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남자의 여자, 노지나>
호텔 이사실에 앉아 브랜디를 마시며 지다와 다인이 오길 기다리는 노지나.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 앉아있던 그녀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약간 놀라 전화기를 들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노도수였다.
"네, 아빠."
노도수와 한참을 통화한 노지나는 전화를 끊고는 다시 긴 생각에 잠겼다. 다인이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온 날,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무표정하게 말하던 그녀가 떠올랐다.
'피임은 하게 해줘요. 이 나이에 임신은 싫어요.'
갓 스물밖에 안된 여자애가 꽤나 당돌하고 겁이 없구나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이, 하물며 자신조차 어려워하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한 그녀였다.
픽- 노지나가 입꼬리를 올리며 브랜디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아버지가 정말로 자신보다 어린 여자와 결혼을 하려고 한다는 생각에 뭔가 묘하면서도 편안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다인의 피임기구를 제거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자신에게 동생이 생기는 건가 하고 피식 웃다가 번뜩하고 떠오른 생각에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지다를 오로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었다.
서른여덟의 나이라 쉽게 임신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제일 확실한 방법이다. 죽을 때까지 아이는 낳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가지다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는 것보다 나았다. 그리고 가지다를 닮은 아이라면 키울 자신도 있었다.
자신의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줄 수 없다.
가지다는....노지나의 남자다.
다인의 팔에 했던 피임인 임플라논을 자신이 가는 병원에서 한걸 기억하고 옆에 놓아두었던 전화기를 꺼내 의사의 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몇달 전에 3년이 된 피임기구를 바꾸기 위해 다인을 데리고 다녀왔기 때문에 쉽게 번호를 찾을 수 있었다.
담당 의사에게 예약을 하고 전화를 끊은 지나는 탁자에 놓인 브랜디를 집어 들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아이는 자신처럼 키우고 싶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불행했던 그녀였다.
어머니 없이 아버지가 붙여준 유모의 손에서 자란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아이만큼은 똑같이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했고, 아이 역시 낳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가지다는 자신의 아버지와 닮았다. 그리고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리다.
만약 아이가 태어난다면 자신의 아이가 아빠보다 열 살이나 많은 엄마를 이해해줄지도 의문이었고 자신과의 결혼생활 동안 가지다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 거라는 자신도 없었다. 자신보다 늙은 여자와 결혼생활을 하는 남자가 어리고 풋풋한 여자를 보고 동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그녀였다.
그만큼....가지다와의 결혼은 생각할것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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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후가 훨씬 넘어서야 천로에 도착한 지다와 다인. 김운은 가지다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강태산에게 전화를 했다. 도착하는 데로 호텔로 오라는 지나의 전화가 있었기 때문에 다인을 혼자둬야 해서였다.
지다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 잠들어있는 다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강태산에게 전화를 하는 김운을 쳐다봤다.
"5분 걸린대."
"...그래."
"피곤했나 보네, 다인이."
"..............."
김운은 다인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지다를 한참 보다가 짧은 한숨을 쉬며 그를 부른다.
"지다야."
"어."
"지나누나 앞에선 그러지 마라."
"............."
"다인이 만지지 마. 그런 눈으로 보지도 말고..."
".............."
"누나 죽어....아파서 죽어...."
김운의 말에 한참 말없이 다인만 쳐다보던 지다가 고개를 들어 김운을 본다.
"운아."
"응."
"......나...할멈 좋아했어."
".......알아."
"...내 첫사랑이야...."
"...알아."
".......할멈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알아...."
행복해지면 좋겠지만 내가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다. 가지다의 눈이 꼭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김운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가지다가 노지나를 아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노지나가 지다를 좋아하는 만큼 지다도 노지나를 좋아했다. 그래서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신의 사랑을 접었다.
김운은 노도수의 여자를 사랑하게 돼버린 자신의 하나뿐인 친구를 보며 자신과 같다는 느낌에 심장 한쪽이 욱신거린다.
똑똑. 차 창문을 두드리는 강태산을 보고 김운이 차에서 내렸다. 지다는 여전히 자신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어있는 다인을 조심스럽게 깨웠다. 천천히 눈을 뜬 다인을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는 지다.
"다 왔어."
자세를 똑바로 고쳐앉은 다인이 손으로 눈을 비비며 차에서 내린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그 아가씨 소리 좀 그만해요, 아저씨."
강태산의 깍듯한 인사에 다인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다인의 불평스러운 말에 강태산이 멋쩍게 웃자, 다인이 차 안에 그대로 앉아있는 지다를 보며 묻는다.
"언제 와?"
"늦을지도 몰라. 밥 챙겨 먹고 쉬고 있어."
다인에게 말한 지다가 강태산을 보며 말을 잇는다.
"이모 불러줘. 얘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어."
"네, 이사님."
지다의 차가 출발한 뒤 차가 가는 걸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다인은 들어가자는 강태산의 말에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간다.
............
......................
......
호텔 이사실. 서류를 보고 있던 지나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지다를 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몸을 일으킨다.
"왔어?"
"....어. 김의원은."
지나가 비켜준 자신의 의자에 앉으며 지다가 묻는다.
"쉬고 있어. 정마담한테 연락해서 애 하나 보내라고 했거든. 붙여줬더니 잠잠해. 근데 좀 늦었네? 일찍 출발했던데."
"......차가 좀 막혔어."
"근데 너 김의원이랑은 언제 그런 딜을 한 거야?"
"...딜?"
"태원건설 리스트."
"...딜을 한건 내가 아니라 영감이야. 난 영감한테 이어받은 것뿐이고."
"그래서 풍로 손에 들어가 있는 리스트를 빼내 오겠다고?!"
"오래전부터 영감이 풍로에 심어놓은 우리 애들이 있어."
