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응. 그런데 윤미는?"
윤미뇬이 우리들의 두어 걸음 뒤에서 아까부터 서 있었던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나의 물음이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찍도 물어본다 하며 나와 고한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윤미가 남들 고백하는 장면은 처음 본다라며 뭔가 부끄럽고 껄적지근하다고 말한다.
도대체 어디의 어느 부분이 껄적지근한거냐.
그러거나 말거나,
가운데에 있던 윤미를 지나 내 옆쪽으로 온 고한겸이 내 손을 잡는다.
무려 깍지를 끼는 놈 때문에 내 얼굴은 점점 굳어지고 있다.
"근데 너, 진짜 회장님 아들이었어? 완전 대박! 어째서 여태껏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던 거야?"
"...숨긴 적 없는데. 이미 알고 있는 애들도 많고."
동글 거리는 얼굴로 제법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고한겸.
근데 손 좀 놓으면 안 되냐? 땀 난다, 야.
"에- 근데 왜 난 전혀 몰랐지?"
"넌 알고 있는 애가 아니니까."
"뭐야? 그게....이야, 고한겸이 그렇단 말이지?... 이야, 완전 대박. 이거 완전 노지나랑 같은 급인 거잖아?!"
"같은 급 아니야. 같은 급이라고 하지 마."
"뭐 어때, 칭찬인데. 그건 그렇고 너희들 이제 사귀는 거냐?"
윤미가 깍지를 끼고 있는 고한겸과 내 손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저러코롬 말하고, 고한겸은 나와 윤미가 벙찔만한 말을 내뱉는다.
"나 아직 고백 안 했는데."
아직 안 했다고?!
그럼 내가 들은 건 뭐야?!
난 뭐 때문에 이 분위기가 불편해지고 고한겸이 부담스러워진 건데?!
"이다이니가 좋아졌나 봐, 나."
하며 허락 없이 날 끌어안았던 놈은 대체 어느 집, 어느군 이냔 말이다.
"벼엉- 그럼 아까 그건, 다이니가 좋아졌니 어쩠니는 고백이 아니라 혼잣말이냐?!"
다행히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
윤미뇬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근데, 너희들 내 이름의 받침을 일부러 빼고 부르는 건 그만둬줄래?
"벼엉은 너다, 벼엉-아. 고백은 근사한 곳에서 근사하게 입고 근사하게 하는 거야. 그런데 난 근사한 꽃도 없고."
근사 근사 근사 근사.
그만 좀 하지.
애초에, 반도의 남자 고등학생이 고백을 그런 식으로 할 것 같으냐?!
윤미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지 제발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가지고 살라고 거품을 물어댄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한겸은 내 깍지 낀 손에 힘을 주며 나를 내려다보고 웃는다.
"이다이니는 보통 사람 아니니까, 난 다이니에 관해선 보통이 될 수 없어."
"그 이전에 넌 이미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거든?!"
내가 하고 싶은 대사를 알아서 척척 날려주는 윤미가 참 고맙다.
어느덧 집 앞까지 온 나는 바로 옆집으로 들어가는 윤미에게 손인사를 하고 멀뚱 멀뚱 날 내려다보고 있는 한겸이에게 데려다 줘서 고마우니 너도 그만 가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자식.
가지는 않고 날 가만히 쳐다본다.
"안 되겠다, 그렇지?"
뜬금없이 뭐가.
"하아- 지금 무지무지 굿바이 키스하고 싶은데 다이니 집 앞이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거지, 응?"
녀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손으로 입을 가리는 나.
이건...그래.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 거다.
정당방위라고 해야 할까.
한겸이는 그런 나를 보고 조금 시무룩한 얼굴이 되는가 싶더니 이내 생긋 웃으며 내일 보자고 말한다.
크게 손을 흔들며 걸어가는 한겸이를 빤히 쳐다보다 집으로 들어왔다.
....
.......
....
다음날.
웬일로 아침 일찍 등교한 한겸이가 오전 수업 중인 선생님께 칭찬 아닌 칭찬을 듣고 있다.
"이렇게 아침에 얼굴 보니 얼마나 좋으냐?"
"응. 응. 좋아하지 마. 난 선생님의 마음에 응답할 수 없어."
고개를 들지 않고 종이로 뭔가를 만드는 데에 열중하며 버릇없이 선생님께 반말을 찍찍하는 고한겸.
하지만 선생님은 어째서인지 그런 고한겸을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쳐다보며 이거 서운한대라는 농을 하신다.
