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풍로 놈들이 어떻게 알고 천로에 갔냐고 묻는 김운에게 어제 강태산과의 전화 통화 내용을 이야기하는 가지다.
"아무래도 뭔가 좀 석연치가 않다고 강태산이 내게 전화를 했더라. 솔직히 아무리 영감이 걱정된다고 해도 강태산을 그쪽으로 보낸다는 건 자체가 말이 안되는 거니까."
노도수 회장을 위해 일하는 강태산이 그런 일로 자신에게 연락을 한 게 처음엔 미심쩍은 기분도 들었지만 영감이 강태산에게 원했던 게 영감이 나올 때까지의 이다인의 안전이라고 생각한 강태산이 노지나의 전화를 받은 후, 이다인을 책임지고 있는 자신에게 연락한 건 아마도 강태산 역시 노지나의 전화에 뭔가 석연찮은 느낌을 받아서일 거라고 말한 가지다는 그럼 지나누나가 풍로 놈들에게 이다인을 잡아가라고 했단 말이냐는 김운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다인을 잡고 있는 놈들이 풍로 놈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너나 나나 노지나는 잘 알고 있지. 어떤 이유에서든 풍로 회장과 손을 잡을 여자는 아니야."
"그거야 그렇지. 지나 누난 풍로 놈들을 누구보다 싫어하니까....그런데 왜...도대체 누가."
"이유는 잡으면 알게 돼."
좀 더 빨리 밟으라고 말한 가지다는 다시 전화를 들어 어디론가 연락을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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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호의 무리들에 의해 천로 입구에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된 이대영은 김규태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고 천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소리친다. 정신을 잃은 채 이대영의 옆에 앉아 있는 이다인을 백미러로 한번 쳐다본 김규태는 자신들의 차를 막고 서서 총을 겨누고 있는 최선호 무리들의 머릿수를 눈으로 샌 뒤 고개를 돌려 이대영에게 말한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 가지다가 오면 다 죽습니다. 시간을 끌지 않으려고 무리하게 엑셀을 밟아도 총에 맞아 죽을 겁니다. 지금이야 인질로 되어버린 이다인 때문에 쏘지 못하고는 있지만 우리를 보내는 것보단 이다인을 다치게 해서라도 우리를 잡는 게 저들 입장에선 좋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무슨 수를 쓰라고, 새꺄!!!!"
"........민무영 회장에게 연락하시죠."
"뭐?! 풍로 회장한테?!! 이 미친 새끼, 지금 여기서 풍로 회장한테 연락하면 이 여자를 넘겨야 한다는 걸 몰라서 그래?! 이 여자를 풍로 회장에게 뺏기면 노지나 사장에게 내 입장이..."
"노지나 사장과의 의리 때문에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실 겁니까, 형님!"
이대영의 말을 끊으며 소리친 김규태. 이대영은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힘겹게 고개를 저으며 김규태에게 말했다.
"그래도 그건 아니야. 노지나 사장은 내 목숨을 살린 분이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난 지금 이렇게 살아있지도 못해. 그런 사람에게 뒤통수를 치고 살아남는..."
"그럼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우리 애들 여섯이 죽었습니다. 저 개새끼들한테 여섯 명이나 당했단 말입니다.
그 녀석들이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싸운 이유 모르십니까?! 다 형님 살리자고 제 한 몸 던져 여기 입구까지 밀고 나왔단 말입니다! 지금 형님이 여기서 포기하시면 그 아이들 목숨은 뭐가 되는 겁니까!!"
울먹이듯 소리치는 김규태를 보며 이대영 역시 눈물을 그렁거린다. 그저 노지나의 부탁에 이다인을 데리고 자신의 구역으로 가려고 한 게 다였던 이대영은 아끼는 부하들 여섯이 자신의 눈앞에서 총에 맞아 죽는 걸 봐야만 했다.
유흥촌을 운영하면서도 늘 자신의 부하들에게 몸조심이 우선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던 이대영은 누군가를 때리고 협박하긴 했어도 누군가를 죽여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그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협박은 하되 목숨은 빼앗지 않는다가 신조였던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부하들의 차에 총질을 하는 천로 놈들을 보며 진심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눈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부하가 탄 차를 벌집으로 만들던 천로 놈들이 악마로 보였다.
비슷한 일을 하는 조직들 중에서도 이대영같이 순한 축에 드는 조직 사람들은 천로나 풍로처럼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쏴 죽이는 거대 조직이 괴물로 보이는 게 당연했다. 그 괴물들 중 하나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는 생각에 새삼 무서워진 이대영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미, 민무영 회장님. 저 일산 이대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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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않고 달려 천로에 도착한 가지다와 김운은 쑥대밭이 되어있는 천로의 입구에 얼굴이 굳는다. 총에 맞아 쓰러진 시체들 틈에서 아직 살아있는 천로인들을 보고 서둘러 구급차를 부른 김운과 가지다는 어깨에 피를 흘리며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최선호를 부축해 일으킨다.
