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고한겸>
"어라, 한겸이 너 왜 벌써 왔어? 아직 점심시간 안 됐는데?"
윤미뇬이 내 등 뒤를 쳐다보며 저러코롬 말해 앙증맞은 손가락의 주인공이 내 짝꿍 놈이란 걸 알았다.
획- 하고 고개를 돌리자, 키가 꽤 많이 큰, 하얀 얼굴이 인상적인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 놈 하나가 나를 내려다보며 생글거리고 있다. 손에는 내 소유인 슈크림 빵을 들고.
"응응. 오늘은 알람이 안 울었는데 반짝하고 눈이 떠졌다."
반짝? 눈이 떠져??
뭐냐, 이 얼빠진 것 같은 말투의 소유자 놈은.
윤미와 이야기를 나누는 한겸이를 한참 올려다보던 나는 내 슈크림 빵의 위치가 잘못되어있다는 걸 놈에게 일깨워주기 위해 목이 아파지는 걸 참아가며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타이밍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놈이, 아무렇지도 않게 윤미뇬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내 슈크림 빵을 까 입속으로 직행시킨다.
아아아악-
마음속으로 절규하며 얼굴이 일그러지는 나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무렇지 않게 생글거리며 웃는 빵 도둑놈.
나는 주먹을 꽉 쥔 후, 녀석의 배를 향해 뻗으며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을 과감히 깼다.
그런데 웬걸.
이 자식, 운동 신경이 꽤 좋은 놈인 모양이다.
한 손으론 빵을 입으로 넣고, 다른 한 손으론 내 주먹을 가뿐하게 잡아버린다.
그리곤 내가 녀석에게 잡힌 팔을 빼내려고 버둥거리자, 내 피 같은 슈크림 빵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거리며 동글 거리는 눈으로 내게 묻는다.
"다이니, 오늘 생리하는 날이야? 왜 이렇게 까칠해?"
.....진심으로 이 새끼를 죽여버릴까 고민했다.
...........
.......
...........
오늘 나 일찍 왔는데 왜 화 내?라던가, 오늘은 나랑 말 안 하기 놀이해?라던가, 자꾸 말 안하고 자길 안 쳐다보면 간지럼을 태운다라며 수업시간 내내 떠들어대던 빵도둑놈은 기어이 선생님에게 불려나가 두 귀를 잡아당겨지는 벌을 당했다.
두 귓불이 새빨개져서 다시 자리로 돌아온 놈은 여전히, 그러나 아까보단 작은 목소리로 나를 쉴 새 없이 불러 재꼈다. 아무래도 이 자식은 뇌속의 주름이 보통 사람에 비해 몇 가닥 적은 모양이다.
그렇게 쌔빠지게 내 이름을 불러대다 또다시 선생님께 불려 나가 귀를 잡아당겨지는 녀석.
쟤 진짜 어디 모자란 거 아냐?!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 수업 시간에도, 또 다음 수업 시간에도 내게 말을 걸어대며 선생님들에게 불려가 혼이 나는 저 뇌의 주름이 적은 아이는....
5교시가 거의 끝날 무렵이 다 돼서야 내가 졌다하며 한숨을 쉰 내가
"너랑 말할 테니까 나한테서 째벼간 내 슈크림 빵 다시 돌려내."
라고 백기를 들어버리자, 세상 누구보다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소리쳤다.
"빠사로-! 다이니 화 풀었다! 와쟈뵤-!"
어이 어이.
아직 수업 시간인데.
원숭이가 환호하듯 끼약 끼약 거리다가 금세 생글 생글 눈웃음을 치며 허락도 하지 않은 내 손을 덥석 잡고는 지금 당장 매점에 가자며 벌떡 일어서는 한겸이 놈.
야야, 지금 수업시간이라니까..?..!..
"고한겸! 네 이노옴! 당장 다인이 손 놓고 자리에 앉지 못할까!"
역시나 한겸이 놈 때문에 진도도 못 나가고 아까까지 몇 번이고 놈을 불러내 혼내셨던 국어 선생님은 이제야 막 진도를 나가려는 찰나에 또다시 한겸이 놈이 내 손을 잡고 뒷문으로 나가려 하자, 참지 못하고 폭발을 해버리셨다.
