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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다 원하다-27화 (27/51)

27화

"지다, 꿈에 다이니가 보였어? 거울에 보였어? 흰옷 입고 있었어?"

흰옷은 뭐고, 거울은 또 뭐냐.....내가 귀신이냐?!

한겸이의 물음에 눈썹을 요따구로 꼼톨거리는 가지다.

한참을 한겸이를 쳐다보며 눈썹 운동을 하던 녀석은 갑자기 고개를 획 돌려 나를 보며 말해.

"야, 너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마."

뭐야. 갑자기 왜 불똥이 나한테로...

아니, 것보다.

뭐, 알짱..?......알짜아아아앙?!!!

"내가!"

얼굴을 붉히며 막 화를 내려는 그때, 손으로 내 입을 막으며 가지다를 보는 고한겸.

"꿈에 귀신 봤다고 다이니 괴롭히면 안 돼, 지다야."

라며 졸지에 나를 귀신으로 만들어 버린다.

"뭐?"

"다이니 또 화났다아- 너 때문에! 내가 힘들게 화 풀었단 말이야. 이번엔 슈크림 빵 삼백 개 사줘도 안 풀리면 책임질 거야?"

골이 난 표정으로 툴툴거리며 저러코롬 유치롱한 언변을 늘어놓는다.

애초에 슈크림 때문에 화를 푼 게 아니라고 난.

그것보다 내 입은 왜 막는 건데?!

눈을 흘기며 내 입을 막고 있던 한겸이의 손을 떼어냈다. 한겸이는 그런 나를 보며 싱긋 웃더니 말을 이었다.

"화내면..화내는 것도 귀엽지만, 그래도 화내면 무표정할 때보다 더 무시무시해지니까...무섭단 말이야."

결론은 내가 화내면 무섭다는 거냐.

"그러니까 얼른 사과해."

"씨바. 지금 니가 나한테 명령했냐?"

무시무시한 얼굴로 정색을 하며 저러코롬 말하는 가지다.

구경만 하고 있던 김운과 강태산이 말리지 않았다면 맹세하건대 고한겸, 가지다에게 두들겨 맞았을 거다.

"에이- 그만들 해."

"왜 이래? 너 답지 않게. 한겸아, 니가 이해해라. 요즘 지다가 잠을 잘 못 자서."

지다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하는 김운과 강태산.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의 뒤에서 김밥을 입에 넣으며 밉살스럽게 입을 여는 민준수.

"싸워. 같은 식구끼리 싸우는 거 알면 아저씨가 되게 좋아하겠다."

같은 식구란 대목에서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같은 조직의 식구끼리 밥그릇 싸움을 하는 건 죽어도 못 본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할배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뀐 과거에서의 할배도 여전한가 보군.

요우 요우.

노도수를 떠올리자마자 온몸의 털들이 만세를 외치는 걸 보니, 난 여전히 노도수가 싫고 두려운 모양이다.

그것보다, 일단은 고한겸을 가지다와 떼어놓는 게 먼저일 것 같은데.

"그만 교실로 가자."

한겸이의 팔을 잡으며 저러코롬 말하자, 한겸이는 순순히 나를 따라 나왔고, 매점을 나오는 우리들의 등 뒤로 들리는 목소리 한 개.

"야. 말했다? 내 눈앞에서 알짱 거리지 말라고."

근데 저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획- 몸을 돌려 가지다 녀석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나는 녀석의 턱 앞께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최대한 재수 없는 표정으로 녀석을 올려다봤다.

"아까부터 자꾸 알짱 알짱하는데. 너 알짱거리다의 뜻이나 알고 쓰니? 모르는 것 같은데 내가 특별히 알려줄게. 알짱거리다는 말이야, 이유도 없이 사람 앞을 자꾸 돌아다니거나 뱅뱅 도는 걸 뜻하거든? 나 네 눈앞에서 이유 없이 뱅뱅 돈 적 없고, 여기도 한겸이랑 빵 사러 왔어. 그러니까 나, 너한테 그따위 말을 들을 이유 전혀 없다는 소리야."

내 말에 아무 말도 못하고 날 내려다보며 눈썹만 요따구 저따구로 꼼톨대는 녀석.

"그리고 꿈에 자꾸 내가 나오는 게 불만인 모양인데. 그게 불만이면 내가 네 꿈에 왜 나오는지 그 이유부터 찾아 내. 그게 싫다면 그 꿈 자체를 아예 신경 쓰지 말던가. 잠을 못 잘 정도로 피곤한 건 그 꿈 때문이 아니라, 그 꿈의 내용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기 때문 아니야? 그렇게 새빠지게 안 좋은 머리만 굴려봐야 답 안 나와. 꿈에서 찾으라고. 내가 왜 네 꿈에 나타나는지."