"이, 이사님...."
고통스러운 얼굴로 힘겹게 입을 연 최선호는 처음에 이다인을 납치해 천로 입구를 지나려는 놈들이 일산의 이대영이었음을 말하고, 그놈들을 포위한 뒤 이다인을 빼내려는데 갑자기 나타난 풍로 놈들에 의해 당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대영이 누구야."
시린 얼굴로 김운에게 묻는 가지다. 김운은 몇 년 전, 노지나가 이대영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던 이대영의 오른팔 김정수를 죽임으로써 그를 살렸던 이야기를 하며 아마 지나 누나가 부탁한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뒤 풍로 놈들이 온건 구석까지 몰린 이대영이 어쩔 수 없이 풍로 놈들을 부른 걸 거라 덫 붙인 김운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일이 복잡하게 되어버렸다고 중얼거린다.
"그래서 지금 이다인은 어디에 있다는 거야."
"풍로 회장 손에 있겠지. 넌 빨리 회장님께 가야겠다."
최선호의 어깨를 누르고 있던 가지다는 김운의 말에 노지나부터 부르라고 소리쳤고, 김운은 지나누나 족치는 것보다 회장님께 가서 풍로 회장과 딜을 하는 게 순서라고 맞받아친다.
"이다인의 목숨이 걸린 문제야.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놈이라고. 민무영은."
최선호의 어깨를 누르고 있던 가지다의 손을 치우며 김운이 대신 선호의 어깨를 누른다. 고통스러운 얼굴로 신음을 뱉는 최선호에게 조금만 참아보라고 말한 김운은 멍하니 서있는 가지다에게 다그치듯 말한다.
"여긴 나한테 맡기고 빨리 회장님한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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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잃었던 다인이 눈을 떴을 땐, 낯선 방안이었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던 그녀가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향냄새가 섞인 나무 고유의 냄새와 고풍스러운 느낌의 옷장, 용의 무늬가 새겨진 침대.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이불과 카펫 등. 집주인이 중국인인가 싶을 정도로 중국을 생각나게 하는 방이었다. 다인은 정신을 잃기 전 자신의 뺨을 미친 듯이 후려갈기던 이대영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이대로 있으면 당할 거란 생각에 서둘러 몸을 일으킨 다인은 조심스럽게 방문으로 가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살짝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검은 정장의 남자와 눈이 마주쳐 자신도 모르게 문을 탁 닫아버린 다인은 짧은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려 침대로 가 앉았다.
여긴 어디지. 대체 날 어쩌려는 거야. 그나저나 정말로 취향 한번 독특하네. 이 정도로 중국이 좋으면 중국에서 살지, 왜 한국에서 이 지랄이야?
방을 두리번거리며 미간을 찌푸리던 다인은 갑자기 덜컥하고 방문이 열리자 본능적으로 이불을 감싸 안았다.
"깼어요?"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앳된 남자였다. 동글 거리는 눈망울에 귀여운 느낌이 강한 남자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다인을 말없이 빤히 쳐다보다 이내 씩- 하고 웃으며 말한다.
"나 사람 같은 거 안 잡아먹어요."
"...누구세요."
"누굴까요?"
"...여긴 어디에요."
"맞추면 상 줄게요."
"나랑 지금 장난해요?"
"장난하는 거 같아요?"
동글 거리는 눈망울을 연신 반짝거리며 씽긋씽긋 웃던 남자는 여전히 경계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다인에게 와인 한잔할래요? 하고 물은 후 냉장고에서 와인과 잔 두 개를 꺼내며 말을 잇는다.
"여긴 풍로고 나는 풍로 회장의 외동아들 민준수. 분명 내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거라 생각해요......이다인씨."
"....그쪽이 왜 날...."
"...?...."
"원하는 게 뭐예요? 날 납치해서 당신이 얻는 게 뭐..."
"아, 잠깐잠깐.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
"나 납치 같은 거 하는 사람 아니에요. 봐요, 납치 같은 거 못하게 생긴 얼굴 아닌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한 민준수는 자신이 내민 와인을 받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만 쳐다보는 이다인의 시선에 내밀었던 와인잔은 거두고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쪽 납치한 건 일산의 이대영이고, 난 아버지 부탁으로 당신을 여기로 데려온 사람에게 당신을 건네받았죠. 여긴 내 집에 있는 유일한 아버지 공간이고, 당신은 아버지 손님이니까 내 게스트룸엔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해 아버지 취향인 이 방에서 재운 거고."
"............"
"더 궁금한 거 있어요?"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민준수가 이다인에게 물었다.
"....날 어쩔 셈이에요."
이다인의 물음에 민준수가 어깨를 으쓱 올리며 말한다.
