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이대영>
뭔가가 자꾸만 머리를 만져대는 느낌에 천천히 눈을 떴더니, 가지다가 엎드린 채 내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다.
분명 너무 아파 힘들어하다가 어찌어찌 절정을 느끼긴 했는데, 곧바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몇 시야..?..."
"새벽이야."
"으음...나 잠들었구나..."
"나도 좀 잤어. 자다 깨서 또 꿈꿨나 했는데 니가 내 옆에 홀딱 벗고 자고 있어서 이번엔 꿈이 아니구나 실감했어."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내 머리카락을 만져대는 가지다를 보고 있자니 또다시 얼굴이 화르륵-타오른다.
"붙어있을 땐 타지 좀 마."
저러코롬 말하며 내 코를 검지로 약하게 튕기듯 때리는 녀석 때문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붙어있을 때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했다.
지다는 그런 내가 귀엽다며 이불째 꼭 안아버린다.
"숨 막혀-"
"스물일곱 살의 이다인보다...어땠나? 좋았나? 스물일곱 살의 나한테 안겼을 때보다 말이야."
갑자기 저러코롬 묻는 지다 때문에 뭔가 당황스러워졌다.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나와 산발이 된 머리를 손으로 정리하며 앉아 지다를 쳐다봤다.
"어째서 아는 거야? 그런 것도 꿈에 나왔어?"
"응, 뭐- 덕분에 한동안 힘들었지."
"...힘들어...?..."
"이 녀석 섰을 땐 빼주지 않으면 곤란하니까."
손을 턱에 괸 채 누워 검지로 자신의 아래를 가리키며 저러코롬 말하는 지다에게 옷 입으라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이 녀석, 왜 벌거벗고 있는 거야?!
아니, 나도 벗은 채인가.
"그래서...어땠냐니까? 그때의 나보다 좋았어?"
"...뭘 그런 걸 묻는 거야..."
"지금의 나는 온전히 네 거니까, 지금의 너도 온전히 내 거고. 그러니까 느낌 자체가 다를 거 아냐."
"......"
"그때의 이다인보다 얼마만큼 더 행복한지 묻고 있는 겁니다, 이다인 양."
어쩌다 보니 계속 꾸게 된 꿈 때문에 자신이 겪지도 않은 내 스물일곱 살 때의 일을 마치 겪은 것처럼 되어버렸다는 가지다는 자신이 지금 이 순간의 가지다라서 좋단다, 내가 지금 이 순간의 나라서 좋단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는 것과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며 그것도 나름 신선하고 기분 묘하단다.
그거야, 당사자인 나도 처음 회귀라는 걸 했을 때는 세상에 무슨 이런 일이 있나 했었으니까.
더구나 네가 온전히 내 회귀에 대해 이렇게 믿어줄지도 몰랐고 말이지.
어쨌든...
그때의 가지다와 지금의 가지다가 동일인인지 아닌지 마음 한구석으로 계속 헷갈려 하던 나는 "뭐, 지금 이 순간 보고 있는 건 지금의 나와 지금의 너니까 그걸로 됐잖아?"하고 웃는 지다 때문에 뭔가 심장 한쪽에 있던 묵직했던 덩어리가 녹아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때의 지다도 지다, 지금의 지다도 지다.
그리고, 그때의 나도 나, 지금의 나도 나.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소중하게 지키면 되는 거다.
그래, 그걸로 돼.
....
.......
...
처음의 인생이 순탄하지 않았다고 두 번째의 인생 역시 순탄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노도수의 여자도 되지 않았고, 가지다도 온전히 내 남자가 되었다.
고한겸에겐 아직도 약간의 미안한 느낌이 있지만, 결과적으론 한겸이가 희정이랑 자버려 헤어진 거니 그것도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다.
회귀하기 전, 날 납치해 내게 이상한 약까지 먹이며 무섭게 굴었던 민준수 역시, 짓궂게 툭툭 던지는 말 빼고는 괜찮다.
그런데.
하루 종일 카지노 일로 바쁜 지다에게 요리학원에서 만든 케이크을 주기 위해 터덜터덜 바닷가 쪽으로 걸어내려가는 지금.
기억 속에서 잊고 있었던 한 남자와 마주쳐버린 난, 케이크를 땅에 떨어뜨릴 만큼 동요하고 있다.
이대영.
그래, 분명 이대영이다.
이대영은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두 명과 무언가 심각한 얘기를 나누다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눈이 마주치자 날 겁탈하려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몸이 흠칫 거렸다.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를 보자 목 인사를 하는 걸 보니 저들은 천로인들인 모양이다.
어이 어이 어이.
근데 쟤, 왜 이리로 오는 거야?!
너무 당황한 탓에 다리가 땅에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는 느낌은 정말로 등줄기에 땀이 흐를 정도로 싫은 느낌이다.
