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7명의 동거인들>
과거와 똑같다.
천로에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한 아빠는 노도수와 약속한 기한이 다가오자, 나를 노도수에게 보내려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고등학교 졸업 때까진 집에 있게 해준다니 그것참 고마워 죽을 맛이다.
노도수에게 가기로 한 뒤부터 매일 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이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우시고, 아빠는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셨다.
그러니까 이번엔 노도수가 날 잡아먹으려고(?) 데려가는 것도 아니고... 고한겸 미끼 역으로 천로에다 데려다 놓을 참인 건데 아빠, 엄마는 마치 내가 노도수에게 강제로 팔려 가는 걸로 생각하신다.
그러고 보면....정말로 노도수에게 팔려갔을 때, 엄마와 아빠는 나 때문에 숨이나 제대로 쉬었을까.
죄책감에 밥은 제대로 드셨을까.
내가 노도수에게 간 뒤, 노도수는 단 한 번도 부모님의 안부를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때의 나 역시 부모님을 원망했기에 물어보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잘 지내셨을까.
뭐, 이제 와 용서하고 부모님들도 힘들었겠구나 하고 생각해봐야 이미 스물일곱에 죽어버린 난.....
어쨌든, 달라진 건 없다.
난...이 악몽을 또 겪기 위해 회귀를 한 모양이고, 아무래도 신은 날 힘들게 하고 싶은 모양이니.
노도수가 그때처럼 날 가지기위해 데려가려는게 아니라는 것에 꽤나 위안이 된다랄까.
노도수의 집이 아닌, 가지다와의 추억이 잔뜩 있는 천로에서 지내게 된다는 사실도.
예전과 같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조금은 안심해버렸다.
지금의 노도수는 나를 자신을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는 아들의 여자로 보고 있으니.
이러나 저러나.
요러나 그러나.
어차피 노도수와 엮이는 건 운명인 건가.
.....
.......
....
두 번째는 꽤 쉬웠다.
엄마, 아빠에게도 쿨하게 내 걱정 말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돈 때문에 팔려가는 건데, 두 번째라고 꽤 쿨하다.
뭐, 괜찮다.
아무렇지 않게 노도수의 차에 탈 만큼.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데리러 온 그들을 따라 천로로 향했다.
회귀 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는 풍로와 천로가 대립관계라 법치국가인 우리나라 고속도로에서 총에 맞아 죽을뻔하기도 했다.
뭐, 지금은 너무 친해서 탈이랄까.
천로에 도착해 내리자마자 예전 기억들에 심장 한쪽이 조금 싸해졌다.
바닷가 근처 쪽의 건물 두 곳이 공사 중인 걸 보니 불법 도박장과 비밀 호텔은 아직 들어서지 않은 모양.
뭐, 저 건물은 그것들 때문에 짓는 건물일 테지.
그런데....
어째서 가지다가 살았던 천로의 집에 로열 클레스 녀석들이 있는지, 왜 내가 녀석들이 사는 이곳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천로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어준 김운은 내가 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웃으며 인사를 한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내 짐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가며 말한다.
"넌 지나랑 이층 같이 쓰면 돼."
그러니까 여기가 하숙집도 아니고 왜 모두 여기 있는 거냐.
"어이- 동거인. 안녕."
소파에 눕다시피 앉아 내게 손을 들어 보이는 민준수가 저러코롬 말하고, 이미 어이없는 광경에 얼굴이 굳어버린 나는 노지나의 머리를 툭툭 치며 방에서 나오는 가지다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웃고 있던 가지다는 나를 보자마자 진심 싸늘한 표정이 되어버린다.
아아, 알고 있어.
네가 날 이상한 애로 생각하고 싫어하는 정도는.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아도 충분히...말이지.
지나는 나를 보자, 가지다가 헝클어뜨린 자신의 머리를 만지며 내게로 온다.
