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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용병군주-178화 (178/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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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지 황제

007

롬바르드족은 훈족으로 인해 피폐해진 동로마 영토를 별다른 저항없이 점령.

물론 야만족에 저항한 로마 도시도 존재했지만, 국경지대에 위치한 도시들의 대부분은 롬바르드족에게 함락되었다. 10여 년 전에 동고트와 동로마와의 전쟁은 아직까지도 후유증을 겪고 있었고, 완전히 몰락한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손에 넣게 된다. 시체로 덮인 이탈리아의 들판과 부서진 도시와 성곽들을 별 저항없이 접수하면서 넓인 영토를 토대로 하여 롬바르드족의 족장이었던 알보인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게 왠 걸?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한 알보인이 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보인의 첩이었던 게피데 왕국의 공주에게 암살 당하면서 왕위가 종결된다.

"폐하! 제 3황후님에게 갈 때는 무장할 상태로 가십시오!"

"아니면 검 한 자루라도."

"엑스칼리버가 있지 않습니까."

롬바르드족의 왕이 게피데 왕국의 공주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브리튼 기사들은 "로마 황녀가 무슨 짓을 저지를 지 모릅니다!"라면서 경고했다.

나로서는 그 말을 들으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가녀린 황녀님이 누구를 살해할 정도로 독기를 품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비무장 상태라고 할지라도 황녀님 정도는 언제든지 제압할 실력도 있었다. 물론 과거 수많은 위정자들이 측근에게 살해당하는 경우는 자주 벌어졌지만, 그 어리석은 범주에 나도 포함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카리나를 만났다.

"아, 오셨어요?"

요즘 들어서는 꽃을 가꾸는 것이 취미가 되어버린 황녀님과 만났다.

방울꽃처럼 하늘하늘하게 흩어지는 은발과 푸른 벽안까지. 제국의 황녀님이란 본디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한없이 지켜주고 싶은 욕구가 느껴지는 가녀린 매력을 가진 처녀. 아직 그녀와는 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없다.

워낙에 업무로 바빴을 뿐더러, 그녀와 형식적인 혼인을 치른 다음에는 훈족 정벌로 떠나 있었으니까. 딱히 카리나가 매력이 없어서 멀리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아리따운 미녀를 소박 놓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어."

"차 내드릴까요?"

"좋지."

카리나가 능숙하게 차를 내오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그녀와는 이렇게 시간을 보낸 적이 적다. 애초에 로마 제국과는 적국도, 우방국도 아닌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황녀님과는 자연스레 거리를 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카리나는 로마 황녀였음에도 결코 로마를 향한 지원을 내게 거론하지 않았고, 오히려 로마에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는 걸 주저했다.

"지금까지 말한 적이 없던데. 로마에 대한 지원을."

"국사는 전하께서 결정하시는 일이니까요. 제가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로마를 그리워하고 있을 텐데."

"예.... 그렇긴 해도, 저는 브리튼의 왕비니까요. 지금의 저는 로마의 황녀가 아니라 브리튼 사람이예요."

카리나의 뺨이 파르르 떨린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까. 거짓말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미숙한 소녀를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이 소녀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서 로마 제국을 지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역사에도 수많은 왕들은 자신이 총애하는 첩의 부탁을 들어주고자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우면서 병력을 움직인 일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 첩들은 대개 타국 출신의 여성들이었다. 그녀들을 총애하는 만큼이나 마음을 얻고 싶었겠지.

"지금의 로마는 두 갈래로 나뉘었더군."

"예. 루키우스 언니와.... 콘스탄티노플이 단절했다고."

"너는 누구 편.... 아니, 말할 필요도 없나."

카리테리나 황녀님은 정치적으로는 크게 관여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역시 루키우스 티베리우스를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유스티누스 2세로 즉위한 얼간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을 뿐더러, 그를 지지하고 있는 원로원은 황후 소피아의 치맛자락에 놀아나고 있는 머저리에 불과하다.

얼간이 황제에 머저리 신하.

아주 딱 들어맞는 군신 관계가 아닌가. 만약 훗날의 역사가가 그들의 역사를 정의내린다면 아마 그렇게 평가하겠지.

콘스탄티노플에서 유지하고 있는 유스티누스 2세의 정권은 매우 위태롭다.

페르시아 전선에 위치한 라지카 왕국과 중동의 여러 국가들은 로마 황실에 반기를 들어버렸고, 이탈리아로 도주한 루키우스 또한 이탈리아 총독 나르세스와 연합하여 새로운 정권을 세워버렸다.

