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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숫자가 많은 쪽이 더 유리한 진형을 만들어 상대를 괴롭힐 수 있으니까.
단순히 1:1로 계속 서로 쏴서 죽고 죽이는 맞교환 상태로만 가도 숫자가 많은 쪽이 이긴다.
“돌겨어어어어억!”
강지건은 자신의 차례가 오자 돌격했다.
총검을 들고 달렸다.
앞에서 달려오는 적의 얼굴이 보였다.
이대로 격돌하면 십중팔구 서로 찌르며 동시 KO되기 딱 좋다.
총검술이라고 해봐야 착검과 찌르기만 배웠으니까.
다른 거 없다.
좌우에 동료가 있는데 이리저리 휘두르는 법을 가르칠 리가 없었다.
그런건 본인이 알아서 할 일.
창을 찌르고 상대를 발로 차서 떼어내는 것만 가르쳤다.
복잡한 건 가르치지 않는다.
어려운 건 가르치지 않는다.
간단한 명령어를 입력한다.
명령만 따르는 기계로 만든다.
이러니 육군 병사의 진급은 매우 어렵다.
공? 몇 명이나 어떻게 죽였는지 알 수 없다.
때문에 전투에서 오래 살아남으면 진급시켜주는 것으로 퉁 친다.
여러 번 전투를 치르며 살아남았으니 그만한 보상을 준다는 의미다.
물론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진급했다고 좋아하지 않고 제대시켜 달라고 한다.
‘굿바이.’
강지건은 마주 찔러오는 적병의 총 중간부분을 툭 쳤다.
그러자 적의 총검이 옆으로 비껴간다.
“어?”
그 순간 강지건의 총검이 적의 배를 찔렀다.
“컥.”
발로 차며 당기자 쑥 빠진다.
이어서 다음 목표를 찾는다.
우선 좌우를 살핀다.
좌우의 아군이 죄다 쓰러졌다.
왼쪽의 적은 서로 찌른 상태라 같이 쓰러지지만 오른쪽의 적이 살아남았다.
개머리판을 휘둘러 먼저 한 방 먹인다.
퍽!
흔들리는 사이에 총검을 휘릭 돌렸다.
이어서 복부에 총검빵.
푸욱.
“허억!”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총검을 잡으려 한다.
발로 차서 떼어내고 반복한다.
그러자 아군 병사들이 너무 맥없이 쓰러져 순간 포위된 상황이 되었다.
소총을 한손으로 잡아 어깨에 올리며 반대편 손으로 리볼버를 뽑았다.
탕탕탕탕탕탕!
여섯 발을 순식간에 비우자 우수수 쓰러진다.
그 사이 강지건은 주변을 살피다 뒤로 슬쩍 물러났다.
혼자만 돌출된 상황이니 더 파고들어야 포위될 뿐이었다.
혼자서 총검만으로 무쌍을 찍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싸워야 할 이유는 없었다.
파단 제국에 충성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다른 민족이기 때문에 큰 공을 세워도 높은자리까지 가지도 못한다.
모든 공은 상급자의 것으로 둔갑할 테니까.
잘 싸워봐야 계속 전쟁터에 끌려 다닐 뿐이다.
전투는 파단 제국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살짝 적을 끌어들이며, 아니 양 옆의 병력을 재빨리 속보로 전진시키며 십자포화를 쏴버린 덕에 적의 병진 일부가 무너졌다.
이어서 차례대로 전 전열을 후벼 파며 도미노처럼 전열을 붕괴시켰다.
이후 돌격한 기병대가 혼란에 빠진 적을 쓸어 담는 동안 보병을 전진시키며 새로운 라인을 구축했다.
더구나 최전방에 방진을 형성하며 적 기병의 추격을 방해하자 아군 기병이 적의 보병 전열을 휘젓는데 성공했다.
전열보병을 이용한 전투는 적의 위치를 보며 실시간으로 체스를 두는 것과 유사했다.
다만 적의 턴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마구 휘저으면서 싸운다는 게 다를 뿐.
적의 수를 제한, 전열을 움직이며 라인을 잘 설정하는 쪽이 결국 유리한 법이었다.
이는 장교들의 제식 훈련 능력에 따라 전투력이 달라지기도 한다.
