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스의 용병군주-160화 (160/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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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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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와 전면전을 벌이기 시작한 로마 제국을 두고서 '지원군' 여부에 갑론을박이 오고 갔지만 이렇다고 할 성과는 없었다.

어느 브리튼 기사는 "그리스 문화권이 페르시아에게 넘어가게 생겼다!"라면서 경고의 뜻을 나타냈다. 과거 그리스가 로마의 속국이 아닌 자치적으로 도시국가를 형성했던 시절부터 페르시아를 막아왔는데, 만약에 로마가 멸망한다면 로마 문명은 그에 융화된 그리스 문화권까지도 모두 소멸될 것이라며 우려를 보였다.

브리튼은 로마의 속국이었던 시절부터 그리스 문화에 도취되어 시와 문학을 즐겨 읽었다. 주로 영웅들의 일대기가 그 대표였고, 일라이스 등도 브리튼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문학이라 할 수 있었다.

"로마 문학가들이 쓴 야설은 엄청 좋은데."

"설차 같은 딸감조무사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지."

"그쪽 문학가들이 없으면 우리는 뭘 보고 뭘 배워?"

콘월인들은 고유의 문화권을 형성하면서 자립하였지만, 브리튼인들은 다르다.

로마의 속국이 되었을 때부터 전적으로 로마에게 문화를 의지하고 있었다. 로마에서 기독교를 전파받아서 교회와 성당들을 건축하였고, 그 건축양식까지도 로마에게서 배운 것이다. 한낱 종이 하나에도 로마의 문화가 담겨 있었고, 로마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브리튼인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전역을 불태우고 짓밟았을 때는 적어도 콘스탄티노플은 로마 영토로 남아있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험에 처했다.

"보고 드립니다! 북방의 훈족이 남하를 개시하여 트라키아의 방어선을 격파. 아나스타시우스 성벽을 넘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진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진짜 위험하네.

이러다가 진짜로 로마가 멸망할 것 같은데.

페르시아와 로마가 전면전을 시작하면서 훈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게르만족은 게르마니아 전선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단들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로서는 외국의 병력을 소환할 수 없었고, 오로지 수도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으로만 매서운 훈족의 진격을 막아야 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수도 로마로 피신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로마의 심장부와도 같은 콘스탄티노플은 야만족 중에서도 가장 사납기로 유명한 훈족에게 빼앗기게 생겼다. 훈족의 대왕 아틸라가 사망한 이후로 로마에는 그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았던 훈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하! 어서 결단을....!!"

제레인트의 말에 브리튼 기사들의 거센 여론이 확산되었다.

로마를 향한 지원을 두고서 찬성과 반대가 극단적으로 나뉘었다. 대부분은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거세게 자신의 주장을 내비치는 인원들도 적지 않았다.

"결단은 무슨 결단? 브리튼은 결콬 적국을 지원하지 않소!"

"하지만 로마가 멸망하면 페르시아는 누가 막습니까?"

"로마가 멸망하면 페르시아의 발호를 막을 국가는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그래도 그렇지, 과거 피터지게 싸운 적국을 어떻게 지원하오?"

그들의 거센 주장을 들으면서 곧바로 집무실도 피신했다.

집무실 한쪽에 마련된 이부자리에 누워서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도 브리튼 기사들은 각자 자신의 주장을 내뱉으면서 싸움박질을 시작하겠지. 어느 정치판이든 거센 몸싸움은 기본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책임감이 없는 행동이라는 건 잘 안다.

기사들을 원탁에 두고서 나 혼자서 빠져나와버렸다. 분명 브리튼 기사들은 옥좌에서 사라져버린 나를 보고서는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고, 어느 누군가는 우유부단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 씨발. 찬성해도 지랄. 반대해도 지랄일 텐데.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이게 바로 정치권의 심각한 모순이다.

어느 선택을 하던지 강한 비난 여론을 감수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절충안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내가 무슨 솔로몬 왕도 아니고 그런 판결을 내릴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두뇌파로 유명한 케이와 아그라베인조차 그 해결책을 모른다면 전쟁에만 지략을 굴리는 나로서도 불가능하다.

우선적으로 가장 큰 문제점은 "브리튼은 반드시 로마를 도와야 한다!" 라는 명분이 없었다. 브리튼은 서쪽 끝에 위치한 왕국으로 로마와는 거리가 매우 멀었고, 중동의 패자라 불리는 페르시아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브리튼인들은 로마의 위기에 경각심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잖아?" 라면서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분열된 여론을 뭉치는 것은 어렵다.

