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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다 원하다-31화 (31/51)

31화

나는 지금.

가지다의 두어 걸음 뒤에서 녀석을 따라가고 있다.

한겸이가 석고상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만, 집에 데려다 줄 테니까 가자는 가지다의 말에 몸이 먼저 움직여버렸다.

"집 어디야?"

길거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물며 녀석이 물었다.

"그렇게 안 멀어. 저기 사거리께 지나서..."

"그럼 걸어서 가자. 택시 타기 애매하네."

택시 타면 5분도 안 걸릴 거리를 걷자고 하는 놈을 보니, 나도 모르게 또 심장이 쿵쾅쿵쾅거려.

아무 말 않고 있었더니 녀석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잇는다.

"사실은 나 지갑 안 가지고 나왔으니까."

아아.

그럼 그렇지.

뭘 기대하고 있는 거야, 이다인.

저 녀석은 스물일곱의 가지다가 아니라고.

"택시비, 나 있는데."

"병신이냐. 여자한테 얻어 타게."

여자한테 택시 얻어타면 병신인 거냐?

별 이상한 논리도 다 있구나.

그래도...

나와 같이 걷고 싶어 걷는 게 아니라도 괜찮다.

지금 무지...아니, 꿈꾸는 것처럼 좀 많이 행복하니까.

이렇게 두어 걸음 뒤에서 걷는 내게 옆으로 오라며 아무렇지 않게 내 어깨를 끌어당기는 가지다 때문에.

걸음이 느린 나와 일부러 보폭을 맞추며 걸어주는 가지다 때문에.

몽글몽글.

심장이 몽글거려.

"이다인."

"...응..?..."

"고한겸이랑은 언제부터 사귄 거냐?"

"엑-?! 사귀지 않았어."

내 대답이 의외라는 듯, 눈을 약간 크게 뜨는 가지다.

"정말이야. 네가 멋대로 마누라니 어쩌니 해댄 거지, 한겸이랑은 정말 그냥 친구라고."

"헤에-?....그럼 사귀지도 않는데 키스하는 사이? 그렇게 안 봤는데 발랑 까졌네, 콩만 한게."

헉, 설마 아까 본 거야?

"그건!"

"뭐, 나랑은 상관없지만."

저 한마디에 풍선 안에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심장 안의 바람이 빠져버렸다.

나 좀 우습다.

가지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구름위를 걷는 것처럼 붕 떴다가 한순간에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입안 가득 씁쓸한 느낌이 찬다.

담배가 피우고 싶어질 만큼.

"내가 말이야.....요즘 자꾸 이상한 꿈을 꾸거든?"

꿈이라면...내가 나온다는.

진짜 가지다와 나의 꿈?

아니, 지금 이 녀석도 진짜는 진짜지.

"근데 그 꿈이....좀 이상한데 말이야."

"...뭐가 이상한데?"

"...내가 널 보는 눈이."

"......"

"그리고 니가 날 보는 눈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는 지다.

또다시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기 시작하고.

"내 꿈에 나오는 너는....여기가 아파."

자신의 심장께에 오른손을 가져다 대며 저러코롬 말한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꿈인데 꽤 현실감이 있어. 그래서 그 꿈을 꾸고 일어난 날은....여기가 아파."

"......"

"그래서 궁금한데."

"......"

"니가 왜 내꿈에 나오는 건지."

"...."

"너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냐...?..."

진심으로, 저러코롬 진지한 얼굴을 하고선 내게 묻는다.

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달빛인지 가로등 불빛인지 모를 빛에 반짝거려 심장이 미친 듯이 발광질을 해댄다.

"알려주면....믿을래...?..."

넋을 잃고 녀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나도 모르게 뱉어낸 말이었다.

그러니까 머리보다 먼저 입이 움직였다랄까...

내 물음에 녀석의 잘난 눈썹이 약간 움직였다.

"내가 말하면...거짓말 아니라고 믿어줄래?"

나 역시 진지 포스를 하고 녀석을 쳐다보며 말했다.

잠시 후,

지다가 입술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는 그때.

♬♩♪♬♩♪♬♩♪♬♩♪♬♩

지랄 맞은 타이밍으로 지다의 휴대폰이 울리고, 녀석은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단박에 전화를 받아.

"어."

뭔가 부드러워진 얼굴에 약한 미소까지.

언젠가 내게 저런 얼굴을 한 적이 있었다.

"왜 혼자야? 운이는 어디 가고....뭐? 아, 진짜 그 자식."

대충의 전화 내용으로 유추해보자면, 고한겸이 말했던 가지다의 참기 모드가 오늘도 발동한 모양인데.

제 친구인 김운과 노지나를 같이 있게 해주려고 자신의 원룸에 밀어 넣고 자신은 지갑도 없이 트레이닝복 바람으로 갈 데가 없어 클럽에 왔던 건가 보다.

그래서 아까 불같이 화를 내고 사라졌는데도 클럽 뒤쪽에서 나타난 거구먼.

