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이제 들어갈까? 좀 춥네."
고한겸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 한참을 모래 낙서를 하다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콧물이 나는 게 더 있다간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읏차-하고 일어나 손바닥을 탈탈 털던 한겸이가 싸늘한 느낌에 두 손으로 팔을 감싸는 나를 보더니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내 어깨에 덮어준다.
"야, 나 괜찮아."
"입고 있어. 업어줄까?"
"거절한다."
"....손...올리면 안 되지...?...나쁜 짓 했으니까."
입술을 오물오물거리며 저러코롬 말하는 한겸이 때문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괜찮아."
"진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어깨를 잡아당겨 자신의 옆구리에 넣는다.
이럴 땐 꽤 남자다운데.
"이젠 못 만지게 할 줄 알았어."
"끝까지 했으면 아마 그랬을 거야."
"미안."
"이젠 그러지 마? 정말로 무서웠다고."
"응응. 인제 안 그럴게. 참을게."
라고 말한 한겸이가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한참을 말없이 걷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본다.
"근데.... 언제까지 참아야 해...?..."
....응...?....
약간 벙찐 얼굴로 녀석을 쳐다보자, 녀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는다.
"아니, 일단은 나 지금도 꽤 많이 참고 있고...아니, 뭐. 사귄다고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 점점 힘들다고 할까...만지면 만질수록 더 만지고 싶어진달까. 넌 분명 입고 있는데도 내 눈엔 벗고 있는 걸로 보일 때도 있고."
어이 어이.
"자꾸만 야한 걸 상상하게 되기도 하고..."
내 얼굴이 점점 굳어지자, 녀석이 말을 하다 말고 짧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인다.
"역시...변태입니까, 나."
"......"
솔직히 한겸이와 한다는 건 아직 생각해본 적 없다.
일단 남자친구이긴 하지만 여태껏 순수한 느낌이 강한 녀석이었기에 혀를 넣는 키스를 처음 당했을 때에도 꽤 충격이었다.
뭐, 금세 익숙해지긴 했지만 뭐랄까...이 녀석과 에로는 어울리지 않는달까.
아- 그래서인가 보다.
아까 마치 전혀 모르는 남자에게 덮쳐지는 느낌을 받은 건.
뭐, 괜...찮을 지도.
과거엔 처음을 노도수에게 빼앗겼지만 지금은.
그러다 문득,
몇 번이고 생각하고 몇 번이고 상상했던 가지다와의 처음이 생각났다.
가지다와 뭘 할 생각 따위 전혀 없지만...처음은.
요우 요우 요우.
나 이런 생각, 위험한 거 아니야?
"역시...아직은 무리야?"
내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한겸이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조금만... 기다려 줄래?"
내 말에 또다시 걸음을 멈추는 한겸이.
동글 거리던 눈이 꽤 커져있는 걸 보니, 이런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닌 모양.
"그...마음의 준비라는 게 필요하니까, 나도."
내겐 여러 가지로 처음이 아닌 처음이니까 말이지.
"응!"
...뭐랄까.
심장이 뜨끔할 정도로 멋지게 웃었다, 방금.
....
.......
......
다음날.
"다인아, 일어나! 야- 이다인!"
날 깨우는 하이톤의 여자 목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어째서 친하지도 않은 노지나가 내 방문을 아무렇지 않게 열어젖히며 저러코롬 날 깨워대는진 모르겠지만...지금 몇 시지?
"빨리 일어나. 밥 다 됐다고 내려오래."
응?....밥...?....
그러니까 일어나자마자...?....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성격 급한 노지나가 내 손을 잡아당겨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잘 떠지지 않는 눈만 비벼댔다.
그러니까 지금 몇 시고, 밥은 또 뭐냐.
"잘 잤어, 여자친구야?"
식탁 한가운데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앉은 자세로 젓가락을 입에 물고 나를 보며 싱긋 웃는 한겸이.
