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다 원하다-28화 (28/51)

28화

<악연>

아직 시작도 못해본 사랑이 끝나버렸다.

상대가 노지나라면 난 이길수 없다.

노지나가 우리와 동갑이 되어 나타난 순간, 이미 난 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건 졌다나 이겼다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내가 과거로 돌아온 이유가, 가지다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하지도 않았던 이 전혀 다른 과거로의 회귀가...가지다의 진짜는 내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주려는 걸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돌이켜보면, 노지나에게서 가지다를 빼앗은 건 나다. 노지나에게 난....자신의 남자를 빼앗아간 아버지의 여자.

자신의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딸이 사랑하는 남자를 유혹한...악역은 노지나가 아니라 이다인.

그 악역 때문에 노지나가 사랑했던 남자가 죽었다.

아무리 좋게 포장하려고 해도 나쁜 역할은 나.

악마는 나다.

스물일곱에서 만난 언니 노지나는...분명 지금 울고 있겠지.

지다가 없으니까...

나와 같이 죽어버렸으니까.

그러다가 문득,

가지다는 왜 회귀를 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같은 시간에 같이 죽었다.

어째서 난 회귀를 하고 가지다는 회귀하지 않았을까.

꿈에서 날 본다는 건 어쩌면 회귀가 맞는 걸까?

이 회귀가 정말로 신에 의한 것이라면, 왜 신은 가지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로 굳이 날 보낸 걸까.

신은 내게 무엇을 말하기 위해 이런 다른 과거로 날 혼자 보낸 걸까.

그런 의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아아, 그러고 보니 답은 이미 나왔다.

이렇게 머리 터지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다.

....가지다의 진짜....

가지다의 진짜는 노도수의 여자였던 내가 아니다.

그의 여자였던 노지나였던 거다.

아아....알고 있다고요. 잊어버린 게 아니라고.

이런 식으로 알게 해주려고 보내지 않아도 될 만큼,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고요.

만약...내가 벌을 받고 있는 거라면 정말 대단한 벌을 주시고 계신 거예요, 당신.

이미 서있을 힘조차 없을 정도로, 온몸이 터져버릴 정도로 슬프니까, 나.

언제부터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려 코까지 막힐 정도가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어느 순간 숨을 쉬는 게 힘들어져서 무의식적으로 코를 들이마셨더니 콧물과 눈물이 입안까지 들어와버렸다.

그런 나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던 고한겸이 손바닥을 펴 내 코앞께로 가져오며 말했다.

"배고파도 코는 먹지 마. 코는 여기다 흥해. 그거, 빵 먹어. 코는 먹는 거 아니야."

꽤나 진지하게 말하는 한겸이를 한번 올려다보고, 내 코앞께에 있는 녀석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위로하는 거라면 서툴구나, 아이야.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털이 난다는 속담도 잊어버리고 피식 웃어버리는 나.

진지하게 나를 보고 있는 고한겸의 손을 치우고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한겸아....너...보기보다 착하구나."

아니...보기에도 착한 건가.

내 슈크림 빵을 째벼 먹긴 했지만.

"응응. 아닌데. 나 안 착한데. 되게 되게 안 착해."

그러냐.

그렇다고 뭘 그렇게 노골적으로 정색 씩이나.

"그래. 응. 그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옷소매께로 닦아가며 영혼 없는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내 손목을 탁 잡는 녀석.

"눈 비비지 마."

"응...그래...응..."

녀석은 한참이나 날 쳐다봤다.

그의 눈빛에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부끄러우면서도 요상스러운 꼬물거림이 생겼다.

난 멍하니 고개를 떨구었고, 고개를 숙여 빼꼼히 내 얼굴을 살피는 한겸이 놈.

"있잖아."

"아니, 없어. 아무것도 없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

미친 듯이 부꾸러우니까 지금은.

"응응. 아무것도 없는데 너 얼굴에는 있어."

응...?....내 얼굴에 뭐가 있어??

