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타는 듯한 갈증 때문에 잠에서 깬 다인은 아래층의 시끌벅적한 소리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옷 위에 카디건을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그녀는 노지나 특유의 까르르 웃는 소리에 발걸음이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또박 또박 계단을 내려와 주방으로 갔다.
모여앉아 맥주를 마시던 그들의 시선이 소리 없이 등장한 이다인에게로 쏠렸다.
가지다와 눈이 마주친 다인은 이내 시선을 피하고 애써 무심한 얼굴로 냉장고로 가 물을 꺼내 컵에 따랐다. 낮에 있었던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려서 표정관리가 어려운 그녀였다.
"아프다며, 괜찮아?"
김운이 다인을 보고 물었다.
"...응."
"이모가 죽 끓여놨어, 앉아서 좀 먹어."
맥주를 마시던 지나가 말했다. 대답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지나를 한번 본 다인이 컵에 따른 물을 마시려는데 가지다가 손을 뻗어 다인의 물컵을 빼앗고는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컵에 따라져 있는 물을 반쯤 버리고 정수기에서 온수를 틀어 반을 채운 후 다시 다인에게 준다.
지나와 운, 태산은 그런 지다를 말없이 쳐다보고 다인은 지다가 내민 물컵을 받지 않고 말없이 응시한다.
"감기잖아. 찬물은 안 돼."
노지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지다의 자상함에 심장 한쪽이 묵직해져 오는 걸 느꼈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는 게 기분 나쁜 그녀다. 노지나는 담배 하나를 입에 물며 지다를 부른다.
"지다, 너...평소에 여동생이 갖고 싶었어?"
그녀의 말에 물컵을 받아들고 마시려던 다인의 손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본다. 그런 다인을 보고 있던 지다가 노지나를 보며 눈썹을 꼼톨거리며 말한다.
"뭐라는 거야."
그리고는 다인에게 어서 물을 마시라며 컵을 밀어준다. 꼴깍 꼴깍, 다인의 물 마시는 모습을 보던 지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를 놓치지 않은 노지나의 얼굴이 시리게 굳는다.
예상을 못 했던 건 아니다. 노도수가 이다인을 가지다에게 보내라고 했을 때 이미 팔팔 뛰었던 그녀다.
안전이 우선이라고는 해도 가지다는 남자였고, 이다인은 자신이 봐도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런 그들을 한 지붕 아래 생활하게 하다니, 매사 모든 일에 냉철한 아버지가 왜 이다인의 문제에서만큼은 냉정하지 못한지 항상 불만인 그녀였다.
솔직히 가지다가 아버지의 여자를 건드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다인은 몇십 년 동안 스캔들 하나 내지 않고 여자를 돌보듯 보던 자신의 아버지를 함락시킨 유일한 여자였다. 저렇게 작고 인형 같은 여자가 마음먹고 남자를 꼬시려 들면 십중팔구는 넘어갈게 분명했다.
거기다 그녀는 몇 년 동안 사내라곤 자신의 아버지 밖에 모르던 여자 아닌가. 중년의 남자만 겪으며 살다가 또래의 남자를 만나면 자연적으로 뭔가 신선한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아니라고 하기엔 가지다는 누가 봐도 멋지고 잘생긴 녀석이었고,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는 녀석이었다.
도우미 아줌마가 끓여두었던 죽을 데우며 다인에게 식탁에 앉으라고 말하는 지다를 보던 노지나는 끓어오르는 불안감과 질투에 속이 타는 걸 느꼈다.
"지다야."
노지나의 부름에 다인을 보고 있던 지다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본다.
"아빠한텐 언제 다녀올 거야?"
지나의 말에 대답이 없는 지다. 그런 지다를 흘끗 쳐다본 다인이 운의 옆자리에 앉으며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연다.
"다음 주 중으로 갔다 오라면서요."
생각지도 못한 다인의 담담한 표정에 노지나가 약간 당황한다.
"그랬지...근데 좀 빨리 다녀오는 게 어떨까 싶어서 말이야. 널 너무 보고 싶어 할 거 같거든, 우리 아빠가."
씽긋 미소를 지으며 다인을 보고 말하는 지나. 웃는 입술과는 달리 눈빛이 차다. 다인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지나와 눈을 맞추며 말한다.
"언니가 말 안 해도 알아요. 같이 있을 때도 질리지 않고 내 얼굴만 뚫어져라 보던 할배였는데 어련하겠어요."
서로를 쳐다보는 두 여인의 눈빛에 스파크가 튄다.
"그러니까 우리 아빠 숨넘어가기 전에 그 예쁜 얼굴 좀 빨리 보여 주라고."
"걱정 말아요...혹시라도 가는 중간에 사라지거나 도망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다인의 말에 노지나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피식 웃는다.
