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강태산이 일본으로 가고, 도우미 아주머니도 집으로 돌아간 오후, 조용한 거실에 혼자 앉아 리모컨으로 TV를 틀어대던 다인은 짧은 한숨을 쉬고 TV를 껐다.
몸을 일으켜 베란다 앞에 서서 밖을 쳐다보며 날씨 좋네 하고 중얼거리듯 혼잣말을 하고 기지개를 켠 다인은 2층으로 올라가 얇은 카디건 하나를 걸치고 내려와 밖으로 나갔다. 강태산이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했었지만, 이렇게 조용한 동네가 그리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에 사람들이 살기는 하는 거야?
아무리 둘러봐도 자신이 사는 집과 저쪽 바닷가 앞에 세워져있는 커다란 건물 두 개 외엔 건물들이 없었기 때문에 바닷가 쪽으로 걸어내려가는 긴 시간 동안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만날 수 없었다. 잘 닦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오면서 얼굴에 닿는 약간 찬 바람에 기분이 좋아진 다인은 어느새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바닷가 바로 앞에 크게 세워진 두 건물 앞에 다다르자, 앞쪽에 몇십 대씩 주차되어 있는 검은색 세단들이 눈에 들어왔다. 약간 놀란 다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왼쪽 건물 앞으로 조심히 걸었다.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안을 들여다본 다인은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뭐야, 카지노야? 여기 불법 도박장이 있었어?
"거기, 뭐야?!"
서둘러 몸을 돌린 다인이었지만 그곳 주위를 지키던 직원에게 들켜 버리고 말았고, 그들에게 잡힌 다인은 자신이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만 쌔빠지게 해댔다. 무전기를 들고 있던 직원에게 잡혀 건물 안의 사무실 같은 곳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아있던 다인은 서둘로 사무실로 들어오는 김운을 보고 반가움에 몸을 일으켰다.
가지다의 오랜 친구이자, 불법 카지노의 책임자인 김운은 노도수 회장이 신뢰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 회장의 집에도 몇 번 갔었기 때문에 이다인과의 안면은 꽤 있는 자였다.
"...다인씨?"
"아, 안녕하세요!"
김운은 다인을 지키고 있던 직원에게 나가보라며 고갯짓을 하고 다인은 그런 김운을 보고 방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한다.
"난 그저 저 위에 잠시 얹혀살게 된 사람인데, 바람 쐬러 나왔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다. 노도수 회장과 잘 아는 사람이므로 수상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 그랬다고요, 내가. 아니 근데, 아까 그 사람들은 뭘 먹고 그렇게 사람 말을 안 믿어요?"
다인의 말에 커피를 끓이던 김운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그게 저들이 하는 일이니까요. 자, 커피 마셔요."
"아, 고마워요."
커피를 내밀며 자신의 맞은편에 앉는 김운을 보고 다인도 소파에 엉덩이를 내려놓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김운이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인에게 묻는다.
"놀랐죠?"
"아, 네. 뭐...조금."
"원래 여기가 회원제로 운영되는 비밀 도박장이고, 옆 건물이 고위급 인사들이나 유명인들을 위한 비밀 호텔이기 때문에 회원 카드가 없는 낯선 사람의 출입이 민감하게 제제되고 있어요."
"아...그냥 한산한 촌 동네인 줄 알았는데...여기가 그런 곳이었군요. 왜 천로가 대한 그룹 지점들 중 톱이라고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네요."
"하하, 유능한 지다 녀석이 여기 대표 이사로 있는 이유가 바로 그거죠."
"흐응-"
"지다와는 어때요? 같이 지낼만해요?"
"뭐, 여기 온 지 일주일 됐는데 첫날이랑 오늘 아침에 본 게 전부예요."
"워낙 바쁜 녀석이니까요."
"그 사람 성격 나쁘죠?"
"에- 아닌데, 지다 녀석 성격 좋은데."
"그 사람 성격이 좋은 거면 난 아주 천사거든요?"
"하하."
"어쨌든, 허락 없이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아뇨, 웬 작고 하얀 여자라길래 다인씨 아닌가 했었어요."
"작고 하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다인을 보고 미소를 짓는 김운이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말한다. 괜찮다고 걸어가면 된다는 다인에게 걷기에는 꽤 먼 거리라고 말하는 김운에게 다인이 정말 괜찮다고 걷는 거 좋아한다며 손사래를 치고 있는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가지다가 등장한다.
뛰어왔는지 앞머리가 꽤 들려있는 가지다는 이다인을 보자마자 무서운 얼굴로 소리를 지른다.
"뭐야? 너!"
그런 그를 놀란 눈을 끔벅이며 한참 쳐다보던 다인이 짧게 한숨을 쉬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미안하다고요, 그렇게 됐다고요."
