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도대체 내 얼굴 어디가 설레임과 닮았는지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인형같이 생겼다는 말은 꽤 듣고 자랐고, 또 대한민국에서 가장 예쁘다는 설레임과 닮았다는 말은 몇 번을 들어도 기분 좋은 쪽에 속하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솔직히 과거 이 나이 때의 나는 설레임을 닮았다는 얘길 잘 들어보지 못 했다.)
"도련님께 연락했습니다."
갑자기 들어온 검은 정장의 말에 노도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폰을 보고 있던 가지다가 노도수를 쳐다봤다.
노도수는 자신을 보는 가지다와 눈을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이 날 만나려고 하질 않으니 말이다."
도련님이라는 대목에서 한 번, 노도수를 만나려고 하질 않는다는 대목에서 두 번.
고한겸과 노도수의 의심스러운 사이에 놀란 나는 가지다의 다음 말에 확신이 섰다.
"원래 아버지라는 게 아들 보고 싶으면 아들 친구를 인질로 세우고 막 그러는 거야?"
어째서 없던 아들이 갑자기 생겨난 건지, 또 어째서 고한겸이 아버지인 노도수와 성이 틀린지, 그리고 또 어째서 가지다가 화가 난 얼굴을 하는 건지....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는데....
"다 좋은데, 지나가 싫어하는 일은 웬만하면 하지 마.... 영감, 지나 아버지잖아."
내 앞에서 노지나를 성 빼고 부른 게 참 오랜만이라, 그것도 저렇게 다정하게.
그게 심장을 욱신거리게 해.
고한겸과 노도수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노지나가 싫어하는 일이 뭔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노지나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가지다의 입술이 내 심장을 찔러 대.
더 앉아있다간 울어버릴 것 같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저기, 제가 급한 일이 있는 걸 깜빡했는데요!"
"앉아."
"앉게."
나를 보고 동시에 말하는 가지다와 노도수.
아아, 이거 아마도 고한겸이 오기 전엔 나와 윤미를 안 보내줄 생각인 모양.
"걱정 말게. 자네들에게 해를 끼치거나 하려는 게 아니야. 그저, 날 보려고 하지않는 아들놈과 얘기를 하려면 이 방법밖엔 없어서. 귀한 시간 뺏은 것에 대한 사례는 충분히 하겠네."
사례를 한다는 말에 윤미의 얼굴이 급자기 밝아졌다.
역시나 돈에 약한 아이는 앉아있는 내내 경직된 얼굴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도수의 사례 얘기에 신이 나 언제 그랬냐는 듯 검은 정장을 따라 여기로 올 때의 눈이 되었다.
그리곤 노도수 앞에선 꺅꺅거리지 못하는 걸 참느라 애쓰는 얼굴을 하다가, 이내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눈썹을 꼼톨거리며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가지다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린다.
"그런데 한겸이랑 지나랑 남매? 쌍둥이?"
몸을 가지다 쪽으로 가까이 숙여 속삭이듯 묻는 윤미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가지다.
"병신이냐. 어딜 봐서 쌍둥이야? 아빠 쪽만 같은 거야, 아빠 쪽만."
"아아-"
고개를 끄덕거리는 윤미와 눈썹을 꼼톨거리며 그런 윤미를 보는 지다.
도대체 이곳의 과거는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노도수에게 노지나와 같은 나이의 아들이 있는 거냐.
기본적으로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나를 너무 좋아해서였다기보단, 여자관계 자체가 아주 담백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노지나의 엄마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있다는 건 뭔가 대단히 놀라울 일이다.
고한겸의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
노도수의 취향인 여자였을까.
아니, 애당초 취향이라는 게 있지 않은 사람 아닌가?
그도 그럴게, 그가 사랑했던 노지나의 엄마와 나는 전혀 닮지 않았으니까.
죽도록 싫어하는 사람인데도 그 사람에게 내가 모르는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별별 궁금증이 들어 버린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노도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노도수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내가 그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재빨리 시선을 돌리는 내게 특유의 잔잔한 중저음으로 나를 부르는 노도수.
