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어쩌면 우리는>
어쩌자고 보고 싶다는 말을 해버렸는지, 내가 날 이해할 수 없다.
수화기 너머의 가지다도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니 내 말에 꽤 벙찐 모양.
그러니까 나도 이런 내가 황당하다고.
어색하게 흐르는 정적이 싫어 일단 수습하고 보자 싶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그러니까 내 말은."
[어딘데.]
요우 요우 요우.
가지다의 나지막한 한마디에 심장이 미친 듯이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고한겸 못 만났어? 너한테 간다고 갔는데, 운이랑]
"아, 응. 만났어, 만났는데..."
우연찮게도 한겸이의 유치원 짝꿍 여자가 내 친구 친구라서 같이 옛날 일을 추억하며 술을 마시고 있다가 난 술이 좀 취해서 바람을 쐬러 밖에 나왔다고 했다.
혼자? 하고 묻는 지다에게 지나는 운이랑 둘이 얘기 중이고 그냥저냥 나 혼자만 붕 떠버린 느낌이라 화장실 간다고 하고 먼저 나왔다고 했다.
그러니까 확실히 취했다, 나.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아졌어.
[겁도 없이 지금 몇 신데 혼자 돌아다니는 거야?]
저번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 녀석, 여자 혼자 밤에 다니는 걸 지나치게 걱정한다.
"아, 이제 곧 애들한테 갈 거니까."
[어디쯤인데.]
"버, 버스정류장?"
[호프집 근처?]
"응."
[정류장에 있어. 지금 차 시동 걸었으니까. 15분쯤 걸릴 거야.]
정말로 날 데리러 올 심산인 모양.
끊는다는 말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린 녀석 탓에 멍하니 전화기만 쳐다보는 나.
아니, 왜? 어째서?....란 생각도 잠시.
두 손으로 뺨을 때리며 술을 깨려고 애썼다.
이건... 내가 가지다를 꼬신 게 아니야.
그러니까 이건, 고한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내가 꼬신다고 넘어올 놈도 아니고, 한겸이의 여자친구인 나와 바람을 피울 놈 역시 아니잖아?
애초에 가지다는 내가 녀석을 단념할 수 있게 과거의 가지다가 날 정말 사랑했다는 말도 했고 말이야.
그러니까 뭔가 찝찝한 이런 기분이 될 필요는 없어.
음음-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갑자기 들고 있던 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발신자를 보니 뭔가 나쁜 짓을 하려다 들킨 기분.
"아- 한겸아."
[어디야?]
"아."
[화장실을 못 찾았어?]
"아."
[물어보지, 나 아는데.]
"아."
[노지나가 왜 안 오느냐고 화내. 화장실은 여자친구끼리 같이 가는 건데 왜 혼자 갔냐고 또 막 화내.]
"아."
[근데 여자친구는 왜 화장실에 같이 가?]
"아."
[빨리 와. 나 유치원 때 짝꿍 때문에 진짜 신기한 일 기억났어. 말해줄게, 분명 너도 신기할 거야.]
"아."
[...다이나? 왜 자꾸 아- 해?]
"아...음. 저기, 나 좀 취한 거 같아서 먼저 가려고 나왔는데."
[에-? 먼저 간다고? 혼자?]
"응. 뭐랄까, 좀 피곤해서...미안, 애들한테 말 좀 잘해줘."
[에- 그렇지만 혼자서 집에 가면.]
"아, 걱정 마. 마침 가지다가 태우러 와 준다고 하니까."
거짓말은 하기 싫고, 딱히 바람을 피우려는 것도 아니니 당당하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저러코롬 말해버렸다.
화를 내진 않더라도 지다와 둘이서 집엘 간다고?! 하며 흥분할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그럼 안심하고 좀 더 놀다 갈게."란다.
희정이와 만난 게 꽤 신이 난 모양이다.
뭐, 그러므로 이쪽도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지다를 기다릴 수 있달까.
그런데.
한겸이와 통화를 끝내자마자 내 앞에 세워진 검은색 차 한 대.
설마 했는데 역시나 뒷좌석 창문이 내려지며 보고 싶지 않은 노도수의 얼굴이 보인다.
"이 시간에 이런 곳에서 다 보는군."
아는 척하지 말라고.
"...안녕하세요."
"태워주지."
"아, 지다 기다리는 중이라서요."
"지다 녀석을?....한겸이 놈의 여자가 아니었던가. 아, 혹시 같이 살면서 지다 녀석에게로 옮겨...."
"아니거든요."
노골적으로 불쾌한 얼굴을 하고 말했는데 피식 웃는다, 이 사람.
"그런가, 여전히 한겸이 놈의 여잔가. 꽤 오래가는군. 아니,아직 일 년이 넘진 않았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까 좀 사라져 주시죠.
"천로에서 사는 건 어떤가. 생활하는데 불편한 거라던지..."
"없습니다. 덕분에요."
"....그러고 보면, 내 아들놈의 여자만 아니면 내 취향인데 말이야."
