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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 제국
001
침묵을 지키고 있던 브리튼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브리튼 전역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은 물론 갈리아의 소수부족들에서도 병력을 차출하여 10만 명에 달하는 동맹군을 이끌었다. 로마에서 사신으로 파견된 유스티나스를 인질로 두고, 로마의 황녀인 카리나와 로마의 교황, 그리고 여러 로마 귀족들와 합의하여 이미 패망해버린 '서로마 제국'의 지위와 황위를 브리튼이 계승한다는 약조를 치른 끝에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로마의 멸망에 대해서 가장 크게 근심하던 것이 바로 교황 비길리우스였다.
기독교를 숭상하는 신의 대리자는 동로마의 후원으로 교황이 된 인물이다. 그래서 동고트의 공격알 받았을 적에도 로마의 편을 들 정도로 친로마에 가까운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교황의 후광은 로마 제국이었고, 그 로마 제국이 멸망하여 훈족이나 페르시아가 천하의 패자가 된다면 기독교를 숭상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낭패를 보는 꼴이었다.
훈족과 페르시아는 기독교를 미워하고 이교를 섬긴다.
당연히 교황으로서는 두려움이 들 수밖에 없었고, 이러다가 로마가 멸망하여 이교들의 세상이 될 것을 우려했다.
교황 비길리우스가 덜덜 떨면서 로마를 구원할 방법으로 생각한 것이 바로 '브리튼 왕국'이었다. 브리튼은 한꺼번에 십만 대군을 일으킬 정도로 군사력이 강대한 나라였고, 심지어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조차 두려워 했다. 서고트 왕국의 주 수입원은 브리튼 왕국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교황은 수 차례나 반복하여 사신을 보내었지만 브리튼은 모두 거절, 결국 전전긍긍하던 교황은 결단의 카드를 꺼내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서로마 제국의 황위 계승권이었다. 물론 교황에게는 황제를 임명할 권한이 없었고, 서로마 제국의 황위를 야만족의 왕에게 넘긴다는 것은 동로마에게 있어서는 치욕에 가깝다.
하지만 그 동로마는 멸망하기 직전이었고, 동로마 제국의 황위 계승 1순위인 유스티나스와 현 황제의 조카딸인 황녀가 교황의 선택에 동조하면서부터 판도가 달라졌다. 그 약조를 언젠가는 후회할 날이 오겠지만, 지금은 들이닥친 불부터 꺼야했다. 훈족과 페르시아가 로마를 멸망시키게 생겼는데 명분이니 하는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우리 브리튼은 황제국이 되겠다!"
"움직여라. 제국이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가!"
"황제를 위하여!"
그 동안 로마에 거부적인 성향을 띄던 브리튼 기사들조차도 '서로마 제국의 황위 계승'이라는 명분이 주어지자 당장에 말을 타고 롱소드를 치켜들었다. 고작해야 변방의 소국 주제에 황제국이 된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명예와 긍지를 우선시하는 기사단으로서는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가 되었고, 만장일치로 로마 파병이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원탁의 기사단이 전원 참전.
란슬롯의 딸인 갤러헤드는 종교상의 이유로 전선을 이탈하였지만 막강한 전력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게르만족에게서 10여 년 동안에 걸쳐서 사들인 우수한 준마로 육성된 기마부댈르 앞세우고서 진격을 시작했고, 갈리아에서 시작된 진군이 다키아에까지 이르렀다.
다키아에 입성한 브리튼의 10만 대군은 으름장을 놓듯이 군사 시위를 벌였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는 브리튼 전함들이 대거 상륙하면서 갈리아의 곡량을 모두 제공하였고, 식량난을 겪고 있던 콘스탄티노플은 기적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브리튼이 침묵을 깨고 참전하였다는 것에 대해서 로마 속국들도 다시금 식량 원조를 이어나갔다.
"전하, 콘스탄티노플로 나아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캐러독이 물었다.
그 물음에 대해서 비세리온은 휘파람을 불었다.
"우리가 딱히 전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지."
"예? 아, 그렇군요."
비세리온 다음으로 뛰어난 전략가라 평가를 받고 있는 캐러독은 원탁의 기사단들 중 누구보다도 빠르게 비세리온의 생각에 대해서 알아차렸다.
