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에필로그>
그동안 일본에 있었다던 한겸이는 좀 달라진 느낌이었다.
뭔가 커버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지다에게 큰 빚을 졌다는 한겸이는 오랜만에 만난 내게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사람을 찌른 게 처음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자신이 뭘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고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본이었고, 자기 대신 잡혀간 지다의 소식을 들었을 땐 정말 미안해 죽고 싶기까지 했단다.
아직 얼굴을 볼 용기가 안 나 지다에게는 가보지 못했다며 고개를 떨구는 한겸이에게 애초에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그때 네가 손을 쓰지 않았다면 이대영에게 당했을 거라고 말했다.
전혀 네 잘못이 아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내가 자신을 원망할 줄 알았다던 한겸이는 내 말에 몇 번이고 다행이라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
.......
......
시간이 흘러 가지다의 출소 날.
오늘은 천로의 노도수와 운이, 지나, 태산이, 한겸이,나, 그리고 민준수까지 가지다를 맞이하러 가고 있다.
두 손 가득 두부 봉지를 들고.
면허증을 딴지 얼마 안 된 내가 손수 운전대를 잡아 운전하고, 고한겸은 내 옆자리에 앉아 가지다를 보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안절부절해한다.
두부 봉지를 보며 아마 이거 다 먹으려면 가지다 배 터질 거라며 웃는 지나와, 오랜만에 보는 녀석인데 억지로 먹이지 말라는 운이는 곧 결혼을 한다.
늘 보호해줘야 할 동생 같기만 했던 운이가 칼에 찔리고 나서야 자신이 운이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지나는 먼저 프러포즈를 했었다.
지나에게 프러포즈를 받은 운이는 여자가 먼저 프러포즈를 하는 게 어디 있느냐며 자기가 할 거라고 물리라고 했고, 기어이 집에서 촛불 길을 만들어 프러포즈를 했다.
그때 나와 강태산, 민준수, 고한겸은 풍선불기와 촛불로 길 만들기를 도와주며 꽤 고생을 했더랬다.
뭐, 노지나가 워낙 행복해해서 우리까지 기분 좋았긴 하지만.
그리고 난 그날, 가지다가 정말 정말 정말 정말 보고 싶었더랬다.
회귀하기 전의 김운은 늘 노지나를 멀찌감치에서 바라보기만 했었는데 여기서는 드디어 노지나의 남자가 되는구나라고 생각하니, 뭔가 몽글몽글한 마음이 생겨난다.
그러고 보면, 이곳의 천로인들은 모두가 행복한가.
자신이 하는 일을 꽤 즐거워하고 좋아하던 강태산은 아직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경호실장의 자리까지 올라갔고, 노도수는 풍로의 민무영과 화해 아닌 화해를 하고 다시 예전의 술친구가 되었다.
김운은 그렇게나 좋아했던 노지나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한겸이는 노도수를 용서한 자신의 엄마와 함께 가끔씩 노도수와 밥을 먹으며 진짜 가족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가지다를 그렇게 좋아했던 민준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애인이 생겼다.
상대는 자신의 경호를 하던, 물론 남자였다.
전에 한번 지나와 같이 가서 밥을 먹은 적이 있는데 꽤 남자답고 우직한 스타일 같았다.
경호원답게 다나까를 입버릇처럼 쓰던 그는 민준수를 아주 아기 취급해 밥을 먹는 동안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전혀 게이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둘을 앉혀놓고 보니 뭔가 신기하게 어울리는 느낌도 들고.
뭐, 나나 지나는 민준수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쪽이므로 어울리든 안 어울리든 무조건 축하는 해줬겠지만, 어쨌든 꽤 잘 어울렸다.
...
......
..
그리고.
지다가 출소를 했다.
2년 6개월의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좀 더 멋진 남자가 되어버린 내 남자는 묵직한 쇠문이 열리자, 특유의 삐딱한 자세를 하고 멋들어지게 우리 쪽으로 걸어 나온다.
모두 그런 지다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삐딱하게 하며 두 팔을 벌린다.
단박에 지다에게 가서 안겨버린 나는 어째서인지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다녀왔어."
숨 막힐 듯 날 꽉 안으며 나지막하게 말하는 가지다.
그런 녀석을 나 역시 꼭 안으며 말했다.
"고생했어."
어느새 우리 옆으로 온 한겸이는 고개를 숙인 채 지다에게 미안하다고 했고, 지다는 그런 한겸이의 머리를 가볍게 툭 치며 무슨 소리냐고 한다.
열받지만, 넌 내 여자를 구해줬고, 난 그런 널 구한 거니까 이걸로 쌤쌤이라고 장난스럽게 말한 가지다는 나 없는 동안 내 여자한테 찝쩍거리진 않았지?라고 한다.
두부를 내밀며 일단 먹으라고 말하는 노도수와 교도소 앞에서 붙어있는 거 아니라며 가지다에게 안긴 날 보고 떨어지라고 말하는 민준수.
그리고 노도수에게 나 때문에 들어간 거니까 나도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진지하게 뜬금포를 날리는 고한겸.
그리고 그런 둘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짓는 강태산.
어느새 우리는 이렇게 모두 모여 함께 웃는 사이가 되어있다.
이 행복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분명 안 좋은 사건 사고도 생기게 되니까.
특히 위험한 일이 대부분인 천로인들이라면 더욱.
하지만, 아주 사소한 보통 사람들의 문제도 자주 생겨나게 될 거다.