애초에 장군들은 병력 개개인의 전투력을 크게 고려하지는 않았다.
완벽하게 숙련된 집단을 형성할 수준이 아니라면 모두 같은 수준으로 취급했다.
보병은 폰이다.
먹이로 던져줄 수 있는.
포병들의 사격이 전열을 흩트리는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치명적인 수준의 피해를 주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공성에는 벽을 허무는데 도움이 되지만 전열 보병을 죄다 쓸어버릴 수준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전투가 끝나고 난 뒤 보급은 후하게 나왔다.
승리를 했으니까 잠깐 풀어주는 것이다.
지나치게 조이기만 하면 피를 본 짐승들이 날뛸 수 있으니까.
전투가 끝난 뒤 빠르게 흥분을 가라앉혀주기 위해 배를 불리는 것이다.
술도 먹여가면서.
대신 술 취해서 난동을 부리면 처벌한다.
“살아남았네.”
“축하한다.”
“고맙군.”
과타수는 살아남았다.
“넌 얼굴이 노래서 튀니까 표적이 될 줄 알았는데.”
“밤에 싸우면 니들은 안 죽겠지.”
“그러게. 크크크.”
흑인과 황인이 서로를 비하하며 낄낄거렸다.
염장고기지만 풍족하게 나왔다.
술도 꽤 많이 주어졌다.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취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꽤 나왔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군표를 가불 받았다.
이렇게 받은 군표로 마차로 달려가 술과 고기를 샀다.
전투를 치러보니 언제 죽을지 모를 운명이다.
그러니 돈을 써버린다.
나중에 죽은 다음에 가족에게 보내줄 거라는 말에도 안 쓰고 버티는 사람은 소수.
대부분 자신이 쓰고 죽겠다는 일념으로 가불로 군표를 받았다.
그리고 질이 형편없는 술과 고기를 비싼 돈 주고 사먹는다.
결국 병사들에게 갈 돈은 죄다 상인과 장교들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병사들은 확실히 현장에서 돈을 다 쓰고 죽은 거니까.
죽은 다음에 밀린 월급을 줄 이유가 없다.
“넌 안 쓰나?”
“나? 살아남을 건데 뭐. 총알은 날 피해간다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 피부를 봐. 축복 받은 검은 색이야.”
“저기 죽은 놈들도 검은데?”
“나처럼 검지 않은 놈들이라 그래. 내가 진짜 검은색이야. 순흑의 고결함을 가졌지.”
“웃기는 군.”
과타수와 강지건은 별 의미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그런데 넌 왜 안 쓰지?”
“나중에 좀 더 모아서 써야지.”
“그래? 그런데 어디 가?”
“뭐 먹을 거 있나 찾아보게. 염장고기는 질렸어.”
“어, 나도 같이 가.”
전투가 막 끝난 상태라 감시가 느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이탈하는 걸 그대로 두고 보진 않는다.
“어디 가는 거지?”
“주변에 짐승 좀 잡으려고 합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지.”
장교 하나가 따라붙었다.
젊은 소위였다.
“그러시죠.”
“이 빌어먹을 전투 승리를 해도 소용이 없어. 엿 같다고 생각하지 않나?”
“왜 그렇죠?”
“우리는 이기지만 딴 놈들을 뒈지고 있으니까.”
파단 제국은 전쟁에서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명장이 이끄는 지금 부대는 계속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결국 적국에서는 이쪽 라인을 박살내기 위해 전력을 집중하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전력 손실이 계속 늘어났는데 다른 부대에서 전력 충원을 거부했다.
귀족들이 질시한 것이었다.
결국 신병들을 위주로 병력을 채우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얘길 해주셔도 됩니까? 저희는 그냥 무지렁이 병사들인데.”
“아, 속 터져서 그래. 그렇다고 탈영할 생각말고. 탈영했다가 걸리면 죽을 때까지 매질해버리고 니 가족 중 여자는 창녀로 팔고 자식들을 선원으로 만들어서 수병으로 영원히 뺑뺑이 돌게 할 거니까.”
“그거 끔찍한 얘기군요.”
선원은 오래 살지 못한다.
일이 굉장히 고된 것도 있지만 영양실조에 걸리기 딱 좋은 직업이기 때문이었다.
