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상호 병원의 입구 앞에 검은색 세단 여러 대가 멈춰 섰다. 병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거기서 내리는 검은 무리의 사람들을 보며 두려운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수군거렸고, 노도수의 병실 앞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은 검은 무리의 등장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노도수의 병실 앞에 서있던 경호실장이 문을 두드린 후 열자, 검은 무리 한가운데에 있던 백발의 건장한 중년이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 무리 중 하나가 따라 들어가려 하자 경호실장이 팔을 뻗어 그를 막았다.
중년이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보이자, 검은 무리는 그 자리에 일렬로 섰다. 노도수의 병실 앞엔 풍로와 천로, 경찰들이 모여 서서 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평소엔 볼 수 없는 희귀한 관경이었다.
"여기까지 불러서 미안하네. 보다시피 내 쪽은 움직일 수가 없는 몸이라."
몸을 일으킨 노도수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민무영."
노도수가 손짓으로 맞은편을 가리키며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민무영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내 아들이 네놈 부하 손에 있다는 게 무슨 말이야."
일본으로 안전하게 빠져나갔을 거라 생각한 아들이 천로의 손에 납치되어 있다는 사실에 앞뒤 안 보고 달려온 참이었다. 노도수가 전화로 한 말이 사실이라는 건 요트 안의 비상 전화가 연결이 되지 않고, 아들인 민준수와 그에게 붙인 경호원과도 연락이 되지 않아서였다.
"지다가 데리고 있네. 너희 쪽이 납치했던 여자도 같이."
"......"
"그 아이를 납치하고 감금한 걸 탓하기 위해 부른 건 아니니 긴장하지 말게."
"네놈 앞에서 긴장 따위를 할 것 같나, 내가?"
"그 변함없이 건방진 투는 여전하구만."
"네놈에게 들을 소린 아니야.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물론, 내 아들놈의 몸값으로 뭔가를 원해도 들어주진 않을 걸세. 전쟁이 하고 싶으면 좋을 대로 해."
민무영의 말이 진심이 아닌 정도는 알고 있는 노도수였다. 이쪽에서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하면 분명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쇠로 검찰 측을 끌어드려 자신의 식구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할 게 분명했다. 그것 때문에라도 가지다가 민준수를 인질로 민무영에게서 그 열쇠를 빼앗으려고 한 것이었다.
노도수는 천천히 그리고 담담하게 민무영에게 제안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여자를 납치, 감금한 걸 덮어두는 대신 민준수를 납치란 천로의 일도 덮기로 하자고 했다.
자신 측이 데리고 있는 민준수를 안전하게 넘겨주는 대신 더 이상은 원수같이 으르렁 거리지 말자는 말도 덧붙였다.
"솔직히 구역도 다르고 서로 으르렁 거릴 이유가 전혀 없는데 네 놈이랑 내가 서로 으르렁거리니 밑에 놈들도 따라 그러는게 아니냐."
"네놈이 먼저 시작한거 잊었나?"
"....그런가...."
노도수는 피식 웃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렸을 적 민무영과 노도수는 친구 사이였었다.
그렇게 친하진 않았지만 지금과 같이 원수가 될 만큼 둘 사이에 나쁜 일은 없었다.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아주 사소한 오해가 지금의 둘 사이를 만든듯했다. 민무영의 아내가 나와 만난다는 소리를 부하에게 듣고 나와 자신의 아내를 오해한 건 민무영이었다.
물론 그건 자신의 아내와 친했던 민무영의 아내가 자신의 아내 문제로 찾아왔던 것이었다.
후에 자신과 민무영의 아내의 결백은 밝혀졌지만 민무영처럼 그의 아내와 자신을 오해한 아내가 죽고 난 뒤였다.
민무영의 의처증 때문에 아내에게 억울하게 오해를 받고,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 오해를 풀지 못 했다.
그 후 억울함은 증오로 바뀌었고, 지금까지처럼 서로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뭐, 휴전은 내 쪽도 반가워할 문제지. 네놈 아이들이 이유 없이 우리 아이들을 괴롭힌 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 앞으로 그런 일만 없게 해준다면 우리 쪽도 더 이상은 천로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겠네.....그런데 하나만 묻지. 갑자기 심경의 변화가 생긴 이유는 뭔가?"
농담처럼 죽을 때가 되었나? 하고 묻는 민무영에게 노도수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일에서 손을 떼고 그 아이와 함께 남쪽 섬으로 가 남은 여생을 보내려 하네."
"...그렇게 소중한 아이인가? 네놈 일생이 담긴 천로와 바꿀 만큼?"
"나도 이제 늙었네. 천로를 위해서도 그편이 좋아. 내겐 나보다 더 잘 이끌어줄 2대 녀석도 있고."
"...가지다 말인가."
노도수는 대답 대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걸로 괜찮은가. 들리는 소문엔.."
"아들로 만들고 싶은 놈이었네... 내 여자를 건드리고 딸아이에게 상처를 준 녀석을 용서한 건 아니야. 하지만 천로를 맡길만한 녀석은 그 녀석뿐이야."
민무영은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봐도 모든 걸 맡기고 싶은 놈이긴 해. 두어 번 본 것이 다인데 마치 어렸을 때의 너를 보는 것 같았지. 그에 비해 내 아들놈은..."
"자네야 앞으로 몇십 년은 더 건재할 테지 않나. 그리고 자넨, 자네 아들놈에게 풍로를 맡길 마음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내 아들놈까지 위험한 일을 하게 하고 싶진 않아. 단지 그것뿐이네."
민무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노도수. 둘은 오랜만에 마주 보고 앉아 꽤나 긴 시간 동안 옛날 이야기를 나눴다.
....