"아무래도 낯이 많이 익군."
연예인을 닮아서 낯이 익은 것과는 뭔가 다르다고 중얼거리듯 말하는 노도수.
그런 그를 보며 뒤통수가 서늘해지는 나.
나의 처음을 가져갔던 남자.
나를 소유하려고 했던 남자.
이유야 어쨌든, 갑자기 젊어진 노도수가 나를 또다시 가두려고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기억은 달라도 같은 인간,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그는 또다시 나를 가지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심장이 쿵쿵거려졌다.
그러니까 이건, 노도수 때문이 아니라 가지다 때문.
지금 내가 말한 원리가 맞는다면 분명 가지다도 날 사랑했으니 나중엔 날 원하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나...지금 노지나에게 빠져있는 가지다는 노지나외의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내가 녀석의 꿈에 새빠지게 나와도...말이다.
"지나 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나."
"....내 원룸."
폰을 만지작거리며 심드렁하게 말하는 가지다 때문에 또다시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노지나가 가지다의 집에 있는 것 따위 아무렇지도 않아. 서로 좋아하고 있잖아. 가지다의...첫사랑이잖아. 저 녀석 집에 노지나가 있다고 이상할건 없다고, 전혀.
속으로 수없이 나를 달래보지만 욱신 거리는 심장은 기어이 내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해버리고.
가지다의 집에 노지나가 있다는 사실 하나에 이렇게 눈물을 내면 어쩌자는 거야, 이다인.
이미 포기하기로 했잖아.
지금의 가지다는 그때의 가지다가 아니라고, 같은 사람이라도 같은 마음이 아니니까 이번이야말로 그가 좋아하는 노지나와 잘 되길 빌어주겠다, 다짐했잖아.
"엑- 너 울어?"
갑자기 내 팔을 잡아당기며 묻는 윤미 때문에 서둘러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하품했다고 거짓말했다.
화장실에 좀 가야겠다고 일어섰더니 가지다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뒤쪽에 서있던 검은 정장도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니까 화장실 간다니까, 화장실.
화장실의 위치를 알려주겠다는 검은 정장에게 자신이 가겠다고 말하고 아무렇지 않게 내 손목을 잡아당겨 밖으로 나오는 가지다.
회귀 후, 처음 닿는 녀석의 손이 너무 따듯해서 몽글몽글 설움이 생겨난다.
울지 마, 울면 안 돼.
도대체 내 얼음 마녀 컨셉은 어디로 간 거냐고.
"야."
울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앙다물며 녀석에게 손목을 잡혀 끌려가는데 지다 녀석이 급자기 저러코롬 날 부르며 걸음을 멈춘다.
"....는데."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 녀석.
응..?...잘 안 들려. 뭐라고?
물어보고 싶지만 안간힘으로 참고 있는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으니까 묻지 않을래.
"....왜 우는데."
"......"
"영감 무서운 사람 아니야. 너희들 어떻게 하려고 가두고 있는 거 아니야. 안 무서워해도 돼, 아무 짓도 안 해."
아니야. 무서워서 우는 거...아니야.
잘못 짚었어, 너.
난...나는....
"화,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었는데 참았더니, 그랬더니."
모기만 한 목소리로 중얼중얼 거리는 나.
"이다인."
처음으로.
가르쳐주지도 않은 내 이름을 조금은 다정하게 불러준다.
그것도 날 빤히 내려다보며.
그래서...또 심장이 꼬물거리기 시작해.
"너 고한겸 마누라냐...?...."
생뚱맞게 저러코롬 물어보는 가지다 때문에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놈을 보는 나.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이 헛소리는.
때마침 고여있던 눈물방울이 또르르 뺨 위로 흘러내리고...가지다는 그런 내 뺨으로 손을 뻗어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주며 말해.
"그 자식 지금 오고 있어. 아까 나랑 문자 했어.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도착할 때 다 돼가니까.....야, 근데 누가 잡아먹냐? 뭘 울기까지 해. 영감 진짜 무서운 사람 아니야."
