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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다 원하다-24화 (24/51)

24화

<그렇게 과거로 돌아왔다>

분명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다. 그런데 눈을 뜨니 9년 전으로 돌아와 있다. 아무도 믿지 않을, 나조차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내게 일어났다.

처음엔 꿈인가 생각했고,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사라지겠거니 했다. 하지만 다음 날, 엄마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뜬 나는, 자고 일어나도 이 믿지 못할 일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오늘도 몸이 좋지 않으면 학교에 전화를 해줄 테니 집에 있으라는 엄마에게 괜찮다고 말한 뒤,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인데도 마치 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준비를 하는 게 익숙했다. 교복이 내 기억과는 조금 다른 것만 빼면.

스무 살이 되자마자, 할배에게 팔려가 몇 년 동안이나 이때의 생활을 그리워했던 나였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고등학생 때 못 했던,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원 없이 할 거라 어렴풋이 생각했던 적도 있다.

내 처지가 가엽게 느껴질 때마다 그런 생각들로 위안을 삼고는 했다. 그런데 정말로 거짓말처럼 과거로 돌아왔다. 신이 나를 불쌍히 여겨 다시 과거로 보내준 것인지, 아님 내가 여태 꿈이라도 꾼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노도수에게 잡혀갔던 스물일곱 살 때까지의 내 삶이 꿈이었다면 노도수와 가지다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게 되는 거다.

그런 생각이 들자 뭔가 한없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느낌이 든다. 지다가 없는 세상에서 자유를 누리고 살아봤자란 생각이 들어버린다.

역시 스물일곱 살 때 했던 선택과 같다. 나는 지다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싶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다시는 만날 수 없어도, 그냥 살아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지옥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나, 심하게 녀석에게 빠졌었다. 지금도 녀석을 생각하면 코끝이 찡해질 만큼.

일단은 지금, 내가 정말로 회귀를 한 것이라면 분명 가지다를 찾을 수 있을 거다. 만약 찾는다면 이번엔 절대로 그를 내 것으로 만들 생각이다.

그가 싫다고 해도.....아....싫다고 하려나....그런 생각이 들자, 뭔가 슬퍼진다. 하지만 괜찮다. 그도 날 사랑했었으니까 분명 다시 또 사랑해줄 거다.

아무튼, 정말로 신이 내게 기회를 주신 거라면 가지다 역시 돌려주실 거라 믿는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거울 앞에서 몸에 꼭 맞는 교복을 입었다. 역시 교복 스타일이 기억과는 많이 틀리다.

분명 화복 치마가 회색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체크무늬로 바뀌어 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아 옷장을 열어 동복과 춘추복 조끼를 찾았다.

역시나 기억과 많이 다르다.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오래된 일이니까 내 기억이 틀릴 수도 있겠구나 하며 금세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버렸다.

갑작스러운 이 일에 대해 고민하던건 진즉에 그만 둬버렸는데 교복이 기억과 틀린 것이 문제 될 건 없다. 그런 사소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보단 앞으로 내가 해야할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우선은 아빠의 회사가 아직 부도나기 전이니, 아빠가 천로의 금융회사인 대한 캐피탈에다 절대로 돈을 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순서였다. 따지고 보면 모든 원흉은 이때쯤, 아빠가 동업자의 말에 꼬여 사업을 크게 벌리려해서 생긴 것이었다.

아빠가 대한 캐피탈에 돈을 빌리지 않으면 내가 노도수에게 잡혀 갈 일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뭔가 조금, 심장이 두근거렸다.

.....

.......

.....

"다이나~!!"

늘 내 이름의 받침을 빼먹고 부르던 고등학생 때의 단짝 친구 윤미가 등굣길에 나를 불러 세웠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환하게 웃어버렸다.

"윤미야."

그러자 윤미는 약간 놀란 눈을 하고 날 쳐다보다가 이내 뭐 씹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너, 아직 다 안 나았냐?"