앞치마가 꽤 잘 어울리는 강태산이 김치찌개로 보이는 뚝배기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내게 앉으라고 하고, 한겸이의 옆자리 의자를 빼주는 김운.
그리고, 나를 보며 머리 스타일 예술이네 하며 엄지를 들어 보이는 민준수와 물부터 마시고 잠 좀 깨라는 가지다.
일어나자마자 정신없는 이 상황에 어리둥절한 나는 가지다가 손수 따라주는 물을 입으로 가져가며 식탁을 내려다봤다.
예전 천로에선 가사도우미 이모가 따로 있었는데 이번은 아닌 모양.
가위바위보에 져서 아침을 만들게 되었다는 강태산은 요리를 꽤 잘했고(물론 외관상으로만), 이제부턴 너희들도 가위바위보에 동참해야 한다는 민준수의 말에 잘 하지 못하는 요리 실력을 걱정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지 않는 이상 밥은 무조건 다 같이 먹자는 김운의 말에 아침을 먹지 않는 주의였던 나는 급 우울해졌다.
뭐, 그래도.
다 같이 앉아서 소란스럽게 먹는 아침은 꽤 기분 좋구나.
눈곱도 떼지 않은 채 밥을 입에 넣는 건 조금 찝찝하지만 말이야.
그리고....
강태산이 겉모양만 꽤 맛깔스러운 요리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버린 난.
짠 김치찌개를 먹고 물 한 모금 마시고, 싱거운 계란찜을 먹고 김치찌개를 먹으며 입안에서 간을 맞췄다.
하나는 짜고 하나는 싱겁고...얘 간을 대체 어떤 식으로 한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침부터 고생한 강태산을 위해 전부 맛있게 먹는 걸 보니, 이 녀석들 꽤 괜찮은 녀석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
.....
"그게 뭐야....?...."
밥을 먹은 후, 씻고 내려왔는데 한겸이가 소파에 앉아 뭔가를 열중해서 보고 있었다.
손에 든 종이를 가리키며 묻자,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웃는 한겸이.
"천로가 소유하고 있는 회사와 가게 매출들. 아저씨가 외우라고 했어."
엑-
"이걸 다? 이걸 외워서 뭐 한다고..."
나중에 안 사실로는 세금 문제 때문에 일일이 서류를 남길 수 없는 노도수가 정확한 매출 파악을 위해 고한겸의 좋은 머리를 컴퓨터 대신 쓰는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 자기 아들이어서라기보단 한겸이가 필요해서 이용하는 게 확실하다.
왠지...나 때문에 싫은 일을 해야 하는 한겸이에게 미안해지면서 가여워져버렸다.
그래서 집중하고 있는 녀석의 머리통을 꼭 끌어안았다.
"다이나...?...."
"애정표현이야, 애정표현."
중얼거리듯 말하자 녀석이 피식 웃는다.
"비누냄새난다아-"
샴푸 냄새 거든?
스윽 스윽.
녀석의 예쁜 뒤통수를 쓰다듬는데 녀석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동글 거리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왜....?..."
"응. 있지."
뭐가 있어?
급자기 내게서 머리통을 빼 바로 앉은 고한겸이 종이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딴 곳을 쳐다보며 말한다.
"비, 비누냄새 때문이야."
뭔 소리야. 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귀까지 빨개진 녀석의 아래가 시선을 두기 힘들 정도로 부풀어있었다.
트레이닝복 바지라 더 두드러진달까.
귀까지 빨개진 녀석이 종이로 부채질을 하며 딴청을 피우고, 난 그 정도로 쉽게 발정을 하는 거냐라고 생각하며 한 손으로 눈을 가렸나.
이거 이거.
빨리 빼게 해주지 않으면 안되겠는걸.
뭐, 처음이 고한겸인 것도 나쁘진 않겠다.
하지만, 뭐랄까.
한겸이와 그런 저런 일을 한다고 상상하니 뭔가 요상스럽달까.