제법 화가 나버려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전부 해버렸지만, 이걸로 속은 시원하다.

동그란 눈으로 작게 와-를 외치며 손뼉을 치는 고한겸이에게 가던 나는 갑자기 내 팔을 잡는 손에 걸음이 멈춰졌다.

"...어떻게 아는 거야...?..."

"...뭘? 네가 내 꿈 꾸는 거?....하아...너 바보야?"

"뭐야?!"

"네가 네 입으로 그랬어. 기억 안 나? 안 나면 내가 나게 해줄게. '근데 왜 설레임을 닮은 이게 자꾸 내 꿈에 보이는 건데?'...이제 기억나? 네놈 입으로 했던 말."

물론, 네 꿈에 내가 나오는 이유를 아는 건 그 때문이 아니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애써 삼키고 너 지금 나한테 놈이라고 했냐며 거품을 무는 놈의 손에 잡힌 팔을 빼냈다.

혼자 실컷 고민하라며 한겸이와 매점을 나오려는데 또다시 날 잡는 목소리 하나. 이번엔 노지나의 목소리다.

"너 그때, 밸런타인데이에 지다한테 초콜릿 주고 차인 애지?"

그 말 한마디에 욱하는 뭔가가 생기고, 정말 그랬냐는 얼굴로 일제히 나를 보는 꽃남병 네놈...과 고한겸.

응. 그랬다는데.

나도 내가 그랬다는 걸 윤미뇬한테 들어서 말이지. 아니 것보다, 당사자인 가지다는 왜 저렇게 놀라는 건데?!

"이게?"

사람을 손가락질하며 이게라는 말로 물건 취급하는 가지다 녀석을 쳐다봤다. 아니, 정정하겠다. 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긴 기억도 없다며 자꾸 나를 이게라는 호칭으로 불러대던 가지다 놈은 정말로 이게 자신한테 초콜릿을 줬었냐고 노지나에게 재차 물었다.

"어. 니가 '꺼져'라고 말한 마지막 애였어. 그래서 나 제대로 기억해."

저런, 거기다 마지막 차인 애였어? 불쌍하다, 불쌍해. 이다인.

"너 나 좋아하냐?!"

노지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획 돌려 나를 보며 묻는 지다.

이럴 땐 어떻게 말해야 할지 좀 난감하달까.

따지고 보면 내가 널 좋아하는 것만큼 너도 날 좋아했는데 말이지. 나 대신 총에 맞아 죽었을 정도로 너.....라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심장이 욱신거렸다.

역시나, 지금 눈앞에 지다 녀석이 있어도 스물일곱의 지다가 내 눈앞에서 죽어버린 일은 괜찮을 수가 없다.

그것도 그럴게, 지금 이 가지다와 스물일곱의 가지다가 동일시되지도 않고, 날 보는 이 녀석의 시선 그 어디에도 예전의 따뜻했던 눈빛을 찾을 수없으니까.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날 사랑스럽게 쳐다보고 만져주던 그 가지다가 보고 싶단 말이지.

왠지... 그런 생각을 하자 또 심장이 욱신거려온다.

"아앗! 가지다 씨바넘-! 다인이 울렸다!"

에엑.

갑작스럽게 소리치는 고한겸을 쳐다보다 그제야 눈에 눈물이 잔뜩 고여 시야가 흐릿해진 걸 알아버려.

원래 이렇게 눈물이 많은 애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 얼음마녀는 어디로 갔냐고요, 얼음마녀는.

그것보다, 지금은 얼굴이 타버릴 정도로 부끄러우니까 일단 여길 벗어나자.

꽤 빠른 걸음으로 매점을 나오는데 약하게 내 팔을 잡는 손 하나. 분명 고한겸일 것 같아 그대로 뿌리치고 냅다 별관 쪽으로 달렸다.

지다가 보고 싶어.

열여덟 살의 가지다 따위 알게 뭐야.

날 좋아하고, 날 따듯하게 안아주던 그 가지다가 필요하다고, 난.

호와 호와.

숨을 헐떡거릴 정도로 달려온 별관 옥상.

그 와중에 슈크림 빵 봉지는 꽉 쥐고 있는 걸보니, 나 식탐이 꽤 있는 인간인 모양이다.

"이다이니!"

언제 나를 쫓아왔는지 받침 없이 내 이름을 부르는 한겸이 때문에 몸을 흠칫거렸다.

