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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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

영화 촬영이 끝나고 편집이 시작되었지만 윤경미가 직접 하지는 않았다.

“남은 건 다 전문가에게 맡기려고요.”

애초에 감독으로서의 역량이 많이 부족했던 윤경미였지만 팬클럽 회장이란 직위로 감독을 먹었다.

사실 제작사에서 준 도움이 상당히 컸다.

조감독이 실무를 다 챙기는 것을 넘어 조언까지 해주었다.

사실상 감독이었던 셈이다.

윤경미는 그저 영상을 보고 마음에 들 때까지 찍거나 마음에 드는 구도가 나올 때까지 지시를 내리는 수준이었다.

“그럼 먼저 가서 좀 알아봐.”

“네.”

이사가 시작되었다.

한국 생활이 정리되고 있었다.

사실 딱히 할 것은 별로 없었다.

‘이제 여기도 끝인가.’

강지건이 직접 사용하던 집의 계약은 끝나지 않았지만 금방 들어와 살겠다는 세입자가 있어서 방을 빼기 편했다.

‘안녕이다.’

짐은 이삿짐 센터에서 알아서 처리해주기로 했다.

강지건은 몸만 움직이면 될 뿐.

‘일단 연습실부터 가야지.’

제타스 연습실은 많이 바빴다.

서머 시즌 우승이 확정되자 남은 것은 세계 대회.

여기에 대비해 다른 리그의 팀들을 분석하는 일에 착수했다.

“세계 대회만 남았네요.”

“꼭 결승에 숟가락만 얹도록 만들겠습니다.”

팀원들은 다들 의욕으로 불타고 있었다.

세계 대회 우승이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선수들에겐 몸값 상승도 필요했다.

노후도 아니고 은퇴 이후의 삶을 생각하면 벌어둬야 했으니까.

다행이라면 제타스 NFT가 꽤 좋은 값에 팔렸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해보도록 하죠.”

강지건은 마지막으로 연습을 돕기 시작했다.

“주희야. 정말 할 거야?”

“응.”

서주희는 휴학계를 내버렸다.

“학교에 더 다니는 것도 이제 지겨워.”

힘에 취했다.

초인의 힘을 가졌는데 법학을 공부하고 있는 게 답답할 뿐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변호사를 얼마든지 고용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법이 마음에 안 들면 때려 부술 수 있는 힘을 가진 쪽이었다.

법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정확히는 법을 강제하는 지구의 그 어떤 세력도 두렵지 않았다.

강지건의 놀이터이기에 조심스럽게 대할 뿐이었다.

“침식 정화가 더 중요해. 주인님을 위해선 침식부터 해결해야 해. 그리고 학교에 다니다보면 또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도 있고.”

진태성과 같은 경우를 다시 겪는 것은 사양이었다.

공부 잘하는 법조계 며느리를 원할 집은 상당히 많았다.

상류층이라고 꼭 정략결혼만 하는 것 아니지만 집안을 아주 안 보는 것도 아니다.

집안이 별로라고 해도 본인의 능력이 뛰어나면 받아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서주희는 집안이 좋았다.

판사 부모.

가족은 물론 친인척까지 법조계에 몸을 담고 있었으니까.

거대한 인맥이 형성되어 있었다.

여기에 서주희 본인도 명문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며느리감으로 직업면에서는 합격이었다.

집안 일 같은 것이야 돈 많은 집은 가정부를 두면 그만이니까.

서주희는 다시 맞선 같은 것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

“OP 그룹 확 망했으면 좋겠는데.”

“그건 좀 힘들 거 같아.”

“경미 언니 때문에?”

“그렇지 뭐.”

윤경미의 전남편인 오경식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자식 때문이었다.

오경식이 자식을 데리고 있으니 윤경미 입장에서는 마음이 복잡했다.

남편은 밉지만 그렇다고 자식까지 망해버렸으면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서운하게 해서 마음은 아팠지만 그렇다고 발목을 잡고 싶지도 않았다.

이 점 때문에 오경식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본인은 하나도 몰랐다.

그저 자신이 유능해서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여겼다.

윤경미의 말 한 마디면 사회 밑바닥에 파묻힐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어쨌거나 이제 지구에 미련은 없어.”

서주희는 지구가 지루하게 느껴졌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초능력을 이용한 전투를 하다 보니 답답했다.

부친인 서진남과의 신경전 따윈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마조 성향을 벗어나면서 동시에 서진남에게 얽매이는 일도 사라졌다.

정신적인 독립을 이룬 것이었다.

“하긴 주인님 아니면 심심하긴 하지.”

황윤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얻게 된 이후, 그리고 침식과 싸우며 힘을 사용한 이후 황윤주 또한 지구가 지루하게 느껴졌다.

맛있는 것?

다른 세계에도 얼마든지 있다.

남자?

강지건이 최고다.

권력?

세계를 마음대로 주물럭거릴 수 있다.

사치?

다른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

더구나 동료들도 많아서 굳이 친구를 따로 사귀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동료들이 한 가득이었다.

함께 강지건에게 안기며 웃고 떠들기도 한다.

황윤주는 서주희를 안았다.

