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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 제국
003
브리튼과 훈족의 전쟁이 개막.
세계의 패권이 걸린 대전쟁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강수를 둔 것은 훈족.
훈족이 자랑하는 1만 여 기의 경기병대들이 진격을 개시하였고, 그들은 마치 지상 위에 파도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거세게 달려들었다. 전속 방향, 모든 방어거점을 노리고서 달려드는 기병대 무리에 감탄과 함께 공포가 밀려올 수밖에 없었다.
악몽. 신의 채찍이라 일컬어지는 훈족 기병대의 돌격.
그 돌격에 로마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게르만족조차도 고향을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그리고 지금, 그 흉악한 신의 채찍이 브리튼 진영으로 들이닥치고 있는 것이다.
"전 병력! 방패 들어!"
"장창을 앞으로, 활시위를 당겨라!"
"물러서지 마라. 자리를 지켜라."
훈족 기병대가 돌격을 감행하여 지척까지 접근하자, 브리튼 군관과 장수들이 아군 진영을 누비면서 병사들을 다독였다. 브리튼 병사들은 두꺼운 방패를 치켜들었고, 그 사이마다 날카로운 장창이 자리잡고 있었다. 로마 군단병이 사용하는 대 기병용 방어 진형. 그리스와 마케도니아가 사용하던 팔랑크스 진형을 선택하여 훈족 기병대를 막았다.
창과 방패의 격돌.
치중이 비교적 가벼운 경기병대들 따위로는 결코 방패와 장창의 성벽을 넘어서지 못한다.
물론 이론상으로는 말이다.
훈족 기병대가 가지고 있는 사나움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흉폭한 맹위. 그리고 훈족 전사들의 특공까지. 모든 요소들이 무시할 수 없는 공포와도 같다.
"브리튼 놈들을 죽여라!"
"고작해야 섬나라 약골들이다! 계속 밀어붙여!"
"다 죽여버려라!"
방패로 하나의 성벽을 이루고 있던 브리튼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자신의 안전을 방패에 의존해야 했다. 훈족 기병들은 장창과 육중한 해머, 심지어 돌멩이를 집어던지면서 방패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선두의 모든 방향에서 방어선이 공격받고 있었고, 그 어디에서도 여유로운 부대가 없었다.
"쏴라!"
"훈족 기병대들을 모조리 격추시켜라!"
후방에 위치하고 있던 장궁병들이 일제히 활을 쏘아냈다. 그리고 동시에 훈족 궁기병대도 활을 쏘았다. 허공에서 화살들이 부딪쳐서 도탄당하거나 비껴가면서 화살이 퍼부어졌다. 브리튼과 훈족은 번갈아서 화살 공격에 당했고, 전방에서는 보병과 기병의 격돌로 인하여 진형잉 붕괴되는 양상을 낳았다.
훈족 기병대는 정예병들로 구성된 예봉부대를 이용한 돌파 진형이 붕괴당했고, 브리튼 보병대들 또한 방패와 장창으로 이루어진 성벽에 훈족 기병대의 맹렬한 공격애 의해서 ㅡ자에서 U자처럼 곡선으로 휘기 시작했다. 직선에서 곡선으로 방어 진형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웨인!"
아군 진형이 붕괴되기 시작하자 중앙에서 전황을 파악하고 있던 비세리온은 다급하게 가웨인을 호출했다. 예상대로 아군 보병들은 훈족 기병대를 이기지 못했다. 현존하는 기마부대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은 아무래도 훈족이다.
죽음을 모르는 돌격은 그리스 전통의 팔랑크스 진형까지도 무너뜨린다. 보병대와 혼성된 병력이 아니라 오로지 기병대만으로 팔랑크스 진형을 돌파해내려는 훈족 기병대는 너무도 두려웠다.
"예, 전하!"
"좌익의 아서와 우익의 란슬롯에게는 현 위치를 고수하라고 해. 그리고 중앙의 팔라메데스와 제레인트에게는 무리하게 전진하는 것을 포기하고 아군의 좌익과 우익이 돌출되어도 좋으니 무리한 반격은 자제하라고 해."
"예? 하지만 중앙이 무너져서는 좌익군과 우익군이 위험....."
"시키는 대로 해."
"알겠습니다!"
가웨인은 더 이상 비세리온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무언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비록 태양의 기사는 비세리온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비세리온을 크게 신용하고 있었고, 이 전투 또한 언제나 있었던 것처럼 승전을 거둘 것이라 확신했다. 가웨인에게 있어서 비세리온은 최고의 군주였기 때문이다.
브리튼 진영은 좌익과 중앙. 그리고 우익.
흔히 로마가 회전에서 사용하는 전법이라 할 수 있는 진형을 선택했다. 군사를 3등분으로 분할하여 각자 지휘권을 맡긴다. 현재 아서의 좌익군과 란슬롯의 우익군은 적절하게 훈족의 맹공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훈족의 대왕인 칸 자베르간이 직접 이끄는 정예기병대가 중앙을 공격하고 있었으므로 점차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제레인트와 팔라메데스가 분전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훈족의 맹위가 너무도 거셌기 때문에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중앙군이 점차 붕괴되기 시작했고, 중앙군이 모두 괴멸되어 구멍이 생긴다면 비세리온 펜드래건이 있는 후방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하지만 비세리온은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예비 병력들을 좌익군과 우익군에 배치. 일부러 중앙군이 붕괴당하여 뒤로 후퇴하도록 유도했다.
