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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다 원하다-39화 (39/51)

39화

<보고싶어>

전혀 친하지 않았던 노지나와, 나란히 붙은 방이라는 이유로 꽤 친해져버렸다.

이렇게 노지나가 캔맥주와 오징어를 내 방으로 가져와 마실 만큼.

내 여자친구니까 나도 끼워줘라며 문에 매달려 안타깝게 소리치던 고한겸을 힘으로 밀어 버리고는 내 앞에 털썩 앉아 캔맥주의 꼭지를 따 내게 주는 노지나는, 예전에 알던 노지나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윤미와 대등한 친구가 되어버릴 것 같달까.

...라고 생각하니 급자기 윤미가 보고 싶어졌다.

천로는 외부인 출입 금지라 윤미를 부를 수가 없으니 나중에 따로 만나러 나가야겠다.

"그래서 낮에 강태산이랑 장을 보러 갔는데 말이야."

지나는 지금, 오징어를 잘근 잘근 씹으며 오늘 저녁밥 당번이었던 지나가 장을 봤던 걸 고대로 싣고 본사로 가버린 강태산을 씹고 있다.

내용인즉,

오늘 저녁밥 당번이 걸려버린 지나가 회심의 요리 솜씨를 보여주기 위해 일찍부터 마트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집에 있던 강태산이 자신이 같이 가주겠다고 해 둘이서 장을 보러 갔단다.

그런데 장을 다 보고 돌아오는 길에 노도수에게 본사로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은 강태산은 빠르게 집 앞에 도착해 노지나만 떨궈놓고 그대로 본사로 가버렸단다.

그래서 오늘 저녁이 중국집이었군.

"오면 죽여버리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대신에 내일 아침 당번은 편하잖아."

피식 웃으며 저러코롬 말했더니 노지나가 나를 빤히 쳐다보다 이내 픽 웃는다.

" 너 좀 똑똑하다?"

어디가....?....

이런저런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주로 강태산을 어떻게 조질까..라는)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노지나가 볼때기를 붉히며 쑥스러운 듯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말하려다 말고를 했다.

"왜?...취했어, 너?"

"캔맥주 두 개에 설마 취하겠니?"

근데 왜 이러는 거야.

무표정한 얼굴로 지나를 쳐다봤더니 너 참 표정 없다고 말한 지나가 다시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말을 잇는다.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꼭 그거 같다."

"응?"

"파, 파자마 파티랄까나."

어디가?!

것보다 파자마 파티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모양.

그런데....

뭔가 쑥스러운 듯 헤헤 웃으며 여자 친구랑 이런 거 해보는 건 처음이야라는 노지나의 말에 심장 한쪽이 뭉클해졌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내 주위엔 저 녀석들밖에 없었으니까. 뭐, 초등학생 때는 지다밖에 없었지만."

"......"

"여자애들이 날 싫어하는 이유는 알아...너도 학교 땐 나 별로였지?"

학교 때...라고 할까.

지금도 그다지...랄까.

"글쎄. 별로...라기보단 친해질 거리가 없는 사이였지. 넌 로열 클레스였고 우리는 일반 클레스였으니까."

일단은 저 한 비주얼 하는 녀석들 틈에 홍일점으로 있으니 학교 여인네들이 심심찮게 네 뒷담화를 깠던 건 사실이고, 또 네 성격 자체가 좀 친근한 타입은 아니었으니...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나 역시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윤미이외의 친구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친구가 돼서 기쁘긴 해."

아... 난 너와 이미 친구가 되어버린 거구나.

뭐, 그것도 괜찮지.

"나...줄곧 동경했거든. 여자친구랑 술 마시면서 고민 얘기도 하고, 연예인 얘기도 하고, 좋아하는 사람 얘기도 하고."

아마도 이 아이는....꽤 쓸쓸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 좀 기뻐."

하고 싱긋 웃는 지나의 모습이 참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그때, 그녀가 캔맥주를 만지작거리며 수줍게 말한다.

"우리 자주 하자, 파자마 파티."

그러니까 이건 파자마 파티 따위가 아니라니까.

......

.........

