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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용병군주-177화 (177/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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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지 황제

006

로마 제국을 지원해야 한다, 라는 의견을 가진 사람은 적어도 원탁의 기사단에는 없었다.

브리튼인들도 로마에 대한 지원과 협조에 대해서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강하게 부정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로마에 대해서 동맹국으로서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논하는 자는 극소수였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파장도 일으키지 못했다. 로마에 지원군을 파병하자고 말하는 자들은 대개 로마 제국주의에 물든 한낱 필부에 불과하였고, 브리튼의 중요 계급인 기사들이 지원을 거부해버렸다.

"우리 아들이 로마에서 싸우다가 죽었는데, 또 보낼 수는 없지."

"3만에 달하는 아들들이 죽었어요. 타국의 전쟁에 왜 우리가 관여하죠?"

"우리 전쟁도 아니잖아요."

브리튼은 과거 로마의 속국이었다고는 하나, 로마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하면서 로마의 속국이라는 개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로마와 대등하거나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많았다. 한낱 평민들이 보기에도 로마 제국은 멸망하기 직전이었고, 구멍나서 가라앉기 시작한 조각배에 환승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로마와 동맹을 맺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의 국익에 관련되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지,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지원하기 위해서 맺은 동맹 관계는 결코 아니다. 애초에 브리튼인들에게 패망하기 직전인 로마 제국을 구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미 훈족의 15만 대군을 격파하면서 그에 대한 의리를 갚았다.

오히려 로마 제국에게 지원을 받았으면 받았지, 로마 제국에게는 더 이상 베풀 전력 따위는 없다.

"그래서, 로마에게 발을 끊을 셈이야?"

"그렇지."

멀린의 물음에 대답해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로마에게 더 이상의 이용가치가 없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주황색 머리카락의 아가씨는 상체를 기울이면서 내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귀여워서 그녀의 입술에 쪽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짧게 키스를 했고, 멀린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베시시 지었다. 이 녀석은 반인반마의 몽마이니만큼 한낱 인간인 나 따위보다는 오래 살겠지. 부럽다. 나는 이미 늙어가기 시작했는데. 늙어간다고 해봤자 아직 30대 중반이지만.

"아바르족과 룸바르드족을 과연 로마가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서방님?"

"무리지. 적어도 아바르족은 어렵사리 막을 수는 있어 보이는데..... 롬바르드족은 힘들어. 그들은 나라를 세우려고 하고 있거든."

롬바르드족은 고대 게르만에서 나뉘어진 부족으로 칭해지는데, 그들은 아바르족과 함께 협공하여 경쟁 민족인 게피데족의 왕국을 멸망시키고는 게피다이 왕의 해골로 술잔을 만들고 왕의 딸을 첩으로 취하였다. 전형적인 야만족 왕이다. 관용을 모르는 카리스마로 부족들을 통합하였고, 로마 제국이 연공을 중단한 것을 명분으로 삼으며 로마 제국의 변경을 공격하려 했다.

롬바르드족의 수장은 알보인 왕.

지금은 알프스 일대에 세력을 두고 있으며, 병력들을 이끌고서 로마 제국의 국경선을 넘나들면서 약탈을 벌이고 있으리라.

로마 제국과 적대 관계에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사실 우리 브리튼으로서도 상대해야 할 적이기도 하다. 그들이 세력을 잡고 있는 곳은 알프스 지역. 그 지역은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로서, 언젠가 브리튼이 점령해야 할 영토였다.

브리트은 동로마와의 약조 덕분에 서로마 제국을 잇는 후예가 되었고, 과거 서로마가 점령하였던 영토들은 이탈리아를 제외하고서 대부분의 땅들을 차지할 수 있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롬브라드족을 모두 죽여야 한다. 그들을 몰아내거나 복속시켜야만 한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병균처럼 로마 제국의 영토에 침식하여 병들게하는 모습을 천천히 지켜볼 생각이다. 애초에 우리 브리튼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 로마 군단병과 싸우느라 피폐해진 야만족들을 공격하면 될 문제였고, 그들을 모두 토벌하고 나서는 로마 제국에 동맹국으로서의 협조라고 말하면서 대충 연공을 요구하면 될 뿐이다.

억지에 가깝지만 브리튼은 강대국이다.

로마 제국 따위가 함부로 대들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뜻이다. 강한 자가 진리이며,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브리튼이 명령하면 로마는 따라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브리튼의 시대가 펼쳐질 테니까.

"그러면 로마는 틀렸다고?"

"아니, 그건 아니지. 로마는 자그마치 1천 년 이상을 버틴 제국이야. 이 정도의 위기로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거야. 로마는 아직 꺼지지 않는 불꽃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지."

"루키우스 티베리우스를 말하는 거야?"

