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스의 용병군주-157화 (157/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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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패자

007

브리튼 왕궁은 친로마, 반로마를 두고서 첨예하게 대립했다.

친로마, 반로마라고 나누기에는 뭔가 석연치가 않다. 전쟁이냐 평화를 두고서 대립을 심화시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끈질기게 자신의 주장을 내뱉는 브리튼 기사에게 "닥쳐, 이 쌉벌레야!"라고 소리를 내질러버린 브리튼 국왕은 골머리를 앓으면서 집무실 도망치듯이 피신했다. 그렇지 않아도 만성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로마에서 사신으로 파견된 유스티누스의 발언에 머리가 더 아파졌다.

만약 로마가 브리튼의 왕을 말려죽이기 위해서 그런 제안을 한 것이라면 대단히 성공한 것이다. 적잖에 위장도 쓰려오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스트레스로 죽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그렇지 않아도 수면부족에 과로로 건강을 해치고 있었으니까. 전쟁보다도 더 피로해지는 것은 기분 탓은 아니겠지.

"아바마마!"

나의 피로 회복제는 역시 모드레드였다.

우리 귀여운 딸은 바보라서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았고, 오로지 애교를 부리면서 내게 매달릴 뿐이었으니까. 바깥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은 모르간을 닮았다. 하지만 이래서는 왕위를 물려주기에는 조금 불안감이 든다. 모드레드는 바깥 사정에 진짜로 관심이 없다. 그저 귓등으로 흘려들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딸~ 이 아바마마는 모드레드를 좋아하는 거 알지?"

"갑자기 둔탱이 아바마마가 그런 말을 하면..... 부, 부끄럽잖아."

"그래. 그 모습.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꼭 어마마마를 닮았구나."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면서 시선을 피하는 모드레드.

지금 생각해보면 자식 농사는 성공한 것 같았다. 아들인 아트리도 그렇도, 모드레드도 그렇고. 둘 다 모친 쪽을 닮아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내 유전자를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드레드와 아트리는 둘 다 모친을 더 닮았다.

이미 왕실에 보관하고 있던 클라렌트는 모드레드가 다루고 있었고, 아트리는 아서가 소유하고 있는 성검 칼리번을 다루었다. 두 아이가 모두 왕기를 가지고 있다. 왕이 될 자질, 딸아들이 모두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참 대단한 아이들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모드레드. 로마와 싸우는 게 좋을까? 아니면 친하게 지내는 게 좋을까?"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딸한테 맡기는 거야?"

그러게 말이다.

너한테 그 결정권을 맡길 바에야 차라리 동전의 양면이 어떻게 나오는지에 따라서 결정하는 편이 더 정확할 거라고 생각은 한다만. 지금은 모든 신하들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강압을 펼치니, 내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는 아직 철도 들지 않은 딸내미 밖에 없다.

열 살 먹은 딸한테 국가의 중대사를 물어볼 줄이야.

나도 이제 슬슬 맛이 가버린 것 같다.

"당연히 싸워야지! 나도 전장에 나가서 건방진 로마를 때려잡고 싶은 걸."

역시 뇌까지 근육으로 되어버린 딸내미다운 의견이다.

대체 누구를 닮았길래 이 정도로 무투파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지. 적어도 나와 모르간은 이러지 않았는데.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모르간을 닮았다. 집무실로 오기 전에 만난 아들내미는 '로마와의 평화'를 주장했다. 백성들은 병장기보다는 농기구를 잡는 시간이 길어야 성군이 된다, 라는 교과서적인 발언을 하였고, 그 아이는 역시 아서가 낳은 아들이다.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일단 로마와 평화 조약을 맺으면 바깥 원정을 나갈 일은 없어."

"그, 그러면 아바마마랑 자주 있을 수 있겠네? 그러면 봐주지 뭐, 로마하고 친하게 지내자."

"그런 이유로 바로 의견을 바꾸는 거냐...."

"나한테는 중요한 일이야!"

새빨간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와악 소리를 질렀다.

마치 작은 소동물이 짧은 팔다리를 움직이면서 파닥이는 것 같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내 딸아이라니. 역시 나를 닮지 않아서 고맙다. 유전의 힘이란. 역시 딸내미들은 친부보다는 친모를 닮아야 한다. 딸이 아빠를 닮는다니, 그런 가혹한 결과도 없지.

"오라버니! 아서입니다."

쿵쿵.

노크를 하면서 아서가 들어섰다.

세피아 머리카라과 눈동자를 가진 기사왕. 10년 전의 과거에 비해서 풍만해진 가슴과 좀 더 여성스러워진 몸매를 가진 미녀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면서 새하얀 치아를 드러냈다. 그 웃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복잡한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이상의 빛. 동화책에 등장할 법한 공주님이 내 앞에 서있었다.