뭐라는 거여, 이 새끼.
내가 노도수를 무서워하는 건..그래, 뼛속 깊이 치떨리게 싫고 두렵긴 하지만...그렇지만 이건.
"...혹시....울 정도로 그 자식이 보고 싶은 거냐..?..."
응. 너 뭔가 잘못 짚은거 같다.
그것도 대단히.
욱신 욱신.
심장이 쉴 새 없이 욱신거린다.
숨을 쉬기가 힘들 만큼.
"....좀...놔 줄래."
녀석이 잡고 있던 내 손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녀석은 날 놔주기는 커녕,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 더 힘을 주며 말한다.
"울지 좀 마."
"알았으니까 놔!"
투툭-하고 떨어지는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도대체 왜 우는 거야? 우리가 너한테 뭘 어쨌길래. 너 이렇게 울면 고한겸 그 자식, 또 영감한테...."
아아.
아아아.
갑자기 내게 엄청난 관심을 쏟길래 난 또, 열여덟 살의 가지다는 눈물에 약한 타입인가 했다.
스물일곱의 가지다도 내 눈물에 약하긴 했지만, 그건 그때의 가지다가 날 좋아하고 있었으니까....였고, 지금의 가지다는 내 눈물을 보고 흔들릴 녀석이 아니야.
왜 우냐고 물었던 건.
날 걱정해서가 아니야.
날 달래주려고 애쓰는 건, 내가 울면 고한겸이 노도수에게 뭐라고 할게 뻔하니까.
가지다는 노도수를 아버지같이 생각했었으니까.
아아.
그렇군.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싫은 기분.
"너 말이야!"
녀석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힘을 주는 내 두 팔을 압박하고 소리치는 그때.
"다이나!"
여전히 내 이름의 받침을 빼고 부르는, 목소리까지 동글 거리는 고한겸의 외침.
가지다는 한겸이를 보고 날 꽉 잡던 손에 힘을 풀고, 그 기회를 놓칠세라 그대로 돌아서 한겸이의 품속으로 머리통을 들이미는 나.
아니.
아니, 아니.
이건 안기려던 게 아니야.
난 그저 여길 벗어나려고 했는데 한겸이의 가슴팍에 부딪혀서, 그래서.
절대로 일부러 안기려던 건 아니야.
"왜 그래? 너 울어?!"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할 겨를 따위도 없이 내 머리통을 숨이 막힐 정도로 꼭 안아버리는 고한겸.
녀석의 단단한 가슴팍이 꽤 따듯하다고 느끼는 순간, 가지다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와.
"영감이 울린 거 아냐. 물론, 내가 울린 것도 아니고. 거품 물려고 시동 거는 거면 일단 꺼. 네 마누라 왜 우는지 이쪽도 궁금하니까 말이야."
너 때문이잖아, 새꺄.
그것보다 마누라라고 하지 마.
난 고한겸 마누라가 아니야.
애초에, 밸런타인데이 때 너한테 초콜릿도 줬다는 난데,(물론 까였지만) 아무리 짝사랑이라도 단 몇 개월 사이에 딴 신발을 신을 리가 있겠냐?!
"거품 안 물어. 그런데 이번만이야. 아저씨한테 전해. 또 이런 식으로 내 친구 납치하면 그땐 정말로 거품 문다고."
"......"
"꽃게가 되어버릴 거야, 진짜로."
진지하게 시린 목소리로 말하긴 하는데, 이 녀석의 말엔 피식피식 웃게 되어버리는 뭔가가 있다고 해야 할까.
뜬금없이 나오는 꽃게에 나도 모르게 풋-하고 웃어버렸다.
아아.
가지다가 날 분명 싸이코라고 생각할 거야.
아무 이유 없이 울어재끼다가(물론 가지다의 입장에서) 고한겸의 품에 앵겨 풋풋 거리고 웃다니.
어쩔 거냐고, 내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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