"응?"

어제 더위 먹고 쓰러지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딴사람처럼 인사질이냐고 내게 묻는다. 얼음마녀한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인다.

아아. 그러고 보니 학교 다닐 때 별명이 얼음 마녀였다. 얼음 미녀도 아니고 얼음 마녀.

항상 무표정한 얼굴에 잘 웃지 않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래도 마녀라니...남녀 공학이었다면 분명 마녀 대신 미녀가 붙었을 거다. 하여튼 질투의 화신인 여고인들의 작명 센스란.

"진짜 괜찮은 겨? 니 어제 오후에 매점에서 갑자기 픽 쓰러져서 내가 얼마나 놀랬다고."

아아, 매점에서 쓰러졌었나, 내가.

"응, 뭐."

"하기야 어제 덥긴 대박 더웠지. 오죽했으면 로열 애들이 안 나왔겠냐."

"로열?"

그게 뭐냐고 물으며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데, 윤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혹시 기억 상실이라도 걸린 거 아니냐고 호들갑을 떨어댄다. 정말로 기억이 안 난다고, 우리 학교에 로열이란 게 있었냐고, 그게 대체 뭐냐고 물었더니 사립 남녀 공학인 우리 학교에 로열 클리스가 있는 건 세 살짜리 꼬마도 안다고 말한다.

잠깐, 우리 학교가 사립이라고?? 공립 아니었냐?!

아니 아니 것보다, 남녀 공학이라고?! 여고였는데?!!!

"우리 학교 이사장이 대한 그룹 회장이잖아. 그 회장이 하나밖에 없는 딸과 아들 같은 남자애들을 위해 만든 게 로열 클레스고. 뭐, 격이 다른 거지. 걔네들은 졸업하면 바로 천로로 가서 대한 그룹의 간부가 될 테니까."

"뭐, 천로? 너도 천로를 알아?!"

"...이 뇬 이거 왜 이래? 오늘 만우절이야?"

우리나라 사람들 중, 대한 그룹 사유지인 천로와 제일 그룹 사유지인 풍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라며 말한 윤미는 내가 아는 것과 비슷한 내용을 신이 난 얼굴로 읊기 시작했다.

"로열은 노도수 회장의 딸 노지나가 주축이 된 귀족 클레스인데 거기엔 미래 대한 그룹의 간부진이 될 애들 4명이 속해있어. 소문에는 그 네 명 모두 아들이 없는 노도수 회장이 어딘가에서 데려온 애들이라는데 그 중 한 명이 미래의 노지나 남편이 될 거라는 소문이 있어. 중요한 건 로열 4인방의 비주얼이 미친 듯이 쩐다는 거지. 항간에는 노도수 회장이 연예인 지망생을 뽑아온다는 소문도 있거든. 이건 너랑 나랑 둘이 했던 얘긴데 설마 이것도 기억이 안 나냐?"

라고 묻는 윤미에게 애써 웃어 보였다. 뭔가 과거로 돌아오긴 했는데 진짜 과거와는 다른 느낌.

제일 많이 달라진 거라면 단연 노지나가 나와 같은 나이가 되어있다는 것. 그리고 눈 정화 4인방으로 불리고 있는 로열 4인방 중, 내가 아는 이름이 셋이나 된다는 것. 가지다, 김운, 그리고 강태산.

어째서 태산 아저씨마저 나와 동갑이 되어있는진 모르겠지만 그건 별로 놀랍거나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열여덟 살의 가지다를 만날수 있다는 것.

"야, 너 어디로 가냐? 그쪽 아니여."

익숙한 길모퉁이로 돌아서려는데 윤미가 나를 툭 치며 저러코롬 말했다. 역시나 학교의 위치도 다르다. 집과 꽤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는 것만 빼면 정 반대다. 시내 쪽으로 가는 방향으로 내 손을 잡아끌며 정말로 더위를 먹고 쓰러진 뒤 기억을 잃은 게 아니냐며 병원에 가보라고 말하는 윤미.

