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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다 원하다-25화 (25/51)

25화

<달라진 과거>

윤미를 등굣길에 만난 게 천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학교 건물이 생소한 것도 모자라 내 기억엔 있지도 않은 별관 건물이 우리 교실이란다.

악악.

뭔가 대단히 잘못된 느낌.

신이 날 과거로 보내 주는 것 까진 성공했는데 뭔가 약간의 실수로 다른 과거에 떨어뜨려줬다거나, 아님 내가 다시 과거로 돌아옴으로써 예전의 과거가 전부 사라졌다거나.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같은 별관 건물 3층에 로열 클레스의 반이 있는 관계로 어렵지 않게 바로 가지다를 만날 수 있다는 건 쾌재를 부를만하다. 날 알아보지는 못하겠지? 졸지에 학교 최고의 인기인이 된 놈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게 과연 가능할까 걱정부터 앞섰다. 그러다 문득, 내가 좋아했고 날 좋아했던 건 스물일곱 살의 가지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가지다가 스물일곱의 가지다와 같은 인물이라는 건 의심하는 자체가 웃기긴 하지만 뭐랄까....뭔가 미묘...하달까. 나와의 추억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은, 심지어 내 밸런타인데이 초콜릿도 받지 않았던 놈을 힘들게 내 걸로 만들려는 게 과연 잘하는 일인가 의문이 들었다. 무엇보다 처음 만났을 때의 가지다는 성격이 꽤 별로였었다.

그런 그가 아홉 살이나 어린 모습이라면...장담하건대, 더했으면 더했지. 덜 하기는 힘들다. (가지다가 내게 꺼지라는 말을 했다는 걸 윤미한테 듣고부터 뭔가 복잡 미묘하게 녀석이 껄끄러워지고 있다.)뭔가 거대한 회오리 안에서 흔들려지고 있는 느낌.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져버린 생각들로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총을 맞았던 자리가 가끔 욱신 거리는 걸로 보아, 내가 죽었던 건 꿈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너 왜 여기 앉아...?..."

"....여기 내 자리 아냐?"

과거의 기억으론 분명 윤미와 나는 짝꿍이었다. 그래서 교실로 들어와 자연스럽게 윤미의 옆에 앉았는데.

"너 진짜 병원 가보자, 아무래도 안되겠다."

하며 휴대폰을 꺼내들어 우리 엄마의 번호를 찾는다. 그런 윤미뇬의 폰을 빼앗으며 내 자리 어디냐고 물었다.

"넌 한겸이 옆이잖아. 고한겸 옆."

고한겸? 그게 누구야.

두리번 두리번.

고개를 쌔빠지게 돌려가며 고한겸인가 고두겸인가를 찾는 그때, 윤미가 길게 한숨을 쉬며 창가 제일 뒷자리를 가리킨다.

"저쪽이잖어, 저쪽. 한겸이는 점심시간 끝나야 등교하잖어. 그것도 잊어버렸냐?"

처음부터 그냥 손가락해줬으면 좋았잖느냐, 친구야.

내가 고한겸이라는 애와 죽어도 짝을 하겠다고 한 이유가 고한겸이 학교를 잘 나오지 않아서라는 말을 윤미에게 들은 나는 정말로 기가 찼다. 까놓고 공부를 우월하게 잘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항상 상의권 안에는 속했던 나였다.

윤미를 두고 일부러 학교를 잘 나오지 않아 오전엔 옆자리가 조용한 녀석과 짝을 했다니...예전의 나..아니, 지금의 나는 어떻게 생겨 먹은 아이인 거냐. 거기다 과거 한 번도 남자와 엮여본 적 없고, 날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녀석들에게도 차갑게 거절했던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고,(뭐, 그게 가지다라는 건 이해가 가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 녀석에게 직접 초콜릿까지 주며 고백을 하다니...내가 생각해도 나 자신이 신기할 노릇이다.

얼음마녀는 어디로 갔냐고요, 얼음마녀는.

차갑고 도도하고 잘 웃지 않던 이다인.

남자애들이 고백해도 무표정한 얼굴로 거절했던 이다인.

여고인 우리 학교 앞까지 찾아와 나를 기다리던 남자애에겐 쌩을 까는 방법으로 지우지 못할 쪽팔림도 안겼던 나다. (분명 그 후에 얼음마녀라는 별명이 생겼던 걸로 기억한다)그러고 보니 나, 고등학생 때부터 꽤 인기인이었군.

