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다 원하다-42화 (42/51)

42화

<한겸이의 외박 사건>

키스 사건 후.

별일 없이 조용한 날들이 이어졌다.

매일 집에서 하는 것 없이 뒹굴던 나는 지나와 함께 요리 학원을 다니게 되었고, 한겸이는 요새 부쩍 윤미와 희정이를 자주 만났다.

한겸이가 내게 몇 번이나 같이 만나자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지나가 싫다고 해, 지나를 두고 한겸이와 애들을 만나러 가기 좀 그래서 거절했다.

윤미를 자주 보고 싶긴 하지만 동성친구에 목이 말라 있는 지나를 우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강태산은 요즘 들어 부쩍 본사에 있는 일이 많아져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고, 김운과 가지다는 완공이 가까워지고 있는 건물의 마무리 작업관리를 맡아 바쁜 나날을 보냈다.

처음엔 아직 어린 녀석들에게 저런 일을 맡긴 노도수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경력 많은 시공관리자를 능숙하게 다루는 운이와 지다를 보고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갔다.

민준수는 녀석 나름대로 천로와 풍로의 유대를 위해 꽤 애쓰는 모양이었고, 요리 학원에 등록하고 왔다는 우리들의 말에 자신도 같이 배우겠다고 했다.

지다는 요즘 아침을 먹을 때밖엔 볼 수가 없는데, 잠깐잠깐 눈이 마주치는 것만 빼면 그 후로 진전이 없다.

그러니까,

꼭 무슨 진전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아침 식사를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내게 들러붙는 한겸이를 봐도 전혀 아무렇지 않아 하는 녀석의 태도가 조금 의아하달까, 신경 쓰인달까.

정말로 내가 꿈을 꾼 건가, 우리가 진짜로 키스를 하긴 한 건가, 저 녀석 사실은 날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술김에 한 키스에 좋아한다고 해버린 건가...라는 생각이 들 만큼 알쏭달쏭 한 요즘이다.

...

......

.....

그리고 어느 날.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나를 찾아왔다.

늦은 토요일 저녁, 윤미와 희정이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며 내게 같이 가자고 유난히 졸라대는 한겸이를 달래 혼자 보내고 지나와 매니큐어를 바르고 놀았다.

남자친구가 저렇게 다른 여자들이랑 노는데 질투도 안 나냐는 지나의 물음에 윤미랑 희정인데 뭐 어때라며 웃어넘겼다.

사실은 전혀 질투 같은 게 생기지 않는다.

그게 또 한겸이에게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로 질투하는 척을 할 수는 없잖은가.

"나 사실은 고등학교 때 지다 좋아했어."

손에 발라준 매니큐어를 입으로 후후 불어대며 지나가 말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첫인상에서의 너는 민준수와 마찬가지로 가지다에게 초콜릿을 줬다는 날 싸하게 쳐다봤으니까.

"...지금은?"

딱히 확인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내 조동아리가 저러코롬 물어버렸다.

아무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잘도 움직이는 녀석이다.

내 몸 중 심장 다음으로 내 말을 안 들어 처먹는달까.

"지금? 글쎄. 좀 시들해졌다고 할까."

"헤에-?"

"그도 그럴게 그 자식은 여자엔 관심이 없어 보인달까, 날 여자로 대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 그럴 리가.

"자꾸 운이 놈이랑 붙여주려고 하는 것 같달까."

그건 맞아라는 말이 단박에 튀어나올뻔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여하튼 좀 시들해. 그 자식은. 차라리 태산이 쪽이 나을지도."

"에엑- 강태산?"

뜬금없이 튀어나온 강태산의 이름에 놀란 눈으로 지나를 쳐다봤더니 아니라며 손을 흔든다.

"내 말은 굳이라면이란 뜻이야. 굳이라면."

"...운이는...별로야?"

"그 녀석이야말로 동생 같은 놈이지."

동생 같은 놈....이라.

이 말 들으면 운이 울 텐데.

"지다 보단 아니지만 그 녀석도 꽤 어릴 때부터 붙어있어서. 그 녀석 보기보다 정말 덜렁대거든, 늘 챙겨줘야 하는 어린애 같달까."

"오호."