"산책하다가 여기까지 걸어오게 됐대. 다행히 우리 애들이 먼저 발견했고, 아무 일 없었어. 그러니까 너무..."
"제정신인 거야?! 여기가 어디라고 경호원도 없이 혼자 기어 올 생각을 해?! 집안에 죽은 듯이 처박혀 있으라고 몇 번을 말해! 나나 강태산이 그렇게 말했는데, 그 정도면 지나가던 똥개도 알아먹었겠다! 너 바보야?! 그 머리는 생각하라고 달고 있는 머리 아니야?! 집에서 여기까지가 어디라고 그 먼 거리를 걸어와? 걸어오길! 너 진짜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볼꼴 못 볼 꼴 다 봐야 정신 차릴 거야?! 지금 네 모가지 값이 얼마라고 생각하는 거야? 넌!"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는 가지다를 보며 고개를 숙이던 이다인이 그가 말을 끝내자마자, 고개를 들어 반박하기 시작한다.
"태산 아저씨 말고 경호원 붙여줬어?! 그 큰 집에 나 혼자 있게 했잖아! 내가 뭐 나 위험한 줄 모르고 천방지축 돌아다니는 멍청이인 줄 알아?! 나도 안다고! 나 노리는 놈들 많은 거!"
"알면 집구석에 가만히 처박혀 있...!..."
"내가 인형이니?! 내가 다리병신이야?! 사지 육신 멀쩡한데 왜 집구석에 죽은 듯이 처박혀 있어야 해?!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왜 그 큰집에서 감옥살이해야 하느냐고! 7년 동안 할배 집에서 감옥살이했어! 여기까지 와서 꼭 그래야 해?! 아주 잠깐, 아주 조금씩 밖에서 광합성 좀 쬐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혼날 짓이야? 운동기구로 걷는 거 말고, 신발 신고 땅 밟는 거 그거 좀 하겠다는데 그것도 안 돼?!"
"위험하다고 했잖아!"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가지다. 그런 가지다를 야리는 이다인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고여있다.
"그 집안에 혼자 있는 건 안전하고?"
"경보장치 다 되어있고, 등록된 사람들 말고는 안에서 문 열어주지 않는 이상 안 열려. 내 집은 세상 어디보다 안전해. 혼자 있는 게 싫으면 말을 했으면 됐잖아. 내일부턴 할멈이라도 불러줄 테니까...."
"난, 산책을 하고 싶다고. 바깥바람을 쐬고 싶단 말이야."
"집 앞에서 쐐. 내 집 정원은 돈 지랄 하려고 만들어 놓은 게 아니야."
책상 위에 엉덩이 한쪽을 올리고 담배 하나를 물어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가지다를 보며 숨 막힐 정도로 섹시하다는 생각을 한 이다인은 지금 이 상황에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속으로 미쳤다며 꾸짖었다. 가지다 역시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는 눈에 독기를 품고 자신을 째려보는 이다인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안 돼?"
"안 돼."
"집 앞에서 100m 안 벗어나겠다고 맹세해도?"
"그래도 안돼."
"....잔인한 새끼."
"쓰읍- 말 예쁘게 안 하지."
"지다 너 아침마다 운동하잖아, 그때라도 데리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김운의 말에 눈썹을 꼼틀거리며 저러코롬 말하는 가지다. 이다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가지다를 보며 말한다.
"방해 안 할게, 옆에서 같이 뛰기만 할게. 절대로 말 안 걸게, 귀찮게 안 해, 맹세해. 숨만 쉴게, 아주 약하게."
다인의 말에 김운이 풋-하고 웃자, 입에 문 담배를 떼내고 긴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뱉은 가지다가 김운을 한번 째려보고는 다인에게 말한다.
"도대체 왜 그렇게 밖에 못 나가서 안달인 거야?"
"너도 7년이나 집 정원에서만 하늘 봐 봐라. 내 마음 이해할 거다."
"............"
"...나 말이야. 할배가 나 백화점 데려가서 뭐 사줄 때 말고는 세상 밖 구경한 적 한 번도 없어. 7년 동안 단 한 번도. 백화점 안에서도 할배가 지정한 곳 외엔 가본적 없고, 쇼핑이 끝나면 바로 죄수처럼 차에 태워져 할배 집으로 돌아가야 했어. 그래도 여름이나 겨울엔 할배가 가끔씩 강원도 별장에 데려가 줘서 바다는 좀 보긴 했는데, 오늘처럼 이렇게 오래 한산한 거리를 걸어본 적도, 뛰어본 적도...없거든, 나. 처음이야. 기분 좋게 오래 걸어본 거."
다인의 말에 김운이 가지다를 빤히 쳐다보자 가지다 역시 김운과 눈을 맞추더니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나 운동할 때만이야. 매일 아침 8시. 늦으면 얄짤 없어."
"응!!"
