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회
세계의 결착
006
루키우스는 도주를 포기하고서 갈리아로 다시 진군하였다.
고작 1천의 패잔병 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용감하게도 싸웠고, 알페스 지역으로 도주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전의를 불태웠다. 살아날 구멍을 스스로 포기하면서 사력을 다해서 싸운다. 브리튼 기사들조차도 뒤로 물러나기에 충분했고, 로마군은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루키우스를 보내주었다. 은발의 여기사는 성검 플로렌트를 휘두르면서 앞으로 전진. 브리튼의 명망 높은 기사들을 모두 격퇴해내면서 비세리온 펜드래건과 마주하였다.
그녀가 비세리온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비세리온 또한 그녀를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에 스스로 나선 것이리라. 성검 엑스칼리버를 치켜들고서 루키우스와 대치했다. 루키우스의 곁에는 아서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네가 졌다."
비세리온이 말했다.
냉혹하면서도 차가운 말이었음에도, 루키우스는 그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전쟁에 대해서 맹목적인 집착을 가지고 있는 황녀였지만 적어도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줄은 알았다. 이런 전황 속에서 스스로의 명예에 도취되어 승리라고 주장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맞아, 내가 졌어."
"그러니 죽는 이유로는 충분하겠군."
지면에 박아두었던 새하얀 백색의 검을 뽑아들었다.
비세리온은 결코 루키우스 티베리우스라는 소녀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제 3황후였던 카리나의 사촌 언니이기도 했지만, 살려둘 이유로는 부족하다. 만약 정상적인 부류의 인간이었다면 그나마의 온정을 담아서 살려두겠으나 루키우스는 너무도 위험하다. 살려둘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브리튼의 모든 기사들이 그녀의 죽음을 원하고 있었으므로 이 자리에서 루키우스 티베리우스가 죽는다는 선택지가 아닌 다른 선택은 불필요했다.
"내가 쉽게 죽어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성검 플로렌트를 뽑아드는 루키우스.
그리고 엑스칼리버를 치켜든 비세리온이 거리를 좁히면서 두 명의 남녀가 불타는 언덕 위에서 격돌했다. 사방에서 들리는 것은 병사들의 함성소리와 죽어가는 신음소리, 그리고 절규로 가득찬 비명이 울려퍼질 뿐이다. 전장의 중심에 선 영웅들은 그 마지막 결착을 지으려 했다.
"비세리온!!"
"루키우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칼날이 교차했다.
푸른 벼락과도 같은 굉음이 울려퍼졌다. 굉음과 함께 시작되는 칼부림. 분명 그 전력의 격차는 명백했다. 루키우스의 압승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지친 상태였고, 그에 반해서 비세리온은 몸상태가 최상이었다. 서로간의 대결은 분명 불공평한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비세리온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며, 불공평하다고 해서 봐줄 생각은 없다.
비세리온은 스스로의 손으로 루키우스를 죽일 심산이다.
그를 위해서 일부러 루키우스가 접촉한 것이 아닌가. 그는 계산적인 성격이었고, 자신이 위험한 상황은 되도록 피하려는 기색이 강했다. 지금도 아서를 옆에 대동하고서 루키우스와 일기톨르 벌였다. 만약 비세리온이 수세에 몰린다면 아서가 개입해주겠지.
"보이느냐! 네년이 만든 이 지옥의 현장이! 네가 로마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아하하하하! 그래, 보여.... 보이고 말고!"
브리튼의 황제가 외쳤다.
그리고 로마의 섭정관이 그에 대답하면서 가늘어지는 교성을 터트렸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뒤엉키면서 벌어진 사상 최대 규모의 대전. 그 대전을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은 루키우스였다. 그녀는 로마 제국이 무너질 위기를 만들었음에도 결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그를 인정해버리는 것은 지금까지 전쟁 속에서 살았던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일이 되리라. 그렇기에 루키우스는 플로렌트를 휘두르면서도 오로지 그 눈동자만큼은 비세리온을 향하고 있었다.
"역겹다. 네 눈도, 그리고 그 비열한 웃음도. 맹목적인 전쟁욕과 추악한 감정까지도. 모든 것이 역겹단 말이다!"
비세리온은 '루키우스 티베리우스'라는 이름의 여성을 철저히 부정했다.
과거 브리튼 왕국을 혼란으로 빠뜨렸던 보두앵 따위보다도 이 소녀를 증오하고 미워했다.
전쟁을 오로지 그 과정으로서 즐기는 악마.
병사들의 아픔과 죽음 따위에는 결코 그 감정을 두지 않는 냉혈한.
자기 자신의 욕망과 만족을 위해서 전쟁이라는 과정을 수단으로서 사용하는 전쟁광.
그것이 바로 루키우스였다.
