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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시 포프스
하루의 일과가 끝이 났다.
‘이대로면 시즌도 곧 마무리고 플레이오프 진출은 확정이고.’
제타스는 남은 경기와 상관없이 2위 확정이었다.
덕분에 시드권을 얻어 플레이오프 초반에는 경기가 없었다.
3위부터 6위까지, 총 4팀이 싸워 4강 진출팀을 뽑는다.
이후 4강에서 결승 진출팀을 뽑는다.
스케쥴을 확인한 강지건은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스프링 우승이 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
‘최근 폼들이 다 올라왔어.’
더구나 작년까지 무적의 포스를 뿜어내던 대영에 대한 준비는 확실히 마친 상태였다.
‘대영 빼고는 다들 별 문제 없이 해결할 수 있고.’
세계 대회 우승팀인 대영은 제대로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승률이 반반 정도였다. 강지건이 보기에 그랬다.
‘압도할 수 있는 라인이 없어.’
대영의 원거리딜러는 특히 더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원래 태생이 하이퍼캐리형 원거리 딜러였지만 자주 죽는 바람에 결국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딜이 가능한 생존형 원딜이 탄생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대영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리그 최상위권의 원거리 딜러와 맞서 싸워도 죽지 않는다.
리그 최상위권의 바텀 듀오와 2:1로 싸워도 죽지 않는다.
죽지 않고 버틴다.
때에 따라서는 러브샷으로 꼭 한 명을 데려간다.
한번은 2:1 교환을 이뤄내는 기적을 보여주기도 했다.
포탑을 끼고 있는 대영의 원딜은 쉽게 잡을 수 없었다.
한국 리그의 원딜만 압도 못하는 게 아니다.
세계 그 어떤 리그의 원딜도 대영의 원딜을 1:1로 잡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바텀의 끈질긴 생명력은 파트너인 서포터의 발을 일찍 풀어준다.
미드 로밍은 물론 시야 장악이 훨씬 빨라진다.
바텀의 시야 장악이 빨라지면 상대 정글의 위치를 빨리 파악할 수 있게 되니 탑의 생존력도 늘어나고 정글러의 동선도 더욱 기가 막히게 뽑히게 된다.
원거리 딜러의 생존 능력 하나로 이렇게 많은 것이 바뀌는 것이었다.
더구나 미드와 탑 라이너들의 기량도 세계 정상급이었다.
어지간해서는 밀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천재과에 속한다고 알려진 대영의 서포터와 세계 최고 선수로 뽑히는 정글러가 게임의 주도권을 잡고 뒤흔든다.
정글러 입장에서는 라인에서 버텨주고 바텀쪽 시야가 빨리 확보되니 활약할 판이 자연스럽게 깔리는 것이었다.
더구나 어느 라인이든 충분히 버텨주니 마음 놓고 휘젓고 다니는 게 가능했다.
그야말로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었다.
이런 강팀이기에 제타스의 폼이 많이 올라왔음에도, 전략을 철저히 준비했음에도 승률은 반반으로 보았다.
아무리 완벽한 작전이라도 시작할 때 잡은 주도권을 풀어나가지 못하면 결국 중간에 전투 한 방에 뒤집어지는 일은 흔했으니까.
주도권을 잡았을 때의 상대를 파악하고 계속 스노우볼을 굴리는 오더를 누군가할 줄 알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또한 상대의 수를 읽고 이를 파악해 받아칠 수 있어야 게임이 뒤집어지는 걸 막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선 끊임없이 전장의 상태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어야 했다.
감독이나 코치진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뭐 하나 조심하라고 하면 상대는 또 다른 수를 들고 나오면 그만이니까.
이거 저거 다 조심하라고 하면?
조심하다가 위축되어버리기도 한다.
결국 이래저래 말하다보면 하는 말은 비슷해진다.
상대의 수를 읽어라.
말은 쉽지만 그리 쉽게 되는 건 아니다.
‘플레이오프 경기는 빠지면 안 되겠다.’
결국 강지건은 결정을 내렸다.
자신이 빠진다면 우승은 힘들다.
기왕 프로게이머가 되었는데 우승을 못한다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었다.
‘올해 세계 대회 우승은 해봐야지.’
