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고한겸 vs 가지다>
두 놈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쏠리고, 쪽팔림이 극에 달아 얼굴이 미친 듯이 뜨거워졌다.
나는 슬금 슬금 몸을 옮겨 고한겸의 등 뒤에 숨으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한겸이에게 말했다.
"너 때문에 웃었잖아. 제발 보통 사람들의 대화를 하라고, 보통 사람들의."
그러거나 말거나, 고한겸은 자신의 등 뒤에 숨은 내가 귀엽다며 까르르 웃었고,
"뭐 하냐, 둘이...?...."
어이없는 얼굴을 하며 저러코롬 말하는 지다 놈.
그러게, 뭐 하는 걸까.
원래 쿨한 성격에 얼음마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잘 웃지 않고, 잘 울지도 않는 나였는데 회귀를 한 뒤부턴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
"영감은 만나고 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는 건 좀 아니지 않냐?"
내 손목을 덥석 잡으며 가자고 말하는 한겸이를 보고 저러코롬 말하는 지다.
"응....싫은데. 내 친구 납치 안 했으면 싫어도 10분 그거, 참고 만나주려고 했는데 납치했으니까 싫어."
"야."
"안 한다고 했어. 엄마랑도 약속했고, 벌써 여러번 말했어. 난 천로에 안가. 난 아빠 없어. 아저씨는 날 엄마한테서 뺏어갈 수 없어. 난 엄마 거야."
그러다가 뭔가 몸을 흠칫하더니,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잇는 고한겸.
"아니야, 내가 엄마 거라는 말은, 응! 그러니까. 아니야, 아니야. 잘못 나온 거야. 나 마마보이 아니니까, 그거 잘못된 소문이니까."
응.
진정해.
"나는 정말로 마마보이 같은 거 아니니까, 오해하면 안 돼?! 전부 다 오해해도 다이니 넌 오해하면 안 돼, 응? 오해하지 마?!"
진정하라고.
"나는 정말로."
진정하라니까.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소리치려는 순간.
"진정해."
낮은 목소리로 고한겸에게 말하는 지다.
우아, 지금 똑같은 생각을.
그런데 그것도 잠시.
"네 마누라 오해하는 거 아니니까 진정하라고. 그리고 네가 천로로 간다고 해서 아줌마한테서 널 빼앗는 게 아니야. 아줌마가 영감에 대해 너한테 뭐라고 떠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영감은 그저 네가 영감 아들이니까 천로에서 일을 해줬으면 하는 거라고. 너 암산이나 계산 쪽으로 거의 천재니까. 그리고... 네가 천재든 아니든 다 떠나서, 아버지니까 당연한거 아니냐? 천로는 영감이 제일 처음 맨손으로 이뤄냈던 거니까 당연하잖아, 그런 거 아들에게 주고 싶은 건."
나보고 고한겸 마누라라고 하는 것도 빡치는데 아들인 고한겸을 천로에서 일 시키고 싶어 한다는 가지다의 말은 더 빡친다.
노도수가 천로에다 뭘 지어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불법 카지노, 불법 비밀 호텔.
우리나라에서 절대 해선 안되는 일들을 한다고.
천로가 대한 그룹 사유지라는 이유로 그 땅엔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지.
그뿐인 줄 알아?! 법치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총을 들고 다닌다고, 그것도 불법으로!
거기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 돈 대신 날 데려가고, 감금하고, 겁탈하고....
그런 곳에, 그런 위험한 곳에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떠민다는 게 말이 돼?!
그것도 아버지란 작자가?!
로열 클레스의 녀석들이...물론 가지다도 포함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한 그룹으로 들어가 노도수의 밑에서 일하는 건 그래.
내가 알고 있는 그들은 모두 천로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좀 위험하긴 하지만 가지다는 꽤 능력 있는 대표 이사였고, 강태산은 실력 좋은 경호원이었으며, 김운은 노도수가 가장 민감해하는 불법 카지노의 책임자였다.
모두 나쁜 쪽의 능력자들이긴 했지만(강태산은 빼놓고라도)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일들을 대단하리만큼 잘 해냈다.
노지나 역시 여자로서는 드물게 조직원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고, 때문에 대부분의 조직원들이 그녀를 따랐다.
만약 가지다 말처럼 고한겸이 진짜 숫자 천재라면 고한겸을 자신의 비리 구역에 데리고 오고 싶어 하는 건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의 일을 물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노도수는 지금, 자신의 일에 필요하니까 핏줄 운운하며 아직 열여덟 살밖에 안된 고한겸을 어둠의 길로 끌고 가려는 거라고.
그건 너무 비열하잖아.
그건 한겸이와 한겸이 엄마한테 너무한 거잖아.
"그러니까."
라는 가지다의 말을 급자기 끊어버리는 나.
"절대로 안 돼!"
어째서인지 머리보다 입이 먼저 움직였다.
내 외침에 두 놈이 동시에 날 쳐다보고.
"대한 그룹이! 천로가! 노도수 회장이 무슨 일을 하며 먹고사는 지 정도는 누구라도 알아! 그 일이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도! 그런 악의 소굴에 한겸이를 집어넣겠다고?! 진짜 아빠라면 그럴 리 있어?!"
속사포처럼 쏟아낸 내 말에 전혀 다른 얼굴이 되는 가지다와 고한겸.
동글 거리는 얼굴로 싱긋 웃는 고한겸과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노골적으로 불쾌한 얼굴을 하는 가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러거나 말거나.
하고 싶은 말은 끝까지 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나.