분명 수려하고 아름다운 용모는 은발의 요정답게 예쁘장하다. 피투성이가 된 상황 속에서도 그 용모는 너무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푸른 벽안은 언제나 보석처럼 아름다웠고, 투명하게 빛나는 그 섬세한 빛은 모든 남정네들을 홀리게 만드는 마력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그 수려함 속에 숨은 것은,
끝이 없는 나락처럼 바닥조차 존재하지 않는 시커먼 어둠이다. 그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은 오로지 순수한 악의. 전쟁을 추구하며 피아를 가리지 않고 오로지 살육을 원하는 끔찍한 살의까지 보였다.
이런 소녀가 로마 제국의 황녀로 태어난 것은 하나의 재앙과도 같았다.
로마 제국 뿐만이 아니다. 훈족과 게르만, 동고트와 서고트. 그리고 갈리아와 브리튼에 이르기까지. 서방 국가들이 떠안아버린 최악의 공포였다. 단 한 명의 존재 때문에 지금까지 전쟁은 계속해서 되풀이되었고, 무의미한 살육과 죽음이 이어졌다. 비세리온은 지금 이 전쟁이 벌어진 원인도 루키우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이어진 전쟁이 뭉치고 쌓이면서 괴물을 만들었다.
괴물은 아름다운 여인의 탈을 쓰고서 인류를 삼키려고 했고, 마지막에는 스스로의 몸을 불태워버리는 전쟁을 만들어냈다.
사실 루키우스는 이 전쟁에서 죽으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 용사의 칼에 쓰러지는 괴물 역할을 충실하게 다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런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물론 착각일 뿐이겠지만 비세리온은 그런 생각도 해버렸다.
두 자루의 성검이 휘둘러지면서 커다란 폭풍을 그려냈다.
대기를 베면서 사나운 소리를 낸다. 지면을 굴러다니는 시체들을 뒤로 밀어내고, 칼날이 만들어내는 바람자국이 지면에 선명하게 남았다. 플로렌트의 칼날에서 푸른 우레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엑스칼리버에서 새하얀 마력이 넘실거렸다.
성검술사의 전투는 치열했고, 평범한 범인이 접근하면 곧바로 베여나갈 정도로 흉폭했다. 비세리온은 차츰 체력적인 한계를 느꼈지만, 적어도 체력이 모두 소진되기 전에 루키우스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은발의 소녀는 피칠갑이 된 상태로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이제 곧 그녀의 목숨을 거둘 수 있으리라.
".....네가 나를 이길 줄이야, 비세리온."
"먼저 싸움을 건 것은 네 쪽이었지. 그게 네 실수다."
"실수? 실수라고 생각해? 나를 멸할 정도의 강자를.... 그런 강자와 싸우게 된 것은 내게 있어서 천운이었어. 그 천운이 내 몸과 영혼을 멸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조금도 분하지 않아. 오히려 지옥으로 떨어져서도 최고의 일대기였다고 뿌듯함을 느낄 거야."
"미쳤군. 너는 미쳤다."
죽음 앞에서도 루키우스는 경건함을 유지했다.
그 경건함은 성직자에게서 느껴지는 고결함이 아니다. 고결함보다는 추악하다는 부류의 감정이다. 수십만 명이 희생당하고 간접적으로는 수백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서. 여러 개의 국가들을 지옥으로 밀어넣었음에도 정작 그 장본인은 경건함을 보였다.
가증스럽다.
역겹다.
엑스칼리버가 루키우스의 어깨를 베어냈다.
가녀린 여체를 유린하면서 살갗을 베어갈랐고, 그 알격은 치명타로 먹혀들어갔다.
루키우스의 몸이 꺾여나가면서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다. 새빨간 피가 뿜어져 나왔다. 전쟁에서 패배를 몰랐다고 전해지는 전쟁의 여신은 보통 인간처럼 새빨간 피를 가진 인간이었고, 칼에 베이면 죽는 인간에 불과했다.
비세리온의 성검은 결코 용서가 없었다.
빈틈을 보이는 루키우스를 향해서 성검을 쑤셔박았다. 정확히 복부에 칼날이 스르륵하고 박혀들었다. 두 손에서 여인의 몸을 찌르는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째서인지 두 손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까지 전쟁에서 망설인 바가 없었거늘, 처음으로 떨림을 느꼈다.
".....가라. 지옥으로."
비세리온이 말했다.
최후에는 적어도 기도문을 읊어줄 법도 했지만, 비세리온은 결코 자비심이 없는 군주였다. 특히 전쟁을 몰고 온 재앙에게는 한 점의 관용도 베풀고 싶지 않았다.
"지옥에서 기다릴 거야, 언제까지나. 다시 결판을 짓기 위해서라도."
루키우스가 답했다.
그녀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비세리온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쪽 세계에서 패배하였다면, 다른 세계에서 다시금 자웅을 겨룬다. 자신은 물론이고 비세리온 또한 지옥행이 당연한 운명이었으니, 그 시간의 차이는 있어도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다시 만날 수 있다. 루키우스는 죽음을 느끼면서도 적잖은 충족감을 느꼈다.
지옥에서 기다리겠노라고.
은발의 황녀는 마지막에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