무엇보다 스프링 시즌 우승 퀘스트를 걸 생각이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다음 스프링 시즌까지 퀘스트 슬롯 하나가 잠기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다음 날, 휴일이기도 했고 강지건에겐 할 일이 있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지구에서 휴식 시간을 갖기 전, 네이가에서 할 일이 있었다.
“준비 됐지?”
“네.”
장갑수송차에는 막대한 지원물품이 실려 있었다.
소총과 탄약을 비롯해 수류탄이 잔뜩이었다. 또한 크롭스크 군부대에서 털어온 전투식량이 한 가득이었다.
가만히 놔둬봐야 상할 것들이니 최대한 챙겼다.
여기에 트럭 여러 대에 크롭스크의 통조림을 가득 채웠다.
모두 카리아 가문에 줄 지원 물품이었다.
이번에는 라다와 야은설도 함께 가게 되었다.
강지건과 델까지 포함해 네 사람은 차를 한 대씩 몰고 포털로 들어갔다.
잠시 뒤, 카리아 가문의 뒤뜰에 트럭들이 나타났다.
“이게 무슨.”
“황제 만들어준다고 했지? 일단 시작은 소소하게 가보자고. 델, 사용법은 다 숙지하고 있지?”
“네.”
“그럼 네가 책임지고 다 알려줘. 라다와 은설은 나랑 같이 움직인다.”
트럭에서 오토바이를 내렸다.
크롭스크에 굴러다니던 산악용 오토바이였다.
시동을 걸자 부다다당 엔진이 운다.
“가자.”
레이싱용 바이크처럼 빠르지는 않지만 제대로 된 길이 없는 곳에서는 산악용 오토바이만큼 좋은 게 없었다.
세 사람은 먼지를 흩날리며 달려나갔다.
“갑자기 이게 다 뭐냐?”
“주군의 보내는 지원물품이죠.”
델은 담담히 장갑수송차부터 시작해 트럭들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 연료라는 거 우리가 구할 수도 있는 거냐?”
“세계 어딘가에 묻혀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원유란 걸 뽑아내도 이를 정제해야 연료로 쓸 수 있어요. 그런 시설을 만드는 건 쉽지 않으니 지금 당장은 어렵죠.”
“그럼 저기 차에 실린 연료가 다 떨어지면 끝이란 거구나.”
“네, 그러니까 멀리 끌고갈 생각은 말고 그냥 창고에 넣어두는 편이 좋죠.”
“그런데 더 쇳덩이들이 정말 다 음식이라니.”
통조림을 하나 땄을 때 아켈은 놀랐다.
과일 통조림은 처음이었다.
참치 통조림과 캔햄은 정말 충격이었다.
“생선을 이렇게 보관할 수 있다니 정말 엄청난 세계구나.”
“그들은 과학을 이용해 문명을 발전시켰다고 해요.”
“그렇구나. 그럼 나도 과학을 배워야 하는 거냐?”
“한 사람이 모두 배울 순 없어요.”
델은 차분히 지구와 강지건이 데려갔던 세계들에 대해 알려주었다.
신기한 이야기에 아켈은 푹 빠져들었다.
부녀는 출출해질 때마다 전투식량을 하나씩 까서 먹었다.
강지건은 남쪽으로 달렸다.
말을 타고 달리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
비행을 하면 좋지만 일단 달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강화 외골격에 달린 비행용 부스터는 따로 연료가 필요했다. 이건 포인트로 구매하지 않으면 구할 방법이 없었다.
반면 오토바이 연료는 크롭스크에 넘쳐났다.
크롭스크 전역에서 좀비가 발생하며 대부분의 인구가 사라졌다.
자원은 넘쳐나는데 쓸 사람은 별로 없는 상황.
주유소고 정유소고 모두 독차지하고 쓸 수 있었다.
생존자들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좀비들이 사라지자 서로 뭉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있었다.
라다는 이런 이들을 찾아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냥 지나쳤다.
대신 파괴 행위를 하는 이들은 걸리면 염력으로 목을 비틀어 죽였다.
나중에 쓸지도 모를 것들을 파괴한다는 게 이유.
크롭스크의 모든 것은 강지건을 위해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라다였다.
“좀 쉬다 갈까?”