무언가 계기가 필요하다. 로마 제국과 불가침을 약속으로 동맹을 맺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로마의 황녀인 카리나를 왕비로 들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로마 성향이 잦아들었지만, 그렇다고 브리튼의 장병들을 로마로 보내기에는 그 명분이 부족했다.

"전하. 그러면 그 명분이 필요한 거군요."

"....넌 어떻게 들어왔냐."

"창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엘프 아가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군주의 집무실에 정상적인 루트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들어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자신의 잘못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긴 엘프에게 인간의 사정에 대해서 설명해봤자 모르겠지. 하지만 원탁의 기사단에다가 10년 이상을 브리튼에서 보냈으니 슬슬 인간 사회의 예절을 익혀줬으면 한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군주의 집무실에 무단침입을 한 것만으로도 사형감이다.

"로마의 황녀만으로는 부족한가요?"

"그렇지. 외국에서 온 황녀 한 명의 존재만으로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어."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페르시아가 동방 전선에 있는 로마의 주력부대를 전선에 묶어두고 있었고, 서방 전선에 있는 주력부대는 게르만족이 묶어두고 있었다.

마치 서로 작전이라도 짠 것처럼 군사를 움직이는 용병술이 정확하다. 분명 야먄족들에게도 머리가 비상한 책략가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강성한 훈족들이 로마의 모든 방어선을 격파하고서 수도 콘스탄티노플 인근까지 도착해버렸다. 로마가 속국으로 두고 있는 여러 소국들은 벌벌 떨면서 게르만과 훈족, 페르시아의 심기를 어지럽힐까봐 감히 로마에 지원군을 파견하지 않았다.

로마가 막상 멸망할 위기에 놓이자 속국들이 외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업보이기도 하다. 그는 속국들의 관세를 높여버렸고, 로마 군단을 파견하여 주권을 훼손하기도 했다. 로마를 향한 민심이 악화되고 있었을 뿐더러 속국의 왕들도 로마 황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인과응보, 라고 할 수 있겠지만 로마의 멸망을 두고서는 심기가 어지러웠다. 적어도 로마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지원군을 파병하는 속국들도 적지는 않았지만, 로마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는 국가들이 더 많았다.

그리스 지역에서는 페르시아의 결전을 주장했고, 북아프리카는 로마의 지원을 거부했다. 소아시아는 중립. 이베리아 반도는 서고트 왕국의 공격을 막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보인다. 현재 로마를 지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는 갈리아를 점령하고 있는 브리튼 밖에 없으리라.

"로마는 분명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알아."

이래서는 갓 시집 와버린 로마 황녀님을 뵐 면목도 없겠구만.

브리튼 왕국이 로마와 깊은 친분을 다지고 있는 동맹국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하기도 애매하다. 결과적으로는 로마와 동맹을 맺은 사이였고, 로마의 황녀를 왕비로 들였다. 참전의 명분으로는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단박에 거절하기에도 난감하다.

"황녀에게서 별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없어. 있다고 해도 말할 성격도 아니고."

로마의 위기 소식을 듣고서 남몰래 벌벌 떨고 있을 황녀님을 생각하니 뒷맛이 좋지 않다.

아무런 일도 잡히지 않는다고 할까. 그런 주제에 내게 도와달라는 말도 하지 않는 걸 보아하면 브리튼과 로마를 사이에 두고서 고민에 빠진 듯하다. 그녀는 브리튼에 시집을 와버린 이상 로마 황녀가 아닌 브리튼의 왕비라는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당연히 브리튼의 왕비로서 로마를 무조건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못할 것이고, 남몰래 전전긍긍하면서 떨고 있으리라.

흐음. 그렇다고 병력을 가볍게 움직일 수도 없는 판국이니 난감하기만 하다. 물론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로마를 지원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적어도 페르시아와 로마는 그 어느 쪽도 승전국이 되지 않는 백중지세를 이루기를 원했고, 세계의 균형을 위해서는 로마와 페르시아. 둘 중 어느 국가도 패망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군사를 움직일 수 있는 명분이 없다.

브리튼 기사들을 억지로라도 설득시킬 수 있는 명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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