"뭐?! 언제...!"
"나도 시기는 몰라. 아마 풍로 놈들이 백화점에서 이다인을 데려가려 했던 그때쯤이겠지. 영감....이다인 일엔 앞뒤 안 가렸으니까, 옛날부터."
".........근데 그 리스트가 뭐길래 김의원이 저렇게 가지려고 안달인 거야?"
"홍로."
"...홍로...?....설마, 화선동 유흥촌?!!"
"그래. 유흥촌의 거물로 유명한 홍로 회장이 성산 부지를 자신의 사유지로 만들었어. 그리고 태원건설 회장에게 대한민국 최대의 유흥촌 건설을 맡겼지."
"건축 허가 안 나서 포기한 거 아니었어?......설마! 그 리스트!"
"맞아. 그 리스트엔 건축위원회 놈들의 모든 비리가 들어있지. 김의원은 그걸 노리는 거야. 그 리스트만 있으면 허가는 식은 죽 먹기니까."
"하지만 그걸 김의원이 가져서 뭘 해?"
"20억."
"20억?"
"홍로 회장이 김의원에게 20억을 내놓겠다고 했어. 그 리스트에 있는 승인하지 않은 회원 놈들을 찾아가 허가를 받아주는 조건으로."
"아하."
"김의원은 리스트를 빼내주면 모든 편의를 봐주겠다고 영감에게 말했고, 영감은 그런 김의원을 손을 잡아야 했지. 이다인 때문에 풍로와 전쟁을 할 판이었으니까."
"그렇지. 김의원이 있으면 총기 밀수가 쉬워질 테니."
"윈윈이지."
"...........따지고 보면 다인이 때문인 거네."
노지나의 말에 서류를 보던 가지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본다. 한참을 노지나를 쳐다보던 가지다가 노지나의 왜?라는 물음에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며 나지막하게 말한다.
"영감 때문인 거지."
"..........김의원한테 전화 넣을게. 재미는 적당히 봤을 테니까."
...........
.....................
..........
씻은 뒤 잠깐 잠이 들었던 다인이 1층으로 내려오자 강태산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다.
"뭐 봐요?"
"아, 깼습니까? 이모님이 식사 만들어놓고 가셨습니다. 식사부터 하세요."
"......아저씬 먹었어요?"
"네, 저는 이모님하고."
"혼자 먹기 싫은데. 나중에 먹을래요."
"노사장님 오시고 계시니까 그럼 같이 드세요."
"......네."
잠시 후, 노지나가 집으로 들어온다. 혼자 들어오는 노지나를 다인이 말없이 빤히 쳐다보자 지나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나 혼자 들어온 게 맘에 들지 않나보네. 지다는 일이 있어서 늦을 거야."
"....물어본 적 없어요."
중얼거리듯 말하고 몸을 일으키며 주방으로 가는 다인을 본 강태산이 노지나에게 다인과 식사를 같이 하라고 말한다. 주방으로 따라 들어간 지나가 국을 데우려고 가스레인지를 켜는 다인을 보고 식탁에 앉는다. 말없이 지나와 자신의 밥을 퍼 식탁에 놓은 다인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지나와 눈을 맞춘다.
"다인아."
"네."
"너 내일 나하고 병원에 가야 해."
".....무슨 병원이요?"
"산부인과."
"................"
"아빠가........피임기구를 제거하라셔."
"..............."
"우리 아빠가 아이가 갖고 싶은가 봐."
"...........나는...."
"어차피 결혼도 할 건데, 예상하지 못했던 거 아니잖아? 내일 피임기구 제거하고 이번 주 주말에 아빠한테 한번 더 다녀와. 기다리는 거 잘 못하시는 분이니까. 하루라도 빨리 자기 자식이 갖고 싶을 거야, 우리 아빠."
노지나의 말을 듣고 있던 이다인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진다. 눈에 보이게 당황하는 다인을 보며 노지나가 나지막하게 말한다.
"넌 우리 아빠의 여자야. 평생...변하지 않을 거야."
"............"
"명심해."
"..................."
얼어붙은 채 가만히 서있는 다인을 보며 몸을 일으킨 지나가 다인 대신 다 끓은 국을 그릇에 담으며 말을 잇는다.
"너 피임할때 나도 같이 했던 거 기억나?"
".........."
"나도 제거할 거야. 나 역시 지다의 아이가 갖고 싶어졌거든."
"............."
"우리 둘, 같은 시기에 임신이 되고 같은 시기에 아이를 낳으면 참 좋을 텐데, 그렇지?"
"............"
"후훗, 근데 그것도 좀 웃기겠다. 내 동생이랑 내 아이가 친구가 된다면."
국을 식탁에 놓으며 앉으라고 말하는 지나를 보며 떨리는 몸을 애써 움직여 식탁에 앉은 다인은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은 울음을 애써 삼키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런데....임신이 잘 되겠어요...?...."
한참 말없이 밥을 먹던 다인이 물을 마시며 말했다.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던 지나의 손이 멈칫하고, 다인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지나를 보며 말을 잇는다.
"언니 나이가.........아니에요,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죠."
".......무슨 뜻이야?"
차가운 눈으로 다인을 보며 말하는 지나에게 다인이 거짓 미소를 띠며 말한다.
"잘해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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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ddn1224님 예전 습작했던 글들은 당분간 올리지 않을 예정입니다. 완결되었던 지우다는 kb가 모자라 완결란에 올릴수 없어서 재연재할 예정이구요. 아마도 기존 지우다와 내용이 조금 달라질것 같습니다.
예전 글들 기다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머물다와 하소서는 조금 나중에 더 나아진 필력으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필력이 나아질 기미는 절대 보이지 않습니다만=_=;;;)그럼 좋은 하루 되시고 늘 행복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