가늘고 긴 손을 내게 내민 그녀는 처음 보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한다.
"안녕. 고한겸 마누라."
아아.
전엔 꽤 적대적인 얼굴이더니.
내가 한겸이 여자친구라 안심 모드인 모양이다.
너, 눈에 훤히 보인다고.
"안녕."
"한겸이도 곧 올 거야."
엑-?!
"앞으로 일 년. 여기서 같이 사는 거야. 우리 7명 전부."
....
......
....
언제까지 천로에 있어야 할까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고, 노도수의 집에서 괴롭게 지내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그저 안도했기 때문에 일 년 동안 여기서 로열 클레스 애들과 지내야 한다는 지나의 말에 꽤나 벙쪄버렸다.
거기다 고한겸도 같이라니, 노도수는 무슨 생각으로 다 큰 남자와 여자를 한 집에 그것도 7명씩이나 같이 살게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뭐, 나중에 이 집에서 모두 천로에서 각자가 맡은 일을 체계적으로 배운다는 걸 알게 되긴 했지만.
다른 걸 다 떠나서, 가지다와 함께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꽤나 거북해져버렸다.
노지나와 가지다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면서 지내기엔 내 멘탈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
역시나 신은 내가 아프길 바라는 모양.
"이다인, 빨리 올라와."
그래도.
예전의 자상한 모습 그대로인 김운 때문에,
"핑크색 좋아한다는 얘기 들어서 며칠 전에 애들이랑 같이 페인트칠 직접 했어, 감동 좀 받을걸?"
하며 팔짱을 끼는 강태산 때문에,
"커튼은 내가 골랐다? 그거 사느라 얼마나 쪽팔렸는 줄 아냐? 그러니까 존나 고마워해야 해, 너."
라며 심드렁한 얼굴로 나를 보는 민준수 때문에,
"낯선 곳에서 지내는 거 무서울까 봐 우리 모두 꽤 노력했으니까."
하고 웃는 노지나 때문에,
"....환영한다."
진심일 리 없지만 저러코롬 말해주는 가지다 때문에, 저절로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러니까 얼음마녀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랄까.
울보 이다인이 되어버렸다.
....
.......
....
공교롭게도 천로에 왔을 때의 내 방에서 그대로 지내게 된 나는, 아까 엉엉 울어 따끔거리는 눈 밑을 만지며 녀석들이 직접 페인트칠을 했다는 핑크색 가구들을 구경했다.
그러니까 누구한테 내가 핑크색을 좋아한다고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온통 핑크색이다.
그래도 다행히 벽지는 흰색이라 고맙기까지 하다.
핑크색을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뭐,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거기다...집에 있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하니까, 뭐.
침대 머리맡에 있는 핑크색 돼지 인형이 전혀 내 취향이 아니긴 하지만, 저것도 꽤 신경 써서 골랐을 테니...
침대 머리맡에 앉아 돼지 인형을 안았다.
정말 누가 고른 건지 참 못 골랐다.
그도 그럴게, 하고많은 예쁘게 생긴 돼지들 중에 왜 이렇게 눈이 단추 구멍인 녀석을 골랐는지.
멍하니 돼지 인형을 만지작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인형을 꼭 안았다.
뭔가 서럽고 외롭고 심장이 따끔따끔해져 와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아아.
이 기분 알아.
이 기분 안다.
노도수의 집에 갔던 첫날도 이랬다.
집을 떠나 생소한 곳에서 지내게 된 첫 날은...아마 누구라도 이런 기분이 될테지.
녀석들은 이런 나를 위해 핑크색으로 가구를 칠하고 손수 핑크색 커튼과 이불과 인형도 사러 다닌 걸까.
조금....고마워져버렸다.
꽤 괜찮은 녀석들이잖아.
"...또 우냐?"
언제부터 문 앞에서 서 있었는지, 가지다가 나를 보며 물었다.
