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상호 병원.
병원 입구에 급하게 세워진 검은색 세단의 조수석에서 노지나가 내렸다. 거의 뛰다시피 병원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7층에서 움직이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올려다보며 애꿎은 버튼만 거칠게 눌러댔다. 주차를 끝내고 뒤따라 들어온 강태산이 말없이 노지나의 옆에 섰다.
가지다가 민 회장의 아들을 데리고 직접 풍로로 갈 거라는 얘기를 태산에게 듣자마자 한 걸음에 달려온 참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풍로 회장의 아들을 인질로 세워 혼자 풍로에 갈 생각을 할리 없다. 죽을 생각이 아니고서야 민 회장 아들의 몸값으로 혼자서 민 회장과 딜을 할리가 없다.
아무리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라고는 해도 풍로와는 바꾸지는 않을 사람이다. 풍로가 흔들리는 건 절대로 두고 볼 사람이 아니다.
민무영은 아들의 목숨 하나와 풍로의 수만 명의 목숨을 저울질해가며 고민할 사람이 절대로 아니란 말이다. 그건 가지다도 분명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일을 감행하려고 하다니...지금 녀석은 일이 잘 되든 안되는 죽을 생각인 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노도수가 있는 병실로 빠르게 걸어간 노지나가 노도수의 병실 문을 노크도 없이 열어젖혔다.
신문을 보고 있던 노도수는 갑작스러운 딸의 등장에 보고 있던 신문을 접고 안경을 벗었다.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아버지!"
"...흥분하지 말고 앉아라."
"아버지!"
노지나가 말을 듣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부르자, 노도수는 따라들어온 강태산에게 턱짓을 하며 말했다.
"이 아이 좀 앉히게."
"네, 회장님."
"아버지!!"
"여기 내가 네 아비인 거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흥분했는지 잘 아니까 일단 앉아서 흥분 좀 가라앉혀."
"그대로 두면 지다 분명 죽을 거예요! 풍로 회장이 그냥 두지 않을 거라고요! 어서 빨리 그만두게 해야...!..."
"그만두면. 애써 얻은 민 회장의 아들이라는 그 좋은 미끼를 그냥 버리라는 거냐?"
"아버지!"
"....그 녀석이라면 죽는 한이 있어도 내가 원하는 건 가져다주겠지."
"지다 목숨은요! 일이 잘 된다 하더라도 죽을 거라고요! 파일을 우리 쪽으로 넘긴다 해도 민준수를 데려간 지다는..!..."
"내 손으로 죽이는 것보단 나아!"
노지나의 말을 끊으며 소리친 노도수. 노지나와 강태산이 동시에 놀란 얼굴을 하고, 노도수는 짜증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테이블에 있는 담배를 집어 물며 말을 이었다.
"내 여자를 건드렸어. 내가 그냥 넘어갈 것 같으냐?"
"...하, 하지만 아버지..."
"내 손에 죽던, 민 회장 놈의 손에 죽던 그놈은 어차피 죽은 목숨이야...그 녀석은 이미, 돌아오면 내 손에 죽겠다고 말하고 제 발로 거길 갔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천로를 위해 파일을 넘기고 죽는 편이 낮겠다고 생각했겠지.....역시 영리하고 믿을만한 놈이야. 그놈 다워."
"아버지!"
"나라고 마냥 괜찮은 줄 알아?! 일이 어째되었건 내 자식 같은 놈이다! 너와 맺어주고 진짜 가족이 되고 싶었던 놈이라고!"
"그럼 용서해주면 되잖아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일본에 도착하기 전에!"
"내가! 그 아이가 그놈을 보는 걸 참을수 있을 리 없어!"
노도수의 눈빛이 얼어붙을 만큼 시리게 변했다.
"이 내가....그 녀석이 다른 놈을 바라보는 건 견딜 수 없단 말이다."
정말로 죽게 할 작정이었다. 노지나는 저절로 떨리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질투심이다. 자신처럼 아버지도...지금 질투를 하고 있다. 자신이 질투심에 눈이 멀어 이대영을 끌어드린 것처럼 지금 아버지도 이성적이지 못한 생각으로 가지다를 죽게 하려고 한다.