고개를 끄덕이며 해맑게 웃는 다인을 보고 김운과 지다가 동시에 입꼬리를 올린다.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네 하며 씽긋 웃는 다인. 그 말에 지다가 단박에 표정을 굳히고는 김운에게 "이거 태워서 집으로 보내."한다.
다인이 야! 하고 소리쳤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가는 가지다. 다인이 그런 그를 째려보며 저 싸가지라며 눈을 흘기자, 김운이 피식 웃는다.
"차 타고 가는 게 싫으면 같이 걸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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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쪽으로 걸어 올라가는 동안 제법 친해져 말까지 트게 된 김운과 다인. 집 앞에 다다르자 다인이 아쉬운 듯 짧은 한숨을 쉬며 입꼬리를 올린다.
"에에- 벌써 도착했네. 고마워, 덕분에 즐거웠어."
"내일부턴 지다랑 아침마다 걸으면 되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마. 그 녀석, 한번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놈이니까."
"응. 그나저나 너 다시 걸어가야겠네."
"차 올 거야. 나 걷는 거 싫어해."
"뭐야, 별로 멀지도 않은데."
"이게 안 멀어? 두 코스 정도는 되는 거린데?"
"젊어서 많이 움직여야지, 나이 들면 후회해. 조금이라도 젊을 때 많이 걷고 많이 움직이란 소리야."
"하하, 할머니 같긴."
"뭐야?"
"들어가. 문단속 잘하고. 혼자 있는 거 싫으면 지다한테 전화해. 지다가 지나 누나 불러준다니까."
"됐네요. 혼자가 편해. 지나 언니랑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니고."
"누나 성격 좋은데."
"나쁘다고는 안 했다?"
".......좋은 여자야. 들어가라, 그만 간다?"
"차 온다며."
"응. 올라오고 있어. 들어가."
"응, 가."
김운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집안으로 들어온 다인은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고 소파에 드러눕듯 앉았다. 아까 노지나의 이야기를 할 때의 김운 표정이 너무 슬퍼 보이는 게 내심 마음에 걸리는 다인이다.
뭔가 있는데....
옆에 있던 쿠션을 잡에 품에 안은 다인은 시계를 쳐다본 후, 안고 있던 쿠션을 베개 삼아 누워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많이 걸은 탓인지 금세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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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다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대자로 뻗어 잠이 들어있는 다인을 보고 기가 막혔다. 방도 넘쳐나는 집에서 대체 왜 그 많은 방들 놔두고 소파에서 자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여자였다. 짧은 한숨을 쉬고 다인을 깨우기 위해 소파로 걸어온 지다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다가 우뚝 행동을 멈췄다.
잠이 든 다인의 얼굴은 마치 인형처럼 예뻤다. 새하얀 얼굴에 지나치지도 덜하지도 않은 핑크빛 입술, 거기다 까맣고 긴 속눈썹까지. 영감이 이 작은 여자아이에게 왜 그렇게 목을 매는지 알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만져보고 싶지만 만지면 망가질 것 같아서 감히 만질 엄두를 못내는... 이런 기분을 들게 한 여자는 처음이었다. 지다는 아이처럼 새근거리며 잠이 든 다인의 얼굴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냐며 고개를 젓는다.
"야, 일어나. 야."
검지로 다인의 어깨를 살짝 누르며 그녀를 깨운 가지다는 눈을 뜬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을 쳐다보자 피식 입꼬리를 올린다.
"얼마나 잔 거야? 눈 부은 거 봐라."
"...몇 시야?"
"7시. 잘 거면 네 방 가서 자.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여기서 자?"
지다의 말에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던 다인이 부엌으로 가는 지다에게 소리친다.
"밥 먹을라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던 가지다가 다인의 말에 기가 차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자, 다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배시시 웃는다.
"배고파."
그녀의 애교 섞인 말에 피식 웃으며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는 가지다.
"볶음밥 해줘?"
"요리 잘해?"
"너보단 잘할걸."
"뭐야, 내 요리 먹어본 적도 없으면서."
"내가 영감을 좀 알지. 요리해본 적 없잖아? 너."
"...어릴 땐 했어."
냉장고 안을 뒤적거리던 지다가 어느새 부엌으로 와 식탁에 앉아 턱을 괴며 말하고 있는 다인을 쳐다봤다.
"우리 엄마가 요리 진짜 잘하거든? 어릴 때부터 옆에서 보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하고....아마 하면 잘할 거야. 엄마 닮았으니까, 나."
"....연락은?"
"....안 해. 할배가 못하게 했거든."
"보고 싶지 않아?"
가지다의 말에 피식 입꼬리를 올리는 다인. 그녀의 쓸쓸해 보이는 웃음에 지다가 고개를 돌려 냉장고 안을 살피며 말한다.
"맥주도 한잔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