"콧물이 입으로 들어가고 싶어 해."

그리고는 쪽팔려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내 코를 자신의 옷소매께로 스윽 스윽 닦아내기 시작한다.

"그래도 안 돼. 코는 먹는 거 아니야. 빵 먹어, 빵."

.....

........

.....

실컷 울고 났더니 뭔가 조금 개운해졌다.

고한겸에게 콧물을 들켜버린 것쯤은 이미 잊어버렸다.(☜사실은 잊고 싶은 거임)눈이 퉁퉁 부어버린 것만 빼면 기분도 좋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윤미뇬이 왜 운 거냐고 귀찮을 정도로 물어봐서 마지못해 실연 중이라고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도 이제부터 즐기고 살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좋았어! 그럼 오늘 가지다의 짝사랑을 끝내고 즐기고 살기로 마음먹은 내 친구를 위해 이 언니가 쏜다! 10시까지 옷 갈아입고 우리 집 앞으로 오게, 친구."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학창시절 윤미는 꽤 많이 노는 아이였다.

남자에 관심이 없고 노는 것에 취미가 없던 나와 어떻게 친한지 의심이 들 만큼.

그러고 보면 나, 꽤 웃긴 성격이었던 것 같다.

노는 것에 취미는 없는데 우등생은 아니었다.

뭔가 좀...요상스러웠던 아이.

뭐, 이제부터라도 즐겁게 살면 그걸로 된 거다.

7년을 지옥에서 살았으니 그 보답은 받아야지.

날 모르는 가지다 따위....가지다 따위....

노지나 하라고 줘버리고 난 새로운 사랑을 찾으면 그뿐.

그래. 그뿐.

.....

.........

......

바뀌어버린 과거에 너무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노도수를 잊고 있었다.

윤미를 따라온 유명한 이곳은 분명 대한 그룹이 운영하던 클럽.

잊어버린 건 아니었지만 클럽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을 때까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시끄럽고 정신없는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고만 있는데 계단 통로 쪽의 사람들이 바닷물이 갈라지듯 갈라지며 계단 위를 일제히 쳐다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계단으로 내려오는 검은 무리들 사이에서 낯이 익은 한 남자를 보고서야 내가 호랑이 우리에 제 발로 들어온 걸 알아버렸다.

노도수!

좀 많이 젊어지긴 했지만 확실하다.

좀 더 확실하게 보기 위해 계단 쪽으로 다가갔다.

저 남자, 노도수다.

노도수가 어째서 클럽에...라던가, 날 알아보는 거 아닌가...라던가.

쿵쿵거리는 심장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그때.

운명의 괘씸한 장난 같게도 누군가가 날 밀어 노도수의 바로 앞에서 철퍼덕 넘어지고 만 나.

누구야, 누가 밀었어.

스윽.

갑자기 코앞께로 내밀어진 손 하나에 스윽 고개를 들었는데 억 소리 나게도 노도수가 친히(?) 몸을 숙여 한 손을 내게 내밀어.

"괜찮은가."

특유의 잔잔한 중저음이 그가 진짜 노도수임을 상기시켰다.

타악.

정중하게(?) 노도수의 손을 치우고 벌떡 일어나 옷을 탈탈 털었다.

윤미뇬이 예쁘게 가야 된다고 난리를 피워서 성격에 안 맞는 뾰족구두를 신었더니 균형감각이 없어졌다.

노도수의 손 따위를 잡고 일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노도수의 손을 밀어내며 괜찮다고 한 건데 주위에서 여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높으신 분이 하찮은 여자애 하나에게 선심을 베풀었는데 하찮은 여자애가 콧대를 세워서 그러는가 보다.

너희들이 몰라서 그러는데 난 이 할배 진짜 싫거든.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 그렇게 외계인 취급하듯 보지 말라고.

노도수, 당신도.

나를 빤히 쳐다보며 변태스러운 웃음을 짓는 노도수를(☜그렇게 웃은 적 없음.) 한번 야리고 윤미와 함께 테이블로 돌아왔다.