"보고 드립니다! 우익군을 맡고 계셨던 펠레노어 경께서 전사. 그 아드님인 퍼시벌 경이 지휘를 이어받았습니다만. 우익군을 담당하고 계신 란슬롯 경의 지휘에 지장이....."
"퍼시벌이 이어받았다면 괜찮다. 위치를 사수해."
"예!"
전령의 말에도 비세리온은 좌익군과 우익군만큼은 조금도 물러서지 말고 진형을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
아군의 중앙이 움푹 패이면서 위치를 사수하고 있던 좌익군과 우익군이 공격을 받는 면적이 늘어났고, 진형 자체는 이미 붕괴당한지 오래였다. 아서와 란슬롯이 명장이 아니었다면 전황 자체가 무너지고도 남았으리라.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브리튼의 진형이 무너진 채였고, 훈족은 중앙군이 깊숙하게 파고들어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특히 칸 자베르간은 정예 기병대들과 함께 마음껏 살육을 펼치면서 진형이 붕괴당하여 도망치고 있는 브리튼 병력을 죽였다. 중앙이 이미 뚫렸다. 후방에 포진하고 있던 브리튼 기병대들이 출진하여 무너진 중앙군을 엄호하기 시작했고, 진형은 계속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004
"브리튼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하늘은 로마를 버리시는 겁니까?!"
삼중 성벽 위에서 병사들을 비롯해서 로마에 거주하던 시민들까지도 모두 나와서는 브리튼과 훈족의 전면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10여 년 전에는 이탈리아를 유린하였던 브리튼이지만, 지금은 로마의 동맹국이며 로마의 사활을 걸고서 훈족과 싸우고 있는 지원군이었다. 과거에는 브리튼 병사에 의해 가족이 살해당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지금만큼은 브리튼을 응원해야 했다. 브리튼이 패배한다면 다시금 콘스탄티노플은 식량난에 허덕이게 될 것이고, 특히 로마의 속국들은 다시금 재개한 지원을 중단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로마 제국으로서는 브리튼이 승리를 거두어야 하는데, 현재 브리튼군은 진형이 무너져내리면서 수세에 몰렸다. 멀리서 육안으로 보더라도 그 명백한 전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로마 병사들은 비명을 질렀고, 시민들은 두 손을 모으고서 신에게 기도했다.
"장군. 브리튼의 중앙군이 무너졌습니다."
"그건 나도 확인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부하 장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벨리사리우스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묘스럽게도 브리튼의 중앙군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좌익군과 우익군에서는 병력을 할애하여 중앙을 지원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중앙군이 무너지면 좌익군과 우익군도 차츰 무너지는 것은 누구나 알 법한 일이다. 그런데도 좌익군과 우익군은 현 위치를 고수하려 할 뿐,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무언가가 있다."
애초에 패주를 하려고 했다면 중앙군이 무너진 바로 직후에 행동했어야 했다. 하지만 좌익과 우익이 계속해서 버티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승기를 걸 수 있는 요인이 있다는 뜻이다. 아서가 지휘하고 있던 좌익군이 반전하여 공격을 개시하자 좌익을 공격하던 훈족 부대가 병력을 재정비하기 위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란슬롯이 이끄는 우익군들 또한 공격을 개시하면서 공격을 퍼붓고 있던 훈족 기병대를 붙잡아두기 시작했다. 아서처럼 적 병력을 격퇴시킬 수는 없었지만 끈질기게 달라붙으면서 적 기병대가 진격하지 못하도록 그 움직임을 봉쇄해버렸다.
훈족의 대왕을 자청하는 칸 자베르간은 중앙 돌파를 목표로 하였기에 정예병들을 모조리 중앙군에 투입시켰다. 자신 스스로가 중앙군을 지휘하고 있었고, 적 심장부까지 진격하면서 그 위용을 떨치기 시작했다. 단순히 본다면 칸 자베르간이라는 대왕이 용감무쌍하여 전장을 누비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적진에 너무 깊숙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에 다른 부대와는 연락이 모조리 끊어져버렸다.
그를 지켜보던 벨리사리우스가 중얼거렸다.
"브리튼의 진형이.... 변화하고 있다. 좌익과 우익이 갈고리처럼 휘어져서 훈족 중앙군의 후미를 잡았다."
"예? 진형을 어떻게 바꿉니까? 이미 무너졌는데."
"저런 움직임은 나조차도 처음 목격하는 것이다."
전황에 따라서 진형을 변화시켜서 대응한다.
반평생을 전쟁으로 보낸 벨리사리우스조차 처음으로 목격하는 해괴한 전략이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로마.
보병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방어 진형과 공격 진형이 발전하게 되었다. 로마는 보병부대를 다루면서 적의 공세로 인한 '진형의 변화'는 곧 패배를 의미하였기에, 결코 아군 병력들이 자리를 이탈하지 않도록 철저히 훈련을 시킨다.
하지만 브리튼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일부러 '진형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적의 공세에 붕괴된 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진형으로 변형되기 시작한 것이다.
점차 밀려나던 브리튼의 중앙군이 칸 자베르간의 정예기병대를 막아냈다. 그리고 좌익군과 우익군이 갈고리가 되어 훈족 중앙군을 감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