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가지다와 고한겸>
우리가 있는 곳이 민준수가 지내고 있는 건물의 지하라는 건 한겸이에게 약 상자를 던져줬다던 키가 작은 무섭게 생긴 아저씨 때문에 알게 되었다.
물과 먹을 것을 챙겨온 아저씨는 나를 보고 괜찮으냐고 물었다.
애초에 이렇게 만든 쪽에서 묻는 건 웃겨 대답하지 않았다.
응급처치는 했지만 이렇게 놔두면 안 된다는 한겸이의 말에,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일찍 의사가 올 거라고 말한 아저씨는 한겸이를 보며 도련님이 찾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잡혀온 상황이라도 한겸이와 같이 있어 덜 무서웠던 나는, 민준수가 한겸이를 부른다는 아저씨의 말에 단박에 안된다고 소리쳤다.
혼자 두지 말라는 내 말에 아저씨는 아가씨에겐 지금 천로보다 이곳이 더 안전할 거라고 걱정 말라고 말한다.
한겸이는 이렇게 갇혀 있을 수만은 없으니 민준수를 만나고 오겠다고 했고, 아저씨와 함께 나가며 금방 돌아오겠다고 한다.
한겸이와 아저씨가 나간 후, 창문도 없는 답답한 방에 혼자 남겨져 멍하니 앉아있길 몇 분.
급자기 지다가 보고 싶어지면서 코 끝이 찡해진다.
딱히 참기 힘들 정도로 무서운 것도 아니고, 불안하거나 초조한 것도 아닌데 지다를 생각하자마자 손끝이 아릴 정도로 슬퍼온다.
날 찾고 있을까.
걱정하겠지.
무리해서 날 찾느라 애꿎은 사람들을 족치고 있을지도 몰라.
보고 싶네....
보고 싶다.
울지 않으려고 꽤 노력했는데, 이미 눈물이 고여버려 시야가 흐릿해졌다.
빨리 온다던 한겸이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냐는 생각을 하는데, 철컥-하고 문이 열린다.
고개를 들어 한겸아-하고 부르려고 입을 여는 순간, 내 머리의 피가 모두 말라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이대영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놈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는데 놈이 왼손을 뻗어 내 입을 막는다.
"드디어 잡았다, 요 쥐새끼 같은 년."
여기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하고 천로만 새빠지게 뒤졌다면서, 날 찾으려고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을 들였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알 턱이 있을 리가 없는 나는, 녀석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녀석에게 강하게 입을 막혀버려 애써 참았던 눈물이 수도꼭지를 튼 것마냥 흘러나왔다.
놈의 붕대에 감긴 오른쪽 잘린 팔이 공포를 더해주고 있다.
아마도 이 자식은 자신의 팔을 이렇게 만든 내게 복수라도 할 모양인데, 천로보다 이곳이 더 안전하다고 했던 아저씨가 급자기 생각나면서 그 아저씨를 따라간 한겸이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역시 한겸이보단 날 걱정하는 게 먼저인 것 같다.
다짜고짜 날 바닥에 눕혀 내 위에 올라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으로 바지 지퍼를 내리는 놈을 보니.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다가 녀석에게 직방으로 얼굴을 맞았고, 갑작스러운 충격에 머리가 바닥에 부딪혔다.
안 그래도 터져있던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면서 몇 배의 고통을 가져왔고, 마음과는 달리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 바지를 내린 팔병신 놈은 더러운 웃음을 흘리며 내 바지를 벗기고, 희미해지는 정신으로 가지다를 부르는 그때.
푸욱-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팔병신 놈이 내 옆으로 고꾸라졌다.
흐릿해져가는 시야 속에 보이는 한겸이는 얼마나 빨리 뛰어온 건지 숨을 헐떡거리며 놀란 눈으로 이대영을 보고 있다.
자신이 찌른 이대영의 등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피를 보고 욱- 하며 토하려고 하는 그 순간.
"이다인!"
날 부르는 목소리만으로도 내 심장을 몽글거리게 만드는 지다가 등장했다.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벙쪄 있는 한겸이를 같이 온 사람에게 빨리 데리고 나가라고 말한 지다는 나를 안아들고는 고개를 돌려 구급차 부르라고 소리친다.
이대영부터 수습해야 한다는 민준수의 목소리와 이다인 죽는다고 욕을 하며 빨리 구급차부터 부르라고 소리치는 가지다.
이 난리 북새통인 공간에서 그저 가지다의 품에 안겨 있다는 이유로 편안한 잠에 빠져들고 마는 나.