"그건 나도 모르죠. 난 그냥 댁을 당분간 내 집에 데리고 있으라는 부탁만 받았으니까."
"..........."
"노도수가 당신 몸값으로 우리 아버지에게 뭘 줄진 모르겠지만 너무 걱정은 말아요. 몸값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당신을 죽일 생각은 없는 모양이니까."
"............"
"이건 비밀인데. 우리 아버지가 당신 데려온 건 몸값 때문은 아닌 것 같거든."
무슨 비밀 이야기인 양 이다인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한 이대영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와인을 마신다. 이다인은 그런 민준수를 보며 미간을 찌푸린 후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본다.
지금쯤 자신이 없어진 걸 알고 걱정할 가지다를 생각하자 저절로 코끝이 찡해진 이다인은 배고프지 않느냐는 민준수의 물음에 힘없이 고개를 젓는다.
"그럼 배고플 때까지 기다리지 뭐. 읏-차."
이다인이 맞은편에 앉아버린 민준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다인을 보며 어깨를 으쓱 올리며 말한다.
"나 혼자 밥 먹는 거 되게 되게 싫어하거든요. 근데 경호원들은 나랑 밥같이 안 먹으려고 하고, 도우미 이모도 절대로 안된다고 하고....그래서 당신밖에 없거든? 같이 밥 먹을 사람."
다인은 저렇게 말한 민준수를 무표정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본다. 민준수는 그런 다인을 빤히 보며 말을 잇는다.
"몇 살이에요? 나보다 누나죠?"
"..........."
"사실은 나 나이 알거든요, 그쪽 나이. 스물일곱. 맞죠?"
".............."
"난 스물셋. 그쪽보다 네 살 어려요. 누나라고 부를까요?"
".............."
"알았어요. 까짓것 누나라고 불러 드리죠."
"............"
"누나. 뭐 좋아해요? 이모가 누나 좋아하는 게 뭔지 잘 몰라서 나 좋아하는 부대찌개 끓였는데 괜찮아요? 우리 이모가 음식 솜씨는 진짜 예술이거든요......나 한국 들어온 지 얼마 안돼서 못 가본 곳 많은데 누나는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쫑알쫑알 쉬지도 않고 떠드는 민준수와 지껄이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고 창밖만 쳐다보는 이다인.
준수는 표정이 없어 더 인형 같은 이다인을 웃게 만들고 싶은 생각에 팔자에도 없는 수다쟁이 남자가 되어 하루 종일 두서없이 떠들어댄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을 찾고 있을 가지다만 걱정하는 이다인은 창밖만 쳐다보고 있다. 한참을 혼자 지껄여대던 민준수는 다 마신 와인잔을 탁자 위에 놓으며 이다인을 부른다.
"누나."
".............."
"이다인 누나."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민준수를 쳐다보는 이다인. 누군가에게 맞아 뺨 위쪽이 부어있는 다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민준수는 짧은 한숨을 쉬며 말을 잇는다.
"벙어리 아닌 거 아니까 말 좀 해요."
"..........."
"치사하게 자기가 궁금할 땐 마구 질문하더니 대답 다해주고 나니까 벙어리처럼 입다물기예요?"
".........."
"나랑 말 좀 해요. 대화를 해야 자연스럽게 반말도 하고 친해지기도 하고 그러죠."
".....나랑 친해져서 뭐 하게요."
"...뭐 하긴요. 친해지면 좋지. 누난 나랑 친해지기 싫어요?"
"............."
"...혹시...집에 가고 싶어요?"
".........."
"우리 아버지가 그러던데, 누난 절대로 집에 가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천로 회장이 누나 납치 감금해서 데리고 있던 거라고. 그래서 아마 보내달라는 소리는 안 할 거라고. 역시 안 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여기 있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네요."
".............."
"아- 이 방이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바로 바꿔줄게요. 이방은 아까 내가 말 했던 것처럼 내 손님이 아니니까."
"전화...쓰고 싶은데."
이다인의 말에 민준수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진다. 애써 씽긋 웃으며 다인에게 묻는 준수.
"누구한테요?"
".......말 해야 해요?"
"일단은."
"..............."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 여기 있는 것도 납치, 감금의 일종이니까. 하지만 줄게요. 난 착하거든요."
자신의 전화를 내밀며 씽긋 웃던 민준수는 이다인이 전화기를 받아 버튼을 누르자 아까와는 다른 서늘한 목소리로 이다인에게 말한다.
"물론 전화를 받는 상대방의 목숨은 보장하지 못해."
민준수의 말을 들은 이다인이 버튼을 누르던 손을 멈추자 그 손을 내려다보며 말을 잇는 민준수.
"노도수 회장과 우리 아버지가 만나기 전까진 누나가 여기 있는 걸 아는 사람이 있어선 안되거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민준수를 바라보는 이다인. 그런 다인과 눈을 맞추며 민준수가 씨익 웃는다.
"그게 가지다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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