. 거기 슈크림 정말 맛있거든.”

미즈키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화제를 전환하여 내 기분을 밝게 만들어주려는 것이다.

“좋아. 그럼 나는 두 개 사먹어야지.”

내가 자전거에 올라타 달려 나가자 미즈키도 나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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