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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 신중하구나.
“그래서 왜 보자고 하는 건데?”
- 너와 같다. 즐거움을 위해서.
“뭐?”
전령을 통해 한 마디씩 주고 받는다.
불편한 것은 없다.
강지건은 최대한 트레핀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우주선을 몰았다.
행여나 침식과 싸우더라도 영향을 받지 않게.
- 임시 관리자여. 나는 한 때 관리자였다.
“뭐?”
- 선배한테 인사 안 하나?
강지건은 깜짝 놀랐다.
‘선배? 뭐지? 아니, 그런데 저걸 믿어야 해?’
적으로 추정되는 존재.
뜬금없이 얘기하자더니 선배 드립을 친다.
‘못 믿겠어.’
하지만 강지건은 자신이 진실을 보여줘도 믿지 않던 지구인들을 떠올렸다.
‘진실일 수도 있겠지만.’
진실을 알려줄 객관적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저 사람이 전 관리자가 맞나?’
- ...
시스템은 침묵했다.
답하지 않았다.
‘답을 안 하는 건가? 못 하는 건가?’
알 수 없다.
‘어쩌면 침식으로 인해 변한 걸까?’
“우리가 편히 인사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 싸울까?
“안녕하신가?”
- 그래. 반갑다.
“그런데 어쩌다가 관리자가 침식된 거지?”
- 당한 것이 아니다.
“뭐? 스스로 선택했다고?”
- 그래.
“왜?”
강지건은 멍청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에 마냥 고개를 저을 순 없었다.
- 영원한 시간, 무엇을 해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세계는 또 다른 감옥일 뿐이다.
“그래서?”
- 그래서 관리자를 벗어날 길을 찾아봤다. 또 다른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
“그래서 선택한 것이 침식?”
- 그렇다. 하지만 벗어날 순 없더군.
“그럼 결국 침식을 통해 벗어난다는 건가?”
- 아니, 침식을 하면 바꿀 뿐이지 벗어날 순 없다. 그 짓도 별로 재미있지도 않고.
소고기를 익혔다고 소고기가 돼지고기 되는 게 아니다.
그런 식이다.
침식을 했다고 해서 세계 자체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소리였다.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많이 침식시킨 것도 아니던데?”
- 그래 보이나? 하긴 그렇겠지.
“그래 보인다니? 설마?”
- 내가 파괴해보고 가지고 놀아본 세계가 몇이나 될 거 같은가?
수도 없이 많았다.
영겁의 세월 동안 해보지 못한 것이 없었다.
안 해 본 것이 없었다.
사디스트 마조히스트 근친 불륜 등 온갖 성과 관련된 것부터 시작해 모든 직업을 다 해보았으며 모든 놀이를 시도했다.
원시적인 부족부터 시작해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시민까지.
왕, 대통령, 사기꾼, 거지.
모두 다 해봤다.
즐긴 것도 있고 금방 그만 둔 것도 있다.
좋아하는 것만 추려서 반복하다가 질려버리기도 했다.
매번 여자를 바꾸며 안아보아도 처음 안을 때 빼곤 별 느낌이 없어지게 되는 순간까지 왔다.
결국 남의 여자를 빼앗으며 빼앗긴 자의 얼굴을 감상하는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이 또한 금방 시들해졌다.
그렇기에 결국 학살을 하기도 했다.
공포에 질린 인간들의 얼굴을 보며 사육하기도 하고 도살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직접 하는 게 별 느낌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붙였다.
좀비 바이러스를 뿌려보기도 하고 괴수와 각성자를 만들어내며 헌터가 지배하는 세상도 보았다.
그렇게 그 속에서 또 즐겼다.
계속해서 뭔가 했다.
그러다 결국 새로운 자극을 위해 세계 하나를 박살내기도 했다.
자극이 오지 않는 것이 이유였다.
수많은 세계를 박살냈다.
그것도 지치고 귀찮아 결국 선택한 것은 바로 침식.
- 어쨌거나 최근 나의 취미라면 관리자 시스템의 선택을 받은 이들과 노는 거지.
“뭐하고 놀자는 거지?”
- 목숨을 건 결투는 어떤가?
“왜 하필? 그냥 게임이나 같이 하면 안 되나?”
- 결투 정도는 되어야지.
“대화는?”
- 결투.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다.
“꼭 위험한 걸 해야 겠나? 그냥 번식하면 안 되고?”
- 번식? 이미 했지 않나?
“뭐?”
- 네 조상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인간은? 다른 세계. 모든 세계의 인간들이 다 비슷비슷한 것이 수상하다 생각한 적은 없는 건가?
“설마?”
- 모든 인간은 나의 피를 이었다.
“조상님? 왜 후손하고 싸우시려고 그러십니까?”
- 유교인가? 그럼 내가 조상이니 죽으라 하면 죽을 건가?
“그건 아니지.”
강지건은 절대 그냥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나저나 내 조상이라.’
믿기지 않는 이야기.
‘굳이 믿어야 할 이유도 없고.’
상대는 침식된 존재.
사기를 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강지건은 말싸움하지 않았다.
‘쓸모없는 싸움.’
원래라면 말싸움도 상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다.
감정적으로 변해서 떠들어대는 이야기들은 모두 정보다.
가공되지 않은 정보.
연기로 화난 척하며 정보를 흘리는 수준이라면 어차피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하고 당할 확률이 높다.
어쨌거나 상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말싸움이다.
물론 이런 식의 도발은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는 쓰지 않는 편이 좋다.
초면에 친하지도 않은 주제에 계속 시험하려 들면 상대에게 반감을 심어주기 좋다.
시험을 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우위에 섰다는 의미니까.
시험을 당하라며 순순히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권력 관계에서 심리적 우위를 점하려는 행동.