"펼쳐놓고 보면 내 이복동생 놈이 제일 어릴 것 같지만."

"하하. 그래도 한겸이 남자다울 때도 있어."

"엑- 전혀 모르겠어."

깔깔거리며 웃는 나와 지나는 이 땐 전혀 알아채지 못 했다.

그 고한겸이 정말로 어떤 쪽으론(?) 대단히 남자다운 놈이란 사실을.

.....

.......

....

다음날 아침.

모처럼의 일요일이라 늦잠을 잤다.

같이 자고 싶다며 내 방에서 잔 지나에게 밤새 이불을 빼앗긴 탓에 몸이 조금 으실으실 해졌다.

1층으로 내려와 물을 마시고 점점 안 좋아지는 몸을 걱정하고 있는데 민준수가 방에서 나오며 나를 보고 말한다.

"여- 네 남자친구 외박했다?"

엑-?!

뜬금없는 외박 얘기에 한겸이 방으로 갔는데 이 녀석 정말로 간밤에 집에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가 녀석의 폰으로 전화를 했더니 무려 전화기가 꺼져있다.

말없이 외박한 게 처음이라 걱정이 좀 되기도 하고 왜 외박을 했는지도 궁금해 윤미에게 연락을 했다.

[뭐? 안 들어왔어?!...실은 어제 난 안 나갔거든. 따로 약속이 있어서....사실은 나 남친생겼어. 너한테 말하려고 했는데....희정이가 소개해줬는데...]

고한겸이 희정이와 어제 둘이서만 만났다는 윤미의 이야기에 알았다고 하고 일단 끊자고 말했다.

너무하다는 윤미에게 남자친구 얘긴 나중에 따로 들어주겠다고 하고 희정이 전화번호를 물었다.

윤미가 가르쳐준 번호로 전화를 하는데,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진 않는다.

꽤 집요한 성격은 아니지만 일단 희정이와 한겸이가 단둘이 만났다는 사실에 조금 열이 받아 있던 나는 새빠지게 전화를 해댔다.

나중엔 신호가 몇 번 가더니 끊긴다.

일부러 안 받는 게 확실해졌다.

하지만 전화를 안 받는다는 것만으로 지금까지 둘이서 있다고 생각할 순 없는 문제라 혹시나싶어 운이를 통해 한겸이의 엄마에게도 전화를 했다.(한겸이가 나 때문에 천로에 오게 되었다고 날 싫어하시기 때문에 내가 직접 할 수는 없었다)역시나 집엔 오지 않았다는 한겸이 어머니의 말에 뭔가 심장이 꼬물거려왔다.

만약 녀석이 지금까지 희정이와 있는 거라면 분명 이건 바람인 건데, 이미 지다와 키스한 내게 한겸이를 족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걱정되냐?"

"걱정보단 화가 나 죽을 얼굴 아니야?"

전자는 멍하니 서있는 날 보고 묻는 가지다, 후자는 민준수되겠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화가 나는 것도 사실이다.

배신감 같은 게 들기도 한다.

하지만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난다거나, 바람피운 년놈들이라고 소리치며 너 죽고 나 살자를 할 마음은 없다.

걱정이야... 사람이라는 게 정말로 혹시 모르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연락이 안 되는 한겸이가 걱정되는 건 당연하고.

"어쩌냐. 네 남친 바람나서."

내 신경을 긁으려는 건지, 내가 한겸이를 제대로 좋아하는지 확인하려는 건지, 멍하니 서있는 내게 민준수가 계속 저러코롬 말하고, 가지다는 그런 준수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넌 좀 닥치라고 한다.

가지다가 자신의 입을 막은 것만으로도 귀까지 빨개진 민준수를 보다 이제야 잠에서 깨 부스스한 얼굴로 내려오는 노지나를 봤다.

지나는 고한겸의 외박 얘기와 어제 희정이와 둘이서만 만났다는 얘기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고,(그 년놈들을 죽이겠다며) 운이는 사실 확인도 안 됐는데 미리 나쁜 놈 만들지 말라며 미간을 찌푸린다.

민준수는 여전히 가지다가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손을 쳐다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고,난.....

나는 뭔가 조금 복잡 미묘하다.