카멜롯의 군주가 말하는 것처럼 브리튼 대군이 직접적으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개입할 필요는 없었다. 가웨인과 가레스 자매는 별동대를 이끌고서 소아시아로 나아가 약탈을 일삼고 있던 훈족을 공격하고 있었고, 팔라메데스와 제레인트는 소규모의 브리튼 기마대를 이끌고 나아가 콘스탄티노플 인근을 돌아디니며 무력 시위를 전개했다.
이것은 모두 훈족의 반응을 보기 위한 것이다.
훈족으로서는 갑작스럽게 참전한 브리튼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껄끄럽게 여기고 있을 것이고, 보스포루스 해협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대규모의 함대를 보고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분명 함선에는 곡량들이 가득 실려있을 것이고, 식량난을 겪던 콘스탄티노플은 활력을 되찾았다.
훈족과 내통하던 로마의 속국들까지도 다시 로마를 지원하겠다고 의사를 밝히면서 상황이 단번에 역전되었다. 훈족으로서는 결코 콘스탄티노플의 삼중 성벽을 뚫어낼 수 없었고, 그를 함락할 방법은 더욱 없었다.
기껏해야 소아시아 일대를 점령하였을 뿐, 가장 중요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훈족은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로마를 지원할 병력이 아무도 없다는 것에 기초하여 내린 작전이었다. 브리튼이 침묵을 깨고 참전을 선택하면서 그 균형이 깨져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훈족은.... 물러나는 건가요?"
"아니. 절대로 그럴 일은 없겠지."
아서의 말에 대답하면서 비세리온은 사태의 추이를 엿보다가 콘스탄티노플로 진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훈족은 브리튼의 개입에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물러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그들은 트라키아 방면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부유한 소아시아를 약탈하는 재미에 빠져버렸다. 훈족에게 있어서 소아시아를 그대로 포기할 이유는 없었으며 로마와 브리튼 연합군에 맞서서 싸우겠다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으리라.
"결전지는, 콘스탄티노플이겠네요."
"맞아. 훈족은 멍청하지만 적어도 두려움은 몰라. 콘스탄티노플 인근에서 우리를 상대로 일전을 계획하고 있을 거야. 로마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브리튼을 부수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페르시아 전선이 어떻게 변할지가 미지수예요. 시간을 끄는 것은...."
"우리들에게 불리하지. 페르시아가 전쟁에서 이겨버리면 훈족들은 기가 살아서 달려들 테니까."
이건 도박과도 같다.
여기서 승전을 거둔다면 피폐하게 변한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협상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브리튼이 원하는 것은 서로마 제국의 황위 계승권. 다시 말해서 통일 로마제국을 이룩하겠다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목표와 야망을 정면에서 거스르는 목적이다. 반평생 동안이나 고국 탈환에만 전념하였던 황제로서는 치명적인 협상이 될 것이고, 약소국에만 머물렀던 브리튼에게 로마의 반쪽을 내어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교황이 브리튼에게 서로마 제국의 황위를 약속했지만, 결정적으로 그 황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동로마였다.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동로마는 그 황위 계승권을 실질적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만약 훈족을 몰아내고 동로마가 그것을 인정한다면 브리튼은 공식적으로 황제국이 될 수 있다.
정통성은 없다.
애초에 비세리온 펜드래건은 약소국이라 불리는 브리튼에서도 이름 없는 변방의 소귀족 출신이었고, 로마 황위 계승권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나마 관련이 있는 것은 로마 제국의 황녀를 왕비로 두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물론 그것으로는 명분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는 막강한 군사력이 있었고, 훈족으로부터 로마를 구원할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훈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피폐한 동로마로부터 서로마의 계승권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고, 브리튼과 갈리아를 포함한 로마의 서쪽 지역을 얻게 된다.
"문제는 훈족을 상대로 어떻게 이기느냐, 가 관건인데."
"여기서 패배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니까요."
"매번 그랬지. 언제나 그랬어. 그러니 이기는 수밖에.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콘스탄티노플의 동쪽 방면에는 훈족의 15만 대군이 상주하고 있었고, 콘스탄티노플의 서쪽 방면에는 브리튼의 10만 대군이 전진 배치가 된 상태였다. 동로마의 수도를 두고서 양군이 배치하고 있다는 것은 꽤나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 어느 군대들도 로마 소속이 아닌 야만족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로마의 운명은 그들이 야만족이라고 생각하였던 국가들에 의해 달려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루어질 거대한 전쟁.
그 승패에 따라서 로마의 운명이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