어린애를 상대로 야한 짓을 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꽤 복잡한 심정이 되어버리는데, 이거.
머릿속에서 된다와 안된다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고, 한겸이는 진정되지 않는 아래 때문에 자꾸 내 눈을 피하고 얼굴에 부채질만 한다.
뭐, 지금이라면 해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버린 순간, 거짓말처럼 가지다가 현관문을 열고 강태산과 함께 들어온다.
온통 땀범벅인 걸로 보아 운동을 다녀온 모양.
이마와 구레나룻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가지다를 보자 또 심장이 두근했지만 이내 시선을 돌려버렸다.
지다 역시, 나와 한겸이를 무시하고 먼저 씻을래? 하고 묻는 태산에게 너부터 씻으라고 한다.
"2층 욕실 써도 되지? 지나 방에 있어?"
왜 지나를 나한테 묻는 거야.
그리고 2층 화장실은 원래 여자들만 쓰기로 한거 아냐?
"모르겠는데."
"욕실 좀 쓴다."
"내 집도 아니데 뭘 나한테 물어."
생각과는 달리, 저러코롬 가시 있는 말투가 나와버렸다.
그러니까 이건 노지나의 행방을 내게 묻는 가지다에게 배가 꼬인 것일지도.
"...고한겸. 네 여자친구 생리 하나보다."
아직 안 해!
휘파람을 불어대며 2층으로 올라가는 가지다를 째려보다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한겸이를 봤다.
얜 또 왜 이래?
고한겸은 한참을 날 빤히 쳐다보다가 종이로 한쪽 얼굴을 가린 채,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소곤거리듯 묻는다.
"생리해?"
.....
.......
.....
오늘 중으로 다 외워야 한다며 종이에 집중을 하는 한겸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몸을 일으켜 2층으로 올라왔다.
지랄 맞은 타이밍으로 욕실에서 나오는 가지다와 딱 마주쳐버렸다.
뭔가 어색하고 요상한 기분.
"샴푸가 우리 쓰는 거랑 틀리네."
"...아, 그거 내가 쓰던 거. 향 때문에 그것만 쓰거든, 나."
"응. 네 냄새난다."
화르륵-
그 한마디에 얼굴이 타올라버렸다.
어이 어이 어이.
동요하지 마, 이다인.
"지, 지나는 있어?"
"아- 없네. 운이가 데리고 나갔나?"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수건으로 자신의 머리를 닦는 가지다를 올려다봤다.
"괜....찮아...?...."
운이 때문에 참고 있다는 한겸이의 말이 생각나, 저러코롬 물었다.
아니, 사실은 물을 생각이 없었는데 이 망할 입이 먼저 움직여버렸다.
"...뭐가?"
응, 그러니까.
"아- 아냐."
손사래를 치며 내 방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움직이는데 녀석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둘이 잘되면, 그게 맞는 거라고 생각해."
"......."
참고 있어....?...
목구멍까지 올라온 물음을 애써 삼켰다.
"뭐, 지금의 난 여자 같은 거 생각할 겨를 없으니까. 영감이 내게 바라는 것도 있고."
픽- 웃으며 저러코롬 말하는 가지다.
왠지 그 웃음이 쓸쓸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이 샴푸, 종종 빌려주라. 냄새 좋네."
라며 내려가는 가지다의 뒤통수를 쳐다보다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새 걸로 사줄게!"
"안 돼. 그럼 애들 전부 이 냄새가 되잖아, 병신아."
"....."
가지다가 내려가 버린 후, 그대로 멍하니 서있는 나.
몽글몽글.
꼬물꼬물.
심장이 바쁘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어서.
그런데.
"내 여자친구한테 병신이라고 했지?! 니가 병시다! 병시야!"
라고 소리치는 고한겸과
"귀도 밝다, 새끼. 엿듣지 마, 재수 없게."
라고 맞받아치는 가지다 때문에 나도 모르게 픽-하고 웃음이 나와버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