"그런 걱정은 한 적이 없는데 말이야. 설사 도망친다 해도 어차피 금방 잡힐 거고."
"그럼요, 할배 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정도는 7년 동안 질릴 만큼 겪어서 새삼 세뇌시키려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알고 있어요."
둘 사이의 서늘한 기류에 김운과 강태산이 눈치를 보다 몸을 일으킨다. 맥주 더 안 하고 벌써 가느냐는 노지나의 물음에 김운은 늦었으니 그만 가보겠다며 의자에 걸려있던 재킷을 입는다. 강태산 역시 김운과 같이 재킷을 입고 아침 일찍 오겠다고 다인에게 말한다.
가지다는 다인과 지나의 팽팽한 긴장감 따위 전혀 상관없는 듯 끓은 죽을 다인 앞에 내려놓으며 김운과 강태산에게 쉬라는 인사를 한다.
김운과 강태산이 가고 나자 세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묘해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가지다가 준 죽을 먹는 이다인과 그런 다인을 말없이 보는 가지다, 그리고 그런 둘을 쳐다보며 연신 담배를 피우는 노지나.
그들의 싸한 침묵은 이다인이 숟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자마자 깨졌다.
"더 먹어."
지다가 다인에게 말한다.
"...배불러."
"그거 먹고 약 먹으면 속 쓰려. 더 먹어."
다인에게 죽을 억지로 더 먹이려는 가지다를 한참 쳐다보던 지나는 앞에 놓인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한다.
"지다 너... 다인이 되게 챙긴다?"
노지나의 말에 다인과 지다가 동시에 지나를 쳐다본다. 그런 그들을 쳐다보며 말을 잇는 지나.
"아빠 여자라고 너무 편애하는 거 아냐?"
피식 웃으며 담배 하나를 무는 지나를 빤히 쳐다보는 지다. 들고 있던 숟가락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쓴웃음을 짓는 다인. 다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지나 언니."
"....."
"나도 담배 하나만 줄래요?"
다인의 말에 지나가 앞에 놓인 담배를 다인에게 내밀자 다인이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담배연기와 함께 한숨을 뱉은 다인이 지나를 부른다.
"언니.....되게 자신 없나 보다."
"...뭐...?..."
"걱정 마요. 나 할배 여잔 거 여기 모르는 사람 없어요. 지다도 알고 있고, 언니도 알고 있고, 나도....더럽게 잘 알고 있으니까."
"......"
"그렇게 연막 치지 않아도 언니 남자, 내가 할배 소유물이라는 거 알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눈에 훤히 보이는 바리케이드 그만 쳐요. 이 남자, 언니 남자인 거 나 알고 있고, 나 할배 여자인 거 이 남자도 잘 알고 있으니까."
나지막하고 차분하게 말하는 다인을 쳐다보던 지다가 담배 하나를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다인을 쳐다보며 입을 연다.
"연막 치려고 한 말은 아닌데. 그렇게 들렸나 봐?"
"....."
"그래도 뭐,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혹시나 모르고 있는 건 아닌가 했는데."
"지금 뭐 하는 거야, 둘."
다인의 옆에 앉아 말없이 맥주만 마시던 가지다가 노지나와 이다인을 한 번씩 쳐다보며 말한다. 노지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피식 웃는다.
"너 내 거라는 인증...정도라고 생각해."
"...유치하게."
"이미 유치해진 거 계속 유치해져볼까?...가지다, 키스해줘."
갑작스러운 지나의 요구에 지다의 눈썹이 꼼톨댄다. 이다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몸을 일으킨다.
"키스든 섹스든 하는 건 자유니까 상관없는데, 할 거면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하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겠어요? 술김이라고는 해도 식탁 앞에서는 좀 아니잖아요?...사람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이성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래요, 언니."
그리고는 주방을 빠져나가려다 아- 하며 몸을 돌려 지나를 보며 말을 잇는다.
"그러고 보니 회장 할배는 내 앞에서 항상 이성이라는 걸 잃어버리던데, 언니도 지다 앞에선 그런가 봐요....그 아버지에 그 딸인가."
".....뭐....!...."
"잘자요....잘 자, 가지다."
찬바람이 불 정도로 쌩하고 돌아서 밖으로 나가버리는 다인. 그런 다인을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보는 지나. 그리고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는 가지다.
지다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되어있는 노지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 여자가 싫은 게 아니다. 아니, 이 여자를 좋아했다.
첫사랑이었고, 그 첫사랑이 흐르는 시간과 손을 잡고 흘러가버린 후에도 좋아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그 좋아하는 감정이 사랑이 아닐 뿐, 노지나는 아직도 가지다 자신에게 소중하고 아끼는 여자다. 하지만 이다인이 심장 안에 들어와버린 지금, 가지다는 그녀 앞에서 노지나를 평소처럼 대할 수가 없다.