"이 예쁜 아가씨도 천로 사람인가?"
"....."
분명 무표정한 얼굴일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서 날 보며 저렇게 묻는 이대영의 눈을 피했다.
이대영의 옆에 있던 검은 정장이 내대신 이대영에게 고한겸의 여자친구라고 말했다.
어이 어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냐.
하지만 아니라고 하고 싶지도 않고....나는 그냥 이 사람이 싫을 뿐.
나를 겁탈하려던 사람이다.
그때의 노지나의 명령을 받아...그러고 보니 그때의 노지나는 상당히 모가 나 있는 여자였군.
지금의 노지나는 사실은 꽤 착한 타입의 여자인데 말이지.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내 맘과는 달리 코앞께까지 와 나를 빤히 쳐다보는 이대영은 뭐가 그렇게 아까운지 자꾸 아깝다는 소리만 뱉어낸다.
그런 이대영의 말에 검은 정장이 이 아이는 그런 곳과 어울리는 아이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고....그제야 아깝다는 의미를 알았다.
내 얼굴이 유흥업소에서 잘 먹히는 얼굴이라 여기 있기에 아깝다는 말이란걸.
"하- 이것도 참 순진한 새끼네. 새끼야, 처음부터 그쪽이 어디 있어? 발 들이면 그쪽인 거지. 하기야, 더러운 일도 가리면서 하는 우리 노도수 회장님은 내 사업까지 손을 뻗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니. 뭐, 그래서 내가 천로를 좋아하긴 해."
저렇게 말하며 날 보고 씩- 웃는 이대영의 모습에 소름 끼칠 정도로 오싹해졌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내게 내밀며 일자리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이대영의 모습에 오싹함은 분노로 바뀌었고, 생각이란 걸 하기 전에 손이 먼저 나갔다.
"찌질한 새끼."
중얼거리듯 뱉은 말 역시, 머리보다 먼저 움직인 입 탓이었다.
"이, 썅년이-!"
명함을 내민 이대영의 손을 치며 찌질한 새끼라고 말해 이대영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고, 검은 정장이 말리기도 전에 내 뺨을 갈겼다.
꼴에 남자라고,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질 만큼의 충격이 내 뺨을 타고 전해져왔다.
바닥에 넘어져 있는 내게 듣도 보도 못한 쌍욕을 하며 자신의 팔을 잡고 말리는 검은 정장에게 놓으라고 소리치는 이대영.
"이 썅년이 내가 누군 줄 알고! 네년이 몸 대주는 놈이 천로 아들이라고 지금 날 까?! 이 썅년, 암만 콧대 세워봐야 그 자식은 서자 새끼라고, 알아?!"
"이사장님!"
"놔봐 새끼들아, 금방 못 봤어?! 저 년이 먼저 날 쳤다고, 날 쳤다니까?!"
퉤.
입안에 비릿한 느낌이 들어 침을 뱉어냈더니 피가 묻어 나왔다.
아놔, 간만에 열받네.
그러고 보니 회귀하기 전에도 때렸어, 저 새끼.
아무튼 아무렇지 않기 여자 때리는 새끼들은 다 죽여버려야 돼.
천천히 몸을 일으켜 검은 정장 둘에 의해 팔 양쪽이 잡혀 악을 쓰는 이대영에게 가까이 갔다.
무서우면서도 열이 받는 이 느낌에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려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두 분, 그거 단단히 붙들고 계세요."
검은 정장 둘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저러코롬 말하고 오른쪽 다리에 모든 힘을 실어 더러운 욕을 아직도 지껄이고 있는 이대영의 중심부를 힘껏 차버렸다.
남자의 거기가 급소라는 건 알고 있었고, 제발 이 기회에 남자구실 못하게 돼버리길 바라는 복수 심리도 있어서였다.
내가 급소를 맞아 꼬꾸라진 이대영은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며 날 죽이겠다고 일어서다가 다시 아픔 때문에 주저앉는다.
내 힘이 조금만 더 셌다면 일어서지도 못하게 했을 건데 아쉽다.
이대영에게 맞아 터진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몸을 돌려 땅에 떨어진 케이크를 잡으려는데 갑자기 검은 정장의 당황한 외침이 들렸다.
몸을 돌리자, 내 왼쪽 팔에 찌르는 고통이 느껴졌다.
보통 이런 쪽의 인간들은 휴대폰처럼 가지고 다니는 건지, 검은 정장에 의해 제압된 이대영의 손엔 피가 묻은 칼이 쥐어져 있었고, 저 검은 정장이 아니었다면 뒤에서 심장을 찔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다인씨!"
"아가씨!"
검은 정장의 외침이 들리고, 순간 뭔가 어질한 느낌과 함께 눈앞이 깜깜해져버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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