"근데. 로열 4인방 중 나머지 한 명은 누구야?"

"응?...민준수."

갑작스러운 그 이름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엑- 민준수?"

그 게이 자식?!

"왜 그렇게 놀라?"

"걔도 나랑 동갑이야?! 어니, 것보다. 걘 풍로 민무영의 아들 아냐?"

"오- 그건 기억하나 보네. 맞아, 풍로 회장의 외동아들이지. 풍로와 천로가 동맹 회사잖아. 그래서 그 아들도 우리 학교의 로열 클레스에 들어있는 거지."

천로와 풍로가 동맹 관계라고? 이건 또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야.

"들리는 소문엔 민준수가 풍로 회장한테 우리 학교에 보내달라도 떼를 썼다나 봐. 걔 사실은 노지나 좋아하는 듯."

그게 아니지. 그 새끼 게이인데. 분명 가지다를 노린 걸 거야.

"아무튼 민준수는 금욕적이고 노지나외의 여자랑은 말도 안 섞는데, 그게 또 멋있다고 핥는 애들이 많지. 그래도 난 눈 정화 4인방 중에 강태산이 제일 좋더라. 그 귀여운 미소하며 전혀 화를 내지 않을 것 같은 성격. 2년 동안 걔 화내는 거 본 사람 아무도 없다잖아. 거기다 좀 잘생겼냐?"

태산 아저씨의 성격이 좀 좋기는 하지. 날 경호해줬던 사람이라고 하면 100% 안 믿겠지?

".....가지다는...?..."

이쯤 되니 가지다의 소문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응? 가지다? 걔야 뭐, 여자들의 넘사벽이지."

아무도 소유할 수 없고, 아무도 길들일 수 없는 존재. 노지나도 애를 먹는 가지다이니 말 다했단다. 까칠함과 시크함으로 무장한 그놈은 밸런타인데이에 자신에게 초콜릿과 편지를 줬던 수많은 여자들에게 '꺼져'라는 무지막지하고 짧은 임팩트를 가진 명대사를 날렸단다.

초콜릿 따위 필요 없으니 몸을 주면 생각해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니 그 자식, 괜히 섹스를 잘했던 놈이 아니었던 거다. 더욱 놀라운 건, 그 소릴 들은 사람 중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 과거의 내가...아니, 현재의 내가 가지다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뭔가 안심되면서도 서글픈 느낌이랄까.

여자란, 자는 것외엔 아무것도 아니라는 주의라는 가지다는 자신의 앞에서 자빠지는 여자들을 다 먹어줄 순 있지만,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은 받지 않는다는 나쁜 남자 중의 최강 나쁜 남자.

뭔가 미묘하고 복잡한 마음에 저절로 짧은 한숨이 나왔다. 윤미에게 그럼 김운은 어떠냐고 물었다.

"김운은 뭐. 팔방미인이지. 운동 잘해, 공부 잘해, 거기다 2학년 최초로 학생회장도 맡았고. 여자를 아주 안 만나는 건 아닌데 그쪽도 약간 금욕적인 느낌이 강하지. 아마 걔도 노지나를 마음에 둔 것 같다는 소문이 있어."

뭐, 이놈이나 저놈이나 노지나를 마음에 두고 있어 정작 노멀 클레스인 우리가 눈독을 들여봐야 도루묵이라고 말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윤미를 보며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현재의 노지나는 뭔가 좀 대단한 느낌이랄까.

뭐, 스물일곱 살 때 본 지나 언니도 대단하긴 했어.

그나저나 넘사벽이라...내가 고백을 했는데도 꺼지라고 했단 말이지.....?....

현재의 가지다는 나와 있었던 기억이 전혀 없는 모양. 아니, 기억하는 게 더 이상한가.

아무튼...뭔가 꽤 장기전이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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