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다시 시작된 악몽>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건 안된다는 말을 하는 거야. 굳이 매일 와야겠으면 조용히, 7시 넘어서, 큰소리로 고래고래 불러대지 말고 벨을 누르는 거야. 알았어?"
"그럼 인제 손잡아도 돼?"
"대답부터 해."
"응. 그럼 인제 손잡아도 돼?"
손을 못 잡게 하고 등굣길 내내 저러코롬 잔소리를 해댔더니 이 자식, 내 손이 잡고 싶어 죽겠는 모양이다.
걷는 내내 내 손만 쳐다보고 있다.
후우.
이 녀석을 정말 어째야 하는 거야.
"한겸아."
"응. 손잡아도 돼?"
내가 녀석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동글 거리던 눈을 반짝거리며 저러코롬 말한다.
하아.
그래, 잡아라. 잡아.
옜다하고 손을 내밀자, 번개처럼 내 손을 낚아채고는 헤헷-하고 웃는다.
그렇게 내 손을 잡고 싶었나.
뽀뽀도 허락 없이 하던 놈이...웃긴다.
"꼭 해보고 싶었어, 이다인 손잡고 등교하기."
"....아아."
어이 어이.
쪼물딱거리지 마.
"정말 정말 꼭 해보고 싶었어."
알았으니까.
"하핫- 기분 짱 좋아."
신이 난 머리통을 요리조리 흔들며 내 손을 쪼물딱거리는 한겸이 때문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
"여자친구 손은 부드럽구나."
쪼물락 쪼물락.
"여자친구 손은 딥다 작구나."
쪼물락 쪼물락.
"여자친구 손은...."
"아- 그만 좀 쪼물딱거려."
녀석의 손에서 내 손을 획- 빼내며 저러코롬 말했더니 녀석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진다.
...미치겠군.
"후우...한겸아."
"응, 여자친구야."
단박에 초승달 눈을 하고 웃는다.
제발 그 여자친구 소리 좀 그만두면 안 되겠니.
"넌 내 어디가 좋은 거야?...대체 어디가 좋길래."
"처음이었어."
"...처음....?..."
"나 무서워하지 않고 옆에 앉겠다고 손든 여자애...이다이니가 처음이었어."
"......"
"무서워하지 않아도 외계인 취급했으니까, 여자애들은."
...겨우 그걸로...?...
이봐 이봐 이봐.
그게 이유라면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2학년 올라와서도 또 나만 남자 짝꿍이랑 앉을까봐 풀 죽어 있었는데 이다인이 멋진 왕자님처럼 번쩍 손을 들어줬어."
보통....여자한테 멋진 왕자님이란 표현은 안 쓴다고.
"정말 정말 기뻤어. 학교 다니면서 기뻤던 적은 그때가 처음."
...뭐. 내 기억엔 없는 내가 한 행동이긴 하지만.
까놓고, 윤미한테 들었던 내가 너랑 앉으려고 했던 이유는 꽤 이기적이었고 말이지.
"그러니까 이제 다시 손잡아도 돼?"
헤죽-하고 웃으며 저러코롬 말을 잇는 녀석.
무슨 말을 해도 결론은 계속 손을 잡고 싶다는 거구나.
아무래도 이녀석은...내 손에 꽤나 집착하는 것 같다.
....
......
....
고한겸과 내가 사귄다는 소문은 금세 학교 내에 퍼졌고, 어느새 학교 공식 커플이 되어버린 나와 한겸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시도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아침에 잘 일어나기 힘들다고 늘 점심때가 돼야 등교하던 놈이 나와 사귀고부턴 꼬박꼬박 집 앞까지 나를 데리러 와 꽤 감동(?) 시키기도 했다.
한번 하지 말라고 한건 다신 안 하는 스타일이라 그 점이 꽤 마음에 들기도 했고.
고한겸과 사귀고부터는 일부러가 아닌데도 가지다를 볼 수가 없었다.
사귀고 첫날, 손을 잡고 등교하다 별관 계단에서 마주쳤는데, 나와 한겸이가 잡고 있는 손을 보고 고개를 들어 날 보길래 드디어 붙었냐는 둥, 이젠 쓸데없는 소리 안 하겠지라는 둥, 무슨 말을 할 줄로만 알았는데 그대로 우리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같은 학교, 같은 건물인데도 요상스러울 정도로 마주치지 않아 혹시나 가지다가 날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 때문에 우울하거나 괴롭지는 않다.
이미 가지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도 했고, 내 옆에 있는 예전엔 없었던 고한겸이란 존재가 꽤나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기도 하니까.
나 때문에 죽었던 가지다는 이미 이 세상엔 없고, 이 세상에 있는 가지다는 노지나의 남자이고 싶어 하니 내 선택지는 역시나 가지다가 아니란 거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모든 게 꿈이었다 생각하고 지금의 현실을 살면 그뿐.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때까지의 나는.
.....
.........
....
한겸이와 사귄 지 어느덧 일 년이 넘었다.