육지에서 일하면 그래도 이것저것 주워 먹을 기회가 있지만 바다는 다르다.
신선한 야채 같은 것은 장기 항해에 금방 떨어진다.
무엇보다 선주가 악덕 선주면 먹을 게 굉장히 부실해진다.
해군이 되어도 마찬가지다.
범죄자 출신에게는 유독 가혹하게 대하기도 한다.
다들 기억하고서 놀려먹고 괴롭히고 온갖 일을 다 시킨다.
안 하면?
매질한다.
일 해도 기분 나쁘면 매질한다.
그냥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죄인 것 마냥 괴롭힌다.
오래 버티기 힘들다.
“전 사냥꾼입니다.”
“오오, 하지만 여긴 파단 제국이라고 병사. 아, 일병인가?”
“네, 자원입대해서 빠르게 일병 달았죠.”
“한 번만 더 살아남아. 그럼 상병이 될 거야.”
“상병 되면 뭐가 더 좋습니까?”
“좀 더 많은 군표를 가불할 수 있지.”
“마차는 바가지 씌우던데요.”
“여긴 전선이잖아. 저 치들도 남는 게 있어야지.”
“뭐 그렇다고 해두죠. 잠깐 총 좀 쏘겠습니다.”
“어, 그래. 저기 늑대 잡으려고?”
“네.”
타앙!
피 냄새를 맡고 근처를 배회하던 늑대부리가 깜짝 놀라 도망갔다.
하지만 총에 맞은 늑대는 그대로 남았다.
“이거 가죽은 내 것일세.”
“네, 가져가시죠.”
“고기는 필요 없으니 주지.”
마음대로 뜯어가는 것 같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원래라면 장교가 제자리로 돌려보냈을 것이다.
자리 이탈을 하면 탈영할 위험이 커지니까.
장교가 직접 사냥까지 따라와 주며 허락해준 것이니 수고비로 가죽을 받아가려는 것이었다.
장교가 진짜 악한 마음을 먹는다면 탈영하려 한 놈들이라며 사살하려 들 수도 있었으니까.
어차피 신분제가 아직도 남아있는 불합리한 세계.
어느 정도 뜯기는 것은 감안해야 했다.
하지만 장교라고 무적인 것은 아니다.
홀로 떨어지게 되는 상황이 오면 부하가 쏜 총에 맞아 죽을 수 있다.
때문에 보통 장교들은 따로 떨어지려 하지 않으며 항상 병사들이 딴 생각을 품지 못하게 바쁘게 한다.
“가 봐.”
가죽을 다 벗겨서 넘겨주자 장교는 터덜터덜 걸어간다.
강지건과 과타수는 고기를 가지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어? 고기?”
“꺼져. 우리가 잡은 거야.”
“이거 주면 안 되나?”
죽은 적의 병사들을 뒤져 챙긴 물품들을 내미는 자들이 있었다.
“이딴 걸 어디다 쓰라고.”
“왜? 가지고 있으면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
“꺼져.”
죽은 자의 신발을 내미는 인간들도 있었고 별 거 아닌 돌이나 조잡한 장식을 총알로부터 몸을 지켜주는 주술이 깃든 부적이라며 사기 치려는 놈들도 있었다.
“그거 다 먹을 수 있어?”
“술 가져온 놈만 고기를 먹을 자격이 있지.”
“고래? 술이라면 내가 좀 있지.”
술을 가불한 군표로 산 이들이 다가왔다.
고기가 구워지자 술을 돌리며 고기를 먹었다.
신선한 고기라 그나마 나았지만 늑대의 노린내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염장고기보다는 나았다.
어떤 것은 온갖 쓰레기가 같이 들어간 것도 있었으니까.
먹다보면 염장고기 사이에 쓰레기가 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부피와 무게를 늘리기 위한 수작인 셈이다.
애초에 지들이 먹을 게 아니고 병사들 먹으라고 군에 납품하는 거니 신경 써서 만들지도 않았다.
싸게 만들려고 서둘다보면 별 잡스러운 것이 다 들어간다.
어쨌거나 오랜만에 신선한 고기를 맛보니 강지건은 좀 나아진 기분이었다.
‘이 딴 것에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니 고난은 역시 최고의 조미료.’
강지건은 낄낄거리며 술을 들이켰다.
술이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