....
.......
...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다.
어째서인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민준수가 삼일을 꼬박 의식이 없었다며 이젠 정신이 좀 드냐고 물었다.
나와 한겸이를 납치한 건 민준수의 짓이었다고 한다.
솔직히 납치라고 하기에는 뭣 한 게, 민준수는 그저 "내일 퇴원한다고 하니까 오늘 꼭 잡아와야 돼."라고만 했는데 멍청한 아래 놈들이 한겸이까지 같이 잡아온 거란다.
내 머리를 깨놓은 것도 그 멍청한 아래 놈들의 독단적인 행동이란다.
그 부분에 대해선 제대로 처리했으니 억울해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런 민준수를 빤히 쳐다보자, 해맑은 얼굴로 그렇다고 똑같이 머리를 깨놓은 건 아니니 그런 얼굴 하지 말란다.
이 새끼가 지금 날 놀리는 건지, 위로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민준수는 그저 나를 인질 어디쯤으로 세워 이 난리 굿판인 천로와 풍로의 사이를 예전처럼 돌려놓을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이대영 때문에 망쳤다고 했다.
인질 어디쯤이란 발언에 뭔가 욱하긴 했지만, 일단 입을 열 힘도 없어 그냥 넘어갔다.
수금 문제 때문에 왔던 이대영에게 내가 이곳에 있다는 귀띔을 해준 멍청한 아래 놈은 자체 처리했다고 말한 민준수는 머리의 상처가 깊은 건 아니니, 그 멍청한 표정 좀 어떻게 하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눈을 뜨자마자, 병원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사람에게 속사포처럼 지금까지의 일을 이야기하는 네놈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반사적으로 멍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잖아.
"..한겸이는....?..."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짜내어 물었다.
민준수는 이대영이 죽었다고 말한다.
죽었다는 말에 잠깐 흠칫 하긴 했지만, 그 자식이 내게 하려던 짓을 생각하면 인과응보다.
것보다, 난 고한겸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고.
그런데....
날 구하려고 이대영을 찌른 고한겸은 이대영의 죽음으로 인해 당분간 한국을 떠나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린 거다.
내 얼굴이 표나게 굳어졌는지, 민준수는 날 보며 이 바닥이 원래 찌르고 쏘고 밟아도 별문제 없는 곳인데, 죽어버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고 말한다.
그래도 한겸이는 같이 엮이지 않게 당분간 먼 곳에 있게 하라는 가지다의 말을 실행에 옮긴 것뿐이라고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한다.
정말로 억울한 건 가지다라는 말도 덧붙인다.
그러고 보니, 지다가 날 안아든 것까진 기억이 난다.
엄청나게 빠르게 뛰는 가지다의 심장소리에 뭔지 모를 안심도 했었다.
그런데.....억울하다고...? 지다가?
...어째서...?....
"지다는 지금 어디에 있는데?"
내 말에 곤란한 표정을 한 민준수는 한참을 뭔가를 생각하더니, 지다도 당분간 만날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어째서...?....지금 어디에 있는데...혹시 한겸이랑 같이..."
내 말에 민준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내 머리가 다 나을때까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너만 모르고 있으면 가지다가 너무 불쌍하니까 말해야겠다며 내가 의식을 잃고 있던 동안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대영을 찌른 고한겸은 자신이 사람을 찔렀다는 쇼크로 정신이 나간 상태가 되었고, 뒤따라 들어온 가지다는 피가 흐르는 내 머리통에 이성을 잃고 구급차를 부르게 했다.
조금 조용히만 처리했었어도 실종으로 묻을 수 있는 일인데 가지다 때문에 일이 커졌고, 뒤늦게 사실을 접하고 온 노도수는 자신에게 고한겸을 당분간 숨기라고 말하는 가지다의 의미를 단박에 알아차리고 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했다.
"내 여자 지키려고 죽였어. 영감 아들 보호하려는 게 아니야. 내가 할 일을 영감 아들이 먼저 해준 건 고맙지만, 기분 더러운 것도 사실이니까."
...
......
....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지다와 한겸이 둘 다 볼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지다를 찾아가려 했지만 운이와 민준수가 말렸다.
지나 역시 조금만 더 참아보라고 했다.
지금 내가 가면 상황만 불리해진다며, 날 구하려다 우발적으로 찌른 것에 정상참작을 요청하며 형량을 낮추는 중이라 나는 아직 회복이 안된 채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담당 변호사가 말했다며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보자고 했다.