서둘러 손등으로 두 눈을 닦고는 말했다.
"왜."
우는 걸 싫어하니 또 안 좋은 소릴 할까 봐 선수를 쳐 적대적인 눈을 했다.
포기는 했지만 녀석의 시린 말에 상처를 받지 않는 건 아니다.
미리 바리케이드를 치지 않으면 또 울어버리고 만다.
"고한겸...조금 늦는대."
"......"
"그 녀석, 나름 필사적이니까....자기 엄마 이해시키려고."
아아.
내가 노도수에게 가겠다고 했을 때, 고한겸은 말렸었다.
자꾸만 자신은 엄마를 버릴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해 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넌 나 때문에 노도수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고, 그건 나 자신이 싫으니까 날 위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졸업식을 얼마 앞둔 날, 그렇게 싫어하던 노도수를 직접 찾아간 고한겸은 노도수와 꽤 오랜 시간 같이 있었고, 그 다음날부터는 나와 내 부모님에게 절대로 날 노도수에게 보내면 안 된다는 말을 일절 하지 않게 되었다.
여기 와서야 고한겸 역시 여기서 같이 지내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때문에 금세 녀석에게 미안해져버렸다.
"야."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데 지다 녀석이 날 불렀다.
고개를 들어 녀석과 눈을 맞추자 나도 모르게 심장 한쪽이 몽글몽글 거린다.
그러니까 이미 포기했다고, 난.
이 잘생긴 놈과 눈을 맞춘다고 해서 이렇게 두근거릴 필요 없다는 소리야.
"어깨...대신 빌려줄까...?..."
뜬금없는 가지다의 저 말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뭘...?....뭘 빌려주겠다고??
왜?...어째서??
넌 나 싫어하잖아.
"고한겸이...부탁했으니까. 올 때까지 달래주라고."
아아.
한겸이가.
"됐어."
됐어.
날 싫어하는 네게 억지로 위로받고 싶은 마음따위.
"그럼 내가 달래줄게."
언제 온 건지 저러코롬 말하고 내게로 후적 후적 걸어와 내 머리통을 자신의 배에 콕 넣어버리는 민준수.
그러니까 이 게이 놈은 더 싫은데.
"자장 자장 울지 마라~"
자장가냐?!
"잘도 웃는다~ 우리 다인이~"
자장가를 절묘하게 개사하는 민준수 때문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 너 때문에 울다가 웃었어, 새꺄.
엉덩이에 털 나면 책임져, 새꺄.
가지다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 지 몸을 획 돌려 가버렸고, 지다가 가자마자 녀석의 손에서 내 머리통을 빼낸 나는 준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가지다 어깨를 다른 여자에게 줄 바엔, 내 배를 주겠다...인가?"
내 말에 녀석은 저 얇고 예쁜 눈썹을 마구 꼼톨거리더니, 이내 픽하고 웃는다.
하지만 나는 봐 버렸어, 네 입술 끝이 떨리고 있는걸.
"바보냐? 내가 가지다를..."
"좋아하지?"
그러니까 난.
악랄한 마녀계는 아닌데 왠지 여자보다 예쁜 이 게이 녀석을 보고 있으면 괴롭히고 싶어진달까.
이유 없이 싫달까.
이것 봐.
이렇게 귀까지 빨개져버리니까.
이걸 귀엽다고 해야 할지.
"어..어떻게.."
"뭐, 여자의 감?"
"....!....."
"걱정 마. 나 입 가벼운 여자 아니니까."
금방까지 녀석의 위로를 받던 내가 몸을 일으켜 녀석의 어깨를 툭툭 치며 위로하고 있다.
것보다, 나와 동지라는 느낌 때문일까.
귀까지 빨개져 부끄러워하는 이 녀석이 사랑스러워 보이면서도 불쌍해져버린다.
어차피 가지다는 우리가 못 가져, 준수야.
그 녀석 안엔....노지나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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