그렇기 때문에 친분이 없으면 조심해야 하고 친분이 있더라도 조심해야 한다.
사람에 따라 굉장히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특히 심리적 우위를 잃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민감하게 반응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침식의 근원은 친해질 이유도 없고 가까이 할 이유도 없다.
상대의 기분을 생각할 필요도 없으니 언쟁을 통해 정보를 최대한 뽑아내는 게 상수.
허나, 강지건은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일단 싸움을 피했다.
“어쨌든 나랑 싸우면서 즐기고 싶다는 거잖아. 그런데 말이야. 난 많이 약해.”
- 그건 안다. 그래서 언제 강해질 건가? 필요없는 놈이라면 치워버리고 싶은데.
“설마 나 말고 또 다른 녀석들하고도 싸워본 거야?”
- 그랬지.
‘젠장. 역시.’
강지건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박살내 본 세계 다수. 죽여본 관리자 다수인 건가? 이런 놈하고 어떻게 싸워야 할까?’
“잠깐 생각 좀.”
강지건은 생각했다.
‘놈이 얻고자 하는 것은 자극이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죽이는 것에도 질려버리면? 그땐 더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래, 이 점을 파고들자.’
- 시간은 충분히 줬다고 보는데.
“내 전임들도 그렇고 이렇게 계속 죽여봐야 지루해지지 않겠어?”
- 언젠가 질리겠지. 그렇다고 오늘을 안 즐길 순 없지 않나? 참아봐야 지루함을 하루를 더 유예할 뿐이야.
“영원한 삶을 손에 넣었으니까 그렇지. 나도 요즘 느끼는 거니까. 그러니까 조금 더 기다리는 건 어때?”
- 기다린다고? 내 말 헛 들었나?
“내가 좀 더 강해지게 도와달란 소리야.”
- 흐음.
“내가 강할수록 더 대단할 거 아냐. 그러니까 네 힘을 좀 줬으면 좋겠어.”
- 훤히 보이는 수작이군.
“내가 강해지거나 네가 약해지거나. 짜릿한 위기를 느끼려면 그 방법밖에 없지. 아니면 알아서 벗어나보던가.”
- 어쩔 수 없군.
바보 같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바보 같은 선택을 하고 마는 침식의 근원이었다.
- 도와준다. 이제부터 방어만 할 테니 알아서 해보라고.
“흐흐, 고맙게 됐어.”
이야기가 끝났다.
“그럼 이 놈은 내가 먹어야지.”
침식의 근원이 전령으로 사용하던 존재를 죽여서 힘을 흡수해버렸다.
“그렇게 되었다면 주인님만 일단 안틸로프에서 싸우는 게 좋겠군요.”
“그것도 그렇고 이제 등급을 올리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 올려봐야지.”
- 문제를 해결하세요.
등급을 올리려 했으나 여전히 되지 않았다.
‘마스터. 전문가. 아직인가? 내 힘은 섹스. 절정. 하지만 섹스와 절정은 결국 생명을 위한 것. 결국 생명과 관련된 무엇인가를 하라는 건가?’
강지건은 상점창을 둘러보았다.
그 중에 스킬 하나가 보였다.
* 유전자 조작 - 10,000 포인트
그리 비싸지도 않고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 생각해서 관심 밖에 두었던 스킬.
하지만 강지건은 유전자 조작을 구매했다.
별로 부담도 되지 않는 것이니 질렀다.
‘퀘스트 난이도는?’
걱정했지만 별 문제는 없었다.
‘다행이야.’
아직도 난이도가 그대로였다.
강지건은 유전자 조작을 사용했다.
익히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바꾸는 것인지.
문제는 이를 사용할 지식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이것은 작곡 프로그램의 사용법은 완벽히 알더라도 이를 이용해 작곡을 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인 것과 같다.
피아노 사용법 안다고 다 베토벤처럼 위대한 음악가가 되는 게 아닌 것처럼.
‘이것에 숙련될 때까지. 등급을 더 올릴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강지건은 안드로이드를 이용해 의학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아니, 이것은 공부가 아니었다.
안드로이드에 자료가 다운로드되는 것을 그대로 실시간으로 뇌에 입력하는 수준이었다.
이해가 되건 안 되건 상관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안드로이드도 1기가 아닌 수천기를 동원해서 학습 중이었다.
동시에 강지건의 본신은 안틸로프에 들어섰다.
홀로 찾은 안틸로프.
예전에 전투를 벌였던 장소에 오니 침식의 군대가 다시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정말 물량 하나는 끝내주는군.’
하지만 이제부터 할 일이 있었다.
“시작하겠다.”
- 그래, 어디 실력을 보여주었으면 좋겠군. 일단 병기만 이용해보는 건 어떤가?
침식의 근원은 보고 싶은 것을 말했다.
“내가 사용했으면 하는 기종은 있나?”
- 처음부터 너무 약한 것으로 하면 재미없을 테니 일단 강한 것부터 타도록.
강지건이 약한 기체로 싸우게 될수록 점점 자극적인 장면이 나올 수 있었다.
본신의 힘을 이용해 기체의 성능을 증폭시켜서 싸우게 될 테니까.
때문에 재미있는 장면이라고 한 것이었다.
그냥 조종 실력만 볼 생각으로 처음부터 강한 기종을 타고 싸우라는 것.
“그렇다면 우리 기술자가 만든 것을 타고 싸우도록 하지.”
- 오 직접 만든 게 아니고?
“나도 너와 같은 고민을 한 적이 있었지. 그래서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어. 나중의 즐거움으로 남겨두려고.”
- 현명한 선택이군. 네가 머리가 아직도 나쁜 이유를 알겠어.
“칭찬 고맙군.”
싸움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