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여자친구야아-!!"
조금 늦은 밤.
2층 내 방에 앉아 가져온 짐들을 풀고 있는데, 뭔가 쿠당쿠당 소리와 함께 고한겸의 외침이 들렸다.
하여간 이런 소란스러운 등장은 고한겸스럽달까.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리고 얼마 후, 방문이 활짝 열리고 내 잘난 남자친구 고한겸이 얼굴을 들이민다.
"아- 왔어?"
하고 씽긋 웃어줬는데, 갑자기 내 손에 든 물건을 보고 볼이 붉어지는 한겸이.
나는 서둘러 손에 들려있던 브래지어를 등 뒤로 감추며 소리쳤다.
"뭐, 뭘 보는 거야?!"
"아, 응. 안 봤는데 손에 있었어."
손가락으로 내 등 뒤 쪽을 가리키며 저러코롬 말하는 한겸이.
"아, 아직 짐 정리 안 끝났어. 이따가 와."
"응응."
그러니까 대답만 하지 말고 좀 가라고.
"......이따가 오라고."
"응. 근데 아직 보고 싶으니까 조금만 더 볼게."
"....."
누가 보면 내 얼굴에 꿀이라도 발라놓은 줄 알겠다.
"다이나- 뽀뽀하면 화낼 거야?"
"당연히!"
"응, 보고 싶었어."
하고 생긋 웃는 고한겸은....왠지 너무 순수해서 어딘가에 숨겨놓고 싶은 느낌이랄까.
때묻지 않게 어딘가에 꽁꽁 숨겨두고 힘들고 지칠 때 꺼내보고 싶은... 그 정도로 녀석의 미소는 치유계였다.
"어머닌...괜찮으셔?"
나 때문에, 내가 원인이라 엄마와 떨어져 천로로 오게 된 한겸이기 때문에 그 부분은 꽤 미안하고 면목없어 물어보기가 조심스러웠지만, 일단은 묻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아 물었다.
내 물음에 약간 어두운 표정이 되어버리더니 이내 생긋하고 웃으며 응! 이란다.
왠지 더 미안해져버렸다.
그래서 손을 내밀고 한겸이를 불렀다.
"할래..?... 뽀뽀."
평소에는 허락 없이 잘도 입술을 비벼대던 놈이 멍석을 깔아주자 목까지 새빨개진다.
말 꺼낸 사람이 무안해질 정도로.
그것보다 저 손으로 옷을 만지작거리는 행동은 뭐냐고.
5살짜리 어린 소녀가 부끄러워라는 행동이잖아, 그건.
"오, 오와아- 두근두근했다."
빨개진 얼굴로 투닥투닥 뛰어와 내 손을 잡더니 자신의 가슴께로 가져가며 말을 잇는다.
요우 요우.
정말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다, 이 녀석.
고작 내 뽀뽀할래 한마디에?
섹스할래라고 하면 심장마비로 죽는 거 아니냐?!
"호와아- 호오와아-"
"......"
"후와아- 후아아-"
그러니까, 내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대고 연신 심호흡을 해대는 이 녀석을.... 언제까지 보고 있어야 하는 거야? 난!
"저기 한겸..."
"후압! 좋았어! 이제 한다?!"
뭔가 기합 넣는 소리와 함께 저러코롬 말하고 내 얼굴을 잡아당겨 키스를 퍼붓는 놈.
그러니까 이런 키스가 처음도 아닐진대, 기합까지 넣는 이유가 뭔데?!...라는 생각을 하다가, 점점 질퍽해지다 못해 내 혀를 아주 그냥 집어삼킬 기세로 빨아대는 한겸이 때문에 녀석의 가슴팍을 마구 치며 빠져나오려고 애썼다.
설마 처음으로 먼저 하자는 말을 꺼낸 나 때문에 고한겸의 스위치가 켜져 버린건지, 아님 아까 우연찮게 본 내 브래지어 탓인지, 그것도 아님 앞으로 한집에서 사는 것 때문에 그런 느낌이 되어버린 건지 모르겠지만, 고한겸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힘으로 날 바닥에 눕히고는 내 위에 올라탄다. 여전히 내 혀를 빨아당기는 녀석 때문에 아파서 눈물까지 나올 지경인 난, 바둥바둥 거리며 녀석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미 스위치가 딸깍 켜져버린 녀석은 내가 힘들어하는 것 따위 상관없는 듯 이미 내 바지를 벗기고 있다.
무, 무서워!
갑자기 노도수에게 억지로 안길 때의 기억이 교차하면서 눈물까지 흘렀다.
"헤이- 거기까지."
만약 가지다가 이성을 잃은 고한겸의 목덜미를 낚아채지 않았다면, 난 강간을 당한 느낌을 받았을거다. 남자친구에게.
"흑- 흐윽-"
이미 눈물, 콧물을 마구 흘려대며 무릎을 세우고 우는 나와, 고한겸의 목덜미를 잡고 나를 내려다보는 가지다.
그리고 이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차린 고한겸.
"아....아...."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것 같은 한겸인 연신 콧물을 훌쩍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어버리더니 그 자리를 박차고 도망가버렸다.
그러니까 이건 무슨 경우냐고요.
한참을 말없이 날 내려다보고 있는 가지다의 시선을 느끼며 훌쩍거리고 있는데, 풀석-하고 내 머리 위에 뭔가가 올려지며 앞이 깜깜해졌다.
가지다의 냄새...인가.
나는 머리 위로 씌워진 옷을 조금 앞으로 잡아당겨 더 깜깜한 어둠을 만들었다.
뭔가, 가지다가 입고 있었던 옷을 덮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꽤 진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런 기분은 한겸이에게 실례인데 말이지.
