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너를 위해>
약기운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다인을 지다와 함께 요트 방 안쪽에 있는 침실로 밀실로 넣어놓고, 민준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있던 김운은 금방이라도 울것처럼 울먹거리는 민준수를 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아파...?..."
"......"
녀석이 중학생일 때, 노도수 회장과 민무영 회장이 만난 곳에서 두 번 정도 만난 적이 있었다. 남자 치곤 작고 아담한 체격에 귀염성 있는 얼굴이 우락부락하게 생긴 민무영 회장의 아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거기가 워낙 숫기가 없는 탓인지 가지다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자신의 경호원 뒤로 숨어버렸던 것이 참 귀여웠다. 김운은 어렸을 때의 귀여운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민준수를 보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비웃는 거야. 내가 우스워?"
그런 김운을 째려보며 민준수가 말했다.
"죽었을 수도 있어. 정말로..."
민준수의 이마에 흐른 피를 소독약을 묻힌 거즈로 닦아내며 김운이 말했다. 민준수는 그런 김운의 말에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의 팔을 탁 쳐냈다. 김운은 짧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민회장이라면 분명 이다인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 거야. 어쩌려고 저 아일 건드린 거야? 정말로 천로와 풍로가 전쟁을 하길 원해?"
"건드리지 않았어!"
민준수가 울먹이는 얼굴로 두 주먹을 꼭 쥐고 김운에게 소리쳤다.
"난 그저!...난 그냥 보기만 할 생각이었는데...저 누나가 가지다를 불렀어! 가지다의 이름을 불렀다고!"
민준수의 외침에 김운이 고개를 돌려 가지다와 이다인이 있는 방을 쳐다봤다.
"둘이 서로 사랑한다니...아니지..?..."
"......."
"어?! 아니잖아! 가지다는 노지나뿐이잖아! 여자 따위! 좋아할 리 없잖아!"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치는 민준수를 쳐다보던 김운은 한참 후, 긴 한숨을 쉬며 그의 이마에 약을 발라주면서 말한다.
"어이, 꼬맹이.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냐?"
"아- 아파!"
"가지다가 누굴 좋아하든 넌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애초에 네 아버지와 우리 회장님은 원수지간이잖아?....민회장도 참 이해 안되는 사람이다. 어떻게 노회장님 여자를 자기 아들에게 맡길 생각을 한 거야? 노회장님도, 지다도....정말로 죽일 거라고. 저 여잘 건드리면."
".....정말...로....야...?"
"......."
"....그럼 노지나는....?..."
"......니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야. 넌 네 목숨이나 걱정해. 이번 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리 없는 모양이니까. 회장님도, 지다도."
"정말로야? 그런 거 이상하잖아! 노도수의 여자를 가지다가 안고 있잖아. 안되는 거잖아! 노도수가 죽일 거라고!"
흥분해서 소리치는 민준수와 아무 말 없이 그의 다친 이마에 약을 바르는 김운.
"넌 네 목숨이나 걱정하라니까. 만에 하나라도 이다인에게 손을 댔다면..."
"여자랑 안돼, 나!"
민준수의 외침에 김운의 손이 멈췄다.
"아버진 믿고 맡긴 거라고!...내가 게이니까."
"......"
"절대로 손대지 않았어. 아니, 만지는 거 정도는...하지만 정말 안 선다고, 나."
"......."
손을 뻗은 채 얼음처럼 굳어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는 김운을 보며 미간을 찌푸린 민준수가 말을 잇는다.
"뭐야,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게이 처음 봐?!"
"....아니, 뭐....."
"빨리 바르던 거나 마저 발라."
"아, 그래."
한참을 말없이 약을 바르던 김운이 민준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민회장이...고민이 많겠다."
.....
.......
.....
그 시간 이다인은 짓궂은 가지다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약기운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이 인간, 넣어줄 생각은 않고 핥아대기만 한다. 침대에 무릎을 세우고 앉은 자세로 자신의 아래쪽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가지다의 머리통을 보며 이젠 한계라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가지다를 부르는 다인.
"으흣- 이제....흣...!.."
다인의 신음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는 가지다. 입 주위가 번들거리는 얼굴로 싱긋 웃는 그의 모습에서 일부러 자신을 애타게 하고 있는 게 보인다. 가지다가 혀로 자신의 윗입술을 핥자, 세상에서 이보다 섹시한 남자는 없을 것 같아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다.
"제발...이제..."
"응?....뭘 해달라고?"
"좀...!..."
가지다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에게 찰싹 달라붙은 다인은 가지다가 자신의 바지 지퍼를 내리자 참을 수 없다는 듯 아래를 그에게 밀착시켰다. 지다는 그런 다인이 귀여워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민준수가 미약을 먹여 혼자 하라고 했다는 설명을 하면서 얼굴을 붉히던 다인이 참기 힘들다며 문어처럼 달라붙는 지금, 꽤나 자신 있었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약발이 의외로 잘 받는 타입인가 보군. 흣-"
"아앗-!"