노지나는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 노도수를 두고 병실에서 나왔다. 강태산이 그녀를 부르며 뒤따랐다. 노지나는 빠른 동작으로 병원을 나서며 휴대폰으로 김운의 번호를 찾았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지금 아버지와 가지다를 말릴 수있는 사람은 이다인뿐이야. 공항으로 가. 일본으로 갈 거야."
......
........
.....
펑펑 울며 지다의 품에서 잠이 들었던 다인은 타는듯한 갈증 때문에 눈을 떴다. 퉁퉁 부어 떠지지 않는 눈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몸을 일으켰다.
옆에서 곤하게 자고 있는 가지다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침대를 내려와 밖으로 나왔다. 밖은 어느새 밤이었다.
민준수는 소파에서 웅크린 채 잠이 들어있었고, 김운은 난간에 기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인은 냉장고 안에서 물을 찾아 마신 후 밖으로 나왔다.
"...뭐 해...?..."
김운의 옆에 서며 이다인이 물었다.
"아, 일어났어?...지다는?"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며 김운이 물었다.
"자고 있어...넌 안자?"
"...응, 뭐...."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생겼다. 다인은 아까 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고, 김운은 노지나의 전화를 받은 후라 그랬다.
"저, 아까는."
"저기 말이야."
둘이 동시에 말을 꺼내고 동시에 놀랐다. 그리고 동시에 피식 웃었다.
"너부터 얘기해."
김운이 바다를 보며 말했다. 다인은 약간 쌀쌀해진 느낌에 걸치고 있던 지다의 재킷을 꼭 여미며 말했다.
"아깐 미안했어...지다가 나 때문에 죽을 거란 말에 이성이 나갔었어."
"아- 그거라면 괜찮나. 사실이 아닌 것 정도야 이미 알고 있으니까."
"......"
"저기...다인아."
"...응..?...."
"지다 죽는 거....싫지?"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좀 들어 줄래?....지다한테는 말하면 안 되는 얘기야."
.....
.......
.....
가지다가 하려고 하는 일 전부를 이다인에게 털어놓은 김운은 노회장님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이다인뿐이라고 말했다.
이다인은 가지다가 자신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으로 민준수와 파일을 교환하고, 그 파일로 이다인이 노도수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라고 부탁했다는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풍로가 파일을 김운에게 보내고 나면 민준수를 풀어줄 것이다. 민준수를 풀어주고 나면 풍로 진영에서 혼자 남게 된 가지다를 풍로 회장이 그냥 둘 리 없다. 만약 운 좋게 거기서 벗어난다 해도 풍로와 천로는 그 일로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일의 책임을 전부 진 가지다가 풍로 손에 죽으면 풍로가 파일을 다시 찾으려고 움직이긴 해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파일과 민준수를 교환하려는 순간부터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가지다가 죽는 게 두 조직이 가장 안전해지는 길이다.
만약 풍로가 파일을 보냈는데도 가지다가 자신의 목숨을 건지려고 민준수를 풀어주지 않으면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가지다가 아무리 날고 기는 능력을 가졌다 해도 민준수를 인질로 데리고 있는 이상 쉽게 풍로를 벗어날 수는 없다.
붙잡힌 가지다를 그 자리에서 죽이던 붙잡아서 감금하고 고문을 해 죽이던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노노수의 여자를 건드린 이유로 노도수의 눈에서 벗어난 걸 알게 되면 가지다를 살려둬봐야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가지다는 바로 죽을 것이다.
즉, 죽는 시점이 언제인지가 달라질 뿐 가지다가 민준수를 데리고 풍로 회장과 딜을 하게 되는 순간 이미 가지다는 죽은 목숨이라는 거다.
지금 이 일을 중단할 수 있는 사람은 노도수밖에 없다.
가지다는 분명 노도수가 그만두고 돌아오라면 어쩔 수 없이 돌아갈 것이다.
노도수를 설득할 사람은 이다인밖에 없다.
노도수가 다인의 명의로 섬을 사고, 결혼을 한 뒤 다인과 여생을 거기서 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언젠가 노지나에게서 들었던 김운은 다인에게 부탁했다.