“뒷정리는 어떻게 할 건데?”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사라지게?”

“그것도 좋잖아?”

“음.”

서주희는 집에 미련이 없기에 간단히 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윤주는 아니었다.

“나는 집에 가끔 들려야 해서 힘들겠다.”

“하긴. 그래도 넌 가족하고 사이가 나쁘지는 않잖아.”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주인님이 큰일이야.”

“권태 맞지?”

“그치.”

강지건이 권태를 느끼고 있음을 눈치 챘다.

아직 심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지구에서 하는 일에 많이 흥미가 줄어든 느낌을 보였다.

“이럴 땐 돌려막기를 해야지.”

“그렇지?”

“그렇지.”

서주희와 황윤주는 바로 강지건을 찾아갔다.

“돌려막기?”

“네, 권태를 느끼시는 것 같아서요.”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잠시 지금 하던 일을 멈추고 다른 일을 하는 거죠. 아니면 잠시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흐음.”

“여행 같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새로운 걸 보고 고생도 좀 하고 집에 오면 또 새로운 느낌도 나고.”

“한달 살기 같은 거?”

“그렇죠.”

서주희와 황윤주의 제안을 강지건은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미국으로 가려 한 건데.”

“세계 대회 끝나면 아예 다른 세상에서 좀 지내보시는 건 어때요?”

“다른 세계?”

“네, 그 세계 사람처럼 살아보는 거죠.”

“흐음,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흥미를 느끼는 표정에 서주희는 반색했다.

“저 도움이 되었나요?”

“그래.”

“그럼 상주세요.”

쩌억.

다리와 구멍을 잡아벌린다.

노골적인 유혹.

“음란한 것.”

“죄송해요. 음란한 암퇘지라서.”

“음란해도 맛있으면 돼지!”

강지건은 욕망의 구덩이에 몸을 박았다.

‘어디로 가보는 게 좋을까?’

권태를 느끼던 시점에서 강지건은 여러 가지 일을 생각했었다.

여러 가지가 떠올랐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지구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

폭주.

더 강한 자극을 위해 폭주하는 것이었다.

세계의 균형이 깨지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해보는 것.

심지어 아포칼립스로 만들면 어떨까하는 아이디어까지 스쳤다.

그리고 놀랐다.

‘어쩌면 이 힘을 가졌던 이들이 폭주한 결과가 침식일지도 몰라.’

강지건은 자신이 가지게 된 힘의 정체를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다.

다만 침식을 막는 게 우선이란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언젠가 최고 등급이 되면 알게 되겠지만.’

하지만 그 전에 포인트를 최대한 많이 벌고 스킬과 아이템을 최대한 구할 생각이었다.

더욱 더 강해지고 만전의 준비를 한 다음에 최고 등급까지 달릴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침식부터 해결해야 했다.

‘침식은 서번트들에게 맡기면 돼.’

결국 시간 문제.

그 사이 강지건은 최대한 즐겨두기로 했다.

‘어쩌면 모든 세계가 다 박살날 수도 있으니.’

현재 강지건에겐 권태가 가장 무서운 적으로 느껴졌다.

형체가 없는 적.

무기를 든 적은 죽이면 된다.

바이러스는 면역을 올려서 퇴치하면 된다.

침식도 박살내면 된다.

하지만 권태라는 감정은 물리력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적이다.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선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서주희가 해준 제안이 나쁘지 않았다.

‘돌려막기라도 해야지.’

많은 사람들이 자주 쓰는 방법이다.

게임을 하다 질리면 드라마를 본다.

드라마를 보다 질리면 소설을 본다.

소설을 보다 질리면 게임을 한다.

셋 다 하다 질리면 여행을 간다.

계속 무엇인가 다른 것을 하다가 다시 접하면 새로운 것이 있다.

‘미국에서 움직이기 전에 다른 세계도 맛을 보는 게 좋긴 하겠는데.’

이런 저런 세계를 살피던 강지건은 한 세계의 이름에서 멈췄다.

‘낙스.’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는 세계였다.

서부 개척시대 같은 문명을 가진 세계.

이미 침식 정화가 끝난 곳으로 카리아 제국으로 편입된 세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개발이 이뤄지며 문명이 빠르게 발전하는 중이었다.

‘흐음, 서부개척시대. 나쁘지는 않았는데.’

문득 어릴 때 봤던 카우보이 영화가 떠올랐다.

‘황야의 건맨.’

말을 타고 다니며 총격전을 벌이는 영화였다.

‘해볼까?’

흥미가 생겼다.

권태를 이길 힘이다.

“체시, 낙스 같은 문명 중에 아직 개발되지 않은 곳 있어?”

“네, 있어요.”

“거기 개발은 좀 미뤄줄래?”

“왜요?”

“개척시대 문명을 좀 즐겨보려고.”

“아하! 알겠습니다!”

체시에게 말한 순간 이미 안틸로프인들은 개발 계획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얼마 전에 정화를 끝낸 세계, 딕스는 개발 직전에 멈춰버렸다.

딕스의 권력자들은 아무런 불만을 가지지 못했다.

애초에 불만을 가질 권력자들은 다 죽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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