"마음이 복잡하실 것 같아 왔습니다만.... 아무래도 필요 없으셨나 보네요. 아리따운 공주님이 계시니까요."

모드레드를 힐끗 바라보며 아서가 말했다.

아서의 말에 모드레드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내 뒤로 숨었다. 내 다리를 부여잡고는 고개를 빼꼼 내밀면서 아서를 바라보았고, 아서와 시선을 마주하자 후닥닥 다시 뒤로 숨어버렸다.

모드레드는 기사왕 아서를 어릴 적부터 경외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아서와는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은 모르간은 딸의 태도에 분노하여 술로 밤을 지세우면서 나를 두들겼다. 그리고 술에 취한 상태로 나를 강간했다. 딸이 기사왕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다. 물론 지금도 아서와 모르간은 감정의 골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모드레드가 아서에게 마음을 주면 줄수록, 모르간은 나를 밤마다 괴롭혔다. 물론 성적인 의미에서. 이미 모드레드는 틀렸으니 새로운 자식이라도 가질 셈인가. 하지만 모르간 사이에서 새로운 자식은 태어나지 않았다.

"아으으.... 아, 안녕하세요..."

"예. 아리따운 레이디."

아서가 장난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 말에 모드레드가 뒤로 꼭꼭 숨었다. 어깨가 움찔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진다. 아서의 밝은 후광에 눈이 부셨는지 뒤로 숨어버린다. 말괄량이 공주님인 모드레드가 유일하게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아서 펜드레건일 것이다. 시녀들을 애먹이는 걸로 유명한 공주님도 제 1왕비님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행동했다.

"어떻게 생각해?"

"흐음.... 저는 물론 평화를 중점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아서가 약간의 고민에 젖은 표정을 지으면서 답했다.

아서의 말에 모드레드는 "나도 평화가 좋아!"라며 답해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쟁! 전쟁! 거리더니 바로 말을 바꿔버렸다. 이 딸내미는 정말로 아서를 좋아하는 듯하다. 아서는 로마와 평화 조약을 맺는 것에 대해서 합당함을 이야기했고, 어차피 로마는 훈족과 게르만, 서고트, 페르시아 등의 적국들을 상당수 두고 있으니 브리튼을 결코 배신하지 못할 것이라 이야기했다.

적어도 로마가 주변국들을 정벌해내는 것은 지금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대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이미 황제는 병에 들어서 죽기 직전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고령에 접어들었는데, 그 나이가 어느덧 70대 후반이었다. 일반 남성의 평균 수명에 비교해보았을 때 로마 황제는 굉장히 장수하는 편에 속했다.

언제 황제가 죽을지 모른다.

그 불안감이 로마 제국을 괴롭히고 있었고, 언젠가는 전염병에 걸려서 사경을 해메이던 황제가 죽었다는 거짓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다음 황위는 그의 조카에게 주어진다고도 하는데 정확힌 이야기는 모른다. 지금 브리튼에 사신으로 온 유스티나스가 다음 황제가 될 것이라는 여론이 가장 높았다.

로마는 브리튼과의 동맹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차기 황위계승자를 사신으로 보낸 것이다. 유스티나스를 통해서 로마의 진정성과 절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로마는 지금의 동맹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리라.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내겠지. 그래서 로마 황실의 종친들이 낳은 황녀들 중에서 용모가 수려하고 몸가짐이 고운 여성을 뽑아서 왕비나 첩으로 준다는 제안까지 한 것이리라.

"오라버니는 정말이지 질리지도 않으시네요. 또 왕비를 들이실 셈인가요?"

"아바마마, 진짜 분별력 없어."

"저의 어디가 부족한 걸까요, 모드레드."

"둘째 어마마마는 잘못한 것 없어! 다 아바마마 잘못이야."

아서와 모드레드가 사람의 마음을 후벼파는 듯한 대화를 나누었다. 둘의 사이가 좋다는 것은 기쁘지만 나를 씹으면서 사이좋은 모습은 보이지 말아줬으면 싶다.

뒤이어 로마에서 두 번째 사신단이 도착했다.

아직 동맹의 건에 대해서 확답을 주지도 않았는데도,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황실 종친의 황녀들 중에서 가장 수려한 아름다움을 가진 소녀를 보내온 것이다. 그 소식에 나로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고개를 숙여버렸다.

"젠장. 열 여섯 꼬맹이를 보내왔어....."

로마가 보낸 황녀의 나이에 대해서 듣고는, 모드레드를 바라보았다.

딸과 겨우 여섯 살 밖에 차이가 안 난다. 내 나이가 이미 서른 다섯이다. 나보다 훨씬 어린 꼬맹이가 내게 시집을 와버렸다.

"역시 전하, 대단하십니다. 이 란슬롯, 다시 한 번 깊이 전하를 존경합니다."

호수의 기사가 두 눈을 빛내면서 내게 아는 척을 했디.

다 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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