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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다 원하다-44화 (44/51)

44화

딱 잘라서 헤어지잔 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펑펑 우는 한겸이를 빤히 쳐다보다 미안하다는 말만 두어 번 더 한 것 같다.

한참 후, 울음을 그친 한겸이는 "내가 더 미안.... 울리고 싶지 않았는데...울려서....미안합니다."라고 말하고는 방을 나갔다.

그게....녀석을 본 마지막이었다.

....

......

.....

고한겸이 사라진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감기로 알아누웠고, 옆에서 지나가 잠도 안 자고 간호를 해준 탓에 3일째 되던 날, 깨끗이 나았다.

어째서인지 나만 보면 딴죽을 걸던 민준수도 내가 아플 땐 죽도 끓여주고 약도 먹여주며 자상한 친구 흉내를 냈다.

일주일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는 한겸이는 남자애들과 통화는 하는 걸로 봐서 아무 일 없이 잘 있기는 한 모양인데, 노도수가 알기 전에 빨리 천로로 데려와야 하는데 말을 안 들어 먹는다고 걱정하는 태산이 때문에 괜히 내가 미안해졌다.

역시나 노도수의 귀에 들어가면, 재수 없으면 7명 모두 불똥이 튀어 다시는 외출을 못하게 될지도 모를 상황이 생길 것 같아 내 쪽에서 한겸이를 설득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한겸이가 있는 곳을 물었는데 운이와 태산이는 대답을 회피하는 눈치고 지다는 궁금해하지 말란다.

나 때문에 사라진 거니까 내가 책임지고 데려오겠다고 했더니, 지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헤어졌으면 더 이상 상관하지 말란다.

그 말에 뭔가 또 욱해버려 녀석과 말싸움을 했다.

"상관하지 말라는 말, 너야말로 할 이유 없어. 내가 한겸이를 상관하는 건 100% 내 책임이니까고, 한겸이가 일주일이나 집에 안 들어오는 게 노도수 회장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우리 모두에게 불똥이 튀니까 상관하게 되는 건 당연한 거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신경 꺼."

"애초에 내 일인데 왜 내가 신경을 꺼야 해?!"

"그냥 꺼, 병신아!"

"또 병신! 욕하지 말랬지! 뭐야? 진짜! 나는 기껏 용기 내서 한겸이 데리러 간다고 하는데!"

"고한겸, 그 여자 집에 있으니까."

소파에 앉아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던 민준수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저러코롬 말하고,

"민준수!"

가지다가 소리친다.

"어이!"

"야, 준수야..."

운이와 태산이까지 민준수의 입을 막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그렇게 절망적인 얼굴로 울었던 한겸이가 지금 희정이 집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히고, 운이는 내 표정을 살피며 말한다.

"그 녀석도 힘드니까...아마 될 대로 되라 하고 자포자기 한듯해."

뭔가...뜬금없이 풋 하고 웃음이 날 것 같다.

그러다가 이내 화가 머리끝까지 나고, 그러다 이내 울컥하고 눈물이 날것 같다.

배신감 같은 게 들기도 하고, 고한겸에게 실망 같은 게 들기도 한다.

어이없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럴 수도 있구나 싶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어떤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멍하니 서 있는데, 가지다가 내 머리통을 잡아 자신을 보게 만든다.

"이다인."

나를 부르는 지다와 눈을 맞췄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금 내 표정이 심할 정도로 무표정이라는 거.

습관처럼 무슨 일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무표정해졌다.

"눈깔에서 다른 새끼 빼."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저러코롬 말하는 가지다.

다른 새끼...

그것보다 눈깔이라니, 내가 생선도 아니고.

"헤어졌으면 그걸로 끝내. 며칠 앓았으면 그걸로 쫑... 머리에서 고한겸 빼."

"...딱히 내 머리에 고한겸이 있지는..."

"헤어진 거야. 제대로, 깨끗하게. 질질 끌지 마. 내가 들어갈 자리, 좁히지 마."