수능과 입시 경쟁에 치여 하루하루를 책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우리들은 여전히 사귀고 있고, 여전히 사이가 좋다.
숫자 천재인 고한겸은 외우는 것에도 대단한 재능을 보여 선생님들이 입을 모아 고한겸을 카이스트에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집까지 데려다 주는 한겸이와 손을 잡고 집으로 온 나는, 회귀 후의 내 인생 최대 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어째서 내 스무 살 때 있었던 일이 열아홉에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순 없지만, 지금 우리 집엔 노도수가 와있고 우리 아빤 예전처럼 노도수에게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는 소리만 새빠지게 해대고 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갚을 테니까...."
"말로만 갚는다고 하면 갚아지는 게 아니지 않소, 이동우 사장."
제집 소파처럼 편하게 앉아 우리 아빠에게 시린 소릴 내뱉는 노도수를 보며 옛날의 노도수가 떠올랐다.
"뭐하는 거예요?"
우리 아빠를 한번 보고 노도수를 보며 한겸이가 물었다.
노도수는 대답 대신 한겸이에게 오랜만이구나라고 말하고는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고한겸과 손을 잡고 있는 내 손을 쳐다보고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흐뭇한 미소가 아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그런 미소.
아아...나 이제야 생각난 건데, 노도수의 저 미소가 미친 듯이 싫었어.
"다음 달까지 말미를 주지. 이게 마지막이오. 어떻게 해서든 돈을 구하시오. 그게 힘들면 아까 내가 했던 말을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요."
천천히 몸을 일으킨 노도수가 우리 아빠에게 말하고 아빠는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집으로 갈 거면 태워다 주마."
한겸이를 보며 노도수가 저러코롬 말하자, 한겸이가 저 동글동글한 눈을 찡그리며 노도수를 본다.
"내 여자친구 아빠한테 무슨 협박을 하는 거냐고, 아저씨."
"그 아저씨라고 부르는 거 그만두라고 몇 번이나 말했냐."
"내 여자친구 아빠한테 왜 협박하냐고."
"아버지라고 해."
"내 여자친구 아빠."
저 죽어도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는 버릇은 절대로 고쳐지지 않는 고한겸이다.
고한겸의 적대가 가득한 시선에 노도수는 짧은 한숨을 쉬며 이건 일 문제라고 했고, 한겸이는 내 여자친구 아빠의 문제라고 했다.
"그래서, 네가 대신 갚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사채놀이 그만해, 아저씨. 착한 사람들 돈 등쳐먹는 짓 언제까지 하다간 지옥불에 떨어지고 말 거래....엄마가."
"네가 대신 갚을 거냐 물었다."
아아, 노도수는 고한겸이 천로에 와주길 바란다.
지금 이 시점에 한겸이가 우리 일에 끼어들면 한겸이는 어쩔 수 없이 천로로 가게 될 거다.
그건 안 돼.
우리 때문에 한겸이를 노도수의 밑으로 들어가게 할 순 없어.
"그만 가주세요. 돈이라면 어떻게든 기한까지 우리 아빠가 구할 테니까."
한겸이의 가슴팍을 밀며 노도수에게 말했다.
노도수는 예전의 그 특유의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봐 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좀 젊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기분 나쁜 눈빛이다.
"아버지, 우리 아저씨한테 돈 빌렸어?"
남자친구랍시고 우리 집에 온 첫날, 우리 아빠를 보며 아버지라 부르고는 말을 놓은 고한겸이 아빠를 보며 저러코롬 물었다.
뭔가 아버지와 아저씨의 자리가 바뀐 것 같구나, 얘야.
아빠는 침울한 표정으로 동업하던 아빠의 친구가 돈을 가지고 날라버린 얘기를 중얼거리다 이내 이건 너희들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며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다며 밖으로 나가셨다.
"하아...너도 이제 그만 가."
복잡해져오는 머리 탓에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 손으로 한겸이에게 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한겸이는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혼자잖아."
"엄마 퇴근 시간 다 됐어. 그러니까 걱정 말고 가."
"응. 그래도 지금은 혼자잖아."
날 빤히 쳐다보는 고한겸.
뭔가 동글 거리던 얼굴에 약간 색기가....
"아니, 나 있으니까 둘이네?"
씩 웃으며 혓바닥을 내밀어 아랫입술을 적시는 녀석.
진짜냐!
"야, 너-!"
"야한 짓 해도 돼?"
바보냐?! 바보지!
지금 이 상황에!
잠깐! 얼굴 들이밀지 마!
"키스만 할게."
"흡-!"
고한겸의 키스는 언제나 심장이 몰캉해질 만큼 뜨겁고 부드러웠다.
우리 집에서, 그것도 이런 심각한 상황에 발정하는 녀석이 꽤 어이없긴 했지만 언젠가부터 녀석의 키스는 기분 좋았고, 또 키스 정도는 어때라는 생각이 들어 녀석의 키스에 스스로 응했다.
그러니까 우리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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