한겸이는....
고한겸은 그 사건 이후로 전혀 얼굴을 보지 못 했다.
이대영의 일이 있던 시간, 고한겸을 아예 한국에 없던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노도수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고맙다는 말도 못 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못 했다.
당분간이 얼마인지 알지 못한 채, 한겸이는 사라졌다.
....
......
....
그리고 긴 시간이 흘러 나는 퇴원과 함께 천로로 돌아왔다.
이대영 사건으로 천로에 자주 들이닥치던 경찰들 때문에 당분간 문을 닫은 카지노는 어느새 대한 금융회사로 바뀌어있었고, 호텔 역시 사원 숙소로 둔갑해있었다.
정말 여우처럼 빠른 천로의 대처에 새삼 놀랐다.
지다는...
나를 겁탈하고 때린 이대영에게서 날 보호하기 위해 우발적으로 살해한 걸 참작해 2년 6개월이라는 짧은 형량을 받아냈다.
죽은 피해자가 살인미수와 강간죄임을 감안하고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같은 일을 했을 거라며 입을 모으는 배심원들의 영향이 컸다.
거의 한 달 가까이 못 만났던 가지다를 만나러 교도소에 갔다.
죄수복을 입은 가지다는 어딘가 모르게 초췌해 보였지만 여전히 잘생긴 얼굴 그대로였다.
괜찮으냐고 묻는 내게 너야말로 괜찮으냐고 묻는다.
참으려고 하는데도 수도꼭지처럼 흘러나오는 눈물이 감당이 되지 않는다.
지다는 우는 내게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
"군대에 간 거라 생각해, 울지 말고....보고 싶으면 언제든 면회 와서 보면 되니까 군대보단 나은 거 아니냐?...아- 그렇다고 너무 자주 오지는 마. 여자가 이런데 들락거리면 야코 죽어서 안 돼."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으니 자신이 없는 2년 6개월 동안 다른 새끼한테 눈 돌리지 말고 노지나랑만 놀고 있으란다.
그러다가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녀석은 이내 조금 힘빠진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한다.
정말 참기 힘들고 외로워지면 그땐 다른 새끼 만나도 용서해주겠단다.
대신, 의사나 선생 같은 직업 죽여주고 성격 더럽게 좋은 놈을 만나란다.
울먹이며 너 말고 아무도 안 만난다고 그런 말하지 말라고 했더니, 애써 씽긋 웃으며 감방에 가 있는 남자친구는 원래 기다리는 게 아니라더라...란다.
애초에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고, 사실은 한겸이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희생한 거면서, 형을 살고 있는 동안에도 내 걱정만 한 모양이다.
교도소에 있는 남자친구건, 전과가 있는 남자친구건, 내 남자친구는 가지다라고 말했다.
회귀까지 해서 드디어 손에 얻은 널, 다시는 잃고 싶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어떤 이유에서건.
애써 웃고만 있던 지다는 기어이 눈물을 터트리고, 녀석의 눈물에 내 눈물 역시 가속된다.
그렇게 우린 마주 보고 울기만 했다.
어떤 날엔 운이와 지나와 셋이서.
또 어떤 날엔 태산이와.
그리고 또 어떤 날엔 민준수를 데리고.
제집 드나들듯 일주일에 몇 번이나 면회를 갔다.
면허증이 없는 내가 혼자는 갈수 없어, 면허증을 딸 때까지 녀석들의 차를 얻어탔고, 기어이 면허증을 딴 후엔 혼자서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좀 적당히 오라고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사실은 내가 오는 걸 목 빠지게 기다리는 가지다인걸 알기에 웃으면서 알았다고 말했다.
어느덧 친해져버린 교도소 경찰들과 담소도 나누고, 안에서 할게 없어 운동만 한다며 몸이 점점 좋아지는 가지다의 모습에 눈 정화도 해가며 그렇게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
가지다가 출소하기 4개월정도가 남은 어느 날.
고한겸이 돌아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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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예유님, 소리숲님.
죽이려던 아이를 살려버리게 만드는 코멘은 글쟁이를 힘들게 만듭니다 ㅠ_ㅠ...
님들 덕분에 지다를 전과자로 만들어버린 전....흑 ㅠ_ㅠ...
뭐, 쨌든.
모두가 해피해졌으면 좋겠다..라거나, 한겸이 지켜주세요ㅠㅠㅠ라는 코멘을 보는 건 글쓰는 입장에서도 역시 행복하니까요.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되시고 행복하시길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