"아니. 로마인의 용기. 긍지. 명예. 그것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

로마가 강한 이유는 바로 로마 시민들의 긍지에 있었다.

자신의 조국이 위험에 처하면 스스로 나서는 그 용기. 야만족들과 섞이지 않는 고결함은 로마 제국을 지탱하는 원동력에 가까웠다. 만약 그것들이 사라진다면, 그 때야말로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가 될 것이다.

"이제는 뭘 할 거야?"

"우선 칼레도니아 사업을 정리하고 아일랜드와 갈리아에 대해서도 적절한 친선을 다져야...."

"아니, 서방님이 지금 뭘 할 거냐고?"

"흐음. 그런 뜻인가."

글쎄. 생각해둔 바는 없다.

나야 집무실에 틀어박혀서는 업무를 보는 게 전부였고, 가까스로 시간을 내서 모르간과 모드레드와 보낸다. 아서는 갈리아 지역에서 종군하고 있었으며 아들인 아트리도 어머니 아서를 따라서 갈리아 지역에 있었다. 강제로 비둘기 가장이 된 느낌이다. 물론 일부다처제라서 딱히 외로움을 느끼진 않았지만 말이다.

아까 전에 모르간과 모드레와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 딱히 할 일은 없었다. 나로서는 꽤나 특이한 경우였다. 널널하게 시간이 남을 줄이야. 수면을 취할 시간도 부족해셔서 건강이 나빠진 적이 많았는데.

"그런가!"

내가 할 일 없는 상태라는 것에 대해서 멀린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두 팔로 내 옷깃을 움켜잡으면서 나를 강제로 눕혀버렸다. 머리 아래로 부드러운 것이 닿는다. 멀린의 무릎이다. 주황색 머리카락의 반인반마 아가씨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도 자신의 무릎 위로 내 머리를 얹었다. 달콤하면서도 이성을 자극시키는 치명적인 체취가 느껴졌다. 몽마 인큐버스의 핏줄이 아니랄까봐. 남자를 유혹하는 재주만큼은 훌륭하군.

만약 지금이 피곤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무슨 짓을 했을지.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을 느끼면서 멀린의 갸름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웃음기가 만연한 그 표정에 나도 웃음이 새어나왔다.

"피곤해 보였어."

"피곤하지. 실제로도 피곤해."

"그래서 잠시 쉬라는 멀린 누나의 배려심이라고 할까? 이런 배려,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구?"

수도 카멜롯에서 자주 사고를 치고 다니는 통에 치안이 악화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장난꾸러기 몽마 마법사 때문에 골치를 겪고 있다고.

원탁의 기사들 중에서도 멀린의 놀잇감이 된 불쌍한 중생들은 널리고도 널렸다. 물론 성적인 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고, 멀린이 환각 마법을 펼치면서 그들에게 시련을 부여하였고 그것을 수행해나가면서 강해지도록 도와주었다.

결과적으로는 고행 끝에 강대한 힘을 손에 넣은 원탁의 기사들을 보유할 수 있었지만, 멀린의 장난에 놀아난 기사들은 초췌한 모습을 보였다. 얼마나 그 고행이 고달팠는지는 헤아릴 수도 없다. 정작 나는 멀린에게 당한 적이 없다. 물론 그녀가 만든 마법 시약 때문에 인생이 송두리 째로 위험해진 적은 많았지만.

"후우...."

"바람 불지마."

"기분 좋아?"

"그럭저럭."

기분 나쁘다, 라고는 말 못하겠다.

모르간만큼이나 아름다운 미녀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장난을 걸고 있었고, 그녀의 짓궂은 모습에 웃음이 새겨졌다. 과도한 업무에 따른 스트레스로 지친 나에게는 편안한 안식처와 같았다.

생각해보면 멀린이 나보다 한참 연상이었다.

주변의 여성들 중에 나보다 연상인 사람은 멀린 밖에 없을 것이다. 멀린은 폭군 보티건과 우왕 우서 펜드래건을 섬긴 왕실 마법사였다. 그 연령은 측정불가. 대략적으로는 40대에서 50대로 보인다. 물론 이 말을 직접적으로 꺼내버리면 짓궂은 장난을 치는 황혼의 마법사가 나타날 것이므로 주의하도록 하자.

멀린이 내 이마를 짓누르며 말했다.

"시간이 남아돌면 로마에서 온 황녀 아가씨를 만나러 가는 건 어때? 정작 시집을 왔는데 소박을 놓으면 안 되잖아. 좋은 서방님이 되야지?"

"주의할게."

그녀의 충고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로마 제국과 외교 관계에 선을 긋는다고 해서, 브리튼으로 시집을 와버린 가련한 황녀 아가씨를 내버려두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적어도 브리튼에 시집을 와버렸으니 그녀는 로마의 황녀가 아니라 브리튼의 황후였으니까. 물론 제 3황후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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