뭐, 노도수가 몇억이나 되는 돈과 나를 바꿀 정도로 꽤 예쁘긴 하지.

머릿속의 생각들이 자연스레 자아도취로 빠지면서 창가 쪽을 선호하는 스타일이라 아무 의심 없이 창가 자리에 앉았는데 윤미뇬이 거기 아니라고 소리친다.

호와아. 후와아.

뭔가 짜증스러우면서도 지치는 기분.

내 과거인데 내가 알지 못하는 과거라니.

이건 뭔 개뼈다귀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남녀공학이라 그런가 모든 교실엔 남자와 여자가 사이좋게 앉아 있다. 윤미도 금방 교실로 들어온 처음 보는 남정네에게 수줍게 손을 흔든다.

그 남정네가 윤미의 옆에 앉는 걸 보니 저 녀석이 짝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내가 점심시간이 지나야 등교를 하는 불량학생과 짝이 된 이유가 꼭 남자, 여자가 짝을 이뤄 앉아야 해서인 모양이다.

이제야 뭔가 조금은 이해가 가는군.

그런데.

까놓고...이런 환경에서 애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겠어? 내년이면 수능을 봐야 하는 애들을 상대로 남녀 짝꿍이라니. 대체 누구의 아이디어란 말인가. 학교가 아니라 완전 연애 놀이터 아녀?!....라는 불필요한 걱정을 하던 나는 갑자기 바깥에서 '로열 떴다!'라고 외치는 목청이 노블레스 급인 여인네의 목소리에 자동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근두근.

열여덟 살 때의 가지다 등장.

.....

.....

그런데.

........헐.....저건 뭔 그림이냐.

진짜 연예인들도 아니고, 애 새끼들 넷이서 드라마 찍고 있다. 웃긴다.

마치 짜고 친 고스톱처럼 네 명의 잘난 놈들이 무리를 지어 등장해주시고. 그 선두에 선 약간 앳된 모습의 가지다는 단연 최고의 싸가지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자신들을 향해 꺅꺅거리는 여인네들을 투명인간 취급했다. 열여덟의 가지다와 스물일곱의 가지다는 그다지 갭이 없다. 하지만 저 오글거리는 자태란...솔직히 저런 느낌엔 많이 약하다.

딱히 좋아했던 연예인 하나 없었을 정도로 보통의 남자들에게도 무관심했던 나였다. 지금이야, 가지다 때문에 남자를 사랑하는 게 어떤 건지도 알고, 그 남자를 위해 희생도 결심했을 만큼 발전했지만, 여전히 저런 '꽃보다 남자'의 포스를 풍기며 목에 힘주는 녀석들은 밥맛이다.

그게 가지다라도 역시.

솔직히 나 대신 총에 맞았던 지다를 다시 만나게 되면 애틋한 무언가가 심장 깊숙이에서 솟구쳐 올라올 줄 알았다. 저절로 코끝이 찡하고 손끝이 아릴 것도 같았다. 하지만 웬걸. 심장이 조금, 아니 빨리 뛰는 것 말고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

단언컨대 이 빠른 심장박동은 저 오글거리는 녀석들의 등장 탓이다. 애틋하거나 그런 느낌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다.

헛.

순간,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고개를 돌리던 가지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쿵쾅 쿵쾅. 심장 뛰는 소리가 훨씬 빨라졌다.

"꺅- 나랑 눈 마주쳤어."

"미친뇬, 뭐래? 나랑 마주쳤거든?"

"시끄럽다, 이 잔챙이들! 가지다는 날 쳐다본 것이다!"

가지다와 꽃남병(꽃보다 남자 병) 무리가 사라지자, 내 주위에 있던 모든 여인네들이 저러코롬 말했다. 날 쳐다본 거라 생각했는데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군. 어쨌든 열 여덟 살의 가지다도 미치게 잘나긴 했다.

까놓고 천로에서 녀석을 꼬실 마음을 먹었을 때, 저 잘생긴 얼굴이 한몫했다. 어차피 할배에게 복수하기 위해 날 굴리려고 작정한 나는 저 잘생긴 놈이라면 깔려도 괜찮겠다 생각했었다.