남자 새끼 입에서 이다이니가 다 뭐냐고, 이다이니가.

"요기 왜 왔어? 지금부터 우꺼야?"

동글 거리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저러코롬 묻는 고한겸.

설마하니 내가 엉엉거리고 울려고 여길 왔겠니, 아이야.

하지만 이 동글 눈의 소유자 고한겸은 내 옆에 나란히 붙어 서며 조심스럽게 물어와.

"아직도 가지다 짝사랑 중이야?"

응이라는 대답도 아니라는 대답도 못한 채, 멍하니 운동장만 내려다보는 나.

"전번 밤에, 또 저 전번 밤에 우리 깜짝하고 만난 날 말했지만."

전범 밤? 또 저 전번 밤? 언제라는 거야? 대체.

애초에 난 널 밤에 깜짝하고 만난 기억이 없다고.

"지다는 운이 때문에 참는 거니까. 그러니까 안 된다야. 내가 몇 번이나 말한 거 안 까먹었지?"

몇 번이나 뭘 말했는지 모르겠으나, 내 귀에 꽂힌 건 지다가 운이 때문에 참는다는 거.

"뭐? 지다가 뭘 참아?"

고개를 돌려 녀석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한겸이는 그런 날 빤히 쳐다보다 이내 푸휴우- 하고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전번 밤에, 또 저 전번 밤에 나랑 너랑 깜짝 만난 날. 내가 말해줬잖아."

전번이고 저저번이고 썰이 길다. 요점만 얘기해라, 요점만.

"푸휴우- 다이니는 기억력이랑 사이가 안 좋구나."

"그게 뭐냐니까!"

동글 거리는 눈으로 푸휴푸휴를 남발하며 나의 인내심을 갉아먹는 녀석 때문에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녀석의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져버렸다. 마치 겁에 질린 강아지의 눈알(?)마냥.

"아, 미안."

"......"

녀석은 한참이나 미안해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참 후에야 약간 작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다인이...왜 평소의 이다인 안 같아...?..."

내가 소리를 지른 게 꽤 쇼크였는지 내 이름의 받침을 그대로 넣어 부르는 녀석.

왠지 좀 미안해지긴 하는데...어쩔 수 없잖아? 내가 나 자신인 건 사실이지만 변해버린 과거에서의 내가 널 어떻게 대했는지까진 알지 못하니.

애초에, 내 과거에 넌 없었던 사람이라고.

"얼굴에 점찍었어?...없는데...근데 왜 자꾸 무서워져?"

점이라니.

언제 적 드라마 얘길 하는 거야? 이 드라마쟁이가.

"어쨌든 화내서 미안. 원래 궁금한 거 잘 못 참는 성격인데 네가 자꾸 뜸을 들이니까...넌 말했다고 하지만 난 전혀 기억이 안 나거든. 그래서."

"....운이가 지나 좋아하는 거, 지다가 알아버렸어."

내 말에 잠깐 뜸을 들이던 녀석이 저러코롬 말하고, 고개를 들어 녀석을 쳐다보는 나와 눈을 맞추며 녀석이 말을 이었다.

"노지나, 가지다 좋아해. 사실은 둘이 서로 좋아해. 그런데 운이가 지나를 좋아해. 그걸 지다가 알아버렸어. 그래서 참는 거야. 좋아하는데 안 좋아하는 척 하는 거야. 그러니까 가지다 좋아하면 안 돼. 너 울게 돼."

"......"

"이렇게 말했었어. 한 개도 안 틀리고 그대로 말했었어."

"......"

"..알았다고 했잖아. 안 좋아할 거라고 웃었잖아. 내 거 될 가망성 없는 거 오래 잡고 있는 바보 아니라고 그랬잖아, 너."

아아. 과거의 나...생각보다 똑똑하구나.

그래, 가망성 없는 것에 목메는 건 바보짓이야. 당연히 알고 있어, 그런 거.

하물며 그 녀석의 마음이 그녀에게 가 있는 거라면.....틀렸다.

난 가지다의 마음을 가지지 못해, 절대로.

언젠가...가지다에게 들은 기억이 있다.

노지나가 그의 첫사랑이었다고.

결혼을 원하던 그녀의 말을 기꺼이 들어줄 만큼.

가지다에게 노지니는 특별했다.

아아, 그건 변해버린 과거라고 해도 달라질 리 없나.

그렇군.

왠지...쏙 들어가 버렸던 눈물이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콸콸 흘러나와버린다.

이다인의 안에 얼음마녀는 사라진지 오래.

울보 이다인만 남았다.

이거 참.

.........아프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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