어이 어이 어이.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화가 난 건 알겠는데.

지금 애들도 다 있고, 무엇보다 노지나와.....널 좋아하는 민준수가 보고 있다고.

".....애들 다 있는데서 입술 비빌 생각이 아니라면... 일단 좀 놔줄래...?...닿겠어."

내 말이 끝나자마자 노지나가 가지다의 뒤통수를 갈기며 내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옆에 오게 만든다.

"아! 죽을래?!"

"야, 지금은 괴롭히지 마. 정리를 하든 다시 붙든, 지지고 볶는 건 고한겸이랑 이다인이야. 다인이가 널 좋아하고, 니가 다인일 좋아해도 넌 아직 삼자야. 그러니까 이 둘 제대로 마무리 지을 때까지 다인이한테 껄떡대지 마."

뭔가, 노지나가 멋있게 보였다.

어디가 껄떡이냐고 악을 쓰는 가지다와 그러거나 말거나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다녀와, 친구. 제대로 마주 보고 제대로 정리해."라고 말하는 지나.

그러니까, 진짜 멋있다고 할까...이 여자.

.....

........

....

윤미에게 희정이의 원룸 위치를 알아내고 무슨 일이냐고 걱정하는 윤미에게 날 잡아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면허증이 없어 천로를 나가려면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타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다가 노크도 없이 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다.

"...노크 좀 해....매너라고."

"죽여서라도 데려올 테니까 가지 마."

내 손에 들린 희정이의 집 주소 쪽지를 보며 저러코롬 말하는 지다.

뭔가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데려오길 원한다면 내가 데려오겠고."

"너 말이야....애초에 내가 한겸이랑 다시 붙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아니, 것보다 죽여서라니. 우리나라가 법치국가라는 걸 제대로 알고는 있니?"

"사라질까 봐 그래!"

갑자기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저러코롬 소리친다.

그러니까...사라져? 누가?...내가...?...

"일주일 참아줬잖아. 기회라면 기회인데도 들이대지 않고, 건드리지 않고 참았어. 한겸이 자식 때문에 너 힘들어하는 거 보면서, 위로할 마음은 전혀 없으니까 힘들어할 만큼 힘들어하라고 손도 대지 않았어. 솔직히 말하면 이쪽은 잘 됐다는 생각에 참기 힘든 거 꽤 열심히 참았다고. 그런데 다시 찾으러 간다니 내가 눈이 안 돌고 배겨?!"

그러니까...참다니, 뭘...?..

아니 것보다, 내가 한겸이를 데려온다는 게 한겸이랑 다시 붙는다는 말이 아니잖아?!

도대체 어느 대목의 어느 부분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건데?

"두 번이나 뺏기고 싶지 않아. 이제야 보이는데 다시 사라지게 만들고 싶지 않아.....니가 알던 나에게도 뺏길 수 없어.....지금의 나는....딱 그 상태야."

"......"

"다시 고한겸이랑 붙는다고 하면 고한겸은 죽여버리고 넌 팔다리 때서 내 방에 숨겨둘 거야."

"어이 어이 어이."

"....그러니까 진짜로 그런다는 건 아니고."

방금 오싹했다, 나.

"....이대로 있는 건 나나 한겸이에게 안되는 거라 생각해. 지나 말처럼 확실하게 제대로...끝을 내야 한다고 생각해. 그게 설사 누군가에게 잔인한 일이라고 해도. 그래서 가는 거야. 물론, 노도수 회장에게 들켜서 앞으로 밖에 못 나가고 싶지 않은 마음도 크지만."

"......"

"그러니까 넌. 안..심..이라고 할까. 괜찮다고 생각해. 어쩌면 지금의 나는 스물일곱 살의 가지다 보다 스무 살의 가지다를 더 좋아하고 있는 것 같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를, 품 안으로 넣는 가지다.

그러니까 한겸이와 이렇게 되고 단박에 지다와 사귈 생각은 없지만...역시나 앞으로 사귀게 될 사람은 지다밖에는 없다고 할까.

