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회
세계의 결착
002
겉으로 보기에는 갈리아 전역을 대부분 점령한 로마군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상 로마군이 수세에 몰린 상태였다.
루키우스는 스스로 본군을 지휘하면서 오를레앙 부근에 맹공을 펼치고 있었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부대들은 이렇다고 할 성과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루키우스와 함께 동방 전선에서 활약했던 로마 장수와 군관들은 훌륭하게 브리튼 기사들을 상대로 우세를 보이고 있었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군관들은 부진한 성적을 내기만 했다. 브리튼 기사에게 패배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보급대를 맡은 장교들은 게르만 기병대의 게릴라전에 곤욕을 겪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후방조차 위험해서 보급로도 운용하기 힘듭니다."
"그냥 퇴각합시다. 전황이 너무 불리합니다."
전쟁에 대해서 반대표를 던진 것은 속국 출신의 장교들만이 아니었다. 루키우스 휘하에 있던 부하들까지도 서서히 전쟁에 대해서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루키우스가 브리튼을 상대로 대활약을 펼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지지했지만, 보급로도 끊어지고 외국 용병들까지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자 그 믿음이 무너져내린 것이다.
로마의 가난한 형편을 위해서라도 장기전은 결코 안 된다.
브리튼과 정전 협상을 하던지, 아니면 이대로 그냥 군사를 물리던지. 그 두 가지의 선택지 밖에 없었다. 어차피 브리튼 또한 충분히 타격을 입었을 터이니 반격을 가해오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들도 재정비를 가질 필요성이 있을 테니까.
"전하께서는 왜 전쟁을 고집하는 겐가?"
"이유를 모르겠군."
"서고트 함대들은 대체 언제까지 지중해를 누빌 속셈이지."
"육로는 물론 해로까지. 모든 보급로가 끊어졌습니다."
원활한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외국 용병들이야 충성도가 약하고 불평과 불만이 많은 족속들이니 그렇다고 쳐도, 20만 대군을 운용하는 입장에서 보급이 제 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치명적이었다. 갈리아 지역에 로마군 20만이 집결. 일부러 대군의 이점을 동원하여 압도적인 전력차를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배고픔과 가난에 발목이 묶여버리고 말았다.
로마를 따라서 전쟁에 참전한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그리고 북방의 여러 소국과 중동의 유목국가들까지.
수십 개국에서 참전한 연합군들이 지지부진하게 전황을 질질 끌고 있었다. 배고프고 지친다는 이유에서였다. 속국의 왕과 영주들은 이대로는 전쟁을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서 탄원서를 보내왔고, 총지휘관 루키우스는 그것들을 모두 불태워버리면서 무시해버렸다.
우스운 것은 정작 루키우스는 매번 성과를 낸다는 것이다.
이번에만 하더라도 적국의 황제인 비세리온과 직접 교전을 벌였고, 그 이전에는 호수의 기사 란슬롯과 태양의 기사 가웨인을 패퇴시켰다. 브리튼의 이름 높은 기사들을 여러 번이고 패퇴시키면서 그 명성을 쌓았는데, 로마군 사이에서는 아직까지도 루키우스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
"전쟁을 자기 혼자서만 하는 줄 아는 겐가!!"
로마군의 한 장수가 테이블을 내려치며 외쳤다.
수많은 장수와 장교들이 생각하고 있었지만, 미처 바깥으로 꺼낼 수 없었던 말이었다. 루키우스는 혼자서만 전쟁을 즐기면서 명성을 쌓고, 고결하면서 고귀한 기사인 것처럼 굴고 있었다.
분명 은발의 지휘관이 쌓은 업적과 가련한 외모를 찬양하는 음유시인들은 넘쳐날 것이다. 20만 대군을 직접 이끌면서 기사들의 나라를 자칭하는 브리튼 제국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우다, 그것만으로도 그 이름은 천 년에 걸쳐서 찬양될 것이고, 그녀의 일대기는 무용담으로서 길게 남으리라.
하지만,
그를 위해서 싸우고 죽어가는 로마의 군단병들은 어쩌란 말인가? 가족을 고향이 두고서 갈리아로 온 병사들은 갈리아에서 헛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지금까지 죽은 로마 병사들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숫자에 이른다. 병사의 죽음을 숫자로 계산하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라고도 하지만, 이것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경우였다.
로마 귀족들조차도 두려움에 떨었고,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배고픔에 죽어가는 아사자들이 늘어났다. 갈리아 시민들을 납치해서 그 인육을 먹기 시작한 로마군도 빈번하게 생겨났고, 심지어 아군끼리도 식인 풍습이 생겨났다. 그 흉악한 현상에 로마 장수들이 몸서리를 쳤다.
"이건 아닙니다. 이러다가 다 죽는다고요."
"루테시아만 함락하면 모두 끝날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함락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오를레앙도 난공불락입니다."
