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뭐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오들오들 떨고 있는 녀석이 가여워 너무 짓궂게 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지금 한말은 농담이었다고 말하고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낮에 몸이 좀 으실대더니 감기가 온 것 같아 빨리 내 방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도 커서였다.
그런데 이 녀석.
이층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내 팔을 잡는다.
그리곤 울먹울먹 잘못했다며 용서를 빌기 시작한다.
"잘못했어. 정말로 취해서 생각이 안 나. 전화기도 왜 꺼져 있는지 모르겠어서. 왜 내가 희정이 집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왜 내가 희정이랑.."
"한겸아, 아파."
"정말 정말 잘못했어. 거짓말해서 잘못했어. 화낼까 봐 그랬어. 다신 안 본다고 할까 봐 그랬어. 이젠 내 여자친구 안 한다고 할까 봐 그랬어. 집에 오는 내내 걱정했어. 정말로 정말로 무서웠어."
"아파, 한겸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새빠지게 잘못했다는 소리만 하는데, 다 큰 남자의 눈물을 보는 건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도 하고, 정말로 희정이와 같이 있었다는 사실에 생각했던 것보다 배신감이 들기도 하면서 머리가 지끈거려오기 시작한다.
감기 기운이 더 심해질 것 같다.
녀석이 꽉 잡고 있는 손목도 아프다.
"이거 놔."
"화내지 마. 아니, 아니...화내도 되는데...그래도....그런데... 싫어하지 말면 안 돼...?......"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내 손을 놓고는 고개를 숙인 채, 저러코롬 말하는 한겸이.
이 정도인 걸 보니 분명 희정이와 무슨 일이 있긴 했겠다 싶어 녀석에게 물었다.
"잤어?"
내 물음에 녀석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린다.
그걸 놓칠 리 없는 난 다시 물었다.
"희정이랑 잤어? 그냥 자는 잠 말고, 남자 여자가 자는 잠...거짓말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줘."
한겸이는 한참을 고개를 숙인 채 훌쩍이기만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끄덕.
아주 천천히 끄덕끄덕.
그 모습에 심장 밑바닥에서 불이 올라왔다.
나 아무래도 한겸이를 생각보다 많이 좋아한 모양이야, 이렇게나 배신감이 드는 걸 보니.
몸을 빠르게 돌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한겸이가 또 나를 잡는다.
"놔!"
"잘못했어!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 정말로 잘못했어요!"
놓으라고 발광을 하는 나와, 그런 나를 품에 안으며 잘못했다는 말만 새빠지게 하는 한겸이.
어째서인지 내 눈에 눈물이 고이고, 용서해달라는 한겸이의 목소리가 그 눈물에 점점 가속을 붙인다.
나를 안고 우는 한겸이와 한겸이에게 안겨 우는 나.
왜 우는 건지, 뭐가 이렇게 슬픈 건지 모른 채,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희한하다.
한겸이를 그렇게 좋아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녀석이 희정이와 잤다는 걸 사실로 대면하자, 심한 배신감에 휩싸여버렸다.
자신도 한겸이 몰래 지다와 키스를 해놓고, 한겸이가 다른 여자와 잠을 잤다는 사실에 미친 듯이 화가 난다.
상상으로 잤을지도 모른다와 사실로 잤다라는 느낌은 그 차이가 굉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
....
둘이서 부둥켜앉고 꽤 많이 울고 난 후, 내 방으로 들어와 나는 화장대 의자에 한겸이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말없이 있었다.
한껏 울고 났더니 조금 이성적이 된 나는 머릿속으로 희정이와 그런 사이가 되어버린 한겸이와는 더 이상 사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고, 한겸이는 사실은 정말로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을 해댔다.
"눈을 떠보니까 옆에 있었어. 호프집에서 술 마시고 희정이 집에 가서 와인 두 잔 마신 게 다였는데."
"애초에 집에는 왜 거길 간 거야? 상식적으로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아무렇지 않게 가는 거 이해 안가."
"애, 앨범 때문이야! 정말이야! 나 보이스카우트 때 사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정말로 정말로 너한테 보여주고 싶어서...난 그냥...너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어쨌든, 결과는 이렇게 됐잖아."
"....."
그리고 조금 길다 싶은 침묵이 흘렀다.
점점 추워지기도 하고,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져버려 일단은 이 상황을 정리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어쩔 생각이야?"
"어...쩌다니...?...나는.."
"잤다며. 잠까지 잤는데 나 몰라라 할 참은 아니지? 희정이도 분명 네가 마음에 있었으니까 잔 걸 테고."
"나는!"
"잘못했어, 미안했어. 이런 말보다 말이야...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론 내는 게 먼저 아닐까? 애초에 책임을 져야 할 일은 그 애한테 해놓고, 나한테 이러는 건....물론 내가 네 여자친구였으니까 당연한 거라 생각도 들지만."
"였으니까 아니야! 아직도 여자친구야! 헤어지고 싶지 않아! 내 여자친구는 이다인이야! 바뀔 리가 없어! 바뀔 수가 없는 걸?!"
그러니까, 이 책임감 없는 남자야.
이미 물을 엎질러놓고 모르고 엎은 거야라고 하면 다냔 말이지.
"한겸아."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다신 안그럴게요. 절대로 안그럴게요. 제발 한 번만, 딱 한 번만."
