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스의 용병군주-145화 (145/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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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바다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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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토틸라가 항복을 요청해?"

나르세스가 동고트 진영에서 파견된 전령의 말에 경각심을 드러내었다.

용맹스러운 동고트의 왕이 갑자기 항복을 선택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이미 수도 로마를 불태우고 마음껏 약탈하면서 이탈리아 전역을 빼앗은 악랄한 왕. 그것이 바로 토틸라다. 이미 그는 로마가 결코 살려둬서는 안 될 대악당이 되어버렸고, 그러한 대악당이 뻔뻔하게도 항복을 요청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책사 역할을 하고 있던 요한 또한 토틸라의 항복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다짜고짜 항복을 요청할 정도로 토틸라의 세력은 약소하지 않다.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되어 로마 군단병이 지배하고 있는 성과 요새들을 공격하는 벙력들은 상당했고, 그들을 모두 규합한다면 분명 다시 한 번 로마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볼 수 있는 세력으로까지 발전하리라.

지금은 타카나이 평원에서 대치하고 있었고, 로마의 병력이 동고트에 비해 훨씬 많았다. 나르세스가 보기에는 확산된 병력을 다시 재집결시키기 위해서 토틸라가 꾀를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교활한 야만족의 왕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할 정도로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고, 겁쟁이도 아니다. 분명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으리라.

로마는 당연하게도 토틸라의 항복을 거절했다.

그러자 마치 응분이라도 갚으려는 것처럼 동고트에서 한 명의 전사가 말을 타고서 로마 진영까지 진격해 왔다. 동고트의 전사는 당당하게도 일기토를 제안했고, 고지 점령전에서 패전하여 사기가 내려간 아군을 고무시키기 위해서 온 것처럼 보였다.

"로마의 기사들 중에 누구라도 좋으니 나를 죽여보거라!"

로마 진영에서 복무하다가 동고트로 귀순한 코카스라는 이름의 전사가 두꺼운 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동고트족 사이에서 잔혹하고 강력한 거인 싸움꾼으로 이름난 코카스는 강하게 으름장을 놓으면서 로마에는 비겁자 밖에 없다며 떠들었다.

원래는 로마 진영에 있던 자였는데 전리품을 두고서 동료와 다투다가 살해하였고, 군법에 따라서 처벌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동고트로 도망쳤다. 거인 싸움꾼이라는 그 흉악한 명성답게 콜카스는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면서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몸을 뽐냈다.

"내가 상대하겠다!"

로마 진영에서 출진시킨 기사는 아르메니아 출신의 안잘리스였다.

중동 출신이었지만 로마에서는 출신은 그렇게 따지진 않는다. 애초에 중동 지역에 속국을 여럿 두고 있는 로마였기에 중동인에 대해서는 관용적이다. 특히 출신지인 아르메니아는 로마의 오랜 속국이었기에 대우도 좋았다. 안잘리스는 로마에서 기사가 된 중동인으로 언젠가 조국을 위해 헌신을 하겠다는 생각을 품고서 콜카스와의 일기토에 대응했다.

"내 칼을 받거라, 야만인!"

"사라센 따위가 어디서 나서느냐!!"

안잘리스는 가벼운 단창을 들고 있었고, 콜카스는 커다란 거검을 쥐고 있었다. 말에 타고서 서로를 향해 격돌하였는데, 콜카스가 먼저 선공을 던졌다. 육중한 거검이 휘둘러지면서 안잘리스를 죽이려 하였는데, 아르메니아 기사는 그것을 가볍게 피해냈다.

그리고 안잘리스는 단창으로 콜카스가 타고 있던 군마의 얼굴을 찔렀다. 단창의 날카로운 창날이 말의 얼굴을 찌르자, 군마는 그 고통에 놀라 등에 타고 있던 콜카스를 낙마시켰다. 아무리 거인 싸움꾼이라 불리는 전사라고 할지라도 갑자기 낙마해버리자 균형을 잃고서 비틀거렸다.