하지만 반도 땅 최고의 개깡을 지닌 고한겸은 그러거나 말거나,
"나 다이니 슈크림 빵 째벼 먹어서 다이니가 나 쌩깐 거래. 그러니까 지금 슈크림 빵 사줘야 해요. 선생님 것도 사주까?"
라며 감히 국어 선생님한테 반말을 지껄이다 말을 높이고 다시 반말을 지껄인다.
"째벼가 아니고 훔쳐! 그 상황에 더 알맞은 말로는 빼앗아! 쌩깐 거래가 아니라 모른 척 한 거래! 고한겸, 너 내가 이론만 잘해봤자 아무 쓸모없다고 실전에서 언어순화하라고 그렇게 일렀거늘!"
그런데 선생님.
화 내시는 포인트가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요.
국어 선생님은 고한겸의 반말질과 수업시간에 내 손을 잡고 교실 밖으로 나가려는 짓은 덮어두고 저러코롬 녀석의 틀린 말만 잡아주시는 국어.
"응응. 그라믄 선생님은 콜라 사주께."
...
.....
.......
고한겸이 학교 선생님들도 내놓은 아이라는 건 나중에 윤미한테서 들었다. 머리가 이상하거나 모자란 아이냐고 묻는 내게 기가 막힌 얼굴로 쟤 항상 전교 일등이라고, 어떻게 학교도 안 나오고 매번 일등을 하는지 알아봐야겠다며 짝하겠다고 한건 너거든?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윤미보다 더 기가 막힌 얼굴을 되어버린 나는, 수업 일수도 항상 간당간당하게 채우고 수업시간 내내 자거나 딴짓하는 놈이 어째서 전교 일 등이냐고 나한테 악악거린 건 네 뇬이라고 말을 이은 윤미뇬에게 진심으로 물었다.
"고한겸.....천재야?"
....
......
...
뭐, 어찌 되었건.
이 뇌의 주름이 몇 가닥 없어 보이는 놈은 거품을 물어대는 국어 선생님에게 상큼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내 손을 꼭 잡은 채, 교실 뒷문을 힘차게 빠져나갔다. 녀석에게 손을 잡혀 졸지에 수업시간 이탈자가 된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선생님을 쳐다봤지만, 국어 선생님은 고한겸의 콜라 발언에 이미 거품을 물고 쓰러지신 뒤였다.
"야. 너 수업시간에 항상 이래?"
꽤 무표정한 얼굴로 녀석에게 손을 잡혀 매점으로 따라가며 저러코롬 물었더니 한겸이가 나를 내려다보며 씩 웃는다.
"다이니. 오늘 딴 사람 같아."
오- 예리한데, 이 자식.
그렇다고 사실은 내가 스물일곱인데 과거로 회귀했고, 회귀해서 보니 내가 알던 과거랑은 사뭇 다른 과거더라.라고 말할 수는 없잖은가. 어차피 믿어주지도 않을 거고.
나는 말없이 녀석에게 끌려가며 슈크림 빵을 몇 개 사달라고 해야 얼굴 두껍다는 말을 듣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수업시간에 매점을 이용하는 학생이 우리뿐만이 아니라는 걸 매점 안으로 들어와서야 알게 되었다. 윤미의 말에 의하면 로열 클레스 녀석들은 대한 그룹에 필요한 공부들을 집중적으로 하는 대신, 학교 수업을 듣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우리들보다 시간의 여유가 있겠지.
그래서 요로코롬 수업시간에 아무렇지 않게 매점에서 밥을 먹는 모양이다. 이거 원, 부럽구먼.
한겸이의 손에 잡혀 매점으로 들어서자마자, 우리에게 시선이 꽂힌 네 개의...아니, 다섯 개의 눈. 꽃남병 놈들 사이에 껴 호강을 하고 있는 꽤 어려진 노지나. 나이 든 노지나의 예쁜 얼굴은 그대로인 채, 뭔가 좀 풋풋해진 느낌이랄까. 하지만 여전히 뭔지 모를 친해지기 어려운 포스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가지다의 옆에 새초롬히 앉아서 날 쳐다보고 있는 그녀를 보니, 항상 언니라 불렀던 여자가 나와 동갑이 되어버린 게 뭐랄까, 요상하고 심란하다.
응...?..심란해..?..
