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천로와 풍로, 싸움의 시작>
눈을 떴을 땐, 낯익은 천장이었다.
내 방 침대 옆에서 걱정스러운 듯 날 쳐다보고 있는 지나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왼쪽 팔의 찌르는 듯한 통증에 눈썹을 찡그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의사가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어."
아마도 난, 이대영의 칼에 팔을 찔리고 쇼크로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내가 쓰러지자 검은 정장 중 한 명이 놀라서 강태산에게 연락을 했고, 우연히 호텔 쪽에 머물고 있던 안면 있는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한겸이가 태산이에게서 내 얘길 듣고 그 의사에게 부탁해 날 치료했단다.
이대영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더니 너는 그 새끼 신경 쓰지 말라며 나지막하게 욕을 뱉는다.
"그 개자식, 풍로가 뒤 봐주고부터 겁대가리를 상실했어."
가지다가 알아서 하니까 넌 그 자식 생각도 말라고 말한 지나가, 가지다가 그렇게 화난 건 처음 봤다며 말을 이었다.
이대영이 날 찌른 이야길 듣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와 내 팔을 치료 중인 의사에게 이거 죽으면 너도 죽는다고 으름장을 놓았단다.
놀러 왔다가 졸지에 날 치료해준 불쌍한 의사 선생님은 다인이 팔 빨리 붙여내라며 징징거리는 고한겸과, 내가 언제 눈을 뜨는 거냐며 이거 설마 죽은 거 아니냐고 새빠지게 물어대는 가지다 때문에 내 팔을 다 치료하고 나서 사례비도 받지 않고 줄행랑을 쳤단다.
안 봐도 비디오다, 둘 다.
그런데 뭣 때문에 이대영의 중심부를 발로 찼냐고 묻는가.
검은 정장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놀랬다는 말도 덧붙인다.
"너도 이대영 알고 있었어? 쉬쉬하고는 있었지만 그 자식, 우리 학교 여자애들 데리고 장사한 것 때문에 예전부터 운이와 지다가 벼르고 있었거든. 계속 눈에 가시였는데 무영 아저씨가 그 자식 뒤를 봐주니까 어쩔 수 없이 참고 있었어."
이대영이 고등학생 여자애들을 꾀어 술집에 다니게 만들었다는 말을 지나에게 듣고 좀 더 세게 차 줄 걸 하고 후회했다.
하여간 그런 새끼들에겐 숨 쉬는 공기도 아깝다.
도대체 민무영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놈 뒤를 봐주는 걸까.
아빠가 그 모양이니 아들이 게이....아니, 이건 너무 갔다.
"그랬는데 니가 먼저 이대영 깠다고 하길래, 너도 이대영이 한 짓 알고 있었나 해서. 학교 다닐 때 공공연하기 소문이 돌긴 했지만 이대영 얼굴을 직접 본 애들은 없었거든."
"아...그건 아니고..."
어째서인지 꽤나 잠겨버려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이대영이 내게 했던 일들을 얘기했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이대영에게 맞아 터졌던 곳이 쓰라려 저절로 눈이 찡그려졌다.
아깝다고 했던 일이나, 명함을 주며 연락하라고 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내가 먼저 열받아서 명함을 내민 손을 치긴 했다고 말했다.
내 이야길 말없이 들은 노지나는 내 말이 끝나자, 그 변태 호로 새끼라는 말을 뱉으며 무서운 얼굴을 했다.
애들이 이미 반쯤 죽여놨을 거라고 걱정 말라는 지나의 말에 민무영이 뒤를 봐주는 사람인데 그래도 되냐고 물었다.
노지나는 내 말에 "그게 대수냐, 우리 아빠도 이번 일은 열받았어."라고 말한다.
그리곤 뭔가를 더 말하려다 입을 닫고 좀 곤한한 표정이 된다.
내가 왜 그러냐고 재차 묻자 마지못해 이번 일 때문에 풍로와 안 좋아졌다는 말을 한다.
"너한테 이런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뭐 너도 이미 천로 사람이라면 천로 사람이니까. 민준수랑 같이 살기도 했고....사실 그전부터 좀 아슬아슬하긴 했어. 호텔 쪽 운영을 풍로가 하면서부터..."
지나가 말한 이미 아슬아슬하고 있는 천로와 풍로의 사이는, 호텔이 바닷가 근처의 두 건물이 완공되면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단다.
기본적으로 나쁜 일을 하고는 있지만, 여자의 몸으로 돈을 버는 그런 쪽의 일은 싫어하는 노도수와, 그런 건 상관없이 일단 돈이 되는 쪽이면 무조건 하고 보는 민무영은 호텔의 사용 여부를 가지고 미리부터 삐걱거렸단다.
민무영이 천로 땅의 호텔 지분을 가질 수 있게 된 건 순전히 민준수 때문이었다고 덧붙인 노지나는, 생각해보니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어릴 때부터 우리 천로에 보낸 꿍꿍이가 역시 있었던 거였다고 말한다.