그리고 그 찰나에 안잘리스가 콜카스에게 몸을 던지면서 달려들어 단검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물론 그 덩치가 거대한 콜카스가 겨우 단검에 한 번 찔려서 죽지는 않았다. 여러 번 버티면서 발버둥을 쳤지만, 연거푸 단검을 찌르면서 옆구리를 난자해버리자 그 상처의 틈 사이로 창자가 삐져나오면서 쓰러졌다.

내장을 쏟아내면서 거인 싸움꾼이 죽었다.

육중한 거검을 휘두르면서 동고트 군영에서 이름 높았던 전사가 아르메니아 출신의 기사에게 어이없이도 죽어버렸다.  그를 보고서 동고트 병사들은 '불길한 징조'라고 여겼다. 동고트의 수많은 장군들이 추천해서 일기토에 나선 콜카스가 죽어버린 것이다.

콜카스가 죽은 이후에는 동고트는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로마 군영을 압박하는 듯한 과격한 군사 행동을 중단하고, 병사들 또한 사기가 저하되었다. 그것은 멀리 보아서도 확인이 가능하였는데, 그를 보고서 로마 장군들은 토틸라도 이제 퇴물이 되어버렸다며 낄낄 웃었다.

하지만 나르세스는 달랐다.

모든 장군들을 불러 경계에 최선을 다하도록 명령하였고, 동고트가 갑작스런 공격을 할 것을 두려워하여 계책을 짜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르세스 장군, 토틸라 따위에 겁을 내십니까?"

"운이 좋게도 지금까지는 이탈리아에서 날뛴 모양입니다만, 동고트 놈들이 벌벌 떠는 것 좀 보십시오."

"하하하하. 야만족 따위가 대제국의 상대가 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로마 장군들은 지금까지 동고트를 무서워하여 벌벌 떨었던 것조차도 잊어버렸는지 여김없이 자신의 용맹을 뽐내면서 자랑했고, 동고트를 한없이 무시했다.

수도에서 동고트에게 학살당한 10만 여명의 로마 시민들이 그 모습을 본다면 과연 뭐라고 할까. 나르세스는 자신의 귓가로 억울하게 죽은 로마 시민들의 통곡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조국을 짓밟은 야만족들을 쳐죽여버리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지만, 지금은 우선 신중을 기하도록 하였다. 지금은 신중하게 적의 공세를 파악할 때였다.

"아예 저희 쪽에서 일전을 펼치는 것도 좋습니다."

"아군의 사기는 높으니 지금을 노려야죠."

"어차피 놈들은 야만족들입니다."

로마와 동고트. 양국의 운명이 걸린 대결이 펼쳐질 타카나이 평원에서 나르세스는 병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방어적인 군대 배치를 선택하였다.

동고트의 기병대들을 우려하는 분위기였다. 토틸라를 억지로라도 끌어내기 위해서 일부러 평야를 전장으로 선택하였는데, 오히려 토틸라에게 역으로 당할 우려도 있다. 토틸라는 타카나이 평원에서는 자신의 용맹스러운 기병대들이 활약을 해줄 것이라 믿었기에 로마의 도발에 응한 것이다.

그만큼 동고트 기병대는 무섭다. 지금까지 여러 번이고 로마 군단병은 동고트 기병대에 무너진 전적이 있었다. 당당하게 숫적인 우위를 주장하면서 전면전으 펼치자고 말하는 로마 장군들을 보던 나르세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의 패배와 굴욕을 망각하고서 그저 승리만을 생각한다. 지휘관으로서 매우 유감스러운 모습이었다.

토틸라 왕은 그 이후에도 예상하게 어려운 기행을 보였다.