노도수가 개인 룸으로 들어가 버리자, 클럽 안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대한 그룹 회장 맞지? 젊은 나이에 사업으로 갑부 계열에 오른. 이 클럽도 대한 그룹 거라며?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인데 진짜 잘생겼네."

"매너도 좋고, 부인이랑 사별한지 꽤 오래됐는데도 혼자래. 딸 하나 있고....근데 어쩐 일로 온 거래? 이런 클럽에 직접 방문은 처음 아냐?"

우리 뒤에 앉은 여자들이 노도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걸 듣는 동안, 윤미뇬은 오늘 죽어도 한 놈 건진다라는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얼마 후.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하나가 나 조직 사람이요의 포스를 풍기며 우리 테이블로 왔다.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네."

검은 정장은 시끄러운 클럽 안임에도 불구하고 남이 들으면 안되는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이러지 않아도 시끄러워서 다른 사람들한테 안 들리거든요.

"저희 회장님이 뵙기를 청하십니다."

검은 정장의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뭔가 옛날의 악연이 다시 시작되는 느낌.

이대로 저 자를 따라가면 난 또다시 바닥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털이 쭈뻣 섰다.

"왜...왜요..?..."

최대한 울상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한 그룹 회장이 클럽에서 헌팅을 하려는 건 아닐 테고.

날 갑자기 왜 보자고 하는 거냐.

설마하니 날 보자마자 반했다거나....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과거의 날 알아본다거나.

수만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집을 짓는데, 검은 정장이 무서워할 것 없다며 친절하게 나와 윤미를 엘리베이터 앞으로 안내해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윤미뇬은 나도 가요? 하며 작게 꺅꺅거렸다.

....

......

.....

그런데.

검은 정장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클럽 3층에 있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구역에서 내린 나와 윤미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던 뜻밖의 얼굴을 보고 놀라버렸다.

"가지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엘리베이터가 열리길 기다린 듯 보이는 가지다는 자신의 부르는 윤미의 놀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편해 보이는 트레이닝 복 차림의 가지다가 교복을 입고 있을 때보다 훨씬 멋있어 보이는 건 아까 윤미와 함께 마신 맥주 때문일 거다.

그나저나 이놈이 여기 이런 차림으로 왜 있는 거냐.

저 차림으로 클럽에 온 것은 아닐 테고.

유난히 편해 보이는 차림인데 혹시 집이 여기라던가.

혼자서 머리를 굴려가며 가지다가 여기 있는 이유를 추리하고 있는 그때.

"뭐야."

우리를 데리고 온 검은 정장을 보며 눈썹을 꼼톨거리며 묻는 지다.

아마도 출입 금지구역인 곳에 우리를 데려온 검은 정장에게 짜증을 내려는 모양.

검은 정장은 노도수가 우릴 데리고 오라고 했다는 말을 했고, 가지다는 꽤나 놀란 얼굴로 "영감이?!"라고 되물었다.

그리곤 몸을 돌려 저 긴 다리로 후적 후적 걸어가며

"무슨 생각인 거야?! 이것들 고삐리라고."

라고 말했다.

누가 들으면 네놈은 대삐리인줄 알겠다. 같은 고삐리 주제에.

그것보담.

이것들이라니.

사람을 물건 따위로 취급하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넌.

"영감! 여자가 궁하면 윤마담한테 보내달라고 해! 왜 고삐리들을 건드리려고 해?! 죽을 때가 된 거야?!"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문을 힘주어 열며 저러코롬 소리치는 가지다.

"죽으려면 곱게 죽어! 원조 교제는 절대로 안된다고!"

저 염병....뭔 소리냐.

"흥분하지 말고 와 앉아라. 자네들도 들어와 앉지."

소파에 앉아 맞은편을 가리키며 저러코롬 말하는 노도수.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슬쩍 슬쩍 뒷걸음질 치는 나와, 씽긋씽긋 웃는 윤미뇬.