계속 달리다 지겨워진 강지건은 작은 호수를 만나자 휴식하기 위해 멈췄다.
“네.”
오토바이에서 내린 강지건은 물을 확인해보았다.
“차갑네. 그래도 문제는 없지!”
옷을 훌러덩 벗고는 호수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라다와 야은설도 벗고 뛰어들었다.
나신으로 가슴을 덜렁거리며 뛰어든 여자들은 강지건에게 매달렸다.
“시원한데요?”
“크크. 그렇긴 해.”
초인의 반열에 오른 세 사람에게 추위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차가운 물속에서도 강철 같은 대물은 죽지 않고 바로 섰다.
세상을 떠받칠 기둥이 물위로 솟아올랐다.
호수의 선택을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성검처럼.
약속된 승리의 대물.
“하룹!”
야은설일 낼름 대물을 입에 물었다.
라다도 웃으며 대물의 뿌리에 달린 알바위를 머금었다.
두 여자의 봉사를 받으며 강지건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물이 피부를 감싸고 있지만 조금 서늘한 느낌.
귀로 들어오는 소리는 적었다.
하지만 초감각은 호수의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눈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흘러가는 게 보였다.
‘좀 있으면 바람이 심해지면서 기온이 떨어지겠네.’
하지만 초인들에겐 별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저건 뭘까?’
물 위에서 초감각으로 호수의 밑바닥까지 살필 수 있었다.
그 결과 상자 하나가 보였다.
죽은 생명체들의 뼈도 있었다.
인간인지 몬스터인지 알 수 없었지만.
기분이 참 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더럽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호수는 충분히 컸고 썩은 것들은 감각에 걸리지 않았으니까.
모두 분해된 상태였다.
자연이 정화했다.
‘상자가 뭔지 궁금하네.’
호기심을 참지 못한 강지건은 여자들의 입에서 대물을 뽑았다.
“왜 그러세요?”
“저기 바닥에 상자 느껴지지?”
“네.”
“가져와봐. 먼저 가져오는 사람이 나랑 먼저 하는 거야.”
순간 야은설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라다는 꼼짝도 안 했다.
“안 가?”
“사람은 머리를 써야 하죠.”
라다는 염력을 발동했다.
그러자 상자를 잡으려던 야은설은 간발의 차로 놓치고 말았다.
이어서 상자를 잡으려 빠르게 물속에서 움직였으나 소용없었다.
라다의 염력이 더 강력했다.
“여기요.”
염력으로 상자를 당겨 손에 넣은 라다였다.
“열어 봐.”
염력으로 허공에 상자를 띄우고는 열어버렸다.
잠금 장치가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초감각으로 구조를 파악하고 염력으로 열어버렸으니까.
열쇠가 없는데도 그냥 자물쇠가 열렸다.
상자가 뒤집히자 안의 내용이 쏟아져 내리다 멈췄다.
염력에 의해 공중에서 떠돌아다녔다.
“금화 주머니. 약간의 보석. 이건 책들하고 마법 아티팩트네.”
“왜 이게 여기 있는 걸까요?”
“누군가 숨긴 거 아닐까? 장물일 수도 있고.”
“챙길까요?”
“어, 다 챙겨둬.”
강지건은 마법 아티팩트임은 알아보았지만 정확히 어떤 마법인지는 알지 못했다.
마법 지식 부족 때문이었다.
다만 책들에 쓰인 언어가 자신이 모르는 것이기에 또 다시 문자를 읽기 위해 언어를 상점에서 구입해야만 했다.
“이건 바르차 제국어였네.”
책들 중 하나를 집어 들어 읽은 강지건은 흥미를 보였다.
“그래요?”
“응, 멸망당한 제국어로 쓰인 마나연공서야.”
“어딘가의 귀족이 여기까지 와서 숨긴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 뭐 자세한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알게 뭐야.”
마수에 의해 멸망한 바르차 제국에 대해 별로 궁금한 것이 없는 강지건이었다.
나중에 심심하면 흥미가 생길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에는 신경 쓸 것이 너무나 많았다.
멸망한 바르차 제국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후순위였다.
“그런데 이 마나연공서, 백작가의 것이네?”
바르차 제국의 아렉 백작가의 마나연공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