이다인에게 가시 돋친 말을 뱉는 노지나가 불쑥 불쑥 신경에 거슬린다. 그녀의 말투가 맘에 들지 않는다.
그건 지극히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다. 이미 식은 사랑과 이제 막 불이 붙은 사랑 중에 이제 막 불이 붙은 사랑에 마음이 가는 건 당연한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하지만 자신보다 열 살 이나 어린 여자에게 자존심이 금이 가 억울함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는 여자가 가여워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위스키 있는데... 줄까?"
나지막한 목소리로 가지다가 말한다. 노지나는 그런 지다를 쳐다보며 한껏 굳어있던 얼굴을 풀어 피식 미소 짓는다.
"지금은 술보다 가지다가 필요한 거 같은데."
".........."
"오랜만에 같이 씻을래?"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미는 노지나를 말없이 빤히 쳐다보던 가지다가 이내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의 손을 잡는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천로의 새벽. 갈증 때문에 눈을 뜬 지다는 물을 마시려 밖으로 나왔다가 거실 밖 테라스에서 바다를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다인을 봤다. 그녀에게로 가 그녀의 입에 물린 담배를 빼앗아 자신의 입술로 문 지다가 잠긴 목소리로 말한다.
"안 끊냐?"
"........끊으란다고 바로 끊어지는 거냐, 그게......."
"안 잤어?"
"...자다가 깼어."
"감기는 좀 어때."
"보다시피 괜찮아졌어."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흐르고, 지다가 다인에게 빼앗아 핀 담배를 다 피워 밖으로 버렸을 때, 다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할배 엿 먹이려고 너랑 잔 거였는데....내가 먹었어, 엿."
"..........."
가지다가 고개를 돌려 이다인을 쳐다보자, 그녀 역시 지다를 올려다보며 말을 잇는다.
"내 심장 안에 칼이 하나 있어서...네가 지나 언니랑 자는 걸 보고, 듣고, 상상할 때마다 내 심장을 찔러 대."
아무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지다가 다인의 손에 쥐어져있는 담뱃갑과 라이터를 빼앗는다. 담배 하나를 입으로 가져가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걸 빤히 쳐다보던 다인이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며 다시 말을 이어 나간다.
"언니 여기 온 날, 너랑 키스하는 걸 보는데 숨을 못 쉬겠더라....그 칼이 심장을 쉴 새 없이 찔러대서. 할배가...나 때문에 심장이 너덜너덜해져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나을 거라고 제 손으로 제 목숨 끊길 바랬는데...병신같이 내가 그래."
"..........."
"내가 빤히 보는데 지나 언니와 붙어먹는 널 보면서 나...딱 죽고 싶을 만큼 심장이 아파."
"..........."
"그런데 더 죽고 싶은 건....난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거야."
"............."
"난 죽어도 널 못 가진다는 거야...그리고 너도...죽어도 날 가질 수 없을 거란 거야....내가 노도수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아버지 같은 노도수를 네가 스스로 버리지 않는 한...우리는 죽어도 안 된다는 거야...설사 네가 날 사랑한다고 했던 말이 진심이라도 해도...그게 진짜라도...우리는 안 된다는 거야."
중얼거리듯 말하는 다인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말이 끝나자마자 또르르 뺨으로 흘러내린다. 그걸 본 지다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린다.
"그래도...."
눈물이 그렁그렁 한 눈으로 지다를 쳐다보며 애써 환하게 웃는 다인.
"조금은 참을만해.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니까...설사 그게 사실은 거짓말이라고 해도."
다인의 말에 지다가 참지 못하고 그녀를 안는다. 지다의 품에 안겨 한없이 울어버리는 다인, 그녀를 안은 지다의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둘은 숨이 막힐 정도로 서로를 꼭 껴안았다.
"...아니야...거짓말..."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한 지다가 긴 한숨을 쉬며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려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준다. 다인은 그런 지다를 올려다보며 애써 울음을 삼키며 힘들게 말을 뱉는다.
"...싫어...언니한테 주기 싫어...나눠 갖기 싫어...처음부터 내 거였으면 좋겠어...평생 내 거였으면 좋겠어..."
"...나도 그래..."
참았던 지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둘은 서로의 입술을 찾는다. 점점 깊어지는 키스에 둘의 호흡은 점점 가빠진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둘밖에 없다. 그래서 알아차리지 못 했다. 가지다의 방문을 반쯤 열고 서서 그들을 보고 있는 노지나를....
노지나는 키스를 하고 있는 둘을 쳐다보며 끓어오르는 질투심에 불타오른다. 그리고 이내,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진다.
노지나의 심장에 가시가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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