혼잣말처럼 저러코롬 지껄이는 노도수 때문에 피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날 소유하고 싶어 죽겠다는 눈빛은 회귀하기 전 몇 년 동안이나 진저리 날 정도로 느꼈으니 여기서까지는 사양하고 싶다.
내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고 노도수가 약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으로 들리지 않으니까 문제거든?!
그나저나 지다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15분이라더니 벌써 20분도 넘었어.
노골적으로 불편하단 표정을 지으며 폰만 만지작거렸다.
여전히 갈 생각이 없이 있는 노도수에게 용기를 내 안 가십니까? 하고 물을까 하는 그때, 노도수의 차 뒤로 같은 기종의 검은색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왜 모두 검은색 차를 선호하는 건지 모르겠다.
노도수의 차가 있는 걸 보고 차에서 내린 가지다가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그러니까 여긴 주차장이 아닌데....뭐, 상관없나.
이미 버스가 끊겼을 시간이니.
"영감?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집으로 가는 길이다. 너는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이거 데리러 왔어. 영감 딸이랑 영감 아들은 바쁜 모양이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지다를 보며 노도수가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린다.
"넌 한가하고?"
"....걱정돼?"
"그럴리가."
"걱정 마. 영감 아들 괴롭히는 취미는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나."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는 가지다.
그런 가지다를 말없이 쳐다보던 노도수가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말한다.
"멍청한 녀석. 우리 같은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갖고 싶은 건 가지는 거야."
"......."
"출발하지."
멀어지는 노도수의 차를 바라보던 가지다는 차가 안 보이게 되어서야 중얼거리듯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서 참고 있잖아, 영감도."
....
......
.....
노도수가 뭘 참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던 건 아닌데, 같이 나란히 차에 타고 돌아가는 길에 꽤 불편한 정적이 싫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외로 쉽게 말해주는 지다에게서 들은 노도수의 이야기는 뭔가 이쪽에서의 노도수도 내가 있던 곳의 노도수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상대만 나에서 한겸이의 엄마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사랑하는 여자에게 미움을 받고 사는 건 똑같은 노도수였다.
노지나의 엄마와 사업을 위해 결혼하고 얼마 후, 고한겸의 엄마를 만나게 된 노도수는 회귀 전의 내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부모가 갚지 못한 돈을 빌미로 한겸이 엄마를 데리고 왔단다.
노지나의 엄마가 있는 자신의 집은 안되는 노릇이라 민무영의 사유지인 풍로에 숨겨둔 채, 한겸이를 낳을 때까지 몰래 만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길지 않아도 꼬리라는 건 밟히기 마련이고, 사실을 알게 된 노지나의 엄마가 노발대발하며 풍로까지 찾아가 한겸이의 엄마와 난투전(?)을 벌였고, 졸지에 불륜녀가 되어버린 한겸이 엄마는 민무영의 아내의 도움으로 한겸이가 10살이 될 때까지 외국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단다.
노지나의 엄마가 예기치 못한 일로 죽은 후, 노도수는 한겸이의 엄마를 자신의 옆으로 데려오려 했지만 두 모자가 강력하게 거부했다고 한다.
물론 자신의 딸인 노지나도 싫어해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내린 노도수는 지금까지 참고 있는 거라고 했다.
듣고 보니, 한겸이의 능력만 보고 나와 한겸이를 이곳에 있게 만든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두 번이나 나를 돈으로 매수(?)한 노도수를 좋은 마음으로 생각할 순 없다.
"한 잔 더 하고 들어갈래?"
갑자기 내게 저러코롬 묻는 가지다 때문에 잠잠했던 심장이 또다시 쿵쿵거리기 시작한다.
바람이 아니야.
이건 절대 바람일 수 없어.
친구끼리 술 한 잔 하자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고, 한겸이도 지금 유치원 짝꿍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잖아?
그러니까 망설일 필요 없는 거야, 전혀.
"맥주라면 좋아."
....
......
...
어딘가 들어가서 한 잔하자는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가지다는 편의점에 차를 세우고 말도 없이 내려 한동안 날 기다리게 만들고는 한참 후, 봉지 가득 술을 사 뒷좌석에 놓고 차 시동을 건다.
"집에 가서 마시게?"
궁금한 건 원래 못 참는 성격이라 한참을 고민하다 저러코롬 물었다.
"집에서 마시고 싶어?"
"아니, 그게 아니라."
이 도로는 천로로 들어가는 도로이고 또, 등 뒤에 앙증맞게 놓여있는 봉지들을 보면 이건 집에서 마시자는 것과 진배없는....
"바닷가 쪽에 벤치 있잖아. 본적 없어?"
아아.
본적이야 있는데.
"아침에 운동할 때마다 밤에 거기 앉아서 술 마시면 진짜 짱이겠다 생각했거든."
네가 짱이겠다 생각한 일을 나와 같이 하려고 하지 말라고.
당황한다고, 이쪽은.