내 생각엔 민준수가 어릴 때부터 가지다를 좋아해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노지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전히 욱신거려오는 팔의 통증 때문에 진통제가 있는지 물어보려고 입을 여는 그때, 요란스럽게 문이 열리며 고한겸이 등장한다.
"다이나- 살아났어?!"
"한겸..."
"살아났다! 우와, 살아났어! 깜짝하고 다시 살아났어! 다행이야! 진짜 진짜 다행이야!"
....애초에 죽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요란스럽게 방방 뛰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놈에게 어지러우니까 뛰지 말라고 말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며 쉴 새없이 지껄이는 한겸이에게 애써 웃어주고 있는데 내 사랑 가지다가 등장했다.
한쪽 눈썹을 멋들어지게 꼼톨거려대며.
눈치 빠른 노지나는 뭐 먹을 거라도 챙겨오자며 고한겸의 팔을 잡아당겨 나갔고, 방문이 닫히자마자 내 이름을 부르는 가지다.
"이다인."
"응."
"나 누군지 알겠냐?"
뜬금없이.
"응?"
"내 이름."
"...가지...아니, 저기. 머리를 다친 건 아니거든, 나?"
"또 회귄가 뭔가 했을까 봐."
"....."
"내가 아는 이다인...맞지? 나 좋아하는 이다인...나랑 잔 이다인."
나랑 잔 이다인은 빼.
"맞아. 일단은 말이지."
"일단은 뭐야."
"당연한 거니까....회귀라는 게 그렇게 쉽게 될 리도 없고, 애초에 난 죽지 않았다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머리통을 자신의 배 안으로 폭삭 넣어버린다.
표정과 말투와는 달리 온몸이 떨리고 있는 게 느껴지는 걸 보니 이 녀석, 꽤 많이 걱정한 모양.
"....나 괜찮아."
"...입술 터졌다."
"참을만해."
"팔도 찢어졌고."
"그것도 괜찮아...찢어졌다는 표현은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걱정했어."
"...알아. 나 치료해준 의사한테 나 죽으면 너도 죽인다고 난리 부렸다며?"
"...누가 그래? 난 의사한테 난리 안 부려. 의사는....고마운 거니까."
들릴 듯 말 듯, 너도 이렇게 살려줬으니까란 말을 덧붙인다.
그러니까 난 죽은 기억이 없는데 이 새끼들은 날 자꾸 죽었다 살아난 사람으로 만든다.
"...이대영은 어떻게 됐어?"
"죽일 거야."
가지다의 말에 녀석의 배에 파묻혀있던 얼굴을 들고 녀석을 봤다.
죽인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녀석이 무섭다.
"죽인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마, 그거 범죄다? 것보다, 우리나라가 법치 국가라는 건 제대로 알고 있는 거야?"
"넌 신경 끄고 그 찢어진 팔이나 빨리 붙여."
"내 팔이 종이냐? 붙이란다고 붙게."
"종이면 좋게? 딱풀로 붙이면 금방 나을 텐데."
진심 진지한 얼굴로 내 다친 팔을 보며 저러코롬 중얼거린다.
어이없는 지다의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더니 녀석이 고개를 숙여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댄다.
터진 입술에 지다의 혀가 닿자 약간 쓰라려 몸을 흠칫했더니 녀석이 단박에 입술을 떼고 눈썹을 마구 꼼톨거리며 말한다.
"씨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얼굴에 손을 댄 거야?! 남은 손도 잘라버리는 건데, 그 새끼."
뽀뽀도 제대로 못하게 입술을 때렸다고 으르렁거리는 지다를 보며 남은 손은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지다는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고는 아파도 조금만 참아보라며 조심스럽게 다시 입술을 비빈다.
아주 나중에 지나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내가 칼에 맞았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달려온 가지다가 내게 급소를 맞아 쉬고 있는 이대영에게 다짜고짜 어느 쪽이냐 물었단다.
이대영이 어이없는 얼굴로 뭐가?라고 묻자, 이다인 찌른 거 어느 쪽 손모가지냐고 물었고, 이대영이 웃으며 오늘 무슨 날이냐며 좃만한 것들이 많이 건드네라고 하자,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칼로 이대영의 왼쪽 손등을 찍었단다.
시린 얼굴로 "말 안 하면 둘 다 날아간다."라는 말을 뱉은 가지다는 한번 더 어느 쪽이냐 물었고, 이내 날 찔렀던 오른손을 잘라버렸단다.
어쨌든 그 일 때문에 가지다는 노도수에게 불려간 모양이고, 화가 난 민무영은 처음엔 가지다의 손목을 원했는데 민준수 때문에 마음을 바꿔 이번 일의 화근인 나를 원했단다.
이대영은 애초부터 풍로의 돈줄이자 간부였으니 천로가 이대영을 손 댄 순간, 그냥은 넘어갈 수 없는 일이 되었고, 이전부터 호텔 문제로 조금씩 감정이 상해 있던 천로와 풍로는 이 사건으로 인해 철저히 등을 돌리게 되었단다.
두 거대 조직의 싸움이 시작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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