뭐, 어쨌든.
로열 5인방들은 5교시의 막바지 무렵이 식사시간인 듯 매점에서 밥을 먹고 있었고, 고한겸은 그들과 꽤 친한 듯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는 나를 잡아당겨 슈크림 빵 진열대 앞에 세웠다. 앙증맞게 진열된 체, 날 먹으라고 유혹하는 슈크림 빵의 자태를 보자마자 가지다는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고, 남자보다 먹는 걸 더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나답게 넋이 나간 듯 빵을 쳐다보며 침을 흘리는 그때, 노한겸이 눈이 번쩍 뜨일만한 말을 내뱉었다.
"다 사주까?"
"진짜?!"
"응응. 다 사주께."
내 손을 놓을 생각 없이 저러코롬 말하는 한겸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솔직히 다 먹을 자신은 없으니 그냥 열 개만 사달라고 말했다. 대신 내일도 또 열개 더 사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다지 공짜를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고한겸이 내 빵을 째벼갔으므로 이 정도의 처사는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한겸이는 웃으며 매점 이모에게 돈을 내며 슈크림 빵 열 개를 담아달라고 했다.
여전히 잡은 손은 놓을 줄 모르고 매점 이모에게 받은 빵 봉지를 내게 건네주는 고한겸.
빵 봉지를 건네받자마자, 볼일 끝난 사람처럼 점점 땀이 나고 있는 손을 그만 놓으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여는 그때.
탁- 하고 나와 함겸이의 잡은 손 사이를 치고 지나가는 놈 하나.
가지다.
덕분에 나는 한겸이의 손에서 자유로워졌다.
"비켜. 걸리적거려."
저 싸가지.
하지만 저 싸가지 없는 모습에도 내 심장이 이렇게 쿵쾅쿵쾅 난리를 부려대니, 이것 참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고나.
"고한겸. 네 여자친구?"
고한겸을 잘 아는 듯 보이는 지나 언니...아니, 노지나가 저러코롬 묻자, 동글 거리는 눈으로 가지다를 쳐다보던 한겸이가 고개를 돌려 노지나를 보며 씽긋 웃는다.
"응응"
응응...?...내가...?!...언제부터?!
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그때, 씽긋 -하고 또 웃으며 말을 잇는 한겸이놈.
"친군데 여자니까 여자친구. 내 짝꿍이야. 예쁘지?"
....가만 보면 이 녀석, 맞는 말을 하는 건데, 묘하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뭐, 내가 예쁘다는 말은 정확히 맞는 말이긴 하지만.
아- 매일 짝꿍이 어쩌고 노래를 불러 대더니 쟤였어?하며 기분 나쁘게 날 쳐다보던 노지나가 뭔가 낯이 익네라고 중얼거렸다. 강태산과 김운 역시 그렇지?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지? 한다.
꼬물꼬물.
심장이 꼬물거린다.
왠지, 이 사람들의 머리 한쪽 구석에 모두 나를 기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버린다.
하지만.
"병신들. 설레임 닮았잖아, 설레임. 완전 설레임 짝퉁이구만."
라며 날 손가락질하는 민준수 때문에 내 얼굴은 표나게 굳어버리고.
예쁘고 유명한 여배우인 설레임을 닮았다는 말은 꽤 기분 좋을 만도 한데, 저 게이 자식은 무슨 말을 해도 사람 기분 나쁘게 말하는 스타일이랄까.
그런데.
내 앞에 서 있던 가지다가 민준수의 말을 듣고 날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김운을 보며 묻는다.
"나 혹시 설레임 좋아한다고 한 적 있냐?"
"뭐라는 거야, 넌 전지현 좋아하잖아."
"맞아. 전지현만 나오면 넋을 놓고 보잖아, 너."
전자는 김운.
후자는 강태산 되겠다.
전지현이 뭐가 예쁘냐며 궁시렁거리는 민준수에게 내버려 둬, 쟤 취향이 좀 구려라고 말하는 노지나.
저 년, 놈들. 아무래도 전지현을 질투 중인 모양.
그런데.
"근데 왜 설레임을 닮은 이게 자꾸 내 꿈에 보이는 건데?"
하며 날 보고 눈썹을 꼼톨거리는 가지다 놈.
이게라니. 내가 물건이냐?!
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