"회장님의 옆에서 평생 살겠다고 하면 될 거야. 자살시도 같은 거 앞으로 절대 안 하겠다고 약속하면 회장님은 분명 네 부탁을 들어주실거야. 앞으로 지다를 다신 볼 수 없겠지만...지다의 목숨은 살릴 수 있어."
이다인은 일본에 도착하기 전에 결정을 해달라는 김운의 말에 한참을 난간에 기대 김운이 준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바다를 바라봤다.
가지다를 죽게 하는 대신 노도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지다를 살리는 대신 평생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전자든 후자든 자신은 더 이상 가지다를 볼 수 없다.
해가 뜨기 전인 새벽 무렵.
꽤 오랜 시간 동안 생각에 잠겼던 다인은 이내 마음을 굳힌 듯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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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론 절대로 자살시도 따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죽을 때까지....당신의 여자로 살겠다고 약속할게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언제까지고 옆에 있겠다고 맹세하겠어요.'
노도수는 이다인과의 통화를 끝낸 뒤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절대로 죽을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다인의 말에 동요가 일었다.
노도수는 7년 동안 이다인을 데리고 있으면서 언제 어느 때 그녀가 자살시도를 할지 몰라 두 다리를 편히 뻗고 자지 못했었다.
그녀가 약속을 정말로 지킬지 알 수는 없지만 가지다를 살려주면 평생 자신의 옆에서 아이를 낳고 산다는 말에 당장이라도 그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그 정도로 그 아이에게 빠져있었다.
그녀가 얌전히 자신의 옆에만 있어준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만약 가지다를 죽게 한다면 그녀는 분명 여러 번의 자살시도를 해 자신의 피를 말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노도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버튼을 눌러 밖에 있던 경호실장을 부른 노도수는 경호 실장이 들어오자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민무영을 만나야겠다. 지금 바로 연락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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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긴 잠을 잔 가지다는 일본이 가까워지자 이젠 다인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일 분도 그녀를 놓고 싶지 않았다. 일분, 일초가 아까운데 잠이 들어버린 게 후회스러웠다.
지다는 아침을 먹을 때도, 심지어 화장실을 갈 때도 다인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다. 그런 지다 때문에 꽤 지친 다인은 두 팔과 두 다리를 뱀처럼 꼬아 자신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있는 지다에게 참다못해 날 뭉개 죽일 참이냐고 소리쳤다.
"도착할 때까지만 안고 있자. 일본 가면 한동안은 너 못 보게 되니까."
이미 거짓말로 다인을 달랜 참이기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다. 괜히 말 한번 잘못했다가 또 따라 죽는다던가 하면 곤란했다.
자신이 죽고 난 뒤, 그녀가 자신을 찾으면 일본에 있다고 거짓말을 해달라고 김운에게 부탁해놓은 참이었다.
다인은 거짓말로 자신을 안심시키는 지다를 보며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한 다인은 앞으로 다시는 그를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다는 생각에 안타까워져 그의 머리를 꼭 안았다.
자신만 참으면 된다. 자신만 노도수의 여자가 되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거짓으로라도 행복한 얼굴을 보인다면 가지다는 분명 자신 때문에 아파하지 않을 거다.
어쩌면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 자신을 보고 지다가 원망 할 수도 있겠지. 상관없다. 가지다만 살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다시는 못 보게 되더라도, 다시는 못 만지게 되더라도, 같은 하늘 아래 살아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옥 같은 삶을 살아도 지다가 살아있고 언젠가는 다시 한 번쯤 볼 수 있다는 걸 위로로 삼을 수 있겠다 싶었다.
"나 섰어..."
다인의 배에 안겨있던 지다가 고개를 들어 다인을 보며 말했다.
다인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다 피식 웃으며 입술을 부딪혔다.
풋풋한 입맞춤이 혀와 혀가 얽히게 되어 진한 입맞춤으로 바뀌고, 지다는 어느새 다인을 침대에 눕혀 옷을 벗겼다.
"...지다야...."
"응?"
"....사랑해."
다인은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말을 관계를 가지는 내내 가지다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지다는 다인의 사랑한다는 말에 대답 대신 그녀의 안으로 자신을 깊숙이 밀어 넣는 것으로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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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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