뭘 참은 건진 모르겠지만 녀석도 참았다고 하니까.

"그런고로...좀 태워줄래?"

내 말에 지다는 한참 동안 얼음처럼 굳은 채 있더니 이내 날 제 품에서 떼어내고는 말한다.

"너 진짜 성격 나쁘다."

....

......

.....

지다의 차를 얻어타고 희정이의 원룸 앞에 도착했다.

기다리겠다는 지다에게 내가 너와 같이 온 걸 알면 한겸이기 화낼지도 모를 거라 말했다.

가지다는 큰 반발 없이 천로로 돌아갔고, 녀석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빤히 쳐다보며 서있던 나는 이내 크게 심호흡을 하고 희정이의 집으로 올라갔다.

삐리리- 삐리리-

초인종을 누른 채 기다리길 몇 초.

철컥철컥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있던 문이 참 쉽게도 열린다.

희정이 일 줄 알고 표정관리를 한 채, 문을 연 상대를 올려다봤는데....고한겸이 팬티 바람으로 나를 보고 서있다.

내 등장에 꽤나 놀랐는지 동글 거리던 눈이 꽤 커져서는.

".......안녕."

"...어떻게 왔어?"

일주일 만에 만나는 것치곤 아무렇지 않게 저러코롬 말하고 몸을 돌리는 한겸이.

놀란 얼굴과는 달리 말투는 꽤 차분하다.

들어오라는 뜻인듯해 천천히 현관문으로 발을 들여놓는데 한겸이 혼자 있었던 모양이다.

여태껏 자고 있었는지 한겸이는 침대로 다시 가더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는 몸을 꼬물꼬물 거린다.

"희정이는?"

"...학교."

아, 대학생이니 당연히 학교에 있을 시간인가.

"......"

"......"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는 고한겸과, 앉을 자리도 애매한 작은 원룸에 서서 멀뚱 멀뚱 방을 둘러보는 나.

"....왜 왔어..."

한참만에 이불안에서 들려오는 한겸이의 목소리.

뭔가 골이 난 목소리에 짧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집에 안 올 거야?"

"....가출중이야."

"그러니까 왜 하필 가출을 희정이 집으로 하는 거냐."

뭔가 배가 꼬여 입을 앙다물며 저러코롬 말했다.

한겸이는 여전히 이불안에서 꼬물꼬물 거리며 말한다.

"책임지라며... 사실은 책임을 지고 있는 거야."

뭔가 그 말에 열이 확 받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성큼성큼 걸어가 한겸이의 이불을 획 들추고 소리쳤다.

"책임을 지랬지, 살림을 차리랬냐?! 애초에 그렇게 울고불고 잘못했다고 빌던 주제에 단박에 이 집으로 온건 무슨 경우야?!"

그런데...

이불안에서 소리 없이 울고 있던 모양이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쏘아보며 바락바락 악을 쓴다.

"어쩌라고! 싫어질 때까지 옆에 있어달라는데! 죽어도 여자친구로 할 순 없는데! 왜냐하면 내 여자친구는 이다인이니까! 그런데 희정이는 자꾸 여자친구가 되겠다고 하고! 나보고 어쩌라고! 됐다고 할 때까지 같이 있어주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는데 어쩌라고 나한테!"

...솔직히....

그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희정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고, 한겸이가 한겸이 나름대로 책임을 지려고 했다는 사실도 놀랍다.

"매일매일 보고 싶은데....참느라고 하루가 백날 같은데...어쩌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참는 것 밖에 없는데...어쩌라고."

"......"

"이렇게 찾아오면....이렇게 봐버리면...이젠 참는 것도 못하는데...왜 온 거야? 대체..."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저러코롬 중얼거리는 한겸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일단 주위에 보이는 옷 쪼가리를 한겸이의 어깨에 덮으며 말했다.

"감기 걸려..... 타잔이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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