솔직히 한잔 더하고 가자고 했을 때, 내 눈은 이미 분위기 좋은 술집을 찾아 눈을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이 추운 날씨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바닷가에서 마시려는 참이다.
사람도 하나 없어 밤에는 무섭기까지 한 곳에서.
뭐.
좀 춥긴 하지만 밤바다의 분위기는 생각만으로도 좋고 또, 가지다와 나란히 술을 마시면서 무서울 새가 있을지도 의문이니 일단은 입을 꾹 닫고 있었다.
....
.......
.....
천로의 바닷가는 생각보단 춥지 않았다.
의외의 자상함으로 지다 녀석이 재킷을 벗어 내게 입혀준 이유도 있고, 꽤 가까이 붙어 앉은 탓에 술을 마시려고 움직일 때마다 팔이 닿아서 심장이 쿵쿵거려대는 이유도 있다.
"안 추워?"
맥주를 반 정도 마실 동안 말없이 바다만 쳐다보던 지다가 한참 후,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물었다.
"참을만해....넌 춥겠다. 다시 옷 입...."
입고 있던 녀석의 옷을 벗으며 저러코롬 말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옷을 내 어깨에 다시 감싼다.
"입고 있어."
"......"
뭔가 어색해져버려 또다시 둘 다 침묵을 지키고 술만 마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맥주 하나를 다 마신 지다가 손으로 캔를 구기면서 말했다.
"이렇게 둘이 있으니까 기분 묘하네."
"......"
말없이 녀석을 쳐다보자 캔 하나를 더 따 마신 후 말을 잇는 지다.
"꿈에선 별의별 것 다했는데."
별의별 것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이미 술이 들어간 상태에서 더 들어간 술 때문에 보지 않아도 붉게 상기되었을 얼굴로 녀석과 눈을 맞췄다.
꽤 오랫동안 말없이 눈을 맞추고 있었는데 녀석이 꽤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참 예쁘긴 해, 너."
화르륵-
하고 얼굴이 타올랐다.
그러니까 술 탓이다. 술 탓.
"왜 그렇게 앞뒤 분간 못하고 빠져들었는지 알 것도 같아."
그러니까 이건.
....꿈 얘기...?....
"아, 물론. 얼굴 때문이라는 말은 아니고. 얼굴 쪽이라면 인형같이 생긴 너보다 사람같이 예쁜 지나 쪽이 훨씬 취향이니까."
그건....칭찬이냐?
술도 들어갔겠다, 회귀 전의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녀석의 입으로 직접 뱉어냈겠다,(물론 녀석에겐 한낱 꿈 이야기일 뿐이지만) 조금 용기가 생겨버린 나는 지다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믿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믿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긴 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정말이니까. 증거라면 나 자신이 증거니까. 어째서인지 좀 다른 과거이긴 하지만."
"다른 과거?"
"...내가 죽기 전 그곳에선 한겸이가 없었어."
"헤에- 영감이 못 찾은 건가?"
"아니야. 노도수에게 여잔 노지나의 엄마와 나밖에 없었어. 그때의 노도수는 나와 결혼까지 할 생각이었으니까. 나이 차이가 지금보다 훨씬 많이 났는데도...."
"응. 그건 대충 알아. 꿈에서 봤으니까."
뭔가,
가지다의 저 말에 저 녀석은 꿈에서 과거의 어디까지 본 걸까 궁금해졌다.
".....이제 와서 궁금해졌는데 말이야. 꿈에서 어디까지 본 거야?"
"어디까지라고 할까....너 대신 총에 맞은 건 이미 봤고, 지금도 계속 꾸고 있다고 할까. 요즘엔 이상한 쪽으로만 꿔서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이상한 쪽?
바닷가 쪽을 바라보며 딴청을 하는 녀석을 빤히 쳐다봤다.
녀석은 눈을 힐끔 돌려 나를 한번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뭐, 그거야 욕구불만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째서 그런 꿈을 꾸는지....안 궁금해?"
닌 궁금해졌다.
회귀를 하지 않은 지다가 과거의 자신에게 보여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도 들면서.
이 녀석이 지금까지 과거의 꿈을 꾸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 같았다.
과거가 바뀐 이유도, 있지도 않았던 고한겸 때문에 노도수의 눈에 들지 않은 이유도, 천로에서 모두 같이 생활하는 이유도.
뭔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다시 살아나지 못한 지다가 나와 과거의 지다를 이어주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미친듯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미 있을 수 없는 일을 겪고 있는 중이니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또 어쩌면, 지금의 가지다가 죽어도 노지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와 지나를 이어주려는 걸 보면, 꼭 노지나가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나여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들어버렸다.
"글쎄. 어째서일까."
나를 빤히 쳐다보는 녀석과 눈을 맞추며 멍하니 쿵쿵거려대는 내 심장 소리만 듣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점점 가까워지는 가지다의 얼굴.
부드럽고 몰캉한 지다의 입술이 느껴지고,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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