어이 어이.
무릎까지 꿇고 두 손을 모아 비는 녀석을 재빨리 일으켰다.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애초에 지능이 4살 어디쯤에서 멈춘 놈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미안해하며 싹싹 빌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겸아."
"제발 제발 싫어하지 마. 제발 제발 버리지 마. 제발 제발 끝이라고 하지 마요..."
이 아이는... 내가 헤어지자고 할까 봐 그게 무서운 모양이다.
"내가 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 제발 용서해주세요. 제발 화내지 마요. "
"...한겸아."
세상이 무너진 듯 울먹이는 얼굴로 중얼거리는 한겸이의 손을 잡았다.
녀석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앉아 눈물방울이 달려있는 한겸이의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너만 나쁜 거 아니야, 한겸아."
내 말에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한겸이.
"사실은 나....지다가 좋아."
절대로 말할 수 없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녀석의 눈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이 떨어지고,
"....응....?..."
아직 이해를 못한 듯 고개를 갸웃하는 한겸이.
"너보다 먼저 나빴던 건 나였어. 내가 먼저 속였어. 지다가 좋아...사실은...아주 오래전부터 좋아했어."
"....."
"....여태껏 속여서......미안합니다."
"....다이나...?...화...화나서지...?......내가 잘못했으니까..나 벌주려고지..?.......그..렇지?"
울음이 섞여있는 목소리로 나를 보며 저러코롬 말한다.
"미안..."
끅-하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애써 삼키는 한겸이를 보고 심장 한쪽이 아려왔다.
삼키고 삼켜도 자꾸 흘러 나오는 울음 탓에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끅끅거리는 한겸이가 또 가여워졌다.
내가 이 아이를 이렇게 슬퍼하게 만들 자격이 있나라는 생각과, 이미 이 아이가 저지른 책임감 없는 짓에 우리의 관계는 끝이 난 거란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돌아다녔다.
울음을 참느라 애쓰는 한겸이와 그런 한겸이 때문에 저절로 눈물이 흘러버리는 나.
한참 후,
울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한겸이가 말한다.
"그러면....처음부터 난...니 마음속에 없었어...?..."
.....
.......
....
"처음부터...내가 아니었어...?...난....나는...나 혼자만 좋아했어...?..."
또다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방울을 달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저렇게 묻는다.
나는...
그 어떤 말도 뱉어낼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저 멀거니 한겸이를 내려다볼 뿐.
"나...혼자만 사랑해....?...."
나 역시 한겸이를 좋아했다.
그게 사랑이라고 말하긴 뭐 하지만...
그러니까, 가지다를 좋아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한겸이를 좋아한 건 사실이다.
아니, 좋아하고 있으니 희정이와 잔 네게 그렇게나 배신감이 든 거다.
"너 혼자만은 아니었어. 나도 너 좋아했어...남자친구로, 그렇게 좋아했었어. 그런데 널 좋아한 것보다 조금 더...지다가 좋았어...그래서 ...너만 나쁜 거 아니야. 나도 나빠."
내 말에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약하게 잡는다.
차가운 손의 떨림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그러면...그러면은..."
스윽 스윽.
옷소매께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는 한겸이.
그리고는 저 눈물에 젖어 반짝반짝하는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며 애써 환하게...억지웃음을 짓는다.
"그러면 샘쌤이다, 그챠? 나도 미안하고 여자친구도 미안하고... 똑같다, 그챠?"
".....한겸아..?..."
"응. 사실은 내가 훨씬 훨씬 백만 배 잘못했지만, 그래도 미안한 건 마찬가지다, 그챠?"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이러는 걸까란 생각에 한겸이를 쳐다보는데, 녀석이 나와 눈을 맞추며 애써 환하게 웃어 보인다.
정말로...슬프게도 웃는다.
"그럼 전부 없었던 일로 하고.... 내 여자친구 그대로 해주면 안 될까요...."
"....한겸아..."
"여자친구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 안 나오면 안 될까요."
"....."
"나...용서해주면....안될까요..."
"....."
"....같이....나 보이스카우트때 사진도 보고, 여자친구는 모르는 어릴 때 이야기도 하고..."
"....한겸아..."
"왜냐면....왜냐하면....그때가 제일 행복했으니까...맨날 맨날 나랑 다르게 생긴 사람들만 보다가....잠깐 한국에 왔는데 유치원도 다니게 되고...짝꿍도 생기고...얼굴이 다르다고 놀림도 안 받고....1년도 안돼서 다시 호주로 가버렸지만, 그래도 그때의 기억이 가장 행복한 기억이니까....그래서 유치원 때 이야기...같이 하고 싶었어...여자친구한테 말해주고 싶었어."
"......"
"....나....10살 때 다시 한국 왔지만 그때는 아저씨 때문에 엄마가 매일 우울해했으니까...."
"...한겸아...."
"....제발......안될까요...."
"...한겸아."
만약에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사귄다고 해도...난 희정이와 잤던 널 떠올리면서 괴로워지게 될 테고, 너 역시 지다를 볼 때마다 내가 지다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괴로워질 거야.
조금은 담담하게...조금은 미안한 마음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한겸이는....
내 말을 듣는 내내 몇 번이나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던 한겸이는....
그렇게나 참았던 눈물을 기어이 터트려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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