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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다 원하다-34화 (34/51)

34화

당연히 믿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날 상상력이 풍부한 미친 거짓말쟁이로 전략시켜버린 가지다의 표정과 행동은 역시 꽤 참기가 힘들다.

"너 혹시 물 떠놓고 이상한 주문 같은 거 외우는 거 아니냐? 내 꿈속에 매일 너 나오게 해달라고."

고개를 짤짤 흔들며 "그건 제발 참아주라."라고 말한 가지다는 울 것처럼 서있는 나에게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얼굴 조금 예쁘다고 울면 다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말지. 나 여자 우는 거 진짜 짜증 난다의 타입이니까. 그리고...역시 나 너 좋아하는 게 아냐. 그냥 니가 내 꿈에 자꾸 나오고, 금방 키스도 꽤 기분 좋아서 착각했을 뿐이니까."

...그래.

더해도 좋아.

어차피 미친 애 취급받을 거란 생각은 했으니까.

안아보기도 했고, 키스도 했고, 내 첫 남자가 너라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나이도 나이고.

이미 날 돌은 아이로 생각하는 너한테 뭘 기대하는 것도 힘들겠지.

뭐, 난 이제 됐어.

쿨하게 네가 노지나와 잘 되게 빌어줄 마음 있으니까 나.

체념한 듯 가만히.

녀석이 날 같잖아하든 말든 그저 입을 꾹 닫고.

쉬는 시간 종이 울릴 때까지 그렇게 서 있었다.

가지다는 가시 박힌 말을 뱉은 후 몇 개의 담배를 더 피워댔고,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입에 물린 담배를 버리고 인사도 없이 옥상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옥상 문을 열고 내 심장에 큰 비수를 꽂았다.

"만약 그게 진짜라도....정말로 어이없긴 하지만 혹시라도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다른 애들한테는 그 얘기, 하지 마라."

"......."

"특히 지나한테는."

아아.

그렇구나.

몇 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한 놈의 결론은....이게 사실이든 거짓이든 노지나가 이 사실을 알아선 안된다는 거구나.

역시, 지금의 가지다에겐 노지나밖에 없는 거구나.

뭐, 괜찮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까까지 끈질기게 나올 것 같은 눈물이 어째서인지 쏙 들어갔다.

아무런 슬픔도,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고 그저 쌔-하다.

응, 지금 난 쌔하다.

"다이나...?..."

어째서 알고 옥상에 왔는지, 동글 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추는 고한겸.

뭔가 녀석의 해맑은 눈동자를 보자, 나도 모르게 몽글몽글 설움이 차오른다.

"한겸....흑..."

"에- 다이나?!"

녀석의 품에 폭삭 안겨 서럽게 우는 난.

가지다에게 입은 상처를 고한겸으로 치유받으려 한다.

어쨌거나 이 동글 거리는 아이는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지는 치유계이고, 또 내가 우는 이유 따위 묻지 않고 그저 가만히 내 등을 토닥토닥 거려 주니까.

얼마나 녀석의 품에서 울었을까.

내 눈물 때문에 녀석의 셔츠가 꽤나 젖은 걸 보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셔츠가...."

"다 울었어?"

응. 그러니까 네 셔츠.

대답 없이 녀석의 젖은 셔츠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녀석이 고개를 숙여 자신을 셔츠를 한번 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생긋 웃는다.

"다 울었어?"

대답을 하지 않으면 백 번이라도 물어볼 기세다.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의 젖은 셔츠를 손으로 잡아당겼다.

너 축축하겠다.

"응. 이다이니 다 울었다아-"

"....미안해. 나 때문에 축축하지."

"응응. 괜찮아. 이제 다 울었으니까."

생긋생긋.

잘도 웃는다.

그나저나,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온 거냐, 혹 위치 추적기 같은....

별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며 내 몸 어딘가네 붙어있을지도 모르는 위치 추적기의 행방을 흘끔거리며 찾고 있는데, 울어서 팅팅 불은 내 눈가를 엄지로 부드럽게 만지며 말하는 녀석.

"왜 울었는지는 궁금하지만 안 물어볼게요. 그래도 말하고 싶으면 들어 줄게요."

....넌...

왜 울었냐는 질문을 참말로 요상하게도 하는고나.

"지다가 너 여기서 울고 있다길래 반짝하고 날아왔는데, 안 울고 있어서 가지다가 거짓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나 보자마자 울어버려서 거짓말이 아니게 돼버렸어."