한겸이를 좋아하지 않은 건 아니니 화가 좀 나는 건 사실인데, 그건 말없이 외박해서가 아니라 희정이와 둘이 만나게 된 사실을 내게 말하지 않아서이고....그렇다고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배신감이 드는 건 또 아니다.

만약 정말로 한겸이가 희정이와 뭔 일이 있었다고 생각해도 별로 괜찮을 만큼.

"이다인."

멍하게 서있는 내가 걱정이 되는 모양인 가지다가 나를 부르고, 노지나는 걱정 말라며 솔직히 그 희정인가 현정인가가 제법 한겸이놈에게 꼬리를 치긴 했지만 무슨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한다.

"꼬리를 쳤다고? 이다인 친구가 고한겸한테?!"

지디의 손에서 벗어난 민준수가 저러코롬 지나에게 묻는다.

"그라니까 친구는 영미고, 걘 영미 따라나온 앤데 우연찮게 고한겸 어릴 때 유치원 짝꿍이었나 보더라고. 다인이 취해서 먼저 들어가고 나랑 운이랑 있는데도 어찌나 한겸이놈에게 들이대던지. 그치? 너도 봤지?"

운이의 가슴팍을 팔꿈치로 쿡쿡 치며 말하는 지나.

지나의 이야기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어 조금 놀랐다가, 노지나가 사람 이름을 못 외운다는 사실도 알아버렸다.

내 친구는 영미가 아니고 윤미야, 지나야.

...........

................

.........

일요일 오후.

고한겸의 외박과 확인되지 않은 바람으로 토의 아닌 토의를 벌인 우리들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태산이의 차를 타고 들어온 한겸이를 만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내가 한겸이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녀석이 오자마자 태산이를 데리고 피해줬고, 강태산은 분위기 왜 이러냐며 아이들을 따라 나갔다.

그러니까....

뭔가 부부 같잖아, 이거.

외박한 남편과 화가 난 부인 컨셉이랄까.

"어디서 잤어?"

뭔가 불안한 듯 옷을 만지작거리며 날 힐끔 힐끔 쳐다보며 서있던 한겸이가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에 보일정도로 흠칫 놀란다.

호오- 요것 봐라.

"으, 으응?"

"어디서 잤냐고. 전화는 왜 안 받고."

"태..태산이랑 본사에서.... 어제는 내가 술이 너무 취해서..."

아아- 이 녀석 거짓말이 서툴구나.

말 끝이 점점 기어들어가고 있다.

"어젠 어디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거야? 윤미랑 희정이 만나서 진탕 마신 거야?"

"으, 으응?...응..."

고개를 끄덕이며 내 시선을 피하는 한겸이.

어젠 윤미없이 희정이와 둘이서 만났을 텐데도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는 걸 보니 뭔가 캥기긴 캥기는 모양.

"걱정했잖아. 태산이랑 본사 숙소에서 자면 잔다고 전화를 해줘야 집에 있는 사람들이 걱정을 안 하지. 전화기도 꺼놓고 말이야."

"...미....안....미안...해."

"됐어. 앞으로 안 그러면 되지, 뭐."

"아, 앞으론 안 그래! 절대로 안 그래!"

뭔가 확고하게 소리치는 녀석의 말을 들으며 피곤할 텐데 씻으라고 말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다 갑자기, 조금 괘씸한 마음이 생겨버렸다.

희정이와 둘이 있었다는 사실은 조금만 알아보면 알 수 있는 문제인데, 윤미 입단속도 제대로 시키지 않은 상태이고 말이지.

이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면 당연히 내가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는지... 뭔가, 날 아무렇지 않게 속이는 녀석 때문에 조금 배가 꼬여와 녀석을 불렀다.

"그러니까. 그 앞으로 절대 안 그러겠다는 의미는 희정이와 단둘이 만나지 않겠다는 의미? 아니면 나한테 하고 있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어느 쪽인데?"

요우 요우.

배가 꼬여 저러코롬 짓궂게 물었는데 한겸이의 표정이 가관이다.

새하얗게 질려서는 세상 무너진 얼굴을 하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응?...어느 쪽?"

나는 아마....

악마인 것 같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떨고 있는 한겸이에게 빨리 대답하라는 재촉을 하고 있으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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