"기다려. 금방 가."

저러코롬 말함과 동시에 몸을 돌리다가 전화를 끊어 주머니에 넣으며 두어 걸음 걷고서야 내가 생각났는지 걸음을 멈추는 가지다.

이곳에서도 난....첫 번째가 아니군.

내가 첫 번째이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다.

상상 속에서는 몇 번이고 노지나보다 가지다를 먼저 만나 그를 내 것으로 만들었었다.

다 부질없는 짓인걸....

그녀의 것이 아닌데도 녀석의 머리엔 온통 그녀뿐이잖아.

아아- 이거 뭔가.....아픈데.

심장이 터질 것처럼.

걸음을 멈춘 가지다가 몸을 돌려 나를 보고, 곤란한 얼굴로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정도는 예언가가 아니라도 알 수 있어.

애써 최대한 밝게 웃으며 선수를 쳤다.

"여기서 금방이니까, 동네니까 위험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가봐. 데려다 줘서 고마웠어."

고맙다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여기 오고부턴 가지다에게 이상하리만치 우는 모습을 많이 보였으니까, 녀석이 날 울보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참을 소리 죽여 울다가 이쯤이면 멀리 가버렸겠지 싶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어댔다.

"흐윽- 흑...흐윽."

회귀를 해서까지 이렇게 힘든 걸보니, 아마 나 벌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노지나의 남자를 빼앗은 벌.

가지다를 죽게 한 벌.

나는....앞으로 얼마나 더 이렇게 아파야 할까.

차라리 사라지는 게 나아.

이런 회귀, 내가 원했던 게 아니야.

그러다가 문득.

가지다가 없는 세상에서의 삶을 생각하자 숨이 턱 막힌다.

그건 지금보다 더 지옥이잖아.

절대로 싫어.

이렇게 아파도 못 보는 것보단 나아.

그런 생각이 들자, 지금 이 아픔도 꽤 괜찮아진다.

이 고통이 현실이란 느낌을 들게 하니까.

가지다가 살아있는 현실.

내가 아직 노도수의 것이 아닌 현실.

그래, 투정 부릴 때가 아니야.

잃어버렸던 20대를 내 스스로 찾는 거야.

스윽 스윽.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쭈그리고 앉아 울었는지 다리에 감각이 없어졌다.

순간, 휘청거리는 내 몸을 잡아채는 손 한 개.

고개를 돌리자, 동글 거리는 얼굴로 고한겸이 날 내려다보고 있다.

녀석을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짧은 한숨이 흘러나오고,아아...가지다이길 바란 거냐, 난.

"개미랑은 데이트 끝났어?"

응...?..갑자기 개미라니.

"아까부터 쭈그리고 앉아서 개미랑 데이트하길래 기다렸어."

아아.

언제부터.

것보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지다가 전화했어. 너 데려다 주라고."

독심술이라도 쓰는 듯, 내 궁금증에 대한 대답을 저 동글 거리는 눈을 하고는 말한다.

"나 분명 너한테 내가 올 때까지 그 앞에 석고상처럼 있으라고 말했어."

응. 그건 미안.

"근데 가지다랑 도망가서 혼자 개미랑 데이트하고 있었어."

응. 도망간 건 아니지만, 개미 따위랑 데이트한 적도 없지만, 그래도 미안.

"이젠 가지 마?"

두 손으로 내 뺨을 잡아 들어 올려 자신과 눈을 맞추게 하고 말을 잇는다.

"내가 있으라고 하면 거기 그냥 있어야지 돼? 인제 가지 말기야?"

응...이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내 입술에 또 쪽하고 입술을 부비는 녀석.

그러니까 이런 거 허락한 적 없어.

"없어져서 걱정했어. 걱정하니까 머리가 지끈 지끈거렸어."

"...미안..."

"난 왠지 이다이니가 내 눈에 없으면 지끈 지끈거려. 근데 내 눈앞에 있어도 마찬가지로 지끈지끈해."

그건 또 뭔 소리...

순간.

날 자신의 품에 넣고는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꽈악 안아버리는 한겸이놈.

야, 숨 막혀.

숨 막힌다고.

"자꾸만 자꾸만 이렇게 하고 싶어서, 자꾸만 자꾸만 욕심이 나서...그래서 지끈 지끈거려."

"저기, 숨막..."

"좋아졌나 봐."

"......"

"...이다이니가 좋아졌나 봐, 나."

".....응...알겠으니까 좀 놔줄래? 나 숨 막혀."

녀석의 품에서 힘겹게 빠져나오려 애쓰며 말했다.

녀석은 날 놓아주는 대신 팔의 힘을 약간 뺏다.

아아.

나 지금 적잖이 당황했나 보다.

얼굴에 힘이 안 들어가.

분명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있겠지.

원래 당황하면 할수록 무표정한 얼굴이 되는 나였다.

녀석의 팔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 뜬금없는 갑작스러운 고백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이나."

"응. 그런데 윤미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리는 것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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