브리튼 제국을 멸망시키고 부유한 지역을 약탈하여 재산을 챙길 생각으로 가득했던 귀족들이 '전쟁 반대'를 외쳤다.
총지휘관 루키우스는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부유한 황금과 빛나는 명예를 약속했지만 그 무엇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루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군 병사들은 굶어죽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얻은 것이라고는 텅 빈 도시와 저장된 곡식조차 없는 촌락들 뿐이다. 브리튼은 교활하게도 로마군이 점령하려는 모든 거점에 있던 곡식을 불태워버렸다. 적에게 결코 식량을 넘기지 않겠다는 전략이다.
"지독한 놈들...."
"갈리아의 곡창지대에 모두 불을 지른 모양입니다. 귀리조차도 구할 수 없습니다."
"자기네들도 무사하진 못할 텐데."
비세리온은 로마에게 식량을 넘기지 않기 위해서 갈리아의 부유하고 풍족한 곡창지대까지도 뒤엎어버렸다.
당연히 현지인들은 자신들이 1년이라는 세월에 걸쳐서 피땀을 흘린 끝에 얻은 재산을 모두 엎어버리는 브리튼 황실에 대해서 적지 않은 적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감내하면서까지 비세리온은 결단을 내렸다.
설령 로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지라도 갈리아에서는 식량 문제가 대두되면서 곤혹을 겪게 되리라. 물론 가난과 배고픔에 허덕이다가 스스로 무너질 로마의 20만 대군보다는 그 상태가 양호하겠지만.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외국 용병들은 수시로 반란을 일으켰고, 로마의 주력군은 오를레앙 포위망에서 제외되어 후방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용병들은 사납고 강했기 때문에 일반 보병부대로는 진압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주력부대가 반란 진압을 이유로 제외당하면 그 때부터는 오를레앙의 성문을 열고서 브리튼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로마를 쳐라!"
"우리의 땅을 침략한 놈들을 용서하지 마라!"
가웨인과 란슬롯이 이끄는 브리튼의 기마부대들이 로마군 진영을 휩쓸었다.
20만에 달하는 대군이었지만 그들은 사실상 무너지기 직전의 패잔병에 지나지 않았다.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었고, 전쟁에 대해서 신물이 나서는 탈영하기에 바빴다. 사기가 바닥을 치는 병력은 죽은 병사들과도 같다. 브리튼은 소수의 병력으로도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오를레앙에서 벌어진 공방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가웨인과 란슬롯이 활약을 하면, 언제나 루키우스가 직접 나타나서는 브리튼 병력들을 격퇴했다. 은발의 여기사는 성검 플로렌트를 휘두르며 로마의 전력을 보여주었고, 로마 군단병을 죽이며 성과를 보이고 있었던 브리튼 병력들은 철수했다.
"루키우스 전하께서 나서신다! 모두 뒤를 따라라!"
"브리튼 따위에게 겁먹지 마라!"
루키우스를 따르는 근위기병대들이 브리튼 기사들의 허리를 찔렀다.
공세에 나선 브리튼 기사들이 오히려 수세에 몰렸다. 루키우스가 병사들을 지휘하는 용병술은 실로 대단하였는데, 그 어떤 기사들도 루키우스의 목을 취하지 못했다. 푸른 번개의 성검에 새카만 잿더미가 되어 죽거나, 우뢰의 칼날에 베여 죽었다.
그나마 그녀와 공방이 가능한 것은 성검을 사용하는 성검 사용자들 뿐이었다. 루키우스를 상대로 가웨인과 란슬롯이 매번 참전하는 이유는 그것에 있었다.
간혹 아서가 나서기로 했는데, 기사왕이 직접 참전하면 언제나 루키우스가 나섰다. 루키우스는 비세리온만큼이나 아서와 싸우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다. 루키우스와 아서의 공방전은 결코 끝나지 않았고, 언제나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서로 말머리를 돌렸다. 성검 칼리번을 휘두르는 아서의 등장에 루키우스는 고운 얼굴을 흉악한 전의로 물들이면서 전장에 나섰다.
"아, 서어어어어어!!"
"루키우스!"
칼리번과 플로렌트가 격돌했다.
아서와 루키우스는 서로를 노려보며 칼을 겨누었고, 언제나 칼부림이 벌어지면서 그 일대는 범인이 감히 발을 디딜 수 없는 현장이 되었다.
"오늘도 마음껏 싸워보자!"
"....질리지도 않네요. 그렇게나 전쟁이 좋은가요?"
"물론!"
전의에 불타는 눈동자는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은발의 소녀는 진심으로 '전쟁'에 대해서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고, 로마와 브리튼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세계의 결전을 하나의 놀이터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일까. 아서는 반드시 루키우스 티베리우스라는 인간을 죽여야한다고 다짐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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