.....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던 과거의 노지나도 친구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런 것 때문에 고민할 스타일 같지도 않았고 나 역시, 얼음마녀란 별명까지 붙은 모난 성격이었지만 윤미가 있어서 딱히 외롭지 않았다.

이제 와 생각하는 건데, 다시 돌아온 고등학교 시절에 조금 더 많은 동성 친구들을 사귀어볼 걸 그랬다.

뭐, 이미 졸업을 한 마당에 이런 생각도 늦은 거지만.

오랜만에 윤미에게 전화를 했다.

대학에 들어간 윤미는 그동안 왜 연락 한번 안 했냐고 거품을 물었다.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끊으려다 갑자기 생각난 지나 때문에 지나와 같이 가도 되냐고 물었다.

학창시절, 노지나를 대통령 딸 취급(?) 하던 윤미는 내 물음에 대박이라는 소리만 새빠지게 외쳐댄다.

"그럼, 저녁에 거기서 봐."

천로에 온 후, 처음 하는 외출 생각에 뭔가 붕 뜨는 느낌이 든다.

지나도 좋아할 것 같아 서둘러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요우 요우 요우.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나와 눈이 딱 마주쳐버린 가지다.

녀석은 지나의 핸드폰을 든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있었고, 지나는 그 폰을 빼앗기 위해 지다에게 매달려 바둥거리고 있다.

뭐냐, 이건....

염장 놀이?

"다인아- 도와줘!"

뭔가 캐릭터가 바뀌어버린 느낌이 드는 지나가 나를 보자마자 울상을 지으며 말했고, 나는 저 바보 놀이에 끼고 싶은 마음이 없다.

사실은...방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다.

"나 저녁에 윤미 만나러 나가는데 너도 같이 갈래? 윤미가 네 얘기하니까 좋아하더라...아, 알지? 고등학교 때 매일 나랑 같이 다니던 여자애."

"여자애?!"

지나는 눈을 반짝거리며 저러코롬 말하더니 후다닥 뛰어와 내 두 손을 잡고 소리친다.

"여자들끼리 데이트!"

그러니까 너 뭔가 캐릭터가 달라졌다니까.

"안 돼, 멍청아. 너 저녁에 운이랑 노트북 가지러 가기로 했잖아."

"내버려 둬, 지금 노트북이 문제야?! 내가 여자친구들과 만나게 됐는데?"

그 애 착해? 그 애 혼자만 나오는 거야?

묻고 싶은 말만 쉬지 않고 물어대는 지나를 보다 가지다를 흘깃 쳐다봤다.

뭔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마구 꼼톨거리며 지나를 야리고 있다.

"너 말이야. 약속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고."

"가볍게 생각한 적 없거든?!"

"운이가 저녁에 너랑 한 약속 때문에 지금 본사에서 얼마나 뺑이를 치고 있는데..."

"아- 내가 전화할게. 넌 신경 꺼."

"노지나!"

뭔가 제대로 화난 느낌.

꽥 하고 소리를 지른 가지다에게 놀란 듯 보이는 지나는 멍하니 지다를 쳐다보다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한다.

"너! 내가 어릴 때부터 여자친구를 얼마나 가지고 싶어 했는지 알지? 지금 이 기회는 내 일생일대의 기회야."

이, 일생일대씩이나.

"운이랑 노트북은 내일 가도 되잖아! 꼭 오늘이어야 하면 너랑 가도 되잖아! 하지만 여자친구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지나의 말에 대답 없이 그녀를 야리며 눈썹만 꼼톨거리는 가지다.

"....맘대로 해, 멍청아!"

하고 몸을 돌려 1층으로 내려가 버리는 가지다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저절로 한숨이 나와버렸다.

운아, 미안.

나중에 제대로 사과할게.

....

........

.....

어쩌다 보니 잡은 약속 장소가 또 천로에서 운영하는 호프집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윤미는 나를 보자마자 반가워 엉엉 울었다.

윤미와 같이 온 대학 친구 희정이는 고등학교 때 우리와 같은 학교였다고 했다.

뭔가 말수가 적고 부끄러움도 많이 타는 귀여운 애였다.