갑자기 말을 타고서 전장의 중심으로 이동하더니 로마 군영을 둘러보기도 하였고, 갑자기 활을 치켜들고서는 로마 군단병을 쏴죽이기도 하였다. 토틸라는 장력이 강했기에 사정거리가 다른 활에 비해서 매우 긴 강궁을 다루었는데, 로마 궁병의 사정거리 밖에서 활을 쏘아내면서 로마 보병을 죽였다.

그를 보고서 분노한 로마 기사들이 여럿 달려들었는데, 그들 모두가 토틸라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동고트의 용맹왕으로 불리는 토틸라는 대단한 전사이기도 하였기에 로마의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안잘리스가 나서려고 하였는데, 그를 나르세스가 제지했다. 안잘리스는 전사 콜카스를 이긴 승리의 주역이다. 그 주역이 토틸라에게 죽는다면 로마군의 사기는 크게 하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체 저 놈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아마 미쳐버린 것이 아닌지요."

"시간을 벌려는 수작일수도 있습니다. 공격하시죠."

창을 붕붕 휘두르면서 로마 군단병들에게 뽐내듯이 묘기를 부리는 토틸라를 보며 로마 군관들이 저마다 의견을 교환했다.

자기가 창을 내던졌다가 말을 몰면서 던진 창을 다시 받아냈다. 물론 용맹왕이라는 이명답게 그 무예만큼은 훌륭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전쟁에서 그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왕이 대단한 무명을 가진 것은 인정하겠으나 그것만으로 무엇을 하겠는가. 그것도 병력의 차이가 압도적인 전장에서.

로마 진영에서 여러 의문을 낳고 있는 묘기를 부리던 토틸라는 사흘 뒤에 그 기행을 중단하더니 전군을 지휘하면서 타카나이 평원에서 일전을 준비했다. 1만 5천에 달하는 보병과 기병의 혼성부대가 전열을 다듬으면서 준비에 나섰다. 갑작스럽게 동고트 진영이 요동치면서 병력을 준비하고 전열을 편성하자, 이에 놀란 로마도 모든 군사들을 소집하여 대열을 갖추었다.

로마의 병력은 총 2만 8천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외국에서 고용한 용병들이었는데, 주로 동고트 기병대를 저지하기 위해서 장창을 쥐고 있었다. 나르세스는 이탈리아의 모든 자금을 풀어서 외국 용병을 고용하였고, 그들은 로마가 섭섭치 않은 대우를 해주자 이에 고무되어 동고트 기병대와 맞서기로 했다.

하지만 양군이 대치하였음에도 공세로 바뀌진 않았다.

로마는 계속해서 방어 대형을 유지하였고, 당장이라도 공격을 하려던 동고트가 요지부동이었던 것이다. 토틸라는 "점심을 먹으러 가겠다." "산보를 하러 잠시 가겠다."라는 수상쩍은 이유를 대면서 자리를 비웠다.

나라의 운명을 건 전투이건만 총사령관이 자리를 비워버린 것이다.

그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고, 로마 장수들은 긴장을 풀면서 드디어 토틸라가 미쳤다, 라고 생각했다. 이 평야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데 자리를 비운단 말인가? 미치지 않고서야 말도 되지 않는다.

로마 장군과 군관들은 토틸라의 미친 행동에 비웃으면서 긴장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하였는데, 나르세스가 그를 보더니 두 눈에 쌍심지를 켜면서 "지금부터 나태한 행동을 하는 자들은 직접 내 손으로 찢어죽이겠다."라고 천명하자, 이를 두려워하여 그 어떤 장수도 나태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시간은 지났을까.

분명 전열에서 자리를 비웠다고 생각한 토틸라가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내더니 동고트의 모든 병력들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만약에라도 토틸라의 모습에 로마 장수들이 비웃으며 안일한 태도를 보였다면 오히려 역공을 당하였을 것이다.

타카나이 전투.

로마와 동고트의 운명이 걸린 전투가 드디어 전면전으로 이어졌다.

로마의 2만 8천과 동고트의 1만 5천. 타카나이 전투에서 양국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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