.......
.....
일본에 도착한 가지다는 선착장에 먼저 도착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노지나와 풍로인들을 보고 놀란 얼굴이 되었다. 아니, 풍로인들과 나란히 서있는 노지나를 보고 놀랐다는 말이 더 맞겠다.
"아버지가 민회장과 딜을 하셨대. 이 일을 묻고 풍로와 천로는 동맹관계를 맺기로 하셨어."
김운에게 잡혀있던 민준수가 푸핫하고 웃으며 이렇게 갑자기?라고 말하자, 노지나가 그를 흘끔 쳐다보고 말을 잇는다.
"아버지가 민회장과 직접 만나셨어."
더 이상 풍로와 으르렁거려선 안된다고 말한 지나는 김운에게 민준수를 풍로인들에게 보내라고 말했고, 김운은 가지다를 쳐다봤다.
벙찐듯 멍하니 서있던 가지다는 피식 웃으며 혼잣말로 당했군이라고 말했다.
그 사이, 풍로인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가지다 옆을 지나친 민준수는 가지다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그렇게 되었다는군. 유감이야, 가지다."
그 말에 지다가 빠른 동작으로 민준수의 멱살을 잡자, 풍로인들이 반사적으로 총을 꺼내 가지다를 향해 겨눴다.
"워워- 흥분하지 말라고? 이미 휴전을 한 상태라잖아?....억울해하진 마. 우리들 분명, 앞으로 만나게 될 테니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가지다에게 말한 민준수가 이내 시린 얼굴로 풍로인들에게 총을 집어넣으라고 말했다. 그리곤 다시 씩 웃으며 가지다를 쳐다봤다.
"그럼. 이 빚은 꼭 갚을 테니까."
가지다에 의해 생긴 이마의 상처를 가리키며 말한 민준수는 풍로인들의 차에 타고 선착장을 빠져나가고 가지다는 노지나를 보며 미간을 찌푸린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아버지의 명령이야. 다인인 내가 데려가. 넌 운이와 함께 천로로 돌아가."
"그러니까 갑자기 영감의 생각이 바뀐 이유가 뭐냔 말이야."
가지다의 물음에 노지나는 고개를 돌려 다인을 한번 쳐다보고 가지다를 올려다봤다.
"....이다인 덕분이지."
"뭐?!"
"지금 이 일 조용히 덮게 된 이유도, 아버지가 널 살려두시는 이유도, 전부. 다인이 덕분이라고."
지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돌려 다인을 보는 지다. 다인은 지다와 눈이 마주치자 씽긋하고 웃었다. 그 웃음이 쓸쓸해 보이는 건 가지다뿐만이 아니었다.
"나는....네가 죽는 건 싫으니까."
"이다인!"
"앞으로 못 봐도 말이야...죽어도 만날 수 없다고 해도....말이지. 역시 난 네가 살아있어주는 게 좋아...죽어버리면...나 역시 살기 싫어질 거야."
"너!"
"살아있어줘....나를 위해서."
다인의 말에 가지다는 이렇게 가면 네가 어떻게 될지 알고서나 이러냐 묻자, 다인이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알아. 난 내 의지로 지옥 같은 삶으로 걸어가는 거야."
"이다인!"
"....너를 유혹한 내 죄책감이라고 생각해."
라고 말한 다인이 노지나의 뒷좌석 차 문을 연 강태산에게로 가 차에 타면서 말을 덧붙인다.
"건강해....지다야."
......
.......
....
노지나의 차를 타고 멀어진 다인을 보며 멍하게 있던 지다는 자신의 어깨를 약하게 누르는 김운을 쳐다봤다.
"다인이가 정한 일이야."
"...넌 이미 알고 있었냐...?..."
"네가 하려는 일 전부 말하고 부탁했어."
"김운!"
"널 그냥 죽게 둘 수 없었어. 다인이도 네가 죽는 건 원하지 않아. 아무도 원하지 않는데 너 혼자 정해버린 거야."
"....."
"너 죽으면 다인이도 죽어."
"그러니까 내가!"
"다인이는 모르게 하라고? 언제까지...그게 언제까지 가능할 것 같아?"
"......"
"지금 너밖에 안 보이는 애야. 너 아니면 살아갈 이유도 없는 아이라고....널 위해서 참을 결심한 거야. 너 살리려고 회장님의 옆에서 평생...있기로 한 거라고."
"...영감을 만나야겠어."
"넌 나와 함께 천로로 돌아가야 해. 회장님 오더야."
"운아!"
"니가 회장님을 만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어차피 곧 한국에 있지도 않아."
"...뭐...?..."
"...다인이 명의로 산 섬....거기 가서 지내실 거래."
"무슨 말이야?! 천로는 어떡하고!"
"너 있잖아."
"...!....말도 안되는 소리!"
"한국에 발 디디는 순간, 넌 천로를 벗어날 수 없어. 다시는...이다인 못 봐."
"......."
"제발 널 위해 다인이가 하는 희생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마라. 그 녀석, 그런 결심하기까지 정말 힘들었을거다."
김운의 말에 지다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자신이 결심했던 것보다 더한 희생을 이다인이 하고 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죽을 만큼 싫어하는 생활을 하려고 한다. 말린다고 말을 들어먹을 리 없고, 엎는다고 변하는 건 없다.
그녀는 이미 자신을 위해 영감의 옆에 평생 있겠다는 결심을 했다.
되돌리고 싶어도 되돌릴 방법이 없다.
이다인과 노도수를 다시 설득할 능력이 가지다에게는 없다.
그저 이렇게, 어차피 가질 수 없었던 여자가 자신의 손을 놓는 걸 그냥 두고 봐야한다.
가지다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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