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가지다와 김운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동안 잠에서 깬 다인은 이불로 몸을 감싸고 침실에서 나왔다. 온몸이 욱신거릴 정도로 아프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벽을 짚으면서 걸었다.
소파에 기대 밖에 있는 가지다와 김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민준수는 침실에서 나오던 이다인이 자신을 보고 흠칫 놀라자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잡아먹어요...지금은 일단 내 쪽이 인질이고."
"......."
무표정한 얼굴로 민준수의 맞은편에 앉은 다인은 밖에 서서 김운과 얘기하는 가지다를 쳐다봤다.
"뱃멀미 안 하나 봐요?"
"......."
"약기운 다 가셨어요?"
"........"
"가지다...섹스 잘해요?"
민준수의 물음에 전혀 미동 없이 가지다만 쳐다보고 있던 다인이 마지막 물음에 고개를 돌려 민준수를 쳐다봤다.
"뭐, 부러워서 묻는 거라고 생각해요. 난 그의 벗은 몸조차 보지 못했으니까."
"......안 보여줄 거야."
민준수를 쳐다보며 말한 다인이 다시 고개를 돌려 가지다를 쳐다봤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나름 질투를 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시크한 스타일인 줄 알았는데 그렇다기보단 감정 표현이 서툰 여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누나도 이 배위에서가 마지막일 걸. 가지다 보는 거."
민준수의 말에 다인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이번엔 꽤나 화가 난듯한, 애써 화를 참는 얼굴이었다.
"무슨 소리야."
"아까 저 두 사람 얘기하는 거 들었어. 가지다는 누나랑 같이 안 간대."
"......"
"아니, 따지고 보면 못 가는 건가....이 나를 인질로 잡은 이상 풍로와의 전쟁은 이미 피할 수 없고, 날 데리고 아버지에게 가는 역할을 하는 사람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 하니까. 뭐, 가지다가 직접 말하기도 했고."
"......!....."
"...귀가 좀 밝은 편이라서 말이야, 내가....근데 웃기지 않아? 누나 같은 여자 하나 때문에 저 가지다가 죽을 결심을 하다니 말이죠."
"...뭐...?!...."
민준수는 피곤한 듯 쿠션으로 얼굴을 가리며 소파에 눕고는 말을 이어 나간다.
"우리 아버지의 비밀문서와 나를 바꿔서 누나를 노도수에게서 자유롭게 해주겠대, 저 사람."
민준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다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민준수는 감고 있던 눈을 떠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뭐, 현명한 거죠. 어차피 누나랑 같이 노도수에게 가도 죽을 목숨이라니까."
"....뭐....?..."
"그러던데?....노도수 손에 죽을 거라고."
"아니야! 할배가 섣불리 지다를 죽일 리 없어! 지다는 지나 언니의!...할배는 지다를 아들같이..!.."
"아. 들. 도 아니고, 아들 같은 사람이 자기 여잘 빼앗았는데 가만히 있을 것 같아?...그것도 천로 회장이."
"......"
새하얘진 얼굴로 멍하니 서있는 다인을 보며 민준수가 시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미 알고 있다고, 저 사람. 어차피 죽을 거 알고 위험을 무릅쓰고 누나를 자유롭게 해주려고 한다고. 뭐, 어차피 우리 아버진 비밀문서와는 날 절대 바꾸지 않을 위인이시고...나도 가지다와 함께 가는 저승길이라면 나쁘진 않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니야!"
갑작스러운 이다인의 외침에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가지다와 김운이 요트 안을 쳐다보고, 다인과 눈이 마주친 가지다가 요트 쪽으로 걸어오자 민준수가 눈을 감으며 중얼거리듯 말한다.
"다 너 때문이야."
민준수의 말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은 다인은 가지다가 들어와 자신을 부르자 애써 아랫입술을 깨물며 참는다.
"깼어?"
"....응...."
"몸은 좀 어때. 배는 안 고파?"
"...응..."
애써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는 다인을 보며 피식 웃던 지다가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뭐라도 좀먹자며 싱크대로 향한다.
"야, 꼬맹이. 너도 배고프지?"
냉장고 문을 열며 묻는 지다에게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있던 민준수가 짜증스럽게 일어나 소리친다.
"꼬맹이라고 하지 마!"
요트 안으로 들어온 김운은 그런 민준수를 보며 피식 웃고는 가지다에게 말한다.