"진짜 아빠라면 절대 그렇게 안 해! 정말로 한겸이를 아들로 생각한다면..!..."
"닥쳐!"
요우 요우 요우.
처음으로.
숨이 막힐 정도로 시린 눈빛으로 나를 본다.
그게 코끝이 시릴 정도로 차가워.
"네가 뭘 알아?!"
뭘 아냐니.
노도수에 대해서? 천로에 대해서?
너희들이 했던 갖은 나쁜 짓에 대해서?
7년이나 봐왔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어.
"너 까짓 게 뭘 안다고!"
"너 까짓 게라고 하지 마, 다이니는 너 까짓 게 가 아니야."
가지다의 말을 끊어먹으며 저러코롬 말하는 고한겸.
가지다는 진심으로 화가 나 버린 것 같아.
고한겸을 빤히 쳐다보다...아니, 노려보다라는 말이 더 맞겠다.
빤히 노려보다 획 몸을 돌려 저 긴 다리로 후적 후적 가버렸으니까 말이지.
분명 나를 감싸는 고한겸을 보고, 고한겸을 감싸는 나를 보고,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오해하겠다.
뭐, 이미 마누라니 어쩌니 오해 중이니까 상관은 없나.
그런데.
급자기 고개를 숙여 내 입술에 쪽 하고 닿는 부드러운 무엇.
엑...!...
에에엑-?!
"고마워. 감동이야. 이다이니는 늘 내게 감동을 주는구나."
아무렇지 않게 입을 맞춰놓고 저러코롬 오글거리는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는 또 쪽-
도대체 허락도 없이 내 입술에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이 자식!
"자, 잠깐 너 말이야! 믿을 수 없어! 갑자기 무슨 짓이야?! 그것도 두 번씩이나!"
몸을 뒤로 빼고 두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소리쳤다.
"괜찮아, 그냥 뽀뽀한 거니까."
동글 거리는 눈으로 씽긋 웃으며 저러코롬 말하는 고한겸.
"안 괜찮아! 그냥 뽀뽀니까 문제인 거야!"
"뭐야, 그게."
어깨를 으쓱하며 저러코롬 말한 놈이 아무렇지 않게 내 손을 잡으며 말을 잇는다.
"한규형 전화 받고 슈슝 날아와서 배고파. 어디 가서 밥 먹자."
슈, 슈슝??
그것보다.
"윤미가 아직 안에 있어! 노도수...아니, 노 회장이랑 같이 있다고!"
내 말에 고한겸은 누가 봐도 일부러 하는 거라는 걸 알 수 있을 듯한 한숨을 내쉰다.
"퓌휴 퓌휴. 인질이 두 명이었어?"
그러니까 인질이 아니라.
"조윤미는 괜찮다 하면 안 돼?"
응?
"아저씨, 여고생은 죽이지 않으니까, 조윤미는 절대로 안전해. 그러니까 우리는 밥 먹으러 가자."
"무스은-! 빨리 가서 데려와! 너 안 오면 안 보내줄 거라고!"
내 팔을 잡아당기는 녀석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저러코롬 소리쳤다.
고한겸은 또 퓌휴퓌휴 한숨을 쉬며 그럼 어디 가지 말고 여기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다.
"잽싸게 갔다올게. 여기 석고상처럼 가만히 있어야지 돼?!"
오냐, 잽싸게 갔다와라. 여기 석고...그냥 사람처럼 가만히 있으마.
뒤통수를 통통거리며 클럽 옆쪽에 붙은 관계자들만 출입하는 문으로 들어가는 고한겸.
후우- 뭔가 정신이 없었다.
이제야 좀 조용한 느낌.
서늘한 밤바람이 얼굴에 닿는 게 기분 좋아져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드문 드문 보이는 별이 예쁘다.
그나저나, 화가 많이 났지. 가지다 녀석.
처음으로 내게 소리를 질렀어.
그런 무서운 얼굴...처음이었어.
몽글몽글.
나도 모르게 코끝이 시리면서 눈앞이 흐려진다.
'너 까짓 게 뭘 안다고!'
어릴 때의 가지다도 노도수의 일이라면 흥분부터 하고 보는 걸 보니, 이런 점은 변하지 않는구나.
그래도...너 까짓 게라니...
그 말 한마디가 송곳이 되어 내 심장을 찌른다.
아아.
나 왜 눈물이 많아졌지?
원래의 난 이렇게 자주 우는 애가 아니었다고.
소매께로 두 눈을 슥슥 닦으며 코를 훌쩍거리는데.
"또 왜 우는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한 개.
내 심장이 이렇게 두근거리는 걸로 보아 이건 분명 가지다의 목소리.
낮으면서도 너무 굵지 않은 듣기 좋은 이 목소리는 당연히 가지다의 목소리.
100% 가지다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벽에 비스듬히 서서 날 보고 있는 진짜 가지다가 눈에 들어와.
아까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너 트레이닝복이 참 잘 어울리는구나.
장인이 빚은 트레이닝복을 입은 현빈님보다 더.
"또 왜 우냐고."
"....."
"니 서방은 어디 가고 혼자 울고 있어? 위험하게."
하아.
이제 아니라는 말도 지쳐서 못하겠다.
뭐, 처음부터 아니라는 말을 한 적도 없지만.
"여기 위험해. 여자애 혼자 있을 만한 곳 아니야. 존나 위험하다고."
담배를 멋들어지게 튕겨내고는 내게로 걸어오는 놈.
저놈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대서 죽을 맛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