뭐, 그런 걸 보면 역시 녀석의 얼굴에 약한 모양이다, 나.

.............

.........

...............

과거로 돌아온 건 꽤 좋은 쪽에 드는 일이긴 한데, 학교 수업은 여전히 지루했다. 덥고, 잠도 오고, 짜증도 나고. 역시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있는 여름날의 수업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수면제 같은 한문 선생님의 수업이 끝나자마자, 매점에 가자며 나를 부른 윤미 덕분에 미친 듯이 오던 졸음이 약간 사라졌다. 먹는 걸 썩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내 기억 속의 학교 매점에 팔던 슈크림 빵은 꽤 많이 그리웠을 만큼 맛있더랬다.

"너 또 슈크림 빵 먹을 거지?"

윤미의 물음에 혹시나 내가 알던 과거와 좀 달라서 슈크림 빵이 팔지 않으면 어쩌나 했던 걱정이 말끔히 사라졌다.

"응."

"더워죽겠는데 아이스크림 같은 거 먹어라. 너 어제도 매점에서 슈크림 빵 먹다가 더위 먹고 쓰러졌잖아."

"싫어. 슈크림빵 먹을 거야."

"어련하시겠어요. 이 슈크림 빵 중독자야."

윤미뇬이 그러거나 말거나 슈크림 빵을 세 개 사서 가슴팍에 소중히 안고 윤미뇬이 지 짝꿍의 아이스크림까지 사는 걸 기다렸다.

"어제도 잠 못 잤냐?"

"지다 너, 요즘 계속 피곤해 보인다?"

바로 그때.

작게 꺅꺅거리는 여인네들의 목소리 사이로 남정네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운이와 태산 아저씨, 아니 강태산이 가지다와 함께 나와 윤미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묻지 마. 입 열기 귀찮아."

하며 내 옆쪽으로 지나쳐 아이스크림을 사는 가지다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김운이 강태산에게 말했다.

"요즘 계속 이상한 꿈꾼대."

"이상한 꿈? 아, 전에 말했던? 어떤 여자애가 자꾸 꿈에 나온다고."

"어. 어제 앞날은 더 대박이었다더라. 그 여자애 대신에 지다가 총에 맞아 죽는 꿈이었대."

"에- 진짜?!"

"꿈이야, 꿈."

뜨끔.

녀석들의 대화를 듣던 나는 지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슈크림 빵들을 바닥으로 떨어뜨렸고, 역시나 매너가 몸에 밴 김운이 나 대신 슈크림 빵을 집어주며 내게 말했다.

"먹는 거 떨어뜨리는 거 아니야."

"아, 고마...감사합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반말이 나올뻔했다. 같은 나이이긴 하지만 친하지도 않은데 반말을 하는 건 역시 이상하다. 내가 알고, 나를 알던 김운도 아니고 말이지.

그런데 아까부터 아이스크림을 고르던 윤미뇬이 가지다가 자신의 옆에 서서 아이스크림을 고르자 그 뒤부터 노골적으로 저렇게 볼때기를 빨갛게 물들이고 아이스크림 뒤적이는 척만 하고 계신다. 조금 있으면 수업 종이 칠 건데 그런 건 전혀 상관없는 모양이다.

네 이 년. 너 강태산이 좋다며. 도대체 왜 가지다 옆에서 그렇게 몸을 배배 꼬고 지랄인데?!

"윤미야."

빨리 오라는 뜻으로 윤미뇬을 불렀다가 가지다와 또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철렁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난 열여덟 살의 가지다에겐 면역력이 없는 모양. 정작 윤미뇬의 내 부름은 쌩까고 가지다만 흘끔 흘끔 쳐다보는 걸 보니 나 혼자라도 돌아가야겠다 싶다.

짧은 한숨을 쉬며 나 먼저 간다고 말하자, 윤미뇬이 잽싸게 아이스크림 두 개를 집어 돈을 내고 내게로 뛰어왔다.

"다 샀어, 다 샀어......우와...너 봤어? 가지다가 내 바로 코앞에 있었어. 우워어, 심장 떨려. 피부 진짜 좋아."