것보다, 정말 무서웠어.
한겸이가... 한겸이가 아닌 것 같은 느낌.
모르는 남자 같은 느낌.
한참을 훌쩍거리며 한겸이 때문에 놀라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딸깍하는 라이터 소리와 후-하고 연기를 내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가지다의 듣기 좋은 중저음 목소리가 들린다.
"아마 이성을 잃었을 거야."
"....."
굳이 한겸이에 대해 대신 변명을 해주지 않아도 고한겸이 어떤 아이인지는 내가 더 잘 알아.
"그 녀석도 꽤 놀란 모양이니까."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열리지 않는다.
그저 가지다가 만들어준 편안한 어둠 속에서 녀석의 체취를 느끼고 있자니 마음이 안정될 뿐.
"일단은, 널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니까."
"......"
"너무 무서워하진 마라."
"......"
"뭐, 어떤 말을 해도 지금의 넌 와 닿지 않을 테지만.... 남자는 가끔 그럴 때 있으니까."
"......."
"자기 자신이 제어가 안될 때."
"......."
"내가... 노지나와 영감을 두고 널 안았을 때처럼."
순간,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믿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니까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할 줄 알았다.
"어...."
어떻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는데 어때 째서인지 소리가 되어 말로 나오지는 않는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거야..?..."
"......"
"...나...그 후로도 꽤 많은 꿈을 꿨으니까."
"....."
"진짜가 아니라도 이제 상관없게 돼버렸어."
"....."
"뭐, 어차피 달라질 건 없지만."
훗 차-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리고, 내 머리통을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을 잇는 지다.
"그때의 가지다는....이다인을 정말로 사랑했어."
그 한마디가 심장을 짜르르하게 만들어.
"믿어도 좋아. 진짜로... 정말 많이 사랑했어."
"....흐윽....."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
".....흑...."
" 그만 울어라, 눈 붕어되면 못생겨지니까."
어째서일까.
그때의 가지다가 진심으로 날 사랑했다는 말에 정말로 기뻐졌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흐를 만큼, 그렇게 기뻐졌다.
돌려 생각하면 지금의 너는 날 사랑 안 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인데, 나는 그때의 가지다가 날 사랑했다는 말에 위안을 받는다.
아아.
알고 있는데도 타인 아닌 타인에게 들으니 이거 꽤...
이 감동 때문에 아까의 놀랐던 마음은 금세 사라져버렸다.
스윽 스윽.
흐르는 눈물을 닦고, 머리에 쓰고 있던 가지다의 옷을 벗었다.
나도.....나도 사랑했어. 정말로.
창밖으로 보이는 까만 하늘을 보고 저러코롬 중얼거리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왠지 아무 이유 없이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정말로 엉덩이에 뿔이 날것만 같아.
지금의 가지다와 잘 된다는 생각 같은 거 안 해.
나한테는 이제 한겸이가 있으니까.
그저, 이제야 안심이 되어버렸달까....
그때의 지다가 날 정말로 사랑했다는 걸 아니까.
확신할 수 있게 대신 말해줬으니까.
그때의 나와 그때의 가지다는 지금 없다.
여긴 다른 세상, 다른 과거.
변하지 않으면 안 돼.
그때의 지다를 품은 채, 놓아주지 않고 고집을 부려선 안 돼.
지금의 가지다가 꼭 그렇게 말해준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뭐, 어쨌든 저쨌든.
지금은 내 변태에로 대마왕 남자친구를 찾는 게 급선무겠지?
........
....................
......
한참을 집안과 집 밖을 돌아다녔다.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는 내 에로 변태 남친 때문에 야밤에 꽤 많이도 걸었다.
한참을 걷다 바닷가까지 와버린 나는, 큰 돌덩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모래에 낙서질을 하고 있는 한겸이를 발견했다.
살금살금 녀석에게 가까이 가는 동안 녀석은 내 존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뭔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네가 나쁜 거야. 아무리 그래도 이성까지 잃어버리다니....그치만 너무 사랑스러웠다고...그래도 그런 짓은 하면 안 돼, 바보. 사랑하는 사람을 울려버렸잖아, 멍청아. 다시 태어나버려....아니야, 그건 안 돼...다시 태어나면 다이니는 내 여자친구가 아니잖아....휘유휘유...너무 놀라서 사과도 없이 도망쳐버렸어, 분명 날...."
누구랑 얘기를 하는 건지.
혼자서 저러코롬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한다.
역시나 요상스러운 녀석.
"야아호-"
"히익-!"
요우 요우.
정말로 놀란 모양이다, 이 녀석.
녀석의 귀에 가까이 다가가 야호라고 말했는데 녀석이 놀라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우리 변태에로 남친 여기 있었네."
언제 울었냐는 듯, 싱긋 웃으며 녀석을 쳐다보자, 녀석이 놀란 얼굴로 날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입을 삐죽거리며 눈물을 글썽인다.
"미...흐윽.."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알아."
"흐윽- 미..."
그러니까 말하지 않아도 안다고.
나는 울먹이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스러운 한겸이의 머리통을 꼭 끌어안았다.
아까의 무서웠던 남자는 온데간데없이 내 품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는 내 남자친구 고한겸.
"미아..끄흑..너우 사으스어..끄윽..나오 모으..끅."
응응.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거든.
녀석의 등을 토닥토닥 거리며 달래길 몇 분.
울음을 거의 그친 녀석이 꽤 잠긴 목소리로 무서웠지? 하고 묻는다.
그런 한겸이를 보고 생긋- 웃어 보였다.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덮치면 죽여버릴 거야."
한겸이는 내 말에 굳은 얼굴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