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스의 용병군주-176화 (176/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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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지 황제

005

"여기가 무슨 용병업체라도 되는 건가?"

비세리온은 아주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로마 제국이 자기네들의 긍지와 명예가 있지, 타국에 이리도 쉽게 손을 벌릴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분명 로마가 궁지에 몰린 상황이긴 하지만 훈족의 침공도 브리튼의 조력으로 간신히 물리친 주제에, 또다시 지원군을 요청할 줄은 몰랐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흔히들 사용하는 말인데 지금 상황에서 쓰게 될 줄이야.

"이건 로마가 아국을 업신 여기는 태도입니다!"

"자기네들이 일으킨 사단을 저희더러 처리하라뇨?"

원탁의 기사단은 당연히 로마 사신단의 '지원군 요청'에 대해서 정식으로 항의했다.

그렇지 않아도 브리튼 또한 훈족과의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대외적으로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원탁의 기사단 중에서도 사상자가 발생했을 정도였고, 3만에 달하는 전사자까지 속출했다. 그럼에도 나라를 유지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으며 내정에 최대한 전념했다. 그런 상황에 로마가 자신들이 저지른 문제에 대한 똥처리를 브리튼에 미루는 행동애 분노하였다.

"로, 로마와 브리튼은 혈맹에 가까운 동맹 국가이지 않습니까?"

"당장 그 동맹 관계를 철회해줄까!"

"그럴 수가... 카리테리나 황녀 전하까지 왕비로 맞이하지 않으셨는지요. 현 황제 폐하께서는 카리테리나 황녀 전하와 사촌에 해당되는 촌수로서...."

로마 사신은 현 카멜롯의 왕비가 로마 황실의 직계 황족이라는 것을 이용하며 최대한적으로 로마 제국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그 말에 원탁의 기사단은 분노했고, 언제부터 브리튼이 로마의 속국이었냐며 소리까지 내질렀다. 원탁의 기사단에서도 용맹하기로 유명했던 펠레노어가 전사하고 다수의 기사를 상실했다. 그런 상황 속에 브리튼이 로마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리가 없었다.

"하아.... 제레인트에게 2만의 병력으로 하여금 갈리아의 알자스 지방으로, 팔라메데스는 로렌 지방으로 6천의 기병대를 이끌고서 나아가라."

비세리온이 병력을 움직이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그 말에 로마 사신의 얼굴이 밝아졌고, 원탁의 기사단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왕명이라면 따르겠지만 번번히 손을 내밀 뿐인 로마 제국의 모습에 환멸까지 느꼈다.

하지만 비세리온으로서는 이탈리아의 루키우스, 나르세스와 싸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들과 싸우는 것은 훗날의 일이 될 터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저 제레인트와 팔레메데스로 하여금 무력 시위를 하기 위함이지, 직접적으로 전쟁을 벌인다는 뜻은 아니다. 이제부터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점령하기 위한 정복 정책을 펼쳐도 모자랄 판에, 브리튼이 어째서 이탈리아와 전쟁을 벌여서 병력 소모를 부르겠는가?

적어도 교황 비길리우스 세계 정세를 훑어보고서 브리튼에 군사 요청을 하였다. 브리튼이 서로마 제국의 영토와 그 지위를 탐내리라는 것을 알고서 훈족 격퇴를 요청했다. 그런데 지금의 로마는 그저 떼를 쓰는 것처럼 병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제안에는 이끌리는 보상도 없었고, 그저 동맹국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브리튼의 아량을 원할 뿐이다.

그건 외교가 아니다.

그저 구걸이지. 외교라는 것은 국가와 국가간의 합의와 계약에 따라서 이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냥 떼를 쓰는 것은 구걸이다. 대제국 로마가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중인 브리튼에 구걸이나 하고 있었다.

저승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이 광경을 본다면 회한에 빠질 것이다. 반평생에 걸쳐서 강성하게 만든 대제국이 스스로 그 명예를 팔아먹고 약소국으로 전락하려 하고 있었으니까.

우선 로마 사신에게는 갈리아의 동부 지역에 병력을 배치시켜서 이탈리아의 루키우스가 경계하도록 만든다, 라는 것으로 일시적인 미봉책을 던져주었고, 비세리온은 곧바로 자신의 안식처라 할 수 있는 왕비에게로 향했다.

"모르간..... 오늘도 피곤해."

"매번 일이야? 이제 슬슬 부하들에게 일임하지 그래?"