나를 따라 나오며 내 귓가에 대고 소곤거리듯 말하는 윤미뇬은 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네가 짝사랑하는 가지다 옆에 좀 오래 있어서 삐친 거냐고 묻는다. 어이없다는 얼굴로 윤미뇬을 쳐다보자 윤미뇬이 개걸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농담이야, 농담. 넌 워낙 애가 반응이 없으니까. 근데 진짜 격하게 잘생겼다. 정말로, 진짜로."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빨리 교실로 돌아가자. 얼른 가서 슈크림 빵을 먹고 싶으니까, 난.

그런데 그때.

갑자기 내 팔을 낚아채는 손 하나.

깜짝 놀라 슈크림 빵을 또 떨어뜨렸는데.

언제 따라 나온 건지 가지다가 놀란 토끼눈을 뜨고 나를 보고 있다.

혹....요즘 잠을 설친 그 꿈속에...정말로 내가 나왔다거나.

"너 나 알지."

"...............어."

라고 대답하자 이 녀석, 뭔가 당황한 눈치다.

"..........진짜 너냐...?...."

한참만에 앞뒤 다 잘라먹고 다짜고짜 진짜 너냐고 물으면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한다니.

"뭐가?"

"................."

놈은 또다시 한참을 내 얼굴만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약간 갸우뚱하며 내게 물었다.

"....너 나 어떻게 아는데?"

미친놈.

"같은 학교니까 알겠지."

"그거 말고. 같은 학교라도 난 너 몰라."

아이고, 잘나셨네.

"나보고 너 아냐고 물었잖아. 근데 넌 날 모른다고? 그런데 널 아냐고 나한테 물은 거야, 지금?"

나란 여자는 기본적으로 당황하거나 불리한 입장에 놓이면 재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이 된다. 그리고 제법, 차가운 말투로 바뀐다. 뭐, 평소에도 상냥한 말투는 아니지만 말이지.

내 물음에 아무 대답도 못하고 가만히 날 쳐다보고만 있던 가지다를 쳐다보던 나는 녀석에게 잡힌 팔을 빼내며 말했다.

"난 너 알아. 이제 가도 되지?"

라고 말한 뒤, 땅에 떨어진 슈크림 빵들을 줍고는 넋이 빠진 얼굴로 가지다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윤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만 정신 차리고 교실로 가자꾸나, 친구야. 더 있다간 매점 근처에 있던 여인네들의 시선에 타죽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 정도로 나와 가지다를 쳐다보는 여인네들이 많았다.

(몇몇 여인네들은 나를 아주 잡아 죽일 기세로 야렸다)혹시라도 나와 있었던 일을 꿈으로 꾸고 있는 거라면 가지다가 날 기억해 내 줄까.

꿈은 꿈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 버릴지도.

아니, 그건 아닌가. 아마 분명, 꿈에 나타난 여인이 나라고 생각하고 날 쫓아왔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약간의 위안이 되기도 하면서 심장이 콩콩 거린다.

신 님. 요상한 과거로 날 보낸 게 미안하신 거라서 지다가 스물일곱 살 때의 일들을 꾸게 하시는 거라면, 이왕 꾸게 해주시는 거 내 기억도 말끔하게 돌아오게 해주시면 안될까요. 정말로 정말로, 지다와 행복하고 싶었던 난데, 열여덟의 가지다는 정복욕이 사그라질 만큼 어려운 놈이랍니다. 대놓고 난 우월하다의 포스를 풍기는 놈을 무슨 수로 꼬신답니까. 그러니까 신 님.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지다 녀석이 꿈으로 우리의 모든 일들을 알아차리게 해주세요.

말도 안되는 기도를 말도 안되게 마음속으로 빌며 가지다와 가까이 있었다는 이유로 여전히 볼때기가 빠알간 윤미뇬과 교실로 돌아왔는데. 뒷문 손잡이에 손을 대자마자 내 머리 위로 등장하는 손 하나.

그 손은 앙증맞게 손가락을 집게로 만들어 내 슈크림 빵 하나를 째벼간다.

이건 또 뭔 거지 같은 상황인데?!

.................

.................

..........

============================ 작품 후기 ============================

비안원님. 가지다와 같이 회귀를 하면 잽싸게 이어지고, 잽싸게 결혼하고, 잽싸게 완결을 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버려서 =_=....;;...뭐, 그렇습니다 ㅎ_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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