지나는 생각보다 윤미와 꽤 죽이 잘 맞았고, 나는 오랜만에 만난 윤미의 쉬지 않는 수다를 듣는 게 좋았다.

그렇게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고한겸과 김운 때문에 나와 노지나는 얼굴이 굳어졌다.

폰에 위치 추적을 해놓은 게 분명해.

몸 어딘가에 위치 추적기를 달아놓았을 수도.

운이와 한겸이를 보자마자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훑어보는 지나를 보니,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여자친구야아-"

짤랑 짤랑 손을 흔들어 보이는 고한겸에게 어떻게 온 거냐 물었다가 왜 온 거냐며 질문을 바꿨다.

한겸이는 해죽해죽 웃으며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아 보고 싶어서라고 했고, 운이는 지나 옆에 앉아 지나에게 전화 왜 안 받느냐 물었다.

뭔가, 여자들끼리 노는 자리에 남자친구가 껴버려 어색하기도 하고 껄적지근하기도 해 윤미와 희정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희정이 조금 이상하달까.

내 옆에 앉은 한겸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애가 좀 잘생긴 편이라 이해는 하는데 노골적으로 한겸이만 보고 있다고 할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 고등학교 때 우리랑 같은 학교라고 했었지?

"윤미 안 본 사이에 살쪘네."

내가 마시던 맥주 잔을 만지작거리며 고한겸이 말했다.

"안 쪘거든?"

"쪘는데? 볼때기가 터질 것 같아."

"죽을래?!"

"근데 귀여운 애는 누구야?"

때리는 시늉을 하는 윤미를 피하며 헤헷 하고 웃던 한겸이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희정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 이희정. 내 친구야."

"안녕? 난 이다인 남자친구야."

싱긋 웃으며 말하는 한겸이에게 희정이가 들릴 듯 말 듯 말한다.

"나...기억 안 나...?..."

"응?"

"...하늘 유치원 기린반 이희정."

순간, 웃고 있던 고한겸의 눈이 화악- 하고 커진다.

"그.....그 이희정이야?!"

큰 목소리로 소리치는 한겸이와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희정이.

뭔가 옛날부터 아는 사이였던 둘을 보며 땅덩어리가 좁긴 좁구나라는 생각을 하는데 뭔가....신이 났다, 내 남친.

어릴 때 유치원 짝꿍을 성인이 되어서야 다시 만나서 엄청 텐션이 높아진듯하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왜 그땐 말을 걸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한겸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줍어하는 저 얼굴은 누가 봐도 좋아하는 건데...

난 왜 아무렇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보통 남자친구를 저런 식으로 보면 화가 나야 하는 게 아닌가?

만약....가지다라면 난 화가 날까.

...아아... 난다.

뭐야, 이거.

약간 상상한 것만으로도 열 받았어.

이거 위험한 거 아닌가, 나 스스로 가지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다짐했잖아.

요우 요우 요우.

뭔가 멍하니 있었더니 또다시 가지다가 머릿속에 가득 차 버렸다.

안 돼. 내가 사랑했던 가지다는 여기 없어.

정신 차려, 이다인.

신이 난 얼굴로 희정이와 윤미와 유치원 때 이야기를 하는 고한겸과, 지나와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는 운이.

뭔가, 나 혼자가 되어버린 느낌.

그 씁쓸한 느낌의 한가운데에서 또다시 지다를 생각해버리는 나.

알딸딸하게 술이 올라서인지, 아니면 외톨이가 되어버린 느낌에 울적해서인지.

몰라, 모르겠는데.

화장실에 간다며 일어선 나는 술을 깨기 위한 목적으로 쌀쌀한 밤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목소리가 듣고 싶어져 생각 없이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신호음이 울리자,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두근한다.

딸깍.

[이다인?]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자, 나도 모르게 걷던 걸음이 멈춰졌다.

[여보세요?]

"지다야..."

[...무슨 일 있어? 한겸이랑 운이 못 만났어?]

물어오는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는데, 내 입은 내 생각과 전혀 다른 말을 뱉어내 버린다.

"보고 싶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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