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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패자
008
플라비우스 사바티우스 카리테레나 아우구스투스.
그 성씨를 천천히 읽어본다면 현 로마 황실의 귀중한 '아우구스투스' 혈족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이름들도 살펴본다면 유서가 깊은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튼 브리튼의 무식한 촌놈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렵다. 카리테리나, 라는 이름의 아가씨는 올해로 열 여섯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였는데, 대륙의 중심에 위치한 로마와는 달리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브리튼 왕국이라는 곳에 시집을 와버린 입장이다.
은방울꽃처럼 새하얀 은발을 기른 아가씨는 겁을 집어먹은 기색이 역력했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브리튼 기사들을 볼 때마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쩔 수 없다. 브리튼 기사들은 대부분 험상궂게 생긴 데다가 오크와 사촌지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박색이었기 때문이다.
매끈한 피부를 가진 미소녀를 훑어보면서 내 옆에 서있던 호수의 기사가 중얼거렸다.
"로마도 제법이군요. 저런 아가씨를 브리튼으로 보낼 줄이야."
"경의 변태성에 대해서는 동조하고 싶지는 않다만.... 이번 경우에는 동감한다."
푸른 벽안을 반짝이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로마의 황녀님을 보면서 말했다.
카리테레나는 현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와는 사촌 지간이라고는 하는데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로마인이 보기에는 야만족의 땅이라 할 수 있는 이런 변방까지 보낼 정도라면 버림패로 여긴다고 할 수 있겠지. 자신의 딸내미를 보내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애초에 적국에 가까운 국가에 친분을 교환하게 위해서 황녀를 시집보낸다는 것 자체가 '소모품'에 가깝다. 원래부터 국가간의 친교를 위해서는 정략혼인이 흔한 일이었고, 로마 또한 정략혼인을 통해서 성장한 국가였다.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의 속국들 중에는 로마의 황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그 충성심을 표시하고 있는 곳도 존재했다.
"로마의 황녀님이라. 저는 전하를 몹시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 란슬롯을 능가하는 삼처사첩이시라니."
"경은 이제 그만 꺼지는 게 어떠한가?"
"알겠습니다. 부디 좋은 시간을 보내시기를."
란슬롯은 헤맑은 표정을 지으면서 사라졌다.
저 바람둥이 기사를 볼 때마다 그의 친딸인 갤러헤드가 불쌍해진다. 저 인간의 무엇을 믿고 아버지라고 따를까. 엑터 같은 경우에는 그 딸내미가 날라리 수준인데, 갤러헤드는 그 아버지가 바람둥이였다. 이 무슨 가족 관계란 말인가. 콩가루 집안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군.
"브리튼의 왕인 비세리온 펜드래건이다."
"아.... 카리테리나.... 플라비우스 사바티우스 카리테레나 아우구스투스라고 하옵니다. 저, 전하...."
내 앞에 선 카리테리나는 차마 내 시선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는지 바닥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눈부신 은발을 가진 소녀는 투명한 보석처럼 빛나는 벽안을 가지고 있었다. 가웨인의 푸른 눈동자보다도 밝고 청명하다. 마치 보석처럼 보인다. 눈동자가 마치 마안처럼 빛났고, 새하얀 피부를 가진 소녀의 빼어난 용모를 더해주고 있었다.
로마 황실에서 특별히 선발에 선발을 거듭하여 빼어난 황녀를 뽑아서 브리튼으로 보냈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 말은 부풀린 말이 아닌 듯하였다. 물론 타국의 왕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이었기에 다른 남정네의 손을 타지 않은 처녀인 것은 당연했고, 이성간의 연애에 대해서도 그 경험이 전무했다.
로마에서 사신으로 파견된 유스티누스가 그녀에 대해서 소개했다.
"카리테리나는 황제 폐하의 누이이신 비길란티아 님의 여식입니다. 용모가 우수하고 살림에 대해서도 능하니, 브리튼의 군주께서 왕비로서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카멜롯에는 왕비가 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이에 아국에서는 왕비의 말석이라도 좋으니 부디 받아들이셨으면 좋겠다는 입장입니다. 제 3왕비라도 좋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유스티누스는 그 아버지였던 집정관 게르마누스처럼 용맹하고 지략에 능한 명장이었지만, 감정을 적절하게 숨길 줄 아는 정치가는 아니었다. 유스티누스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굉장한 외교적 굴욕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대제국 로마의 황녀, 그것도 현 황제의 조카딸이라고 할 수 있는 황녀를 제 1왕비도 아니고, 제 3왕비로 책봉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 굴욕적이라 여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로마가 수많은 외적에 의해서 곤혹을 겪고 있었기에 이러한 외교적 굴욕을 겪고 있는 것이지, 과거 영광스러웠던 로마 제국이었다면 이런 치욕은 겪지 않았을 테니까.