"......"

"...다이나.....내가 눈물 나?"

"......"

"울지 않고 있었는데 나 보자마자 깜짝하고 울었어...내가 울렸어....왜야...?....."

"...아니야...너 때문이 아니라."

"어쨌거나 나 때문에 울었으니까, 내가 울렸으니까 미안합니다."

아니 아니.

너 바보냐? 이건 네가 미안하다고 할 문제가...

그것보다, 가지다가 말했다고? 내가 여기 있는걸..?...

지다 넌 무슨 생각인 거냐.

정말로 내가 너한테 그만 찝쩍거리고 고한겸이랑 알콩달콩 행복하길 바란다거나, 아님 이것저것 나 때문에 귀찮으니까 그만 귀찮게 하고 고한겸의 옆에 붙길 바란다거나.

이러나저러나.

요러나그러나.

어쨌든 내가 고한겸과 붙길 바라는 건가, 가지다는.

"다이나."

"...응....?..."

"이제 30분 남았는데. 집에 갈 시간."

아아.

벌써 6교시였던가.

난 대체 몇 시간을 재낀 거냐.

"30분 더 기다릴까?"

동글 거리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묻는다.

아아.

어쩌면 앞으로의 내 인생엔 이 아이가 좋을지도 몰라.

혹시나 옛날과 똑같이 우리 아빠가 날 노도수에게 돈대신 넘겨줘도 내가 자기 아들의 여자친구라면 날 데리고 있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거다.

한겸이라면, 지금 좋아하진 않아도 충분히 좋아질 만큼 매력이 있고, 또 노도수보단 몇백만 배 나아.

어차피 가지다의 여자가 될 수 없다면...가지다가 노지나와 행복한 걸 참고 보는 게 내 업보라면...이 아이의 옆이 가장 좋을지도 모른다.

"28분 남았다아-"

"좋아."

시계를 보며 저러코롬 말하는 고한겸에게 애써 웃으며 말했다.

한겸이는 꽤 놀란 얼굴로 나를 봤고, 이내 저 동글 거리는 눈을 초승달로 만들며 소리친다.

"와싸로-! 이다인은 이제 고한겸 마누라다아-!"

.....

........

......

다음날 아침.

아니, 아직 밖에 해도 뜨지 않았으니 새벽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여자친구야- 학교 가자아-!"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되는 목소리에 저절로 눈이 번쩍 떠졌다.

"여자친구야- 학교 가자아-!"

꿈벅.

"여자친구야- 학교 가자아-!"

꿈벅꿈벅.

"여자친구야- 학교 가자아-!"

꿈벅꿈벅꿈벅.

"여자친구야- 학교...."

벌떡.

몸을 일으켜 눈썹이 휘날리도록 2층 내 방에서 뛰어 내려와 현관문을 벌컥 열고 녀석의 멱살을 잡아 집안으로 들여놓았다.

고한겸의 소란에 깨버린 엄마와 아빠는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고, 난 지금 내 머리가 산발이 되었고, 잠옷 바람이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녀석의 멱살을 짤짤 흔들어대며 짜증을 내고 있다.

"너 말이야! 지금이 몇 신 줄 알고...아니, 것보다 동네 사람들 다 깨게 그렇게 큰 소리로..."

"다인아...?...누군지부터 얘기해주겠니?"

급하게 입은 가디건을 감싸며 엄마가 말했다.

"이친구...신문에 났던 친구 아닌가?"

안경을 고쳐 올리며 말한 아빠 때문에 고한겸이 신문에도 났었다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겸이는 이미 어릴 때부터 수학천재로 한국에서 꽤 유명한 녀석이었단다.

"어제부터 다이니 남자친구인 고한겸입니다."

생글 생글 웃으며 엄마가 내미는 녹차를 받아들고 저러코롬 말하는 고한겸.

엄마는 내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기뻐했고, 아빠는 상대가 유명한 천재소년이라 기뻐하는 것 같았다.

"너 말이야. 새벽부터 실례라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데 녀석이 동글 거리는 눈을 깜빡 거리며 내게 말했다.

"응. 여자친구는 머리가 실례야."

그제야 자고 일어나 사자머리가 되어버린 내 헤어스타일을 인지하고 두 손으로 머리를 눌렀다.

"이건 너 때문에 급하게 일어나서!"

"응응. 너무 참기가 힘들어서 깜짝하고 빨리 눈이 떠졌어. 너무 빨리 같이 학교에 가고 싶어서 빨리 와버렸어."