유스티누스 2세는 동쪽과 서쪽에서 적을 맞이해야 했고, 북쪽에서는 아바르 족과 롬바르드족을 상대해야 했다. 그는 황위를 위협한다면서 유스티누스를 죽였는데,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차라리 유스티누스에게 대장군직을 주면서 그를 구워삶아서 철저히 충신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한 패기도 용기도 없으면서 당치도 않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

그것이 바로 유스티누스 2세의 가장 큰 실수였다. 실수를 반복하는 군주는 언젠가 그 옥좌에서 내려와야 한다.

무능하고 멍청한 인간은 결코 군주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군주직은 탐욕에 젖은 인간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다가 언젠가는 뛰어난 군주가 그를 대신할 것이다.

언제나 옥좌는 그에 걸맞는 주인을 판별하기 때문이다.

로마의 황좌를 차지할 인간은 대체 누구일까. 유스티누스 2세의 뒤를 이어서 황좌를 차지하게 될 인간이. 나는 루키우스만큼은 황제가 될 수 없을 거라 여겼다.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호적적이었고, 전쟁을 너무 즐겼다.

심지어 루키우스와는 친자매처럼 지낸 카리나조차도 자신의 언니가 황제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주저함을 느낄 정도였다.

"나는 네가 싫지 않아."

"....아, 감사합니다. 조금.... 두근두근거리네요."

소심한 성격인 황녀가 조금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새하얀 뺨에 붉은 홍조가 어렸다. 그녀가 나를 이성적으로 사랑하고 있다, 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황녀님과 지낸 시간은 지극히 적었고,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다. 로마에서는 브리튼과 동맹을 맺고자 카리나를 보내어 정략혼인을 시켜버렸고,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감정은 작용하지 않았다.

과연 그녀가 나를 좋아하고 있을까?

아니, 내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겠지. 로마인으로서는 브리튼이 그리 달가운 국가는 아니었으니까.

설령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준 우방국이라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브리튼에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지극히 적다. 로마인의 입장에서 본 브리튼은 '과거 로마의 속국이었던 주제에 갑자기 강대국이 되어서는 깝죽거리는 야만인들'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브리튼의 왕비님, 차를 한 잔 더 부탁해도 될까?"

"네, 감사합니다."

카리나가 내어주는 차는 맛있다.

부하 기사들은 그 차에 언제 독이 들어갈 지 알 수 없다면서 난리를 피웠지만. 물론 처음에 카리나에게서 차를 받았을 때는 약간의 망설임도 들었다. 타국 출신의 왕비가 남편인 왕을 독살하거나 모종의 이유로 살해하는 경우는 적지 않았으니까. 처음에는 엑스칼리버를 허리에 차고 다녔지만, 지금은 집무실에 던져놓고 방치하고 있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엑스칼리버를 사용한 게 언제였더라.

호수의 요정 비비안이 울겠군. 만약 자신이 하사한 엑스칼리버가 지금 어떤 꼴인지를 안다면 당장에 내게서 뺏어가려 굴 것이다.

하지만 브리튼의 군주로서 직접적으로 전장에서 칼을 휘두를 일은 많지 않다. 총지휘관이 칼을 휘둘러야 할 정도로 절망스러운 전황이라면 그 전쟁은 패배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물론 역사에서는 수많은 전쟁왕들이 직접 전장에서 칼을 휘두르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일화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비현실적이고, 허구에 가까운 거짓에 가깝다.

왕이 직접 병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싸우다니.

그건 좋지 않다. 왕은 어디까지나 전쟁을 총괄해야 할 지휘관이지, 용맹스러운 장수가 아니다. 만약 전장에서 왕이 전사하기라도 한다면 그 국가는 무너지게 된다. 설령 전쟁에서 승리할지라도 왕이 죽으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갈 테니까.

그래서 나는 직접 전장에 참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죽어서는 안 되는 목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브리튼은 서로마 제국의 지위권과 그에 대한 계승권을 얻었어."

"예, 그렇죠?"

"브리튼은 로마이기도 해. 로마이면서 브리튼이지. 신하들과 논의해서 국호를 서로마 제국으로 바꿀 생각이야."

브리튼인으로서 자주성을 지키자, 라고 주장하는 신하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국호를 '로마'로 개칭하면서 얻는 이득이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하자.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이나 세계의 패권은 로마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 로마를 대신한다는 것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지중해에 존재하는 수많은 부족국가들을 복속시킨다.

서로마 제국의 옛 영토를 모두 정복하여 그들을 모두 산하로 편입시키기 위해서라도 서로마 제국의 이름을 계승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세계가 바라는 것은 '로마'였지, '브리튼'이 아니다.

"오늘 밤에는 처소로 찾아가도 될까?"

카리나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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