다인의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지다는 몸을 천천히 움직이며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숨쉬기 힘들 정도로 혀와 혀가 얽혔다.
다시는 이 사랑스러운 여자를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다는 생각에 심장이 타들어가는듯했다. 가지다는 지금 하는 이 행위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의 안 깊숙이 자신의 존재를 뿌렸다.
가지다는 아직도 이다인이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 했다. 노도수 옆에 있다면 편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겠지만 이전처럼 그녀에게 자유라는 게 없어진다. 또 언제 자살시도를 할지, 혹은 아무 남자나 유혹할지 알 수 없다.
자신을 유혹할때의 이다인은 노도수를 상처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할 마음이 있는 여자였다. 만약 그녀를 노도수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주면 자유는 얻겠지만 대신, 노도수가 죽을 때까지 평생 숨어서 살아야 한다.
자신이 보해해 줄 수도 없는 상황에서 노도수를 피해 숨어서 사는 건 지금 집안에서만 갇혀사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렇다고 노도수를 설득해 이다인을 놔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노도수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그게 정말 사랑인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다인이 원하는 쪽으로 해줄 생각이지만 그 안에 자신은 없을 것이다. 어렸을 때 자신을 주워준 은인을 배신하고 그의 여자를 사랑했다.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안았다. 노도수가 용서를 해준다고 해도 자신 스스로가 이젠 그의 곁에 있을 수 없다.
노도수가 죽으라면 죽을 것이고, 사라지라고 하면 사라질 것이다. 병원에서 나오면서 다짐했다.
자신을 키워준 노도수와 노지나에게 이다인 외의 배신은 하지 않겠다고.
몇 번의 관계로 지쳐 잠든 이다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가지다는 천천히 일어나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민준수가 그를 보자마자 인상을 썼다.
녀석이 어렸을 때 두어 번 정도 본 게 전부였는데 어째서인지 전혀 바뀌지 않은 얼굴이 익숙하기까지 했다. 여전히 아버지인 민무영과는 닮지 않은 귀염성 있는 얼굴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또한 여전했다. 뭔가를 갈망하는 듯한 눈빛. 자신을 원하는 듯한 눈빛. 여자들이 자신을 쳐다볼 때와 비슷한, 꽤나 익숙한 눈빛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해. 저 여잘 건드렸다면 넌 지금 살아있지 못해."
"배신자! 바람둥이! 나쁜 놈!"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던 가지다가 갑작스러운 민준수의 외침에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배신자, 바람둥이, 나쁜 놈이라니.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남자 놈 입에서 계집애나 뱉어낼 말들을 저렇게...아니, 그것보다 내가 왜 이 자식한테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해?!
가지다는 예전에 이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경호원의 등 뒤로 숨던 민준수를 보며 저 아이, 네가 마음에 들었나 본데라고 했던 노지나를 떠올렸다. 그 후에도 가끔씩 술을 마시며 이 녀석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대한 얘기를 했었다.
아주 나중에 풍로에 심어놓은 놈에게 유학에서 돌아온 민무영의 외동아들이 게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오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게 사실일수도.
그래도 이 나를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하다니. 수십 번은 죽여버리고 싶어지는군. 맘에 안 드는 여자가 진득거리는 시선으로 보는 것도 짜증 날 정도로 싫은데 하물며 남자 새끼가.
가지다는 민준수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맘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민준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리 니가 민무영 외아들이라도 말이야. 그런 식으로 기어오르면 죽여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죽여! 죽여버리면 되잖아!"
"나도 그러고 싶은데 말이지."
"지다야!"
한 손을 뻗어 민준수의 목을 꽉 쥐는 가지다를 보며 김운이 놀라 소리친다.
"저 녀석에게 약을 먹인 거부터 표시가 남을 정도로 목을 조른 일까지. 옷을 벗게 한 건 벗긴 게 아니고 직접 벗었다니까 그건 애교로 넘겨주고. 그렇더라도 넌 충분히 지금 내 손에서 죽을 목숨이야."
"윽!"
"하지만 안 죽여. 웬 줄 알아? 넌 꽤 비싼 몸이니까. 민무영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로 말이야."
밀어내듯 민준수의 목에서 손을 땐 가지다가 김운의 옆에 털썩 앉으며 담배를 문다. 민준수는 자신의 목을 감싸며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애써 삼킨다.
좋아했던 건 아니다. 좋아했다기보단 동경에 가까웠다.
이렇게 멋있는 사람은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고 유학시절 노지나외의 여자와는 깊은 관계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얘기에 그 동경이 더 커졌었다.
설마 남자인 자신과 연인 관계 같은 걸로 되리라곤 생각한 적 없지만 노지나외의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건 싫었다. 그래, 싫었다.