로마로서는 반드시 브리튼과 동맹을 성사시켜서 가장 성가신 적국을 배제시켜야 했고, 브리튼을 견제하고 있던 병력들을 페르시아와 훈족의 방어에 투입시킬 것이다. 이미 루키우스 티베리우스는 페르시아 전선에 있었고, 대부분의 명장들도 동방 전선에 투입된 상태였다. 게다가 로마 황제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지지도가 바닥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브리튼과는 동맹을 맺어야 했다.
"카리나. 이름이 기니 카리나라고 부르도록 하지."
"....카리나... 알겠사옵니다."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대답에 만족스럽다. 성격이 소심하긴 하지만 적어도 말썽을 부릴 것 같지는 않다.
로마 황녀라고 해서 모르간처럼 성격이 드센 여자가 오면 어쩌나, 라고 고민을 했지만 아무래도 기우였던 모양이다. 하긴 로마도 생각이 있으면 그런 여자를 시집보내진 않겠지. 그들에게 있어서 브리튼과의 동맹은 매우 중요했으니까.
"그러면 폐하. 아국과의 동맹은....."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따로 시일을 정해서 서로 불가침 조약을 맺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로마 측에게 만족스러운 답변을 해주었고, 유스티누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카리나와 시선을 마주한 뒤에 스스로 물러났다. 나와 카리나를 단 둘이 있도록 해주겠다는 배려인 것 같다. 물론 외교적인 계산이 깔려있는 배려였겠지만 말이다.
딱딱하게 굳은 황녀님을 보고서 말했다.
"잡아먹거나 하지는 않아. 내 딸하고 여섯 살 밖에 차이도 안 나는 여자애한테 무슨 짓이라도 하겠나."
"아... 아, 알겠사옵니다."
카리나를 나를 극존칭으로 높이면서 대우했다.
이렇게까지 나를 높여서 대하는 왕비는 없었기 때문에 꽤나 참신하다. 작은 초식동물처럼 보이는 황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나와는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소심한 성격의 황녀님에게는 아무래도 타국의 왕성이 두려울만도 하겠지. 그녀를 책망할 생각은 없다.
"그, 전하께서는 뛰어난 영웅이시다고 들었사옵니다."
"영웅? 사람을 죽이면 살인마, 사람을 죽여서 산더미를 만들면 영웅이지. 나는 나를 영웅이라고 생각하지도, 그렇게 말하고 다니지도 않아. 살인마와 영웅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할 테니까."
"예....."
나로서는 친절하게 답변을 해준 것인데 분위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적어도 내 기분을 띄워주려고 했던 것이겠지만 로마 황녀님에게 '영웅'이라는 말을 들으니 석연치 않은 마음이 들어버렸다. 적어도 로마 제국의 황녀로서는 비세리온 펜드래건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으리라.
적어도 침실에 들어와서 내 목덜미에 칼을 꽂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단언도 할 수 없었다. 내게 죽은 로마 시민들의 숫자만 하더라도 수만 명은 넘어갈 것이고, 내가 전장에서 죽인 로마 병사도 그 숫자에 비견될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죽이고 또 죽였다. 매번 사람을 죽이고 다닌 살인마에 불과했고, 피해자인 로마 황녀에게 영웅이라 치켜세워지고 싶지도 않았다.
"좋아하는 것은?"
"아.... 자수 뜨는 것을 좋아하옵니다. 그리고 작은 동물을 키우는 것도...."
"마련하지."
카리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무언가 상처받은 마음이 힐링되는 기분이 들었다. 내 주변에 있는 여성이라고는 남자도 때려눕힐 정도로 건장한 여장부들 밖에 없는 터라. 아서는 말할 것도 없었고, 모르간도 말할 필요도 없겠지. 유해지정소녀라고 할까. 적어도 일반적인 여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전하께서는 따로 취미가 있으시옵니까?"
"흐음. 딸내미 돌보는 것과 아들내미를 귀여워해주는 것? 왕에게 딱히 취미가 있을 리도 없겠지만."
과로사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이미 과로사는 현재진행중이었고, 언젠가는 과로사로 죽어버리겠지만.
물론 여성들과 잠자리를 가지는 걸 최고의 쾌락으로 삼고 있었지만, 고작해야 열 여섯 밖에 되지 않은 꼬맹이 황녀에게는 관심 없다. 적어도 이성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이 꼬맹이를 이성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범죄에 가까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