저러코롬 말하고 뒤통수를 긁적이며 헤헤 웃는 녀석을 보며 엄마는 귀엽다고 꺄꺄거리셨다.

아들이 없어 귀여운 남자아이에 늘 약한 엄마였다.

근데 빨라도 너무 빠른 거 아니냐?

이제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고.

아침 보충도 없는 우리 학교에 이렇게 일찍 갈 이유 따위 없단 말이다.

엄마가 준 녹차를 후우-하고 불어 마신 한겸이가 다이니랑 손잡고 학교 가도 뭐라고 안 하실 거죠?라며 엄마 아빠를 보고 묻자, 엄마가 웃으며 당연히 괜찮지.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자식은 내 의지 따윈 전혀 상관이 없는 모양.

난 이 어이없고 정신없는 상황에 저절로 짜증스러운 한숨이 쉬어졌다.

"딸기 잠옷은 처음 보는 거야."

동글 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며 한겸이가 말했다.

"보지 마!"

한겸이의 뒤통수를 퍽 소리 날 정도로 갈기고 씻고 내려 올테니 기다리라고 말한 뒤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다.

보통 사람과는 좀 많니 다른 저 녀석과 사귄 시점에서 이런 일은 각오했어야 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런 새벽에 집 앞에서, 그것도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큰소리로 학교에 가자고 소리를 질러 쌌는 고삐리가 세상에 있을 거라는 상상을 했겠냐고, 내가.

스물일곱 평생을 살고 다시 열여덟이 되었지만, 저런 녀석은 정말 처음이다.

어이가 없어 저절로 피식피식 나오는 웃음을 참아가며 씻고 나왔다.

언제 올라온 건지 고한겸이 내 방 앞에서 우물쭈물하고 서있다가 씻고 나온 날 보며 급 당황을 하며 두 손을 휘휘 젓는다.

"허, 허락 없이 안 열어봤어. 어머니가 올라가 보라고 해서. 진짜야, 절대로 방문은 열지 않았어. 온통 핑크색 방이 실제로 있다는 것도 몰라."

아아.

열어봤구나, 이 녀석.

"아빠가 직접 페인트 사서 칠해준 거야. 뭐, 딱히 핑크색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갈색을 싫어해서."

방문을 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 들어오라는 고개짓을 했다.

내 방 거의 모든 가구가 핑크색인 건 정말로 갈색이나 어두운 계열을 색을 어릴 때부터 싫어한 날 위해 아빠가 직접 페인트칠을 해줬다.

고한겸 덕분에 잊고 있던 추억이 새록새록 생각났다.

결론적으론 날 돈대신 노도수에게 보내긴 했지만 아빠는 외동딸인 날 누구보다 사랑해줬다.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것, 해달라는 것은 무리를 해서라도 해주려고 노력하셨다.

그러고 보니, 회귀를 하고 난 후 아빠와 엄마에게 꽤 차갑게 굴었다.

지금의 부모님은 그때의 부모님이 아닌데.

아니, 그때의 부모님이라도 이젠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정말로 집이 망해버린 시점에서 노도수에게 가지 않았다면 아빠의 돈을 대긴 갚기 위해 난 술집 따위를 전전하는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르니.

부모님 입장에선 아마 최선이었을 수도.

내 입장에선 어떤 쪽이든 같지만, 아빠는 내가 좀 더 안전한 삶을 살기를 바라셨겠지.

아아.

왠지 아빠와 엄마를 안아주고 싶어지는데.

멀뚱멀뚱 서있는 한겸이를 잊어버리고 저런 생각을 하며 무의식적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녀석이 같이 있다는 게 기억난 건 이미 잠옷 윗옷을 벗은 채, 블라우스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꺄아."

네가 할 소리냐?!

고한겸은 브래지어 차림의 내가 고개를 돌려 녀석을 보자 저러코롬 말하며 두 손으로 눈을 가렸고, 당황한 내가 서둘러 블라우스를 입고서야 눈에서 손을 때며 내게 말했다.

"여자친구 노출증이야?"

"어디가!"

"속옷도 핑크다아-"

"그런 거 말하는 거 아냐!"

하아.

어째서 이 녀석과 있으면 이렇게 목소리가 높아지는 건지 모르겠다.

당황하면 무표정이 되는 스타일인데 어째서 이 녀석과 있으면 흥분부터 하고 보는지 정말 모르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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