"그러고는 싶은데."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그가 사랑하는 아내의 요청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일 중독이라고 해야 할까. 타인에게 무조건적으로 일거리를 넘겨주는 적이 없다. 과로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스스로의 선에서 업무들을 모두 훑어보아야만 만족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 성격 때문에 몇 번이고 위태로운 적이 많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제 수명에는 못 살 듯하다.

브리튼 왕은 과로사로 죽거나, 전쟁에서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의 주변인들은 모두 예상하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의 품에 매달려서는 두 팔을 뻗어서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미 모드레드라는 장성한 딸내미를 두고 있음에도 모르간은 브리튼에 다시 없을 미인이다. 처녀 시절에는 매료되지 않는 남정네들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재녀였고, 그것은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중이다. 브리튼 최고의 미녀에서 은퇴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나이를 먹으면서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는 거람.

비세리온은 자기 혼자서만 나이를 먹는 것 같아서 서먹한 마음이 들었다. 아서도, 모르간도, 그리고 가웨인도. 아리따운 여성들은 나이를 먹지 않고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비세리온은 가면 갈수록 스스로가 무기력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바마마! 오늘은 무슨 일이야? 또 바람펴서 어마마마한테 혼났어? 솔직히 매번 있는 일이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우리 딸. 이 아바마마는 방탕아가 아니라고."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딸내미다.

이름은 모드레드.

브리튼 왕국, 아니 이제는 브리튼 제국으로 격상된 국가의 단 한 명 밖에 없는 황녀님이시다. 성검 클라렌트를 휘두르며 사내보다도 용감무쌍한 여기사는 안타깝게도 브리튼의 황녀 전하였고, 얼마 전에는 제 2의 수도인 론디니움과 그 일대 지역을 공작령으로 묶어서 모드레드의 영지로 귀속되었다.

론디니움 공작.

비세리온은 아무리 자신의 딸내미라고는 하지만, 공작위는 딸내미에게 과하다고 여겼다. 머리도 나쁘고 정치에 대해서는 기초조차 모르는 딸이다. 앞날이 어둡기만 하다. 용감무쌍한 최우의 기사가 될 수는 있었지만, 최고의 군주는 될 수 없었다. 장수와 군주는 다르다. 그 차이점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나라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한 국가를 책임지는 군주가 자신을 용감한 장수라고 생각한다면(리처드 1세), 그 나라는 전쟁의 참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쇠락하여 멸망하게 되리라(항우). 지금의 모드레드가 그러했다. 그녀가 바뀌지 않는 한은 비세리온으로서는 그녀에게 황위를 물려줄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서 아서의 아들인 아트리는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수재였으니 어린 나이였음에도 벌써부터 차기 국왕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로마가 또 군사 빌려달래."

"또? 거기는 거지 단체야? 어디 슬럼가라도 되는 거냐고?"

왕비님이었음에도, 아니 이제는 황후인가.

아무튼 제 2황후로 책봉되신 모르간은 특유의 독설을 내뱉으면서 자신의 남편을 또다시 끌어내려는 로마에 대해서 악감정을 드러냈다. 그 망할 제국은 스스로 자국의 영토를 수호할 수 있는 전력도 없는 것인지 매번 브리튼에 군사를 요청했다. 물론 그를 덥썩 받아들이는 것은 호구나 할 일이고, 효율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성격인 비세리온에게는 어림도 없는 말이다.

이미 서로마 제국의 황위 계승권과 모든 지위를 공식적으로 동로마에게서 넘겨받았는데, 동로마에게 또 뭘 바라겠는가? 동로마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동로마의 요청을 들어줄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거래를 치를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로마를 때려눕히면 되는 거야?"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외쳤다.

누구를 닮았는지 그 생각머리가 매우 단순하다.

적이거나 아군이거나. 부숴야 할 적이거나 아니거나. 그것이 바로 모드레드가 생각하는 적아군을 판별하는 단계였다.

"아니. 그냥 내버려둬. 알아서 욕받이를 해주는데 나설 필요는 없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아바마마는 어려운 말만 골라서 쓴다니까?"

모르간이 내 뺨을 꼬집으며 말했다.

"애 앞에서는 고운 말 써."

"정치와 관련된 내용이면 매번 욕부터 시작하는 것이 남자의 버릇이야. 정치, 사회, 군사 등 각종 분야에 대해서 설명해버리면 욕이 먼저 나온단 말이지."

"뭐라는 거야. 바보야?"

"그럴지도 몰라."

비세리온이 스스로의 모습에 대해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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