가지다는 툴툴거리며 제 집 소파에 앉는 것처럼 편하게 앉았고, 마지못해 그의 옆에 불편하게 앉는 나.

그런데 이 녀석, 너무 편하게 앉았다.

조만간 드러누울 기세다.

내가 녀석을 빤히 쳐다보자 녀석도 날 빤히 쳐다본다.

뭐, 왜. 눈싸움하자고?

그거라면 꽤 자신 있는데, 나.

"갑자기 불러와 놀랐겠군, 차 들지."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피하지 않는 가지다와 눈싸움을 하는데, 갑자기 노도수가 저러코롬 말하며 비서가 가져온 차를 마시라고 했다.

"아, 감사합니다."

"고삐리라고. 우리 학교 새끼들이란 말이야."

차를 입으로 가져가는 나를 보며 말하는 가지다.

새끼들이라니, 여자한테.

것보다...이 녀석은 노도수가 우릴 마음에 들어 해 데려온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알고 있어. 전에 한겸이와 있는 걸 본 적이 있어."

"........눈썰미 별로 안 좋잖아, 영감."

"한겸이 녀석의 일에서만큼은 꽤 좋은 편이지."

"어련하시겠어."

노도수의 입에서 갑자기 나온 고한겸의 이름에 꽤 어리둥절해진 나.

노도수에겐 아들이 없다.

노지나의 엄마 외엔 결혼한 여자도 없었고, 그녀와 나 외의 여자관계도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노도수는 그랬다.

그러니까 고한겸이 노도수의 아들일 리는 없다.

뭐, 가지다와 비슷한 케이스일 수도 있겠지.

"저...한겸이 때문에 저희를 부르신 건가요?"

제법 조심스럽게 물음 하는 나.

그런 나를 쳐다보는 시선들.

그 시선들이 꽤나 거북스러운 난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한겸이랑은 같은 반 짝꿍이긴 하지만, 그게 다인데요. 나 걔랑 별로 친한 것도 아니고...."

"한겸이가 여자아이와 친하게 지내는 건 자네가 처음이라고 알고 있네. 미리부터 자넬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

......아아.

전혀 다른 과거로 온 다음 날.

생소한 학교의 생소한 자리에 앉게 되고, 그날 윤미에게 내 짝꿍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등교를 하는 내 괴짜 짝꿍 녀석은 잘생기긴 했는데 외계인 같은 녀석이라 여자애들이 피한다고.

그런 그의 짝꿍을 자진해서 내가 한다고 했을 때, 고한겸이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고.

뭐, 내가 한겸이 놈과 짝꿍이 된 건 점심시간까지만이라도 조용히 혼자 앉을 수 있으니까라는 이유였다고 하지만.

그런데 그 녀석과 처음으로 친해진 여자아이가 나라는 이유로 굳이 클럽에서 놀고 있는 나를 여기로 데려왔다고?

그것보다.... 왜 그렇게 빤히 보는 거야? 사람 기분 나쁘게.

나를 보는 노도수의 눈이 과거에 나를 보던 노도수의 눈과 비슷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머리끝이 쭈뼛쭈뼛 선다.

"그런데 자네, 꽤 낯이 익은데."

"노망났어, 영감? 방금 영감 입으로 고한겸이랑 같이 있는 거 본 적 있어서 데려온 거라고 말했잖아. 술 마셨어?"

대한 그룹 회장에게 저렇게 버릇없이 말할수 있는 놈이 가지다 말고 또 있을까.

친아들도 아니고 말이야.

"안 마셨다. 그게 아니라 얼굴이 꽤 익다는 뜻이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처럼."

노도수의 말에 가지다가 나를 힐끔 쳐다보며 픽 웃는다.

뭐랄까...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멋지게 웃었다, 방금.

(정작 본인은 비웃은 것일 테지만)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노도수를 보며 말한다.

"영감도 설레임(유명한 여자 연예인)빠야?"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