"....날 어쩔 셈이야."
손등으로 눈물을 닦은 민준수가 물었다. 가지다는 대답 대신 김운을 쳐다봤고 김운은 그런 가지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일본에 도착을 해야 민무영이 눈치를 채지 못할 거야. 회장님껜 연락했어. 너와...있다고도 얘기했어."
"......."
"도착하면 넌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 이다인은 태산 형님이 데리러 올 거야. 난 민준수로 민무영회장과 딜을 할 거고."
"딜은 내가 해."
"지다야."
"넌 다인이 데리고 영감한테 가. 내가 그러라고 했다고 해."
"하지만!"
"분명 너....영감에게 니가 하겠다고 말했겠지....니가 하든 내가 하든 민무영과 직접 접촉하는건 목숨을 거는 일이야. 기억 못하나 본데, 모가지 지키는 건 옛날부터 너보다 내가 나았어."
"지다야."
"정했어, 이미."
가지다의 말에 김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지다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말한다.
"어차피 한국에 돌아가도 이 목 붙어있지 않을 거야."
"....회장님이 널 죽일 생각은 하지 않..."
"내가 안 돼."
"......"
"영감 옆에 있을 면목이 없어서...내가 안 돼. 아직 해야 할 일도 남았고."
"......."
그 대화를 끝으로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민준수는 담배를 피우며 먼 바다를 보는 가지다를 빤히 쳐다봤다. 아주 한참 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가지다가 김운을 불렀다.
"운아."
"응."
"다인이 좀...부탁하자."
"......."
김운은 가지다의 부탁에 짧은 한숨을 쉬며 담배를 물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얼굴로 고개를 들어 가지다를 본다. 지다는 그런 김운을 보며 피식 웃고, 김운은 벌떡 일어나 지다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다.
"무슨 말이야. 어쩌려고 그래?!"
민준수가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묻는 김운. 가지다는 배 난간에 두 팔을 기대며 말한다.
"민무영이 가진 X파일 전부와 민준수를 교환할 거야."
"뭐?! 그런...!...."
"민무영도 많이 늙었어. 하나뿐인 아들이 어떻게 된다면 절대 일어설 수 없는 노인이지. 아들 목숨을 위해서라면 X파일 정도는 당연히 넘겨줄 거야."
"말도 안 돼! 그게 그렇게 간단히!.....너...설마!"
놀란 얼굴로 가지다의 팔을 잡는 김운을 쳐다보며 피식 웃는 가지다.
"같이 죽을 생각이니까. 넘겨주지 않을 작정이라면."
"가지다!"
"이게...다인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이야."
.....
.......
.....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는 말, 영감에게 그대로 전해줘. 이 일이 성공해서 내가 파일을 손에 넣으면 그 파일로 영감과 딜을 하자고 해. 이다인이 원하는 대로 하게 해줄 거야. 그 후에 영감 손에 깨끗이 죽어주겠다고 해....어쩌면 영감은 파일보다 다인일 선택할지도 모르지. 그땐 파일을 다인이에게 줘. 그 녀석, 생각보다 똑똑한 녀석이니까 분명 그걸로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할 수 있을거야."
덤덤한 목소리로 바다를 보며 말하는 가지다. 그런 그를 보며 김운이 슬픈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까지 한다고 이다인이 정말 행복해할까...?...너처럼 다인이 녀석도 너한테 빠져있잖아. 자신 때문에 니가 죽는 걸 그냥 두고 보겠어?"
"다인이 때문이 아니야."
김운을 쳐다보며 말하는 지다. 김운이 말없이 자신과 눈을 맞추자,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바다를 본다. 그리곤 나지막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우리 일이 말이야. 말이 좋아 그룹이지, 어차피 조폭이잖냐. 등 뒤에서 칼 맞고 머리통에 총구 겨눠지는 것 정도야 각오하고 사는 인간들 아니냐."
"......"
"...영감한테 할수있는 최선의 사죄는...내가 영감 손에 죽어주는 거야."
"......."
"하지만 저 녀석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살 기도라던가....나 없다고 울거나 하면 이쪽은 정말 죽어서도 또 죽는 게 되니까."
죽는다는 건 말이 쉬운 거였다. 적어도 김운의 입장에선 그랬다.
노지나를 그렇게 좋아하고, 그녀를 보는 게 한없이 아파서 죽고 싶어질 때도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진짜로 죽을 결심은 하지 못했다. 그런 걸 보면, 이다인과 가지다는 닮은꼴인 건가...이다인도 몇 번의 자살 기도를 했을 만큼 죽음에 두려움이 없는 여자다....아니, 이건 억지일지도.
김운은 바람 때문에 흐트러지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짧게 한숨을 쉰다. 그런 김운에게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내미는 가지다. 김운은 담배 한 까치를 받아 물며 애써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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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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