"욱하는 성격은 민 회장 판박이네. 요리는 내 쪽이 전문이야. 나한테 맡겨."
"웃기고 있네. 내가 더 잘하거든?.....내가 할 거야. 너한테 만들어주는 마지막 음식일지도 모르잖냐."
가지다의 중얼거리는 듯한 말에 요트 안이 조용해진다. 김운은 말없이 지다를 쳐다보고 지다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다인을 쳐다보며 애써 얼버무린다.
"음식 만드는 거 진짜 귀찮잖아? 여기 아니면 내가 언제 음식을 만들어보겠어."
다인은 그런 지다를 빤히 쳐다보며 울 것 같은 자신을 애써 달랜다.
다 너 때문이야라는 민준수의 말이 머릿속에서 자꾸 맴돌아 심장이 아파진다.
나 때문이어서는 안돼. 가지다가 죽어서도 안돼.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어도 같은 하늘 아래 살아는 있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다인은 한참을 고개를 숙인 채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김운을 부른다.
"운아.....나랑 잘래?"
순간, 당근을 썰던 가지다의 손이 멈추고 김운과 민준수가 놀란 얼굴로 다인을 쳐다본다. 다인은 애써 무표정한 얼굴과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지다 지금 요리 중이라 바쁘고, 저 꼬맹이는 게이라 내 알몸 봐도 서질 않고....이 요트 안에 날 상대해줄 사람은 지금 너 뿐인 것 같은데."
"이다인!"
당황한 김운이 다인을 부르고, 가지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인을 본다. 가지다와 눈을 맞춘 다인이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한다.
"난 아무라도 괜찮거든. 할배와 연관된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지다는 다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친 동작으로 다인의 팔을 잡아 침실로 들어가 쾅 소리 나게 문을 닫는다.
김운은 갑작스러운 다인의 행동에 머리를 긁적거린다.
"왜 저러는 거야...?...."
알수가 없다고 중얼거리며 지다가 썰던 당근을 써는 김운. 그런 김운을 보며 민준수가 말한다.
"내가 말했거든."
"....뭘?"
"가지다 죽을 거라고."
"......뭐....?...."
"누나 때문에...죽을 거라고."
"이봐."
김운이 민준수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자 민준수가 어깨를 으쓱 올리며 말한다.
"포기하라고 해. 우리 아버진 절대로 내 목숨과 문서를 바꾸지 않아. 그 문서...그게 없어지면 우리 아버지가 일생을 바쳤던 풍로를 잃게 돼. 아버지에게 풍로는 내 목숨과 바꿀 만큼 하찮은 게 아니야."
"....그 X파일...지금의 검찰청장과 관련된 거...맞지?"
"청장이 지금 우리 뒤를 봐준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도 잘 몰라.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지. 그게 천로로 들어가면 노도수는 분명 나쁜 짓을 하는데 그걸 쓰겠지."
"네 아버지도."
"틀려. 우리 아버진 그걸 절대로 건드리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셔. 우리 아버진 노도수처럼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기지 않아."
"....."
"천로는 말단 조직원의 생일도 챙겨준다지? 다들 정말로 가족같이 지내고 말이야...하지만 일이 터지면 무조건 그들을 총알받이로 만든다지. 누가 죽든, 얼마나 죽든, 상관없다지. 이번에 이대영 때문에 죽은 애들도 꽤 되지 않아?...노도수의 여자 때문이라는 하찮은 명분으로 목숨을 잃은 녀석들이 정말로 불쌍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
"......"
"풍로는 안 그래. 조직이라는 거, 정말로 목숨을 걸고 하는 위험한 일이라서 가족처럼 지내려고는 하지 않아. 웬 줄 알아? 만약 우리 아버지나 내가 풍로의 일이 아닌 개인적인 일로 조직원들을 총알받이 시키려고 하면 누구라도 반발하라고...이건 잘못되었다 싶은 일엔 소신을 가지고 자신의 목숨을 제일로 생각하라고. 대신에 풍로의 일엔 자신의 목숨을 바칠 각오로 일하라고....우리 아버지가 항상 하는 말이야."
"......."
"거짓 유대를 가지고 조직원들을 이용하는 천로 노도수보단 우리 아버지가 백배는 더 나아. 몇 사람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여자 하나의 목숨과 바꾸다니."
"....."
"정말로 잔인한 거야. 당신들은."
.............
....................
.......
"뭐 하자는 거야."
다인의 팔을 밀어내듯 놓으며 가지다가 물었다.