운이와 지나가 사소한 일로 부부싸움을 하거나, 같은 성을 쓰지 않는 노도수와 고한겸에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기분 좋은 갈등이 생겨날 수도 있고, 강태산은 자신보다 유능한 어린 경호원 때문에 자신의 자리에 위기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남자와 연애를 하고 있는 민준수에겐 주위 사람들의 반대가 고비가 될지도 모르고, 나 역시....
이제야 제대로 내 옆에 있게 된 가지다와 사소한 일로 다투고, 화내고, 몇 번이나 헤어짐을 반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불안들은 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는 사랑이 전재된 감정들.
싸우고, 화해하고, 불안해하고, 위기감을 느끼면서 좀 더 단단해지고 튼튼한 울타리가 되는 것이 아닐까.
....
......
....
드디어 지나의 결혼식 날.
새하얀 드레스가 엄청나게 어울리는 지나가 꽤나 긴장을 해 청심원을 사 먹였다.
이렇게 긴장하는 노지나를 보는 건 처음이라 나 역시 같이 긴장이 된다.
오랜만에 만난 윤미와 희정이와 인사를 하고 신부대기실로 데려갔더니, 지나가 정말로 감격을 했다.
친구라는 선이 애매해 청첩장을 안 보냈는데 어떻게 왔냐며 기뻐하는 지나에게 윤미는 어째서 우리가 친구가 아니냐며 우리가 네 청첩장을 다인이에게 받아야겠느냐고 투덜거린다.
미안하다는 지나에게 다인이 결혼식 청첩장은 꼭 네가 달라고 말하는 희정이 때문에 뭔가 꼬물꼬물 거리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결혼...나도 하겠지, 지다와.
아니, 지다는 생각하지 않고 있을지도.
하지만 역시...가지다 말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드레스를 입은 지나를 보니 나 역시 결혼이 하고 싶어진다.
신부 대기실을 나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내 어깨를 잡는 손 때문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여기서 뭐 해?"
"아, 지다야."
"운이 지금 긴장해서 턱이 저절로 떨리고 있어."
피식 웃으며 너 오늘 예쁘다고 지나가듯 말을 덧붙이는 지다를 올려다봤다.
역시 정장 스타일이 진짜 잘 어울리는 타입이다.
우월한 기럭지와 작은 머리 때문에 트레이닝복도 미치게 어울리지만 역시 갑은 지금 이 모습이랄까.
이렇게 잘난 남자가 내 것이라는 것도 꽤 기쁜 일인데, 죽을 때까지 평생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걸 보니 나 정말 가지다가 전부인 듯.
"...왜....?..."
"지다야, 나하고 결혼할...읍...!...."
지다를 빤히 쳐다보다 나도 모르게 나와 결혼할래라고 말하는데,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입을 막는다.
그리곤 귀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눈썹을 마구 꼼톨거리며 소리친다.
"그런 말을 왜 갑자기 지금 이 상황에서 하는 거야?! 그것도 니가! 노지나랑 놀더니 노지나 닮아가냐?!"
"......"
"내가 해, 내가! 프러포즈도 내가 하고 고백도 내가 해! 아- 진짜, 이 집 여자들은 하나같이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한거야?!"
제법 악을 쓰는 내 잘난 남자친구.
나는 내 입을 막고 있는 녀석의 손을 살며시 떼어내며 말했다.
"...결혼해줄 거야...?..."
"....하아- 그러니까 너 성격 급하다니까."
"진짜 해줄 거야?"
"해줄 거야가 아니야, 멍청아."
저러코롬 말한 가지다는 한참을 나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이내 토마토가 울고 갈 만큼 빨개진 귀때기를 한 채, 내게 조심스럽게 말한다.
"전과자 남편....괜찮겠냐?..."
"....."
"다른 건 다 자신있어. 너 정말 행복하게 해줄 자신도, 다른 여잔 쳐다도 안 볼 자신도."
"......."
"세상 누구보다 사랑해줄 자신도 있고, 근데 이 빨간 줄이..."
"사랑해."
녀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녀석의 목을 끌어당겨 저러코롬 말했다.
녀석은 그런 내게 웃어 보이며 "나야말로."라고 말하고는 내 입술에 입을 맞춘다.
언제 나왔는지 내 결혼식장에서 키스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노지나와 우리도 할까라는 김운.
부끄러워하는 그들 사이로 흐뭇하게 미소 짓는 고한겸과 그런 한겸이를 쳐다보며 얼굴이 붉어지는 희정이.
멋진 정장 차림의 강태산을 넋이 나간 얼굴로 보는 윤미와 같이 온 애인에게 우리도 결혼하면 좋겠다는 민준수.
가지고 싶은 사랑, 가질 수 없는 사랑, 가지려고 하는 사랑, 이미 가진 사랑.
저마다 하는 사랑의 방식은 다르지만 우리 모두는 지금 사랑이란 걸 시작하려거나 이미 하고 있다.
그 사랑이 힘들지 않고 무난하게, 행복한 결실을 맺었으면 좋겠다.
회귀까지 해서 드디어 손에 넣은 가질 수 없었던 남자를 드디어 가지게 된 나 역시.
.....
.......
....
가지다.
마침.
============================ 작품 후기 ============================
이렇게 가지다가 끝이 났습니다.
원래는 다인을 대신해 죽는 고한겸과, 그를 그리며 가지다와 이다인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한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모두 행복해지는 결말이 되었습니다.(제법 어정쩡한 결말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뭐, 이쪽도 나름 흐뭇해져서 좋네요*=_=*그럼, 그동안 읽어주신 모든 분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늘 행복하시고 즐거운 일만 가득하시길.
+다른 글로도 다시 만나주시면 정말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