설마 저 노처녀 선생님이 고한겸을 노리는 건가?라는 생각도 잠시.
갑자기 다했다! 하고 소리를 지르는 고한겸 때문에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렸다.
"자, 선물."
아침부터 뭔가를 새빠지게 만들더니 이거였냐.
나는 고한겸이 내미는 종이 장미꽃을 멍하니 내려다봤고, 빨리 받으라고 재촉하는 고한겸.
응, 그러니까 이걸 왜.
자꾸만 받으라고 해 얼결에 받긴 했는데....
이걸로 뭐 어쩌라고.
"흠흠. 그럼 꽃은 받았으니까."
하며 벌떡 일어나 내게 손을 내미는 고한겸.
야. 지금 수업시간인데.
"고한겸의 여자친구가 되어주세요."
...어...어이 어이 어이.
지금 수업시간이라고.
....
.....
...
고한겸이 아침 수업시간에 내게 고백했다는 사실은 삽시간에 전교에 퍼지고.
아마도 고한겸은 생각보다 꽤 유명한 아이였나 보다.
고한겸이 고백한 여자애를 보려고 쉬는 시간마다 우리 반이 벅적벅적 한 걸 보니.
일단 도망을 치긴 했는데.
수업을 재낀 건 또 처음이라 이 넓은 학교 안 어디에 숨어야 할지 막막하다.
학교 수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 대답해줘야 한다고 웃는 얼굴로 날 압박하는 고한겸 때문에라도 교실에 앉아 있을 수 없어.
쉬는 시간에 화장실로 숨었다가 수업 종이 울리고 한참만에야 슬금 슬금 나왔다.
옥상은 학생 금지라 잠겨 있으려나.
별관 4층 쪽으로 슬금 슬금 올라가 옥상 문을 잡았다.
생각과는 달리 열려 있어 속으로 러키를 외치고 들어갔다.
그런데.
위험하게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가지다가 보여.
왠지 힘이 없어 보이는 뒷모습은 기분 탓인가.
근데 쟤 저기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상식은 있는 거야?!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모양인 가지다는 나를 보자마자 놀란 얼굴이 되고.
"위험하잖아."
나도 모르게 녀석의 뒤로 가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건 놀래서.
정말로 위험하니까.
"응."
저러코롬 대답하고 가만히 있는 녀석.
녀석의 까만 머리통이 반짝 반짝거린다.
몰랐었는데 너 머릿결이 좋구나....만져보고 싶을 만큼.
"내 목 조르는 니가 더 위험한 거 같은데."
그제야 핫, 하고 녀석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콩만한게 발랑 까져가지고, 수업도 재끼냐?"
"...너야말로."
"우린 오늘 수업 없어."
"....."
"우리 수업 담당하는 윤실장이 영감 따라 풍로에 갔거든."
아아, 잊고 있었다.
여기의 천로와 풍로는 사이가 좋았지.
민무영의 아들 민준수가 여기서 같이 학교를 다닐 만큼.
"항상 그렇게 위험하게 앉아서 담배 피워?"
여전히 아슬 아슬하게 난간에 걸터앉아있는 녀석에게 물었다.
내려오라고 새빠지게 말해봤자 듣지 않을 것 같다.
"뭐, 머리가 복잡할 때 한정?"
담배를 튕겨 버린 후 난간에서 내려오며 저러코롬 말하는 녀석.
"넌 여기 왜 왔는데? 설마 나 만나러?"
"전혀. 너 있는 줄도 몰랐어."
"농담이야."
피식 웃는 녀석의 얼굴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무슨 일이 있나.
무슨 일이라고 해봐야 또 노지나의 일이라던가.
또 김운을 위해 노지나를 김운과 함께 있게 해주려고 애썼다던가.
노지나의 일이라던가.
노지나의 일이라던가.
뭐야...어차피 가지다가 이런 얼굴을 할 이유는 노지나밖에 없잖아.
"무슨 일 있었어..?..."
조심스럽게 묻는 날 빤히 보던 가지다가 한참만에 입을 연다.
"너야말로 있잖아? 일."
아아.
아침 고백의 소문이 거기까지 갔구나.
역시 발 없는 말은 천리를 간...
"그래서. 이제 진짜로 사귀는 거냐?"
금방 피워놓고 또 담배 하나를 빼 물며 묻는 가지다.
아니야.
근데 어째서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질 않는다.
후우- 하고 내뿜는 담배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녀석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춘다.
"야."
"응?"
"내 꿈에 그만 좀 나올래?"
....응....?...
"너 때문에 진짜 죽겠거든, 요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