다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보고 있는 가지다를 쳐다보며 애써 덤덤하게 말했다.
"뭐가. 내가 운이랑 잔다는 게 이상해? 상관없잖아. 어차피 나 네 여자도 아니고. 하고 싶어졌는데 너 바쁘길래 운이랑 하려는데 그게 뭐, 나빠?"
"이다인!"
"...나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어. 굳이 네가 아니라도 괜찮아. 앞으로도 쭉 괜찮을 참이고......너 뭔가 착각하는 거 같아서 말해주는 건데, 내가 너 사랑한다고 한거. 그거 진짜 아니야. 금방 시들해졌다고, 너 같은 거."
"어리광이야? 갑자기 뭐가 맘에 안 들어서 이래?"
"어리광 따위 아니거든?!"
"적당히 해. 받아주는 것도 정도라는 게 있어. 방금 건 벗어났어, 너."
"내가 운이랑 자면 벗어나는 거야?"
"이다인!"
"어차피 너랑 잔 것도 벗어난 거였어! 굳이 네가 아니라도 괜찮았다고! 누구도 상관없었어! 근데 니가 뭐라고! 니가 대체 뭐라고!"
"무슨 소리야?!"
"싫어!"
"이다인!"
"이젠 싫다고, 너!!"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인 눈으로 다인이 소리쳤다.
지다는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 다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발가벗고 같이 뒹군지 한 시간도 안 지났어. 갑자기 싫어졌다는 말을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다인을 빤히 쳐다보며 묻는 가지다. 다인는 그런 가지다와 눈을 맞추며 애써 울음을 삼켰다.
아무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길 몇 분. 다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내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입이 움직였다.
"약기운이 떨어졌거든."
다인의 말에 지다의 눈썹이 꼼톨거렸다. 다인은 흘러내린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하자. 이만하면 많이 놀았잖아? 이제 너 질려. 그만 놀래."
더 이상은 참기 힘들어 문쪽으로 걸어가는데 가지다가 다인의 팔을 잡았다.
다인은 연신 흐르는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며 지다에게 말했다.
"이젠 싫어! 볼꼴 못 볼 꼴 다 보여서 짜증 나! 할배한테서 나 뺏지도 못할 거면서 위하는 척하는 너 역겨워. 어차피 너랑 나 아무것도 아니잖아! 아무것도 될 수 없잖아!"
참지 못해 울음을 터트리며 소리치는 다인을 자신의 품 안으로 당기는 지다.
".....갑자기 뭣 때문에 이러는 거야."
다인을 있는 힘껏 껴안으며 가지다가 물었다. 다인은 넘쳐흐르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면서 소리쳤다.
"나 너 사랑 안 해! 안 봐도 돼!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죽지 마! 나 때문에 죽지 마! 으허어어엉-!"
오열하는 다인을 숨이 막힐 정도로 껴안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지다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쉿...울지 마, 쉿..."
한참을 다인의 이마와 정수리에 키스를 하며 그녀를 달랜 지다.
어느새 울음이 잦아든 다인이 그의 품에 안겨 울먹거리며 말했다.
"안 봐도 좋으니까...평생 못 만나도 괜찮으니까..죽지만 마...살아있어. 나 때문에 죽지 마..."
"...내가 너 때문에 왜죽어, 바보야..."
그런 다인을 꽉 안으며 지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위험한 일하지 마. 같이 돌아가. 쟤 데리고 할배한테 가자. 가서 할배한테 알아서 하라고 하고 넌 예전처럼 천로에 있어. 응?"
"다인아."
"나 먼저 보내면 어떻게 해서든 죽어버릴 거야. 나 죽는 거 하나도 겁 안 나, 원래부터 그랬어....지금은....니가 없어져버리는 게 겁나."
"........안 없어져...."
"거짓말하지 마. 저 애한테 다 들었어. 나 필요 없어. 너 죽이고 자유 같은 거, 절대 필요 없어. 그딴 거 싫어, 절대로 싫어."
".............."
"같이 가자...응...?...."
지다는 대답 대신 다인을 꼭 안았다.
자신과 만나기 전에도 몇 번이나 자살시도를 했던 여자였다.
자신이 없어져버리면 충분히 자살을 하려고 할 여자였다.
민준수의 입을 막아 버리는 건데.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소용없다.
무엇보다...지금은 자신이 사라지면 정말로 죽어버릴 것 같은 이다인을 안심 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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